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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봉당] 시대(時代) 05 제20화
재위 25년을 끝으로 금상이 마흔을 채 채우지 못하고 서른여덟의 짧다면 짧은 삶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금상은 어미의 바람대로 보위에 올랐지만, 마누라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 처복(妻福)이 유난히 없었던 탓에 따뜻한 사랑을 나누지도 못했다. 정에 굶주린 까닭에 정을 줘본 적이 없었다. 임금을 잃은 인수왕대비는 대성통곡하였다. 지아비와 시부모, 심지어는 맏아들과 딸을 연이어 금상마저 여읜 왕대비였기에 그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왕은 지아비인 임금과 함께 묻히기를 청했던 폐비의 소원과는 다르게, 대행대왕의 유해를 한강 건너에 땅을 마련하여 그곳에 묻히게 하였다. 이곳이 선릉(宣陵)이다. 뒤이어 새 임금이 대행왕의 시호를 성종(成宗)이라 했다. 금쪽같게 키워 보위에 앉혔던 아드님이 세상을 떠나버린 뒤 인수왕대비는 아래 동서인 안순왕대비와 함께 대왕대비에 올랐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손자가 보위에 올랐지만 인수대왕대비에게 문안을 드리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손자를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탓일까. 대왕대비는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대왕이신 성종께서는 이 어미를 가까이했건만 지금의 손자가 나를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니 어찌된 일일까.) 주위에 정 귀인과 엄 소용이 폐비를 죽어서도 모함하였다. 손자인 금상은 대왕대비의 눈 밖에 나지 않고자 대신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수륙재(水陸齋)를 간청하는 대왕대비의 뜻에 따라 이를 관철하였다.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할머니와 맞서지 마라.) 새 임금의 눈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상, 이제 주상께서는 만백성(萬百姓)을 다스리는 군주가 되셨습니다. 할머니가 무섭습니까. 날이 밝으면 이 할미는 주상의 신하가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저하께서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존(至尊)이 되시는 겁니다. 아직도 할미가 무섭습니까.) 대왕대비의 두려워하는 눈빛이 새 금상의 뇌리(腦裏)를 스쳐간다. 새 임금이 즉위하자 그 배필 신씨(愼氏)는 왕비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왕비 신씨는 금상의 이복누이 휘숙옹주(徽淑翁主)가 야심한 밤을 틈타 웬 젊은 여자를 데리고 찾아왔다. 휘숙옹주는 중궁에게 이 젊은 여자를 소개하였다. 여자는 소복(素服) 차림으로 큰절을 올리니 중궁은 대궐 출입은 처음 해보느냐? 여자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네, 전에 한 번 들어왔습니다. 돌아가신 상감마마께서 큰 잔치를 베푸시는데, 한 번 들어왔습니다. 사뭇 중궁이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휘숙옹주에게 물어본다. 전에도 시중 기생이 대궐에 들어온 적이 있던가요? 예, 마마. 대궐 안에 약방기생이 모자라면 더러 밖에서 구해오곤 했습니다. 하오나 마마, 시생은 허탕만 쳤습니다. 원래는 상감마마 앞에서 춤추기로 했는데 소춘풍이란 기생이 독무대(獨舞臺)를 치는 바람에 허탕만 쳤습니다. 시원시원한 말씨로 여자가 대꾸하자 휘숙옹주는 눈짓으로 힐난했다. 항상 너그러운 눈매로 중궁이 내버려 두세요. 대궐 밖 백성이 까다로운 궁중 법도를 어찌 알겠습니까? 춤도 한 번 못 추고 갔다니 그거, 참 안 됐구나. 말솜씨 한번 시원시원하구나. 웃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속의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거늘. 녹수(綠水) 덕분에 웃어보는구나. 