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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개국615(2006)년 9월 6일 (수) 18:49  [유시(酉時)]
문서분류 기록
설명 혜종경렬대왕 행장 시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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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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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대왕문서(惠宗大王文書)







혜종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 행장
惠宗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 行狀

왕(王)의 휘(諱)는 모(某)이고 생전 존호(尊號)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體天興運俊德弘功新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凞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으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손자이시며, 선조소경대왕(宣祖昭敬大王)의 차자(次子)가 되신다. 모비(母妃)는 공빈(恭嬪) 김씨(金氏)로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를 지낸 김희철(金希哲)의 따님인데, 장생전(長生殿)에서 개국184년(을해:1575)에 왕을 낳으셨다. 모비의 사가(私家)는 원주(原州)의 손이곡(孫伊谷)으로, 일찍이 명종조(明宗朝)의 예언가 남사고(南師古)가 예언하길, '손이곡은 왕기가 서려 있으니 장차 왕이 나실 것이다'고 하였다.

왕의 보령(寶齡)이 3세 되시던 해인 개국186년(정축:1577) 5월에 모비께서 왕을 생산(生産)하실 때에 얻으신 병으로 졸(卒)하셨으므로, 왕은 일생동안 모비를 크게 애모(哀慕)하셨다. 이듬해 무인년(187년)에 학습(學習)을 시작하셨는데, 조야(朝野)에 명망이 높았던 학자 하락(河洛), 이기설(李基卨:1556-1622) 등이 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왕은 총명하고 효심이 깊었으며, 독서를 즐겨 하셨다. 왕의 총명과 효심을 가늠할 수 있는 왕자(王子) 시절의 두 일화가 있었는데, 하루는 선왕(先王)께서 왕자들 앞에 여러 물품(物品)을 늘어놓으시고 "취(取)하고 싶은 물품을 택하라." 하시니, 다른 왕자들은 다투어 보화(寶貨)를 택하였으나, 왕은 붓과 먹을 택하셨다. 이를 선왕께서는 기특하게 여기셨다. 또, 하루는 선왕께서 왕자들에게 "찬(饌) 중에 무엇이 으뜸이냐."고 하문(下問)하시니, 왕은 "염(鹽)입니다." 하고 답하셨다. 선왕께서 그 연유를 하문하시니, 왕은 "염이 아니면 백(百) 가지의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왕이 백성을 사랑하심이 이와 같으셨다. 선왕께서 다시 "네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하고 하문하시니, 왕은 "모비(母妃)께서 일찍 졸(卒)하신 것이 마음[心]에 걸릴 뿐입니다." 하고 답하셨다. 왕의 효심이 이와 같으셨다.

왕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개국192년(계미:1583)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고려사(高麗史)》,《십팔사략(十八史略)》,《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등의 서적을 탐독(耽讀)하셨다. 이듬해 갑신년에 관례(冠禮)와 가례(嘉禮)를 치르신 후, 궁(宮)의 법도에 따라 사가에 거처[居]하셨는데, 왕비(王妃)는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유자신(柳自新)의 따님이시다. 왕비의 조부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잠(潛)이고 외가는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자손으로, 명가의 규수이셨다. 성품이 지극히 온화하시고 주관이 분명하셨다.

