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
궐내 서각(書閣) - 상소문 등록 공간 (클릭)
작성자 이운
작성일 개국627(2018)년 4월 24일 (화) 20:43  [술시(戌時):초경(初更)]
ㆍ추천: 0  ㆍ열람: 42      
[승정원/동부승지] 승정원일기 : 개국626(2017)년 7월 (교정)
상(上) 13년, 7월 1일 기축(己丑)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2일 경인(庚寅)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3일 신묘(辛卯)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4일 임진(壬辰)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5일 계사(癸巳)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승문원판교 겸비변사낭청 정예림이 청죄소를 올리며 아뢰기를, "삼가 부복하여 아룁니다. 신이 지금까지 탑전에 죄를 청하지 않은 것은, 그동안 신에게 죄가 없고 떳떳했다고 생각했기 때문도 아니고 이제와서 염치불구하게 처분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함도 아닙니다. 신의 죄가 너무나 명명백백하기에 차마 얼굴을 들어 용안을 뵐 낯이 없었습니다. 그저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어전에 들어 청죄소를 올리는 것조차 신에게는 과분한 것이고 염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미 추고에 대한 비답이 나왔고 소명서를 헌부로 제출했기에 얌전히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추고를 받는 관원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보았습니다. 하여 지난달 15일 헌부로부터 추고에 관한 공문을 받은 후 사실 그대로 가감없이 성실히 소명에 임한 이래 겸허히 근신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보름 이상의 시일이 흘렀음에도 일에 진척이 없어 보였지만 사안의 경중에 따라 기간이 달라질 수도 있고 헌부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추고를 받는 입장에서 시간이 길어질수록 긍긍(兢兢)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신이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금일 추고를 담당했던 지평 강건이 돌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이제는 가만히 앉아 결과를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헌부가 공석이 된 상황에서 신이 직접 어전에 부복하여 죄를 청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에 늦게나마 이렇듯 엎드려 죄를 청합니다.
지난 6월 11일 밤에 개국625년 4분기 훈장 수당 지급이 유사(有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신은 훈장 수당도 댓글 채택이 되어 증여 처리가 된 것으로 오인(誤認)하고 장터를 통해 6월 12일 자정 무렵부터 훈장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보니 댓글 채택이 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고 신의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유사의 착오가 아닌가 하여 유사에게 문의를 남겼습니다. 12일 00시 24분 경 "녹봉 지급 기간 외 댓글 등록이므로 처리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받게 되었고 신은 지난 12일에서야 5월 6일부터 20일까지였던 녹봉 지급 기간보다 이른 5월 5일 밤 11시 경에 금전 수령 댓글을 남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신은 혹시 수당을 재지급을 받을 수 없는지 실책을 수습하고자 호조에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알게된 사실은 "다음부터의 녹봉 추가 수령은 관련 규정에 따라 녹봉 수령 종료일(기한) 다음날부터 최대 15일간 연장(추가)으로 제한합니다."라는 유사의 방침이었습니다. 이미 6월 12일은 녹봉 수령 종료일인 5월 20일 다음날부터 15일이 경과된 시점이었기에 신은 재지급에 해당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4분기 훈장 수당이 지금까지 밀려 처리되지 못한 상태기도 하고, 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더이상 방법이 없다고 여겨, 훈장들의 수당을 보전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가득차 훈장 수당을 사비로 임의 처리 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신의 잘못은 너무나 명확하였기에 처분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하고 혹시라도 신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역에 글을 올렸습니다. 이와 같은 공개적인 글을 통해 이미 헌부에서 사실 관계를 파악했을 것이며 감찰에 들어갔을 것으로 예단했습니다. 잘못을 인지하였다면 곧장 어전에 죄를 청했어야하나 해이하고 안일한 태도를 일관하며 연거푸 실수를 반복하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그 죄가 절대 작지 않습니다.
재정에 관한 사안은 인사만큼이나 중요하기에 철저히 확인하여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장 수당 지급에서 과오를 범하였으니 이 모든 것은 신의 불찰입니다. 죄를 저질렀는데 어찌 벌을 피하려 하겠습니다. 통훈에 이르러 해이해지고 안일해진 신을 엄히 징치하여 초심을 찾게 하시고 또한 본보기로 삼아 다른 관원들이 신과 같은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조정의 경계가 되게 하여 주십시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저 신의 불찰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방조하거나 묵인한 다른 관원은 없습니다. 청컨데 죄없는 다른 관원들이 불안에 떨지 않도록 굽어 살펴주십시요. 또한 훈장들에게 지급된 사비는 회수케 하고 훈장 수당이 공금으로 재지급되어 훈장들이 4분기 수당을 보전받을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십시요."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단기간에 사헌부가 구성되기를 기다리기 어려울 듯 하니, 비변사에서 추고를 이어 진행하라. 공정을 기하기 위해 판교의 비변사 낭청 직임은 즉시 면직한다."라고 하였다.
○ 행병조정랑 겸훈련원판관 방인하가 무관 사망 등에 대하여 계목을 올리며 아뢰기를, "무관 사망에 대하여 아룁니다. 금일 사헌부지평 강건이 졸하였습니다. 규례에 따라 4품 추탈하여 정7품 적순부위로 명하고자 합니다. 사헌부 수장의 사망으로 후임을 물색해보았으나 현직 무관 중에는 마땅한 인물이 없으니 이조에서 의망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훈련원군관 전역에 대하여 아룁니다. 작일 훈련원군관 고무열이 타 직역의 체험을 이유로 전역신청을 하여 전역 처리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소임을 맡긴 상황에서 사망하였으므로 의례적인 품계 강등 규정만 적용할 수 없다. 추탈(追奪)하라."라고 하였다.

