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 개국611년 임오년 연두교서

임오년(壬午年) 정월에 교서를 내린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여 교서를 내려야 하는데, 교서할 내용을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이미 작년 신사년의 연두교서(年頭敎書)에 과인이 올해 들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대부분 언급되어 있으므로 거듭 같은 내용의 교서를 내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비록 '연두교서'라는 것이 그 해(年)에 나아갈 바를 밝혀 제시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그 내용이 작년에 교서하였던 '풍속을 바로잡고 교육을 장려하며 법령을 세우고 화합을 도모하여 인(仁)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에서 크게 차이를 둘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올해 연두교서는 과인의 심중(心中)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다시 새해가 밝아오니, 이제 본조(本朝)가 중흥의 기치를 세워 천하에 그 뜻을 알린 지도 어느덧 햇수로 3년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만으로 1년 6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전교(傳敎)와 비답(批答)이 있었으나, 과인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정은 문무백관(文武百官) 이하 팔도(八道:전국) 백성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때문에 작년과 비슷한 내용을 포함하는 교서를 거듭하여 내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교서와 전교, 교지(敎旨), 비답, 윤음(綸音) 등의 어명(御命)은 모두가 하나같이 중요한 것들이므로, 그 명(命)을 내려야 할 때를 당하게 되면, 내리고자 하는 명령에 강상(綱常:사람의 도리)과 의리(義理)에 약간이라도 벗어나는 내용이 있는지, 그리고 열성조(列聖朝)의 덕(德)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는 내용 있는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 하면 그리 하여야만 비로소 천하가 명령에 순응하고 하늘 또한 감복하여 전교하고 하교한 바가 제대로 시행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현재 조정의 상황이 옛날과 크게 달라 수백 년 전의 제도와 법령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으므로, 이른바 시속(時俗:시대의 풍속)과 인정(人情:사람들의 마음)이 변하는 것에 따라 내용과 적용을 달리하여 명령해야 한다고 할 경우에 있어서는 더 말하지 않아도 그 고심의 정도가 어떠할 것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교를 내린 이전과 이후가 서로 다르거나 또 중첩되고 배치되는 내용의 비답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 이는 대개 과인 스스로가 매사에 만전을 기하지 않았거나 혹은 신하들이 살펴 지적하지 못하였거나 과인의 학문이 희(喜), 노(怒), 애(愛), 구(懼), 애(哀), 오(惡), 욕(慾)의 칠정(七情)에서 자유롭게 제어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때문이다. 즉, 중국 춘추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인상여(藺相如)가 혜문왕(惠文王)에게 기약한 것과 같은 '완벽(完璧)'을 추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람을 쓸 때 그 시기마다 변동이 있었던 것을 두고서, 그 이면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인이 사람을 쓸 적에 간혹 특별한 마음에 의지한다고 하지만, 초기부터 지금까지 등용(登用)한 면면을 살펴 본다면 그것이 때로는 쉽게 변하는 과인의 성정(性情)에 의한 것일지언정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정 각 관청이 처한 상황이 수시로 변하고, 비록 뛰어난 인재라고 해도 한 가지 결점이 있고 하찮은 필부(匹夫)라고 해도 한 가지 재능은 있는 법이니, 모든 신하들이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 진퇴(進退)가 결정될 수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인사와 관련된 명령은 대체로 지나친 자를 억제하고 미흡한 자를 이끌며 파당(派黨)이 결성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든 신하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관계로 당초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자들 가운데는 서운하고 아쉬운 감정을 가진 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능력과 경력, 자품(資稟:성품), 행실 등을 감안하되, 조정의 여건과 각자의 형편을 아울러 고려한다는 뜻이 결코 다른 데 있지 않고 연고주의와 온정주의라는 폐단을 제외하고자 하였던 마음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크게 변함이 없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신하들 스스로도 각자 자기 자신이 과거에 행동하고 말한 바가 있는데, 그것을 모두 '관(寬:너그러움)'이라는 글자 하나로 덮어 지난 행적을 지우려고 하는 것 또한 지극히 곤란하다. 군주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백성들의 과거 잘못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인도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 하겠으나, 장기간 노력하여 쌓은 치적이 한 번 포상한다고 하여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관용을 베푼다고 하여 예전 관직이나 업무에서 얻은 죄나 허물이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이다.

