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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봉당] 시대(時代) 05 제19화
성종 즉위 14년 정월 4일의 일을 <실록>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영돈령 이상, 의정부와 육조 당상관에게 불러 전교하길 “내가 옛일을 보건대 여덟 살에 세자를 봉하는 것이 예인데, 이제 원자의 나이가 이미 여덟 살이므로 명위(名位)를 정할 만하다. 전에 온 조서(詔書)에 ‘만약 주청할 일이 있거든 모름지기 한명회를 보내라.’고 하였는데, 지금 정승이 아무런 탈이 없으니 보낼 만하다. 경들의 뜻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이에 정창손 윤사흔 심회 등이 말하길 “세자 책봉을 청하는 것은 빨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를 주청할 때에 인준하는 회답의 칙서를 겸해 청하여 사자에게 바로 부쳐 보내게 한다면 저절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여 한명회가 정사로 보내는 것을 극구 꺼려하였다. 또 노사신 등이 말하길 “한명회는 외국의 소신인데, 예전에 비록 중국 조정에 들어갔었다 하더라도 황제가 어찌 지금까지 기억하고 못 잊어 하겠습니까? 이것은 작은 일이므로 따라도 무방하겠으나 뒤에 이보다 큰일이 있어서 또한 성지라고 한다면 하나하나 들어주고 따르겠습니까? 또 세자 책봉을 청할 때에 굳이 한명회만 가야만 인준을 얻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여기서 한명회가 사신으로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暗的) 표시였다. 이들은 모두 명나라에다 중궁의 폐위 조서를 넘긴 것과 관련하여, 조선 사람으로써 명나라 왕실 내관인 정동(鄭同)과 야합(野合)해 주청한 것을 의식하여, 한명회를 사신으로 보내는 것에 불만을 가진 까닭이리라. 이는 훗날 연산조(燕山朝)에 이르러 한명회가 죽어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면하지 못한 대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희맹과 허종 등이 의논하길, “한명회를 들여보내는 일을 이미 성지라고 말했다면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미리 탐지하여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정동이 말하길, ‘한명회가 들어오면 별헌(別獻)을 없앨 수 있다.’ 하였으니, 정동의 말에 따라 면제할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명회가 이 말을 듣고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의 명령에 대해서 물불을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 주청(奏請)은 신하의 영광인데 신이 어찌 감히 사양합니까? 다만 신의 나이 이제 칠순이 되므로 아침에 저녁을 염려할 수 없으니, 군명(君命)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며 왕명을 받들었다. 이때 한명회가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고하러 한 달 동안 가 있다가 돌아왔으니, 왕이 2월 6일에 경복궁 사정전에서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왕이 새 왕세자에게 교명(敎命)을 내리기를, “이극승저에 있어서는 반드시 세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요 승조수기는 진실로 원량에게 속하는 것이니, 마땅히 전장을 들어 위호를 바로 해야 하므로 너 이융을 책명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덕을 높이고 도를 즐기며, 어진이를 친근히하고 간사함을 멀리할 것이며, 예의가 아니거든 행하지 말고, 오직 충신을 힘써 종사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중외의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하였다.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은 일제히 전을 올려 치하하니, 훗날 왕세자로 책봉된 원자가 피바람을 몰고 올 씨앗이었을 줄 상상할 줄 알았을까. ―금상이 서른여덟에 접어든 해에 갑자기 몸져누웠다. 금상의 용안은 수척해져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입술은 메말랐다. 심지어는 기력이 쇠하여 일어나 앉는 것조차 힘들어하니 정무를 다스리기에는 매우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한밤중에 병석에 누워 있는 세자를 불러내어 자신의 곁을 지키게 하였다. 융아, 남아있느냐? 하며 나직이 임금이 세자를 찾는다. 여기 있습니다. 아바마마. 어느새 열아홉 장성한 세자가 곁에 기척을 낸다. 그러자 상감이 손을 내민다. 세자는 고분고분 아버지의 손을 고이 잡아본다. 세자의 손이 차가운 것에 놀란 임금이 아직도 아비를 미워하고 있느냐? 내가 몹쓸 짓을 하였으니. 세자에게 미안함을 드러냈다. 그러자 세자의 눈시울이 붉혀졌다. 아버님, 소자 아버님을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소자는 아바마마께서 가까이 불러주시기만을 기다렸나이다. 세자로 책봉되는 내내 상감은 세자에게 죄의식을 가지고 대해왔다. 가정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눈치에 억눌려 왔으면서도 세자에게 든든한 보호막으로 노력해 왔다. 때로는 자상하게 때로는 엄하게 키웠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인명이 재천이라고 임금이 그만 자리보전하고 만 것이다. 인수왕대비전에서도 상감의 병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상께서는 앞으로도 오십 년은 족히 사실 겁니다. 잔병 하나 없으셨던 주상이십니다. 만에 하나 주상께서 변을 당하시면 세자의 장래를 보장해라. 하며 장담하였다. 그러나 왕세자가 장성할수록 인수왕대비를 의식하는 눈들이 적지 않았다. 만약 금상이 죽으면 자신들의 세력이 위축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좌찬성을 지낸 한치형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게다가 왕세자는 빈궁(嬪宮)을 맞이했다. 신승선(愼承善)의 딸로 맞이하였는데 신승선은 세자의 생모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관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원수 집안에 세자빈을 들이게 되니 신승선으로서는 가시방석이 아닐 수 없었다. 인수대비의 말 한마디면 왕위를 이을 후계 구도가 뒤집어 질 판국이니, 원자 이융이 세자에 책봉된 뒤에 자순왕비(慈順王妃)로부터 태어난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새 왕으로 삼아 수렴청정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기까지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왕세자에게 든든한 동량이 있었다. 요행(僥倖)하게도 신승선에게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다. 신수겸(愼守謙) 신수근(愼守勤) 신수영(愼守英)이 이들이었다. 그 중, 신수근은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세자를 보좌하는데 있어 빈틈이 없었다. 장차 왕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임금의 병환이 위중하면 할수록 왕세자가 엇나갈까 저어하였다. ‘폐비에게 아들이 있었다지요? 폐비에겐 아들이 있었는데 폐비가 사약 내리기 얼마 전에 염병(染病)에 걸려 급사했다지요. 가엾기도 해라. 세상 구경도 제대로 못 해보고 죽다니.’ 신승선으로서는 좌불안석이 아닐 수 없었다. 세자가 뱉은 말이 떠오른 것이다. 세자가 자신이 폐비의 아들이라고 의식하고 말한 것인지, 아니면 짐짓 모르는 척하고 말한 것인지 명색이 왕세자의 장인이라 더욱 초조한 것이다. 신승선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만큼 금상의 죽음은 중요했다. 만약 금상이 죽으면 왕세자와 진성대군이라는 갈림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 왕세자가 예정대로 보위에 오르면 자신의 가문이 부귀와 영달(榮達)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진성대군이 보위에 올라 도성 안팎의 소문대로 인수왕대비가 수렴청정한다면 끝장이 날 것이다. 신승선으로서는 양날의 칼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은 어머니이신 인수왕대비에게 왕세자를 왕위에 옹립할 수 있도록 간곡히 청하였다. 대신 폐비의 일을 들먹이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는 인수대비와 왕세자 간의 갈등을 마지막 생에서만큼 봉합하고자 했던 금상의 지혜가 아닐 수 없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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