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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19편
어두운 밤을 틈타 대궐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은 명회에게 앉기를 권하더니
“어째서 안 보이셨는가.”
“소인이 글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명회가 핑계를 댔다.
“명색이 선비라는 자가 손에 먹물을 묻힌지 오래인지라서.”
그러더니 제품에서 살생부를 꺼내 들었다.
“소인이 정성을 다하여 쓴 글이옵니다.”
수양대군이 책을 펼쳐보았다.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기는 동안 명회는 눈을 감았다.
“한 사람이면 족하지 않나.”
“죽이셔야 하옵니다. 모두 죽이셔야 하옵니다.”
“한 사람만 책임을 물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안평대군의 이름이 보이자 수양이 섬뜩하여 책을 재빨리 덮는다.
“영상과 좌상으로 족하이.”
“이현로가 낙향하여 생살부를 만들었다면 대군께서는 김종서의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황보인의 자리는 김종서가 적혀있을 겁니다. 정난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옵니까?”
수양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가로젓더니 명회를 바라본다. 명회는
“안평대군을 죽여야 하는 이유는 다섯 가지가 넘습니다. 역모를 도모했습니다. 친형을 죽이고자 했으며 근친을 범한 패륜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국정을 어지럽혔으며 부정과 부패의 근원으로.”
“이 사람아, 안평대군을 죽여야 할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보다 백 가지가 넘어간다 해도 용서할 것일세.”
버럭 수양이 역정을 낸다.
“안평대군을 죽이지 못하시는 것이 인정입니까, 체면입니까? 형제의 정 때문에 죽이지 못하신다면 한 사람으로서의 성공은 있을지언정 바람직한 군주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권력과 인정은 물과 불처럼 상극되는 것으로서 권력이 인정을 베풀면 법과 정의가 바로 서지 않으며, 인정이 권력에 매달리면 권력의 온갖 온상(溫床)에 화근이 될 것입니다. 제갈공명이 마속(馬)을 죽인 고사를 모르십니까. 대군께서는 일신의 영화를 위해 정난을 도모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간신들을 죽이고 강력한 국가를 세우시려는 일념 때문이 아니시옵니까?”
“다음을 넘기시게.”
“대군 마님.”
이내 수양대군이 격노하여 당신 조부인 태종 대왕의 피비린내 나는 내력을 얘기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그 대가를 태평성대로 이룩하고자 하였음은 말할 것 없고, 모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문(諺文)을 만들었으며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두루 이로운 행적을 남겼으니 일일이 열거하여 무엇하나. 수양대군은 이내 입을 닫고, 다음을 넘기라고 했다. 다음을 넘기는 순간 이현로의 차례에 이르자
‘참으로 무서운 사람일세.’
수양도 현로와 친분을 가지고 있음을 알기에, 제 친구를 죽이려는 명회를 무섭게 생각하였다.
“몇 번 생각해보아도 김종서 한 사람이면 족하이.”
“대군께선 일을 이루시기도 전에 관용을 베풀려 하시옵니까?”
수양대군의 뜻을 꺾어내 끝내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貫徹)시켰다. 이제 칠삭둥이의 손에 생사의 여탈(與奪)을 한 손에 쥐었다. 친구까지 죽이려고 하는 모험을 각오하는 명회를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권람이 명회 집에 들어서자
“이보게 자준, 김종서를 진정 죽이시라고 했는가. 김종서를 죽인다면 민신을 잡기 어려우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시려고.”
“대군의 앞길에 방해된다면 모두 죽여야 하네.”
권람은 말없이 명회를 지켜볼 뿐.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을 들었는가. 나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야수의 심정으로 아침을 맞이할 걸세.”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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