7월 6일 갑오(甲午)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7일 을미(乙未)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8일 병신(丙申)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9일 정유(丁酉)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10일 무술(戊戌)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11일 기해(己亥)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12일 경자(庚子)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13일 신축(辛丑)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14일 임인(壬寅)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15일 계묘(癸卯)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16일 갑진(甲辰)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17일 을사(乙巳)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공조참의 겸비변사부제조 이운이 훈장 수당 임의 사재 처리 사건에 대하여 계사를 올리며 아뢰기를, "지난 6월 15일 국고에서 지급 되어야 할 수당 지급을 사재로 임의 처리한 관원이 있어 추고하라는 전교가 헌부에 내려졌으나, 대관이 돌연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7월 13일 비변사에서 추고를 이어 진행하라는 전교를 받들어 신이 추고를 진행하였습니다. 해당 사건에 관계한 자에 대하여 신이 조사한 바로는 당사자인 승문원판교 정예림과 방조 혐의 정황이 포착된 종부시정 겸비변사낭청 김관 그리고 당시 호조 수장이었던 통훈대부 정태수 등 3인 이었습니다. 시정 김관의 경우 비변사낭청을 겸하고 있으나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기에 추고 과정에서 시정 낭청은 배제한 상태로 신이 단독으로 추고를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승문원판교 정예림에 대하여 아룁니다. 판교 정예림이 소명하기를 “지난 6월 11일 밤, 그동안 밀려있었던 녹봉을 비롯한 각종 수당 지급이 유사(有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개국625년 4분기 훈장 수당도 댓글 채택이 이루어진 것으로 오인하고 6월 12일 0시 무렵부터 장터를 통해 훈장들에게 금전을 지급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보니 댓글 채택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관리단에 문의를 남겼는데 ‘녹봉 지급 기간 외 댓글 등록이므로 처리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받았고, 지난 6월 12일이 되서야 5월 6일부터 20일까지였던 녹봉 지급 기간보다 이른 5월 5일 밤 11시 경에 금전 수령 댓글을 남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당을 재지급 받을 수 없는지 실책을 수습하고자 호조에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고 당시 호조 수장이었던 정태수로부터 유사의 방침에 관한 답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즉, ‘다음부터의 녹봉 추가 수령은 관련 규정에 따라 녹봉 수령 종료일(기한) 다음날부터 최대 15일간 연장(추가)으로 제한합니다.’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소명에 따르면 판교 정예림은 훈장 수당은 재지급에 해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미 녹봉 수령 종료일인 5월 20일 다음날부터 15일이 경과된 시점이었고, 지난 4분기 훈장 수당이 지금까지 밀려 처리되지 못한 상태이기도 하고,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방법이 없다고 여겨, 훈장들의 수당을 보전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비로 임의 처리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다음으로 시정 김관에 대하여 아룁니다. 시정 김관은 판교 정예림이 지역에 사재로 임의 처리한 것과 관련한 글에 댓글을 남긴 것에 대하여 소명하기를 “예조 수장이 지역 글에 자신의 과오에 대한 글을 올렸을 땐 이미 훈장 수당을 수령한 뒤였으며, 예조에 근무를 오래하며 수장으로 근무한 전력이 적지 않은 통훈의 관원이 자신의 과오를 올려 이를 다시 바로 잡을 것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때 저 역시 인지하였으나 오랜 경력과 품계가 통훈에 이르는 관원을 제가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이 바로잡는 관원이라는 것을 전조를 담당하는 저로서는 잘 알고 있기에 당연히 이를 바로잡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하나하나 제가 그것에 관여하는 것 또한 월권이라 생각했습니다. 우선 예조 수장으로서 본 사항을 놓쳐 이러한 상황에 간과한 부분은 안타깝게 생각하며, 예조 수장 역시 밀려 있던 수당을 빨리 훈장들에게 나눠주려 했던 선의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소명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통훈대부 정태수에 대하여 아룁니다. 통훈대부 정태수는 “6월 12일 예조의 수장인 정예림이 훈장 수당을 받지 못하여, 이에 대한 재지급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였습니다. 이에 호조에서는 이전 관리단이 처리한 내역이 있는지에 대해 확인해 본 결과, 이전 강건님이 녹봉 재지급을 요청하여 당시 호조 수장이셨던 김시습님이 관리단에 요청한 사례가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사례에서 관리단은 녹봉 추가 수령은 녹봉 수령 종료일로부터 15일로 제한한다고 답변을 달았었고, 이에 근거하면, 마지막 수령일인 5월 20일에서 이미 15일이지난 6월 12일이기 때문에 녹봉의 추가 수령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으며, 정예림님 역시 이를 뒤늦게 확인하고 본인이 반려한 바 있습니다. 이후 예조 수장 정예림님은 본인의 행정 착오로 훈장 수당이 지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비로 지급을 진행하였으며, 호조에서는 이에 대해 별도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호조의 수장으로 수당의 재지급에 대한 절차를 추가로 문의하거나 또는 상께 아뢰지 않은 것은 호조의 수장으로서 실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문책의 사유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판교 정예림에 대한 신의 생각을 아룁니다. 판교 정예림은 이번 사건에서 관리단의 수당 지급 날짜를 오인하여 사재로 훈장 수당을 임의 지급한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마땅히 직역에 대한 수당은 국고에서 지급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번 사건은 근본적으로 녹봉 지급 날짜를 오인한 판교의 실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징치하여 조정의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삼아야 함이 마땅할 것 입니다. 그러나 판교 정예림은 금전 수령과 관련하여 수령 지급 댓글이 늦었거나 아예 댓글을 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날짜를 오인하여 일찍 남긴 것이고, 또 관리단의 수당 지급이 늦어져 제 때 지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있어 각 교육기관 훈장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수당을 신속하게 전달하려는 마음이 앞선 것이니 이 점을 참작(參酌)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특히, 판교 정예림은 출사 이래로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잘하였으며 한 달이 넘는 추고 기간 동안 두 번의 소명서와 한 번의 청죄소를 통해 자신의 실책에 대해 통렬히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판교 정예림의 관직을 종3품 행승문원참교로 강등하여 조정 내외의 본보기로 삼는 것이 적절하다 사료됩니다.
다음으로 시정 김관, 통훈대부 정태수에 대한 신의 생각을 아룁니다. 시정 김관은 판교 정예림의 평소 업무 처리 능력에 대해 통훈대부이며 예조에서 오래 근속하였고 수당 지급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판교 스스로 바로 잡을 것이라 생각하여 판교의 지역 글에 댓글을 남긴 것으로 보여 집니다. 통훈대부 정태수는 당시 호조 수장으로서 예조의 수당 재지급 요청에 대하여 호조 수장으로서 필요한 절차를 모두 처리하였습니다. 이에 시정 김관과 통훈대부 정태수는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혐의가 없다 여겨지며 본 추고 과정을 통해 업무 처리에 있어서 여러 관원들에게 충분한 경종이 되었다고 사료됩니다."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일이 벌어진 이후 여러 날이 지나도록 보고 들은 자가 한둘이 아닐 것인데, 단지 글월로 호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길 수 있는 일인가. 참의도 분명 그 일을 인지하였을 것인데, 당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는 어찌 자성하는 말 한마디 없이 남의 일 말하듯 세 관원에 대하여만 언급하는가. 조치 이전에,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관원이 대부분이었으니, 공사 구분에 관하여 관력과 관직이 무색한 지경이라 하겠다. 그러고도 조정 사무를 관장하는 비변사의 수장이라 하겠으며, 그러한 일에는 관대하면서 포상 계본에는 어떻게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가.
