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당] 시대(時代) 05 제16화

용안에 생채기가 났다는 말씀이신가. 어허. 이럴 수가. 그러고도 네가 살기를 바라느냐. 고얀것!

인수대비의 화가 중궁에게 향했다. 상감이 어두운 전각에서 떨고 있음을 보던 대비는 아랫것을 시켜서 불을 키고 살펴보았다. 사실이었다.

자수궁에 얼씬거리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인수대비의 분노는 점차 더해가고 있었다. 상감이

원자의 어미가 아닙니까.

일을 애써 무마시키려고 했다.

주상을 시해하려고 몸에 비상을 지니고 있던 鷄緝입니다.

상감이 구차하게 변명을 늘인다.

중궁의 잘못이 아닙니다. 소자가 가고 가라는 중전의 손을 뿌리친다는 것이.

그러나 인수대비로서는 구차하게 변명을 해대는 상감의 체통이 한심스럽게 보였다. 방양서와 비상을 궁궐에 들여놓고 잉첩들을 독살해 죽이고자 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라고 공언해 대던 중궁이었다. 한데 하다하다 이제는 상감의 얼굴을 할퀴다니. 인수대비는 튀어나오려는 분노를 어금니 악물고 참아보았다. 그러나

듣기 싫습니다, 주상. 용안에 생채기를 낸 것이 중궁인 것을 어미가 이미 알고 있거늘.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으십니까.

인수대비는 드디어 트집을 잡는 명분이 생겨났다. 눈엣가시 같은 작은 며느리가 고까웠던 인수대비였다.

중궁을 폐하세요. 이번에는 안됩니다. 중궁을 폐서인해서 사가로 내보내세요. 오늘 밤 안으로 내보내세요.

인수대비는 결단력이 부족한 상감을 대신해 의지를 내리어 중궁을 폐하였다. 폐위된 윤씨는 이윽고 사가로 내보내졌다. 전교를 내린 뒤 인수대비는 남모르는 눈물을 흘렸다. 밤새도록 윤씨를 생떼쓰며 내쫓은 매정하고 모진 시어머니가 당신 체통을 버리면서까지 흐느끼고 있었다. 당신 손으로 <내훈>을 지어 내외명부의 규율을 엄히 하고자 했다. 그뿐인가. 당신 생각대로 왕실의 화목함을 누구보다 바라왔던 바가 이토록 어려운 일인가. 후비의 모범이 될 중궁이 당신 바람대로 이루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건만. 서운한 마음이 든 채 연신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윤씨가 폐위되어 사가로 내쫓겼다는 소식을 듣던 백성들은 경천동지와 같은 전교에 우르르 폐비의 사가에 찾아가서 통곡하였다. 윤씨는 이것을 보고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시어머니였던 인수대비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인수대비는 오라버니에게 말하였다.

폐비가 대궐을 나서면서 말하기를 원자가 더 장성하여 보위에 오르면 그때 가서 할 말이 따로 있다고 하였답니다. 그러니 원자가 더 장성하기 전에 폐비를 사사해야지요. 그래야 후환이 남지 않습니다. 폐비를 살려두고 원자를 세자로 봉할 수는 없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원자가 장성하여 어미를 찾으면 무슨 수로 모자 간의 상봉을 막겠습니까. 종당에 서로 왕래하여 정을 통하게 될 것이니 원자가 어미의 복위를 청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입니다. 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라버니 한치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자마저 폐위하라고 했으나 대비는

내 손주입니다. 원자는 내 손주예요. 어미를 잘못 둔 것 말고 원자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거들떠보지 않았다.

설령 폐비를 사사한다고 해도 원자가 승복을 하겠습니까? 아무리 비밀에 부치셔도 언젠가는 원자가 폐비의 죽음을 알게 될 것이 아닙니까.

이번에 옆에 앉아 있는 사촌오빠 치형이 거들었다.

모르게 해야지요.

왕대비의 의지는 단호했다.

세상 사람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 없습니다.

간언하는 치형의 입술이 바싹 타들어갔다.

원자가 장성하고 나서 알게 되는 것은 상관이 없지요.

보다 못한 치례가

어미의 일이 아니옵니까.

오라버니들이 조바심을 내니 인수대비는 웃어 넘겼다.

오라버님들께서 권세의 속성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번 맛을 들이면 손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 권력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어미의 죽음 때문에 모험을 하겠습니까. 임금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자가 보위에 올라 어미의 한을 풀어주려면 어미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겁니다. 지금의 중신들은 물론 그 자손들과 비굴하게 얼굴을 돌린 사대부들을 모두 다 죽이지 않으면 폐비의 폐 자도 입에 담을 수 없을 겁니다.

두 오라버니는 오금이 저린 것을 느낀다. 겁도 덜컥 났다. 치형은 인수왕대비의 수족으로서 중궁과 신진 관료들의 견제를 도맡아왔다. 그 여파로 죽은 뒤에 와서 편히 무덤에 쉬지 못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지만 치례는 우직한 성품 덕분에 죽어서도 영면에 들 수 있게 된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다 죽여야지요. 그 뿐입니까? 이 할미부터 죽여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손가락 까딱하지 않을 겁니다. 저들이 앞장서겠지요. 원자의 어미가 한밤중에 초라한 사인교를 타고 대궐 밖으로 쫓겨나는 꼴을 구경만 하고 있던 조정의 대신들이 서로 폐비를 죽이자고 할 것이니 나는 가만히 앉아 하회를 기다리는 것으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인수대비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인수대비의 호탕한 웃음을 듣던 치형과 치례는 무거운 발걸음을 애써 グ若

(원자가 장성하면 그때 가서 따로 할 말이 있다?)

인수대비의 비웃음이 입가에 맴돌았다. 어디 해 볼 테면 해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차 먼 일을 내다보던 인수대비의 눈에서는 먹이를 찾고 보는, 아니 피에 굶주려 미친 호랑이의 눈빛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