개국201년(임진:1592) 4월에 일본(日本)이 침략하여 불시에 난(亂)을 겪으셨다. 13일 부산(釜山)에 상륙한 일본군(日本軍)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였으며, 28일에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1546-1592)이 충주(忠州)에서 패하였다. 전황(戰況)이 이러하니, 장안(長安)에 불안(不安)한 민심이 가득하여 피난(避難)을 떠나는 백성들로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다. 당시 조정의 공론(公論)은 '파천(播遷)하여 회복을 도모하자'는 파천론(播遷論)과 '서울[京]을 버리면 민심이 분열되어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원칙론(原則論)으로 양분되었는데, 달리 특별한 방책이 없던 터라 결국 파천으로 대의(大意)가 정해졌다. 화급함 속에서 종묘사직의 안위(安危)를 걱정한 우부승지(右副承旨) 신잡(申磼:1541-1609)이 선왕께 왕세자(王世子)의 책봉을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청하니, 이를 선왕께서 윤허(允許)하시며 신하들에게 이르시기를, "천망(薦望)하라." 하시었다. 그러나 선왕의 보령을 상량(商量)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다. 이에, 선왕께서 왕의 총명함을 칭양(稱揚)하시며 "세자로 책봉함이 어떠한가." 하고 하문하시니, 입시(入侍)한 신하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합당하다 아뢰었다. 29일에 왕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윤음(綸音)을 조정에 공표(公表)하였는데, 이때 왕의 보령이 18세이셨다.

30일에 선왕의 거둥[擧動]을 따라 익월 20일에 평양(平壤)에 당도하셨는데, 이 즈음에 선왕께서 책봉교서(冊封敎書)를 팔도 전역에 반포하시고 어필서한(御筆書翰)을 내리셨다. 교서에서 이르시기를, "선왕의 기업(基業)에 의지하여 위태로움을 잊고 지내다가 병란의 핍박을 만나게 되었다. 원량(元良)을 가려 세자를 세우자 신민(臣民)들이 의지할 만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자리가 편하지 않기는 하나, 난리 중이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 피난하는 때를 당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반포하노라. 사리에 어두운 내가 국가의 어려움이 많은 때를 만나 25년 동안이나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려고 하였지만, 억만(億萬)의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밀려오는 백성들의 원망을 어떻게 하겠는가. 다행이 이번에 인지(麟趾)의 경사를 얻게 된 것은 실로 선조들의 음덕을 힘입어서 된 것이다. 비록 백성을 위로하는 방법이 없어 부끄럽기는 하나 세자를 세우는 일은 오히려 일찍 해야 하는 줄로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책봉하는 의식은 응당 근엄해야 하니 한신(漢臣)의 장주(章奏)는 연이어 거듭되기만 하였고, 시일이 오래 지연되자,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모두 백발로 변하였다. 다만 이렇게 오랑캐의 모욕을 받아 마침 방가(邦家)에 내분이 일어나는 때를 당하여 호(鎬)에 침입하여 방(方)에 미치는가 하면, 많은 성의 방어가 일제히 무너져 재앙이 절박하므로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을 뫼시고 피난하게 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급박하게 되어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기만 하는데, 내 어찌 고집을 부려 사양만 하겠는가. 나라의 근본을 빨리 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기질이 영특 명철하고 학문이 정밀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가 선왕의 기업을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국사(國事)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은 비록 갑작스럽게 거행하는 것이지만 계획은 실로 예전에 정한 것이다. 모든 신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하였다고 여기지 말라.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것은 진실로 갑작스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평양[箕邑]에 와서야 비로소 글을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지만 전날 서울[漢都]에서 이미 신민의 하례를 받았다. 관중(關中)이 소해(少海)의 은택에 젖고 도로에는 전성(前星)의 빛이 보이게 되었다. 황천(皇天)이 아직도 우리 조종(祖宗)을 돕는데 사직이 어찌 이 외진 지역에서 편안하겠는가. 오랑캐의 넋이 어느덧 빠져 한수(漢水)의 물결이 맑아지고 관군(官軍)이 분발할 것을 마음먹자 적현(赤縣)의 벽루(壁壘)가 넓혀지게 되었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學禁)에 옛 도읍의 의례가 회복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알리는 뜻을 헤아려 태자(太子)를 위해 충성을 다하여 나 한 사람에게 수치를 끼치지 말게 하라. 이에 진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 백성들은 함께 듣고 따르도록 하라. 아, 큰 강을 건넘에 아득히 나루가 없는 것과 같으니, 이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여 원자(元子)를 공경하고 보호하라." 하시었다.