허울뿐인 말로 경종이 되겠는가.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판교를 파직한다. 전지평 정태수, 시정 김관은 평점을 각 5점, 3점 감산하라."라고 하였다.

7월 18일 병오(丙午)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행병조정랑 겸훈련원판관 방인하가 무관 인사에 대하여 계목을 올리며 아뢰기를, "우선 전교를 받들어 前사헌부지평 강건을 추탈하였습니다.
인사평정 결과에 대하여 아룁니다. 7월 2차 인사평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인사평정의 결과에 따라 신이 정략장군에서 소위장군으로 1계 가계되었습니다.
더불어 아룁니다. 신이 지난 5월 6일부터 행병조정랑으로서 근속해왔고, 훈련원에서도 3개월 이상 근속하였습니다. 하여 행군기시첨정 겸훈련원첨정으로의 내부승진을 청합니다."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내부 승진을 계목대로 재가한다."라고 하였다.
○ 행호조정랑 하유가 수당건 후속업무에 대하여 아뢰기를, "현 상황을 볼때 광흥창에 접속체력으로 보나 수당 지급이 예전에 보다 못하는거 같아 보였습니다. 광흥창에 접속체력을 고려하여 호조에서 관리단으로 직접 그 수당을 받고 받은 수당은 예조, 병조에 전달하여 군관, 관속, 교육기관 지원금, 훈장들에게 직접 수령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나이다.
하여 전하께 간절히 주청 올립니다. 문, 무관 녹봉은 광흥창에서 원래대로 시행하고 나머지 교육기관 지원금, 훈장, 관속, 군관 수당은 호조에서 관리하여 그 수당을 관리단에서 따로 받아 예조와 병조에 전달하여 처리하시는게 어떻시겠습니까
신이 판단을 하였을때 그렇게 된다면 굳이 후속조치도 할 필요도 없고 정상적으로 업무는 돌아가는게 맞다고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조정에서 처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7월 19일 정미(丁未)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20일 무신(戊申)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공조참의 겸비변사부제조 신 이운, 개국626년 하반기 포상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며 아뢰기를, "절목과 지침에 따라 각 관청에서 포상 대상자 추천 공문을 비변사로 보내주었습니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금년도 1월부터 6월까지의 문관 근정, 지역 활성화, 교육 활성화, 무관 근정, 모임 및 시전 활성화 포상 대상자에 대해 논의하고 공론을 정하여 상신합니다.
문관 근정 포상에 대하여 아룁니다. 종부시정 김관, 행고양군수 홍봉한, 행승문원박사 태연 등 3인을 상신합니다. 시정 김관은 금년 7월 해주목사로 재출사를 시작으로 이조, 비변사 등에서 지금까지 근속 중에 있으며 조정 내외에서 여러 소임을 맡아 막힘없이 정확히 처리한 공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마도 경차관으로서 특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행군수 홍봉한은 작년 8월 행통례원인의 재출사를 시작으로 예조, 사헌부, 지방관 등에서 지금까지 근속 중에 있습니다. 특히, 사헌부에서 근무할 당시 서경 등의 일반적인 업무는 물론이고 진언 및 간언 등을 통하여 조정과 앞날을 위해 대관(臺官)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으며, 이러한 부분은 조정의 모든 관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행박사 태연은 금년 1월 예조의 권지관원으로 출사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장인 판교 정예림을 도와 예조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하'점 없이 우수하게 평점을 받으며 지금까지 한결같은 자세로 근면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며 다른 관원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시정 김관을 당상으로 가자하고, 행군수 홍봉한은 창국대전 한 질 및 인사평점 가삼점, 행박사 태연은 이조 표창 및 인사평점 가이점을 수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시정 김관의 포상에 대하여 덧붙여 아룁니다. 시정 김관은 개국621년 2월 23일에 통훈대부로 가계되어 실직은 금일(7월 20일)을 기준으로 2,088일을 근무하였고, 누적평점은 131점입니다. 주요 역임 관청으로는 의정부(의정부사록), 비변사(비변사낭청), 이조(종부시정), 호조(내자시정), 예조(승문원판교, 예빈시정), 형조(형조정랑), 공조(선공감정), 세제상정도감(낭청), 책례도감(낭청), 자산군수 겸성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여주목사 겸광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해주목사 겸해주진관병마첨절제사 등 입니다. 기타 행적으로는 618년 문관 정기포상 2회(인사평점, 월봉 1개월), 621년 1분기 문관 정기포상(은사품 및 은사금), 624년 하반기 문관 정기포상(근정삼급 진충장) 등이 있습니다. 그간의 공적을 볼 때 마땅히 가자가 합당한 줄로 아룁니다. 한편 승문원판교 정예림에 대해 아룁니다. 현재 재직 중인 예조에서 서계, 성균관 개청, 근속 기장 신설 등을 노력한 점이 보여 문관 포상 후보자에 있었으나 최근 훈장 수당 처리 과실과 관련하여 추고를 받고 있으므로 포상 후보자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지역 활성화 포상에 대하여 아룁니다. 경상도 백성 정예림, 전라도 백성 최준, 강원도 백성 고무열 등 3인을 상신합니다. 경상도 백성 정예림은 이미 개국623년 하반기, 624년 상반기 및 하반기, 626년 상반에 포상을 받음으로써 지역 활성화에 대한 공적을 입증하였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포상 이후에도 계속 지역 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가 지역에 활기를 불어 넣은 공로가 작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전라도 백성 최준, 강원도 백성 고무열도 입조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는 지역 활동을 전개하며 다른 백성들과의 소통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경상도 백성 정예림에게는 동의보감 한 질 및 은사금 300냥, 전라도 백성 최준과 강원도 백성 고무열에게는 은사금 300냥을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교육 활성화 포상에 대하여 아룁니다. 자운서당 및 고산서당 훈장 김관, 영남학당 및 대동학당 훈장 정예림, 천손서당 훈장 홍봉한, 태백서당 훈장 고무열, 청암서원 훈장 정병욱 5인을 상신합니다. 자운서당 및 고산서당 훈장 김관은 해당 기간 동안 자운서당에서 형법 23강, 고산서당에서 민법 23강을 주제로 강하였고 강의의 질이 우수하며 백성들의 호응도 높습니다. 