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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6편
양녕대군은 안평대군의 이번 태도에 진절머리가 난 모양인지 그 형이 되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사저로 향했다. 안평대군의 작은 형인 수양대군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했던 조카였기 때문이다. 안평과는 다르게 수양대군은 문무(文武)를 두루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향력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세에 능히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눈여겨 두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태종대왕은 왕위계승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형제는 물론이고, 제 처가와 사돈의 팔촌을 몰락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양녕대군은 이를 수도 없이 지켜보았기에 자신이 보위에 오르면 그 업보(業報)를 짊어져야 하는 것 때문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셋쩨 아우에게 보위를 넘긴 것이다. ‘내가 오죽 기인 행세를 했겠는가. 그런데 나이 어린 임금이 보위에 옹립되다니.’ 양녕대군의 예상은 적중했다. 오 년도 못 채운 채 문종대왕이 하세하자, 세종대왕의 소생들이 장성한 데다가 모두들 보위를 탐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보니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곧장 망하게 될 성싶어 불안해하던 차였다. 안평대군의 태도가 양녕의 눈으로서는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제깟 놈이 유세를 부려서 좋을 게 뭐하누.’ 혀를 끌끌 차대며 아랫것에게 시켜 평교자를 탄 채 수양대군의 집에 도착한 양녕은 곧바로 기척을 내었다. “이리 오너라.” 수양대군의 처 윤씨(尹氏)가 서둘러 마중나온다. “오셨습니까.” 윤씨의 인사에 양녕은 “수양은 안에 있나.” “네, 백부(伯父)님.” 윤씨의 대답에 서둘러 수양이 기거하는 사랑으로 향한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수양대군이 양녕의 헛기침 소리에 직접 마중을 나왔다. “양녕 백부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양녕은 들입다 수양의 사랑채에 들어간다. “앉으시게.” 다급한 듯 양녕이 수양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오늘 대낮에 안평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서는 냅다 내 집 창고에 내던지듯 놓았네.” “그래요?” 의외의 반응을 보인 수양대군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더러운 재물을 내가 무슨 수로 받누.” 하며 넋두리를 놓는데 수양대군은 묵묵히 듣고 있는다. 그러잖아도 종친부(宗親府)에서는 말썽이 많았다. 안평대군은 난초는 물론, 산수화에도 두루 능했다. 그러기에 모자람 없이 왕족으로서 살아온 처지였는데, 양녕의 눈으로서는 그게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기에 종친부의 수장으로서 양녕대군은 그런 안평대군의 태도를 예의주시했을 뿐만 아니라, 왕재(王才)로서의 자질을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양녕은 양녕대로, 수양은 수양대로 그런 태도를 눈감아오던 처지였지만 앞서 이현로가 저지른 과오 때문에, 형제간의 의리를 저버리는 행각임을 생각할 때 괘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양녕이 물러간 자리에 윤씨는 자리에 앉았다. 윤씨는 윤번(尹)의 딸로서 열두 살의 나이에 수양대군에게 시집을 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둔 덕분으로 세종대왕 내외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시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생전에 처복(妻福)이 없는 장남 대신 차남 내외를 따뜻하게 대했다. 그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까닭인지 윤씨를 볼 때마다 마치 소헌왕후의 생전 모습을 닮았다고들 하는 처지였다. 그만큼 수양대군과의 금슬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수양대군의 부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각별한지도 모른다. “양녕 백부님께서 어인 일로 오셨나요?” 윤씨의 물음에 수양대군이 대답한다. “안평 아우가 낭비벽(浪費癖)이 도진 모양입니다그려.” 그러고는 수양대군이 너털웃음을 친다. 송도 경덕궁 지기 자리를 때려치우고 한양에 돌아온 건 대략 초가을 즈음. 그것도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야심한 시각에서였다. 가뜩이나 혼례를 치르고 처가살이하는 처지요, 잔소리꾼인 장모에게 눈칫밥 얻어먹고 사는 신세이고보니 한양에 당도하는 것도 신세이다 보니 한양에 당도하는 것도 변변하게 못하였다. 그래서 생각난 게 월담하는 것이었다. 칠삭둥이 한명회. 그는 기세 좋게 담을 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착지가 불안정하여, 장독대에 하필 내려버렸다. 그런 탓인지 죄없는 장독 두어 항아리만 깨진 것이다. “아이구, 아야.” 발을 헛디딘 바람에 명회는 발목 편에 살짝 삐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앓는 소리에 민씨가 잠옷 바람에 놀라는 게 아닌가. “뉘시오.” 도둑이 들었는지 싶어 조심스럽게 기척을 낸다. 이 와중에 명회는 계속 앓는다. 염좌(捻挫) 증세가 있는 모양인 듯. 민씨는 어둠을 비집고 장독대에 가서 보고서는, “에그머니, 이게 누구요. 영감 아니슈?” 하며 묻고는 안심한다. 명회도 그제야 깔깔 웃는다. “영감, 집에 들어오셨음 응당(應當) 대문으로 들어오시지 왜 담을 넘어 오시우. 예가 남의 집도 아닌데.” “이내 몸이 처가 덕으로 살고 있는 까닭에.” 명회 말에 “알기는 잘도 아십니다그려.” 민씨가 코웃음친다. “그나저나 송도는 어쩌시고, 예까지 왜 왔소.” 부인의 물음을 듣던 명회는 그제야 이실직고한다. “송도 경덕궁 지기 그만두었소이다.” 그제야 민씨는 어처구니 없어 한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명회는 기세등등하게 콧노래를 신바람 나게 흥얼거리며 오랜만에 보금자리를 찾은 기쁨을 만끽했다. 명회가 경덕궁 지기를 다른 사람한테 넘기다시피 때려치우고 찾아온 연유가 안평대군의 책사로 있던 이현로의 연락을 받은 탓이다. 인편을 통해 현로가 서찰을 써서 서울로 당도하기를 고대하는 맘을 전달했다. 명회는 오랜 지기인 현로의 연락을 받고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던 까닭에 이렇게 사단이 난 것이다. 이현로는 본래 세종대왕이 신임하던 집현전 학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 탄핵받고, 좌천되었던 까닭에 변변한 벼슬을 해보지 못하다가 안평대군의 도움과 문종대왕의 사면에 힘입어 죄에서 풀려났다. 이후에 안평대군의 밑에서 조력(助力)하게 된 것이다. 한번은 세종대왕의 차남이자 안평대군의 작은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문종대왕의 산릉(山陵) 문제로 현로와 마찰을 빚었는데, 자신을 업수이 여겼다는 이유로, 현로에게 안평대군의 마졸(馬卒)이라는 폭언을 하며 매질했다. 이 사건 때문에 조정 안팎에서 한동안 회자(膾炙)되었다. 그런 이현로가 명회의 출사를 터볼 요량으로, 안평대군의 제휴를 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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