재(材:재능)와 학(學:학문)과 식(識:식견)으로 이야기되는 '삼장지재(三長之才)'와 과거의 경력, 그리고 평소 성품을 살펴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밖에 없는데, 곧 그것이 최선의 '대리 지표'인지라 과거에 남긴 족적(足跡:발자취)이 관직을 명할 때에 중요하게 반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군주 스스로가 '자기가 잘난 척을 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 리 밖에서 거절하게 한다.'는 옛말로부터 여느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이렇다 할 큰 실수나 허물이 없는 신하들에게도 스스로가 자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작은 시련을 주기도 하는데, 이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높은 관직에 임명해 많은 백성들을 이끌도록 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 각각의 현장에서 실무를 경험하고 능력을 입증한 인재를 중용(重用)하니, 그리 하여야만 시련이 함께 하고 다른 관원들의 고충을 알 게 될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제기되는 여러 방면의 일들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정조)께서 정승(政丞:의정)을 쓸 때에 반드시 먼저 8년간의 시련을 준 다음에 다시 8년 동안은 믿고 쓰셨던 것이나 과인이 여러 관청의 일을 두루 역임하게 하는 것, 즉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삼사(三司: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와 인사권을 행사하는 전조(銓曹:이조와 병조), 예형(禮刑)을 관장하고 집행하는 예조와 형조, 그리고 한직인 호조와 공조 및 백성들과 직접 대면하는 외관직 등을 차례로 거치도록 하여 맡겨진 직임의 성취 여부를 살피는 것은 그 내면에 의도한 바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선비들의 기풍(氣風)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옛날 선비들에 비해 공적인 의리에 관한 결심은 크게 미약하면서 사적인 분개에는 조금도 참지 못하는 것이 대체로 오늘날 선비된 자들의 행실이다. 논의나 논쟁 가운데 행여 남으로부터 사소한 지적이라도 받는 날이면 당장에 다시는 씻지 못할 치욕을 당한 것으로 느껴 그릇된 마음을 품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정녕 개탄스러운 일이고 무엇이겠는가. 옛말에 '작은 절의(節義에 구애되는 자는 영화로운 명성을 이룰 수 없고, 조그만 수치를 꺼리는 자는 큰 공(功)을 세울 수 없다.'는 말을 가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기풍은 조정 관리들에게 미쳐,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처신을 쉽게 결정하는 폐단이 적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관직을 찾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 부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정작 그 관직에 임명되고 나면 적성에 맞지 않는다든가 업무가 과중하다든가 하는 이유를 들어 관직을 그만두고자 하는 것이 근래 조정의 상황이다. 이는 군주가 믿고 의지하는 바가 지엄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상하동료 관원들 사이의 의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은 때문으로, 관리들의 잦은 사직(辭職)과 면직으로 인해 유발되는 피해가 자못 적지 않다. 여러 관직의 업무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이러한 결과를 조장하는 원인 중 하나일 것이나, 본래 그러한 기풍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자신의 모든 행동은 무조건 합리화를 하면서 타인의 모든 행동은 긍정이 아닌 부정으로만 보는 '자기 기만'이 이러한 기풍에서 비롯되니, 팔도 백성들이 쉽게 서로를 의심하는 풍토가 여기에서 생기고 타인에 대한 험담과 비난을 남발하는 습관 또한 여기에서 유발된다. 이것이 곧 나라를 분열되게 하고 사회를 무너지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된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기 자신과 동등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똑같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식하려는 객관 지향의 '열린 사고'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날 조정에서는 군주에게 올리는 문서에 구절 하나, 글자 하나에라도 문제가 있다면 그 옳고 그름을 가려 죄를 주거나 유배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지금 조정에서까지 그리 할 수 없는 이유는 조정 내외(內外)의 상황이 옛날과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군신(君臣:임금과 신하) 사이의 처지가 옛날 군신간의 처지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군주와 신하 모두의 기품과 학식과 도량이 옛날 선현들의 그것에 비해 크게 미치지 못하므로, 앞에서 말한 바를 살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고 감안하면서 도리에 맞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정 신하들이 자주 절망하게 되는 원인을 생각해 보면, 대개 과인의 뜻과 배치되거나 의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에 그 까닭이 있다고 하겠다. 지난 1년 6개월의 기간 동안 과인이 정사를 돌보면서 크게 공을 이루거나 덕을 쌓은 것이 없다고는 하나, 나름대로 지켜 고수하고자 한 바가 있었으니, 한마디로 압축하여 말한다면 이른바 '상고(尙古)'라고 말할 수 있다.