특히, 김관 훈장은 청암서원에서 48강(618년 06월 26일 ~ 620년 02월 14일), 대동학당에서 20강(621년 01월 08일 ~ 621년 04월 05일) 정석학당에서 4강(623년 08월 20일 ~ 623년 08월 27일)을 강의한적 있으며 지난 개국619년 8월에 47강을 강하여 팔괘장을 수여받은 적이 있습니다. 팔괘장을 수훈한 이후에도 각 지역에서 도합 70여 강을 강의한 전적이 있습니다. 영남학당 및 대동학당 훈장 정예림은 성균관 교양과 교임으로 4강, 영남학당 훈장으로 28강을 꾸준히 강하였으며, 대동학당 훈장으로 17강을 강하는 등 행정학과 사회복지세미나를 주제로 양질 강의를 진행하였고 수강생의 호응 또한 좋았습니다. 이외에도 영남학당 학보 10회를 발행하는 등 교육 활성화에 진취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정예림 훈장은 경상도 영남학당에서 지난 624년 8월부터 강의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약 3년간 성실한 자세로 강의에 임하여 총 103강(성균관 포함 107강)을 진행하였습니다. 천손서당 훈장 홍봉한은 해당 기간 동안 성균관과 문과 교임으로 4강, 천손서당 훈장으로 11강을 꾸준히 강하였으며, 사회복지발달사와 한국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지향 등을 주제로 양질의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백성들의 호응도도 높습니다. 특히 홍봉한 훈장은 함경도 천손서당에서 지난 622년 12월부터 강의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민국에서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 약 2년간 성실한 자세로 강의에 임하여 총 46강(성균관 포함 50강)을 진행하였습니다. 청암서원 훈장 정병욱은 해당 기간 동안 청암서원에서 장애인 복지를 주제로 44강을 꾸준히 강하였습니다. 진행한 강의의 양은 많으나 강의의 질이나 호응도는 다른 훈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태백서당 훈장 고무열은 해당 기간 동안 법학과 시민정치학 등을 주제로 12강을 강하였습니다. 강의의 양과 질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호응도도 높았습니다. 이에 자운서당 및 고산서당 훈장 김관과 영남학당 및 대동학당 훈장 정예림은 명예이급 근화장, 천손서당 훈장 홍봉한은 명예삼급 팔괘장, 청암서원 훈장 정병욱은 국조보감 한 질 및 은사금 300냥, 태백서당 훈장 고무열은 동문선 한 질 및 은사금 300냥을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무관 근정 포상에 대하여 아룁니다. 신과 행병조정랑 겸훈련원판관 방인하 등 2인을 상신합니다. 신은 다른 관원들로부터 해당 관청에서 소관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였고, 당상으로서 공조와 비변사의 수장을 도맡아 백관을 두루 살피고 여러 사무를 처리하여 조정 안정화에 기여한 공이 있다는 사유로 포상 추천을 받았습니다. 행정랑 방인하는 연초 승정원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했고, 이후 병조와 훈련원에서 업무를 원활이 진행한 공이 있습니다. 이에 신에게는 화승총 한 자루 및 은사금 300냥, 행정랑 방인하에게는 인사평점 가삼점과 국궁 한 장(張)을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모임 및 시전 활성화 포상에 대하여 아룁니다. 모임 부문에는 조선문학회, 박문독서회, 차르재단 등 3곳이 있으며 시전 부문에는 마담상회 1곳이 있어 각각 상신 합니다. 모임 부문에 조선문학회는 모임 성격에 맞게 꾸준한 문학 창작 활동을 하였고 또 많은 이들이 문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문학회지 발행을 통해 모임 활동을 지속하며 다양한 작품 활동으로 타 모임에 귀감이 되고 있으며, 이미 5차례 포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박문독서회는 모임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회원들의 꾸준한 활동으로 모임 활동을 지속하며 서평, 영화평론 등에 대한 정보 공유가 잘 이루어져 다른 백성들이 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차르재단은 재단모임으로 여러 행사들을 기획하여 꾸준한 활동을 보이며 침체된 아조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어 타 모임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시전 부문에 마담상회는 꾸준한 판매 활동으로 백성들이 아조에서 물품 구매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해주었고 상거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에 모임 부문에 조선문학회는 명예포장을, 박문독서회, 차르재단에는 각 공조표창 및 은사금 500냥을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시전 부문에 마담상회에는 호피 1매 및 은사금 300냥을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당상 가자는 근속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여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비변사의 계사를 보면 근속 경력이 가자의 충분한 조건이 아님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한 번 문이 열리자 이후 적당한 때가 되면 이처럼 가자를 거론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으니, 후폐(後弊)를 염려하지 않고 이를 허락했던 때문이라고 하겠다.
교육 부분의 일부 내역이 분명하지 않다. 팔괘장 수여 이후의 강의 내역을 예전 근화장 수훈자의 경우와 비교하여 상세히 계하라."라고 하였다.
○ 종부시정 겸비변사낭청 김관이 문관 평정결과 등에 대하여 아뢰기를, "7월 제2차 문관 평정이 끝났사옵니다. 금번 문관 평정으로 봉렬대부 행호조정랑 하유가 봉정대부로, 승사랑 권지교서관정자 이예훈이 '상'점 2회로 각각 가계 되었으며, 권지정자 이예훈은 이번 가계를 통하여 정직 전환이 되었사옵니다.
하옵고 8월 초에 문,무관 소폭 개각을 진행하려 하옵니다. 이번 개각으로 현재 체제보다 좀 더 나은 인사안으로 보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관원이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사옵니다."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계한 바를 잘 알았다."라고 하였다.

7월 21일 기유(己酉)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자헌대부 봉조하 서긍이 전하께 삼가 시무에 대해 아뢰기를, "오륜(五倫)에 군신유의(君臣有義)라 하였으니 그 의미가 세월이 갈수록 가슴에 깊이 와닿습니다. 신이 다년간 잠적하여 종적을 보이지 않다가 근래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보이게 되었으니 마땅히 전하께 문안을 드려야 하나 상소 봉입이 중단되고 승정원이 가동되지 않아 상소를 올리는 일을 저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조야의 민심을 살펴보니 우려되는 점이 있어 외람되오나 전하께서 부르지 아니하였음에도 입궐하여 이렇게 아뢰게 되었습니다.
