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지역
작성자 이동진
작성일 개국612(2003)년 10월 28일 (화) 23:20  [자시(子時):삼경(三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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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료실] 임진왜란-평양성전투
[ 평양성 전투 ]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4월 하순에 요동에 외교 문서를 보내어 일본이 침공한 사실을 명나라에 알렸다. 그후, 선조가 평양에 도착한 5월 7일에 또다시 요동에 역관을 파견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그러자 명나라 요동의 관전보부총병 동양정이 휘하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겠다고 하였으나, 조선의 의주진절제사 황진은 "조선이 자력으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여 그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5월 중순에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조선 조정은 우부승지 유몽정을 성절사로 명에 파견하여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의 병부상서 석성은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게 되다면 그들은 곧 요동을 침범하고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위협할 것"이라고 역설하여, 명군의 조선 출병을 적극 주장하였다.

한편, 명의 조정 일각에서는 조선이 일본과 공모하였을 가능성을 거론함으로써 조선 출병을 반대하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명의 조정은 전란이 중국에 파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대동강선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요동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 가운데 일부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592년 6월 중순에 요동부총병 조승훈이 명군 삼천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다. 조승훈은 유격장 사유의 군대를 선봉으로 하여 압록강을 건넌 다음, 가산 - 순안을 거쳐 7월 17일 새벽에 평퍙성 부근까지 진국하였다.

이 무렵, 조선군의 도원수 김명원은 척후장인 순안군수 황원으로부터 "일본군은 모두 한성쪽으로 철수하고, 평양성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다"는 적정 보고를 받았다. 김명원은 이 내용을 조승훈에게 전달하였다. 이를 그대로 믿은 조승훈은 바로 이 시기가 평양성을 탈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을 내리고, 밤새 강행군을 거듭하여 평양성 가까운 거리까지 육박하였다.

다음날 명군은 평양성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발견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보통문을 지나 대동문까지 진출하였으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이에 명군은 일본군이 이미 평양성에서 퇴각해 버린 것으로 속단한 나머지, 아무런 경계태세도 취하지 않은채 종대를 유지하면서 평양성 중심가로 행군하였다.

명군의 후미부대가 막 보통문을 통과할 무렵, 성안의 골목 요소 요소에 매복하고 있던 고니시의 일본군이 명군을 겹겹이 포위하고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당황한 명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열은 순식간에 혼란에 휘말려 들어 명군의 선봉장 사유를 비롯하여 천총 대조변·장국충·마세륭 등이 전사하고, 주장인 조승훈도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평양성을 탈출하였다. 평양성에서 패퇴한 조승훈은 18일 아침에 안주성에 도착하여 남은 병력을 수습한 다음, "장비를 정비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요동으로 돌아가버렸다.

당초 일본군은 평양성으로 접근하고 있던 명군을 평양성 안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평양성에서 일본군이 철수하였다"는 거짓 정보를 유포시켰던 바, 조승훈 부대는 경솔하게 평양성 안으로 진입하여 일본군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명나라는 조승훈 부대가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하자, 즉시 재출병을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나, 즉시 재출병을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나,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다. 당시 명은 부총병 발배가 그해 3월에 영하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말미암아 조선에 대규모 병력을 신속히 파견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파병이 지연되자, 명은 일단 8월에 유격장군 심유경을 조선에 급파하여 명의 대군이 조선에 출병할 때까지 외교적 교섭을 통해서 일본군의 북진을 지연시킴으로써 시간을 벌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조선에 온 심유경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와 회담한 결과, 9월 1일부터 50일 기한부로 잠정적인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 동안 명은 반란을 평정하고, 조선에 출병할 동정군을 편성하여, 제독 이여송으로 하여금 작전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명은 12월 8일에 4만여 명의 동정군을 삼군으로 편성하여 13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듬해인 1593년 1월 초순, 이여송은 안주와 숙천을 거쳐 1월 6일에는 평양성 근교까지 진군하였다. 조선군 측에서도 명의 동정군과 보조를 같이하여 만여명에 달하는 평양성 탈환군을 편성, 협동작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도록 하였다.

조선군측에서는 이일·김응서 등이 지휘하는 만여 병력이 명군과의 협력아래 평양성 탈환공세에 들어갔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서북면을 포위하였다. 1월 8일 조·명 연합군은 아침부터 화포를 평양성문 부근에 배치하여 성벽과 성문에 집중사격을 가한 다음 돌진하였다. 그리고 이일· 김응서 군은 함구문으로 접근하여 조선군의 전력을 경시하고 있던 일본군의 방어망을 무너뜨리고 성안으로 돌입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성의 외성을 점령하고 중성으로 돌입하여 일본군을 만수대와 을밀대 방면으로 밀어붙였다.

일본군은 이날 밤에 평양성을 버리고 대동강을 건너 중화·황주를 거쳐 봉산으로 남하하였다. 이로써 평양성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 약 7개 월 만인 1593년 1월 9일에 수복되고, 조·명 연합군은 이 작전을 계기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명 연합군에게 평양성을 빼앗긴 일본군은 봉산-용천-배천을 경유하여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그 병력은 당초 18,700명에서 6,600명으로 격감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조·명 연합군의 공세에 의해 평양성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한성 이북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부대를 한성에 집결시켜 방어에 총력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개성의 고바야카와, 배천의 구로다 부대 등이 한성으로 속속 집결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명 연합군은 한성 이북지역의 대부분을 단시일 안에 수복할 수가 있었다.


개국612년 10월 28일
원주목사 이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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