옛날 문물과 선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을 가진 '상고' 두 글자의 의미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멀리 중국의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를 동경하자는 것도 아니고, 유교만을 존숭(尊崇:존경하고 숭배함)하던 옛날로 되돌아 가자는 것도 아니며, 옛 것을 지나치게 숭상해 흐르는 시간을 영원히 정체시키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바로 수백 년 전의 '조선(朝鮮)'을 가능한 한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으로, 다시 말하자면 국호(國號) '조선'에 걸맞게 제도와 분위기를 만들어 그것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과인이 생각하고 다짐하는 바가 항상 이와 같아, '상고' 두 글자에 제도와 법령과 격식을 맞추고 견지하려 하였으므로 그만큼 충실하고 강경하게 시행하려 한 계책과 제도가 적지 않았고, 신하들에게 내심 기대한 바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아래로부터 제기된 새로운 시책과 제도가 애초에 기대한 바에 크게 부합하지 못하였거나 옛 제도에 대응하지 않는다고 여겨 물리치고 질책한 바가 적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각자의 좌절과 시련이 더 크게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특히, 오늘날 조정에 관리들이 어떤 관청에 부임을 하게 되면 기존 제도와 법령을 고쳐 시행하려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강하므로 이러한 사례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는데, 제도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고 자체를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이미 마련되어 있는 제도에 우선 충실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워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거나 수정하려고 하는 분위기가 그러한 사례를 초래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지나치게 소극적인 신하들도 적지 않으니, 조용히 생각해 보면 이는 대개 각자의 성향이 본래부터 그러하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라고 하겠다.

복위하고 복권한다든가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킨다든가 절차와 예법을 고증한다든가 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더욱 신중하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그 일들이 당시 준엄한 공론(公論)과 의리에 의한 것이었고, 또 절차와 예법이 지극히 어려워 현재 조정 여건상 쉽게 도모할 수 없는 것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과인이 성군(聖君)이 아니고 과인을 보필하는 신하들도 학자적 관료가 아니니, 절차를 명확하게 하고 일을 시행함에 그에 걸맞는 무게를 두어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들도록 하고 조상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몇 사람만의 의견을 쫓아 일을 결단하거나 단기간의 논의를 통해 사안을 매듭짓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 이외에 면학(勉學:배움에 힘씀)을 장려하고 위민(爲民:민본을 위함)과 풍교(風敎:덕행으로 인도함)에 치중하며 시비우열(是非優劣)을 분명히 하고 명분(名分)을 바로 세우려는 등의 원칙이 있었던 것에 대하여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전교와 비답 전편을 두루 살펴 보면 대략 그 관통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교서한 바는 첫째가 어명과 관계된 것이고, 둘째가 인사에 대한 것이며, 셋째가 요즘 사람들의 경박한 풍속을 논한 것이고, 마지막이 시책을 펴는 원칙과 그 원칙 적용의 어려움에 관한 것이다.

마음을 차분히 하여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이므로, 비록 조목조목 지시하여 분명하게 나아갈 바를 제시하지는 않았더라도 교서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 헤아린다면 과인의 심중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본 교서의 내용이 이후 정사(政事)에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같이 교서한 후에도 약간의 변화조차 느낄 수 없다면 과인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 개국611년 2월 12일 (음력 정월 초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