그간 정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니 상소 봉입이 중단되고 정기 과거가 중단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그러한 조치를 내리셨는지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허나 이 두 조치는 백성을 불안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과거가 중단됨은 스스로의 문재(文才)를 시험하고 인정받아 출사하여 본조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백성의 뜻을 펴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과거를 중단하심은 조정에서 더 이상 인재를 받지 않겠다는 뜻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인재 발탁 제도는 이제 천거 제도만이 남았는데, 천거의 기준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주관적이어서 천거권자가 천거를 행하기도 피천거권자가 천거에 응하기도 서로 애매한 상황이 항상 연출되어 과거가 중단된 지금도 천거는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피천거자가 활동을 하는 것은 시각에 따라 마치 천거를 받기 위한 모양새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신이 만나본 유생 중에는 이 점을 저어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정기 과거의 재개를 고려하고 있지 않으시다면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고려하여 주십시오. 천거된 자로 하여금 과거를 치르게 하여 합격한다면 떳떳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출사하게 되었다는 공인을 받는 것이니 위에서 신이 언급한 천거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즉, 천거 기준의 주관성과 모호함을 과거와 혼합하여 보완하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에 목마른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방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부터 실시되었던 소과, 대과는 "응시생이 없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서 시제와 시행 기간, 시관을 정했었다면 현량과는 미리 응시생을 마련해두고 실시하는 것이니 유능한 관원을 충원할 수 있는 확률도 더 높습니다.
오랜만에 신이 결례를 무릎쓰고 감히 아뢰었습니다. 바라옵건데 옥체 강녕하시옵고, 과거의 중단으로 인한 백성의 불안을 헤아려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7월 22일 경술(庚戌)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행교서관정자 이예훈이 삼가 부복하여 전하께 아뢰기를, "신이 사서를 살펴보며 상고하였건데 대저, 하늘이 모든 백성을 내고 사목을 세운 것은 임금이 없으면 어지러워지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임금이 백성을 중히 여기지 않고 단지 천하로 하여금 자신만을 받들게 한다면, 패망하는 화가 모두 이에서 생기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맹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백성이 가장 존귀하며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존재라고 하였으며, 공자는 군자는 세상의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한 부분이 옳다고 완전히 따르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한 가지가 적합하지 않다고 모두 배척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과, 짊어져야 할 책임이 막중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비자의 망징편에 기록되어있기를 임금의 성품이 너무 강해서 신하들과 화합할 줄 모르고 간언을 물리치고 신하들에게 이기는 일을 즐기며 나라의 이익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자신의 믿음에만 의지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간관의 간하는 말을 모두 유중불하하시고, 백성들의 상소의 봉입을 허하지 아니하시며, 승정원과 사간원을 닫아 옆에서 말할 이를 두지 않으심은 신하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게 하는 것과 같으며, 말하고자 하는 이의 의욕을 꺾어 사조의 발전을 저해함과 같으니 이것이 첫 번째 폐단입니다.
본조가 창국한 이래로 비국이 열려 대부분 관청의 일을 맡았던 날이 오늘과 같은 날이 없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신하를 내치시는 것은 쉬이하셨으나, 신하를 뽑는 일에는 박색 하시어 조정에서 일할 자가 적어진 것에서 시작된 일이 아니라 할 수 없겠습니다. 조정에서 일할 자가 적어짐으로 조정조차 둔화되어 지방을 활성화시킬 방도를 찾기도 어려워졌으며, 업무를 볼 때에 한 사람이 적게는 서너 가지, 많게는 예닐곱 가지까지도 맡게 되니 처리할 일은 많고 사람은 적어 병목현상이 생겨나고 있는 이유는 대부는 많으나 직임에 있는 자가 적으며, 새로이 천거되거나 과거로서 출사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두 번째 폐단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주가 예절을 갖추고 겸손한 자세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군주가 예의가 없고 겸양도 없는 자세로 나라를 통치한다면 법규와 제도가 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군주는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예의와 겸양을 갖춘다면 법규와 제도가 없어도 능히 통치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으로서는 상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에 전하께서 신하들의 간언을 쉬이 물리치시는 까닭이 혹 전하께서 스스로 세종대왕과 정조대왕 또는 성종대왕과 같은 덕이 있는 군주라 생각하시어 그러시는 것이라면 과연 전하께서는 스스로 낮추시지 못하시고 도리어 스스로를 높여 성군이라 하시니 군주로서 참담하기 그지없을 일인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폐단입니다.
삼가 고하건데 전하께서는 사헌부의 간하는 말을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신하들의 상소를 봉입하게 하시며, 사간원을 두어 잘못된 일에 잘못되었다 하게 하심으로써 신하들과 백성들의 간하는 말을 들으시고, 귀를 여시어 현재의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인가를 직접 들으시옵소서. 무릇 의사가 사람을 치료할 때는 칼로 뼈를 찌르는 것을 서슴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신하들로 하여금 충언으로서 군주의 귀를 거스르더라도 위태로운 나라를 구할 수 있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한 조정의 일 할 사람이 적으니, 조정의 관료들이 피곤해 하며 조정의 움직임이 점점 무거워져 둔화되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응시생이 없을까 하는 마음을 거두시어 소과와 대과를 각각 치르심으로 조정에 새로운 재목들을 들이시고,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 하시면 현량과라도 치르시어 어떤 방법으로든 조정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조정이 조금은 더 가볍고 쾌활한 움직임을 띄도록 하시기를 청합니다.
마지막으로 전하께서 스스로를 낮추시어 겸손한 마음으로 예절과 겸양으로서 통치를 하셔야 할 것 이온데, 가장 먼저로는 신료들의 간하는 목소리를 들으시옵고 나중으로는 백성들의 청하는 소리를 들으시옵고, 아조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과연 어떠한 정책을 펼쳐야 하는가를 신하들에게 끊임없이 묻고, 논하게 하심으로써 아조가 흥하고 흥하여 오 년, 십 년, 백 년, 만만세세 이어지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7월 23일 신해(辛亥)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24일 임자(壬子)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25일 계축(癸丑)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첨지중추부사 서민교가 삼가 정사에 대해 차자를 올리기를, "시골의 소신이 엎드려 살펴보건대, 오늘날 위로는 선비가 응당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않고 백성은 임금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옅어졌습니다. 이것을 다만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없다고만 할 수 있습니까. 또 근자에 직무로 인하여 죄명을 받고 처벌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이 원인이 무능해서일지 마음이 안일해서일지 불충하는 마음일지 논하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北辰이 그 자리에 없는데 衆星이 어떻게 그를 향해 돌겠습니까. 백관의 벼리가 되시는 전하께서 조정을 마음을 다하여 돌보지 않으시는데 아랫사람이 일을 잘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한 줄기 개울에 그물을 치고서 기다린다면 크고 작은 물고기가 걸리겠습니까, 안 걸리겠습니까.