여자를 돌려보낸 중궁은 이후 우울증에 시달린 상감을 위로하게 하고자 궁녀를 들였다. 그러나 상감은 웬일인지 금상을 가까이 해보지 못하고 다시 궐 밖으로 쫓겨났다. 상감은 항상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항상 한밤중을 틈타 대궐 밖으로 잠행(潛行)하기도 했다. 생모가 폐비라는 사실 때문이다. 금상은 중궁의 입에서 폐비를 입에 담기만 해도 발악하듯 토해대었다. 나는 임금의 자격이 없어요. 내 피에는 더러운 피가 있어. 이 자리는 진성대군의 자리였어. 애당초에. 임금의 자격지심은 급기야 사초(史草)를 뒤적여 자신의 생모가 어째서 폐위되었는지 살피기에 혈안 되어 있었다. 이를 근심하던 한치형이 대왕대비에게 마마, 주상께서 폐비의 일을 소상히 아시게 된다면 한 차례 거센 바람이 몰아칠 것입니다. 마마께서 이를 막아주셔야 합니다. 딱히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니지요. 보여드리면 어떻습니까. 폐비의 일은 법에 따라 행한 일이니, 하자가 없습니다. 주상께서 폐비께서 아시려고 한다면 보여드리세요. 다만 부왕의 유교를 어기고 폐비를 복위시킨다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질 겁니다. 그때 가서 따로 처리하면 됩니다. 임금은 실록의 사초를 뒤지는 데 그치지 않고, 폐비의 편을 들며 직언하던 임사홍을 중용했다. 임금은 임사홍을 ‘활치옹’이라고 놀려대며 신임하였다. 활치옹은 앞니가 빠진 채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아끼지 않다며 임금이 직접 하사한 별명이었다. 임사홍의 아들 광재(光載)가 예종대왕의 장녀 현숙공주에게 장가가 풍천위(川尉)에 봉하고, 성종대왕의 따님인 휘숙옹주에게 장가가 풍원위에 봉해지니 임사홍의 신임은 더욱 돈독해져만 갔다. 전하, 중전마마께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습니다. 중전마마께서는 참변을 당하신 데에는. 임금의 얼굴에서는 깊은 고뇌의 늪에 빠져 있었다. 경이 내 어머니에게 온정(溫情)을 베푼 데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부른 것이오. 잊어야지요. 지금에 와서 그때 일을 다시 생각하고 후회하고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오. 그런다고 다시 어머니께서 살아 돌아오시지 않거늘. 임사홍이 임금에게 그렇습니다. 다 잊으셔야지요. 무엇보다 대왕대비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전하, 심기가 울적하실 적에는 신의 사저(私邸)로 납시지요. 궐 안의 번거로움을 훌훌 벗어던지시고 인생의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그리하면 어머니에 대한 일은 더러는 잊으실 수 있게 됩니다. 임사홍의 아부에 상감은 호탕하게 웃어넘기며 활치옹, 내 제갈공명이 되어주시구려.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임사홍은 아직 생전에 있는, 한때나마 부부인에 봉해졌던 폐비의 어머니 주위를 아랫것들을 시켜서라도 지키게 했다. 유자광과 한통속이 되어 훗날의 일을 도모했다. ―녹수는 졸지에 대궐 밖에 내쫓기고 나서 분통을 터뜨렸다. 다 된 죽에 코를 빠뜨린다고 갖은 아양을 다 떨고 뇌물까지 다 바쳤는데 대궐에 들어가는 길을 뚫었건만 그놈의 부마인지 역마인지가 급살을 맞아서 죽어가지고, 산통을 다 깨지기나 하구.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다고 하는 것마다 다 배배 꼬이는 겁니까. 기가 막혀서. 그란께 사람 팔자란 게, 다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여. 사람의 일이 잘 되고 안되는 게 다 하늘의 뜻이란 말이여. 그게 다 운이여 운. 네 잔머리를 굴린다고 뭐가 될 성싶으냐. 퇴기(退妓) 월매(月梅)가 녹수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골라서 하니 녹수는 녹수대로 약이 올라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스승 월매의 쓴 말을 묵묵히 들어야 한다는 처지가 매우 처량했다. 그러던 차에 녹수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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