亞聖께서 宣王에게 말씀하실 적에 친구의 처자식을 맡은 자가 그들을 추위에 떨고 굶주리게 한 것, 법관이 관원을 다스리지 못한 것을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하자 선왕은 버리고 그만두게 한다 하였습니다. 다시 성인께서 사방 경계 안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자 왕은 할 말을 잃고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처럼 못난 모습을 보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天下國家가 다스려지지 않는 근본 원인은 帝王이 失德했기 때문이며, 아무도 道理를 밝힘으로써 구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허물을 돌리겠습니까.
또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諸侯에게는 보배가 셋이니 土地와 人民과 政事”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예전과 같지 않아서 정사를 돌볼 수 없다’ 하시며 軍國機務를 廟堂에 맡기셨습니다. 九重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끔 편전에 한 말씀 하교를 내리려 나오시는 것이 마치 초겨울 산보 나오시는 것 같습니다. 관리들을 그 정도로 믿으시는 것입니까, 정사는 이제 뒷전에 물리신 것입니까. 有司조차도 나와서 조정의 일을 돕는 것이 부쩍 뜸해진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고서야 정치가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순조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작년 초에 전하의 명을 받잡고 備局을 설치할 즈음에 과연 오늘날 이렇게 되리라고 차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조정이 困乏해져서 위엄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삼가 우리 英祖께서 연로하셨을 때까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신 일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전하께서 종묘사직을 돌보지 않으신다면 국가의 천년 만년을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그저 大內에 거하시고 군신들은 署押만 할 따름이면 진창에 엎어져 우는 전하의 赤子들은 누구에게 호소하겠으며, 만일 국난의 위기가 있게 되면 宮府는 어디에 의지해야 합니까. 오늘날, 말하는 사람들은 憲廟·哲廟 兩朝의 역사를 들어 君臣이 어리석어 일할 줄 모르고 識者들은 뜻을 펼치지 못하여 亡國으로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민국이나 본조나 국운이 갈림길 사이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중한 시기임을 깨닫고 구할 줄 모릅니다. 다시 혹 나라가 망해버린다면 列聖朝를 무슨 낯으로 뵙겠습니까. 이 백성들은 다시 遺民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니 그 수치와 곤욕을 어떻게 감내하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한번 日新하시려는 각오를 다지시고 합당한 인재를 적절한 관직에 앉혀서 공무를 잘 처리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書』에 이르기를, “진실로 그 덕으로 나아가면 도모함이 명확해지며 보필이 잘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등극하신 이후로 進道하려는 마음을 굳히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현인을 중용하셨습니까. 다만 법령을 세움으로써 다스리셨을 따름입니다. 이는 일세의 방도일지는 모르나 백세의 방도는 못 됩니다. 또 周公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아, 君子는 無逸을 거소로 삼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군주는 안일해서는 안됩니다. 일신이 편하자고 祖宗朝의 功業을 뒤로 한다면 무슨 수로 백관을 다스리며 백성을 애육하겠습니까. 오늘부터라도 통절하게 해이한 마음을 끊어버리셔야 백세의 경계가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一心으로 정사에 임하셔야 士人과 小民들도 비로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많은 말들이 있어서 전하께서는 민간의 상소를 폐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臺閣의 진언에는 비답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憲府 뿐이었으니, 아래로 백관을 감찰하면서도 위로 간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言官을 둔 연유는 直諫하게 하여 제왕의 과실을 바로잡게 하려 함입니다. 그런데도 臺官의 차자에 가타부타 하교는 내리시지 않으시고, 그렇다고 하여 내쫒지도 벼슬을 갈아버리시지도 않으셨으니 대관은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였던 것입니까. 그러나 지금은 三司 중에 어느 곳이 개폐되어 있습니까. 이제 누가 있어서 상하의 과실을 바로잡겠습니까. 이제 나라가 물에 떠서 이 넓은 천지에 어디로 흘러간들 붙잡아 줄 자는 누가 있겠습니까. 道亡과 國亡이 멀리 있다 자신할 수 있는 오늘날입니까. 사세가 이러한데도 나랏일을 廟堂에만 맡길 수 있으시겠습니까.
본시 제왕은 괴로운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는 하늘이 내는 것입니다. 본조는 왕조국가로서 王者의 名分은 일개인이 아니라 국가입니다. 전하께서 계시되 궁중에만 계시다가 가끔 재결만 할 뿐이시라면 내일도 모레도 조정은 이 모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聖王들께서는 종아리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일하시고 먹고 있던 것을 뱉으면서 현인들 맞아들였다 하니, 이러한 정성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그 나라가 오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天命을 다시 받는 것이니, 維新이 달리 있겠습니까. 또한 이 자리는 듣는 자리입니다. 자기 뜻대로만 하고 선현들의 가르침에 말미암지 않고 백관의 간언을 용납하시지 않는다면, 인덕이 있는 군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현인과 忠言을 萬金처럼 귀히 여기지 않고서도 一夫가 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요행이라 하겠습니다. 제발 통촉하여 주십시오. 종묘사직을 받드심에 眞心을 다하시고 신민들을 대하심에 公心을 다하십시오.
신이 原任인데다가 時政을 잘 알지도 못하여 여태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신이 이토록 極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올챙이 같이 못난 소신이라 하나 당상의 지위에 있고 이날까지 국록을 받았으니, 이처럼 말하지 않으면 안될 義理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두고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미 다 올렸습니다. 그러나 榻前에서 감히 御心을 어지럽히고 亂言을 입 밖에 낸 不忠不敬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으니, 王府에서 떳떳이 죽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 행교서관정자 신 이예훈가 삼가 부복하여 전하께 현 시무에 대하여 아뢰기를, "언로의 막혔습니다.. 제왕은 때때로 신하가 말하면 경청하고, 간하면 행동하여 고쳐야 하는 것을 덕목으로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전하께선 신하가 말하면 승정원으로 보내시고, 간하면 이 또한 이전과 다를 바 없다 하시며 승정원으로 보내시니 감히 말할자가 적어지며, 신하들의 입이 백개라도 더 이상 올릴 말이 없음입니다. 대대로 조종의 대왕들께서 때로는 집현전으로, 때로는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홍문관의 문을 여시어 간관들에게 말하게 하심은 군주에게 간쟁하고, 논박하여 말하게 하고 그릇된 것은 고칠 수 있게 말하게 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군주는 간관들의 이야기를 무겁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가벼이 물리친다면 백성들이 무엇을 보고 따라 행하겠습니까. 실로 군주는 백성들의 어버이시니 전하께선 언로를 여시고 신하들에게 말하게 하시고,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시며, 간관들에게 간하게 하셔야 합니다. 미루시고, 듣지 아니하시고, 입을 막아버리신다면 백성들마저 그것을 보고 배워 옳지 못한 바를 따르게 될 뿐이니 이것이 첫째로 급한 시무입니다.
인재가 없습니다. 업무는 과중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조정을 보면 여러 대부들이 있습니다. 낮게는 종3품이며, 높게는 종2품관도 있는 줄 압니다. 만일 그들을 가자하여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그렇게 세운다면 그렇게 하여 육조와 의정부의 수장으로 세운다면, 부족하다면 행으로 수로 관직을 제수한다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과거를 제대로 치루고 인재를 선발하게 되면 언제 인재가 없다 할 수 있겠고, 사람이 없어 업무가 과중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없다하여, 사람을 뽑지 아니하면 결국 사람은 더욱 없어지고 일은 더욱 쌓이는 모순만 낳을 따름이니 이것이 둘째로 급한 시무입니다.
사람을 쉽게 물리치십니다. 전하께서는 신하를 쉽게 물리치심으로 매번 조그만 허물이라도 보이면 파직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렇게 조정을 떠난 자들이 많아 셀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조정에 남아있습니까? 매번 사람이 부족하여 외관 한 명에게 서 너 개의 도의 일을 맡기시고, 비변사에게 몇 개나 되는 부처의 일을 맡기시면서 언제에야 사람을 불러다 자리에 앉히시려하십니까. 최소한 자리에 사람을 앉히실 것이 아니라면 사람을 쉽게 물리치지 마셔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셋째로 급한 시무입니다.
신이 사서를 보며 지난날들을 돌아보니, 제왕은 언로를 살펴 막히지 아니하게 함이 그 덕목인 줄 압니다. 옛 먼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대 제왕들을 굽어보건대 언로를 열었다면 감히 성군이라 부름이 아깝지 아니하였으나 언로를 닫고도 성군이라 불리웠던 제왕들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습니다. 물론, 언로를 열고도 성군이라 불리지 못한 제왕들이 역대에 많으니 모순이라 하겠지만, 언로를 엶에 그 뜻이 큰 것입니다. 더욱이 조종의 세종대왕과 성종대왕께서 언로를 더욱 여시고, 간관 및 대소신료들의 말 듣기를 쉬지 아니하셨으니 실록에 기록이 남아 있기로는 "以爲何如"라는 말은 각각 66번, 63번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세종실록의 초반부에는 당시에 상왕이셨던 태종께서 남기신 것으로서 그 수가 줄어들 수 있다고는 하나 그렇게 할지라도 역대 조선조 제왕들께서 남기신 말씀들 중 가장 많이 하셨던 것은 자명합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데, 당연한 말이지만 언로는 열면 열수록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왕은 홀로 정하지 아니하고, 신료들의 말을 들어 결정하는 것 또한 그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정한다면 신료를 세움에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홀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직접 그 말을 듣고 홀로 세워진 제왕만이 그 일을 처리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각 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료들을 세움은 그들로 하여금 제왕이 듣지 못한 이야기까지 듣고자 함이니 그 뜻은 높고 높아 감히 헤아릴 수 없음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성상께서는 그러지 아니하시고, 간관이 간하여도 듣지 아니하시고, 고관들이 말하여도 물리치시니 어찌 언로를 살펴 막힘이 없게 하신다 하겠습니까. 과연 전하께서 이러하시건데 누구와 정사를 의논하며 조정의 의견이 어디로 올라가 어떻게 행해진단 말입니까.
과연 전하께서 언로를 여시겠다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하지 못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다만, 작금의 전하께선 언로를 피하려고만 하시니 그 문제가 큰 것입니다. 신하의 말이 두렵다면 어찌 제왕이라 할 수 있으며, 군주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실로 성상께서 무엇이 두려우신지 알 수 없으니 모든 신료들이 충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이때에 배반할 자가 누구이며, 역도가 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신료들을 쓰는 것은 모두 군주의 몫인 것이지, 신료들이 나아가겠다 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상께선 어찌 언로를 열지 아니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한비자는 "하급의 군주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중급의 군주는 다른 사람의 힘을 사용하고, 상급의 군주는 다른 사람의 지혜를 활용한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마땅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하나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전하께서는 신하들이 말함에도 듣지 않으시고, 신하들이 보여드릴 때에 눈을 가리시며, 말하셔야 하실 때에 입을 닫고 계심입니다.
허조는 세종대왕 대에 죽음으로 그 죽을 때 유언으로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天地間)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浩然)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의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상상(上相)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군자는 간하면 행하고, 말하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지금의 관리해야 할 그 누가 간하면 행하고, 말하면 듣겠습니까. 경계해야 할 다름입니다.
전하께서 오늘날처럼 계속 행하신다면 과연 폐주 연산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전하께서 폐주 연산보다 낫다고 스스로 위로하신다 할지라도 역사와 사신은 전하를 폐주 연산보다 못하였다 평가할 것입니다. 또한, 제왕의 자리에 동반되는 책임이란 하늘을 양 어깨로 떠받들고 있는 것과 같사오니 실로 무겁고 두려울 뿐 이온데, 전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니 이제 하늘이 누구를 내어 아조를 이끌게 하겠으며, 어떤 백성들이 일어나 왕을 섬기자 하겠습니까.
전하께옵서는 스스로 자중하시고 겸손하시어 아래로는 백성들의 소리부터 위로는 하늘의 뜻까지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받드시옵소서. 스스로 성군이라, 군자라 생각하지 마옵시고 날마다 갈고 닦아 더욱 성군으로서 군자로서 행할 바를 행하시기를 청하옵니다. 신의 차자를 물리치지 마옵시고 신의 목에 칼을 들이 대실지라도 신은 말씀 올릴 바를 올리겠다는 생각으로 말씀을 올렸사오니 신의 관대를 물리치시고, 파직과 삭탈을 하실지라도 후회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7월 26일 갑인(甲寅)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27일 을묘(乙卯)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28일 병진(丙辰)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공조참의 겸비변사부제조 이운이 개국626년 하반기 교육 포상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기를,"전교하신 바와 같이 팔괘장 수여 이후의 강의 내역을 예전 근화장 수훈자의 경우와 비교하였습니다. 이에 교육 부문 근화장 수여 대상자를 조사해보니 故 박연, 故 김민승이 있어 이들의 사례와 비교하였습니다.
故 박연에 대하여 아룁니다. 故 박연은 개국616년 8월 31일 교육 포상 계본 이전까지 정석학당에서 32강을 강하였고 동년 9월 3일 팔괘장이 수여됐습니다. 팔괘장 수여 이후에도 계속 강하여 개국617년 5월 18일 교육 포상 계본 전까지 총84강을 강하였고 학보 발행까지 하였습니다. 팔괘장 수여 당시 32강과 이후 84강을 더해 총116강을 강하여서 동년 5월 19일에 근화장이 수여 됐습니다.
故 김민승에 대하여 아룁니다. 故 김민승은 개국619년 2월 25일 교육 포상 계본 이전까지 대동학당 4강, 정석학당 30강, 성균관 문과 5강 등 총39강을 강하였고 동년 3월 8일 팔괘장이 수여됐습니다. 팔괘장 수여 이후에도 계속 강하여 개국619년 11월 26일 교육 포상 계본 전까지 자운서당 23강, 태백서당 2강, 청암서원 11강, 성균관 문과 9강, 정석학당 31강 등 총76강을 강하였습니다. 팔괘장 수여 당시 39강과 이후 76강을 더해 총115강을 강하여서 동년 12월 2일에 근화장이 수여 됐습니다.
자운서당 및 고산서당 훈장 김관에 대하여 아룁니다. 해당 기간 동안 자운서당에서 형법 23강, 고산서당에서 민법 23강을 주제로 강하였고 강의의 질이 우수하며 백성들의 호응도 높습니다. 특히, 김관 훈장은 청암서원에서 48강(618년 06월 26일 ~ 620년 02월 14일), 대동학당에서 20강(621년 01월 08일 ~ 621년 04월 05일) 정석학당에서 4강(623년 08월 20일 ~ 623년 08월 27일)을 강의한적 있으며 지난 개국619년 8월에 47강을 강하여 팔괘장을 수여받은 적이 있습니다. 팔괘장 수여 당시 47강과 이후 71강을 더해 총118강을 강하였습니다.
영남학당 및 대동학당 훈장 정예림에 대하여 아룁니다. 해당 기간 동안 성균관 교양과 교임으로 4강, 영남학당 훈장으로 28강을 꾸준히 강하였으며, 대동학당 훈장으로 17강을 강하는 등 행정학과 사회복지세미나를 주제로 양질 강의를 진행하였고 수강생의 호응 또한 좋았습니다. 이외에도 영남학당 학보 10회를 발행하는 등 교육 활성화에 진취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정예림 훈장은 영남학당 33강(624년 08월~팔괘장 수훈), 25강(팔괘장 수훈~625년 12월), 대동학당, 성균관 등에서 지난 624년 8월부터 강의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약 3년간 성실한 자세로 강의에 임하여 총 103강(성균관 포함 107강)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신의 생각에 대하여 아룁니다. 김관 훈장은 팔괘장 수훈 이후로 진행한 강의는 전례와 비교했을 때 약간 미달하나, 총 강의수로만 놓고 보면 차이가 없었고 정예림 훈장은 총 강의 수는 전례와 비교하면 8~9강 미달하나, 팔괘장 수훈 이후로 진행한 강의가 74강에 이르고, 그 외에 김관, 故김민승과 다르게 학보 발행을 하는 등 강의 외적으로 교육활성화에 이바지한 공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계한 바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7월 29일 정사(丁巳)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7월 30일 무오(戊午)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종부시정 겸비변사낭청 김관이 문관 인사에 대하여 아뢰기를, "통덕랑 정도전이 관직신청을 하였사옵니다. 정도전을 얼마 전 파직되었던 前승문원판교를 대신하여 예조 수장으로 삼으심이 어떠하겠사옵니까. 하여 정도전을 행예빈시별좌로 의망하옵니다. 정도전은 출사이후 현재까지 지방관업무를 제외하고 예조에서 업무를 진행하여 예조업무에 대한 이해가 높으며, 지난 3월 예조수장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 갑자기 예조수장이 파직되어 수장의 부재였던 예조를 신속히 정상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옵니다. 다만, 지난 6월 지방관인 前충청도사로 근무하다 파직되었으므로 이조업무지침에 의거 무록직으로 의망하였으며, 인사행정절목에 의해 파직된 지 1개월이 지났으므로 소명 및 각오의 글은 진행하지 않는 것으로 할 예정이옵니다."라고 하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보류한다. 이후 사직을 청하는 관원이 있거든 당일로 면직 처분하고, 편전에 올려지는 사직차도 재가를 기다리지 말고 이조 또는 병조에서 전결로 면직하라"라고 하였다.

7월 31일 기미(己未)
승정원에 배속된 관원이 없음(無)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선교랑 행승정원주서 김진만이 쓰고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경연참찬관 이운 교정하다.

개국627(2018)년 1월 30일 기록 : 선교랑 행승정원주서 김진만
개국627(2018)년 4월 24일 교정 :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경연참찬관 이운
http://www.1392.org/bbs?sajor11:870 게시물 링크 (클릭) 게시물 주소 복사하기
답글 : 제한 (접속하십시오) 서찰(메일) 수정/삭제 : 제한 (접속하십시오)     윗글 밑글 목록 쓰기
  | 비공개 설정 사조 백과사전 맞춤법 문법 검사기 0
2000
저장(입력)
[승정원/주서] 승정원일기 : 개국626(2017)년 7월   김진만   627('18)/01/30-14:39     64    
[승정원/동부승지] 승정원일기 : 개국626(2017)년 7월 (교정)   이운   627('18)/04/24-20:43     42    

[13920] 한성부 북부 육조대로 1 승정원 (경복궁)
Copyright(c) 2000-2021 by Seungjeongw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