선왕께서 의주로 가시는 길목의 영변 고을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시어 분조(分朝)의 명을 내리시고 분조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왕에게 위임하셨다. 선왕께서 분조를 명하시며 이르시기를, "세자 혼은 뛰어난 자질로 숙성한데다가 평소 어질고 효자로 알려졌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며 떠받드니 중흥(中興)의 공을 돕기 충분하고 사방에서 은덕을 노래하며 모두 '우리 임금의 아들[吾君之子]'이라고 말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이 오래 전에 결정되었으니 이제 군사를 총괄하는 명을 내릴 때다. 세자 혼에게 임시로 국사를 맡겨 관직의 임명과 상벌을 스스로 결단하도록 하노라." 하시었다.

왕은 분조를 통솔하여 6월부터 12월 하순까지 평안(平安), 함경(咸鏡), 강원(江原), 황해도(黃海道) 일대의 전장을 순무(巡撫)하시며, 전란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군무(軍務)를 관장하셨다. 이천(伊川)에 머무시던 중에는 강화도(江華島)에 주둔하던 의병장(義兵長) 김천일(金千鎰:1537-1593)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의병들을 독려(督勵)하시고 이들로 하여금 군령(軍令)을 삼남(三南)에 전하는 소임을 수행토록 하셨다. 이어 전이조참의(前吏曹參議) 이정암(李廷馣:1541-1600)에게 명하여 '황해도의 연안성(延安城)을 방어하라.' 하셨는데, 이정암이 5백의 의병으로 5천의 일본군과 결사항전(決死抗戰)하여 연안성을 방어하였다. 때문에 황해도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던 일본군의 세(勢)가 저하되었으며 황해도에 주둔한 일본군과 연락을 꾀하던 평양의 일본군이 고립되었다. 또 의주(義州)에서 연안을 거쳐 서해(西海)의 강화(江華)로 이어지는 조정의 연락로가 이루어졌다. 왕의 전훈(戰勳)은 어이없이 유린되었던 아조(我朝)의 조정이 다시금 필사항전(必死抗戰)을 결심하는 시점(始點)이 되었고, 사방에 조정의 건재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어 전역에서 구국(救國)을 위해 의병이 봉기(蜂起)하였으며,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극복하는 구심점(求心點)이 되었다.

왕은 순무 과정에서 환후(患候)를 얻으셔서 개국202년(계사:1593) 3월부터 해주(海州)에 머무시며 환후를 치유하셨다. 일본과 강화(講和)가 진행되자 10월에 선왕과 환궁(還宮)하셨는데, 윤11월에 원군(援軍)인 명(明)의 요구에 의하여 무군사(撫軍司)를 통솔하여 남행(南行)하셨다. 12월에 공주(公州)에 당도하셨고, 전라도(全羅道)와 충청도(忠淸道) 일대를 순무하시며 병력을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시는 등의 일로 명군(明軍)을 지원하셨다. 이듬해 봄에 홍주(洪州)로 옮기셨는데, 계속되는 전란으로 과도한 징발(徵發)과 징세(徵稅)가 이어지고 여기에 기근(基根)이 겹치니 홍주 백성 송모(宋某)가 백성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켰다. 수행한 신하들이 왕의 안위를 걱정하여 다른 곳으로 거둥하실 것을 종용하니, 왕이 사양하고 머무시며 난의 평정을 관장하신 후 8월에 환궁하셨다. 개국206년(정유:1597)에 일본의 재침(再侵)이 있었으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1545-1598),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1537-1599) 등의 전공으로 이듬해 무술년에 전란이 종결되었다.

개국217년(무신:1608) 정월에 선왕께서 환후가 위독하시자 왕은 지극 정성으로 선왕의 병구완을 하셨다. 어의(御醫) 허준(許浚:1546-1615) 등이 귀한 약재들을 구해 처방하였으나, 2월 초1일 인시(寅時)에 선왕께서 승하(昇遐)하셨으므로 왕께서 비통함을 금치 못하셨다. 초2일에 승정원(承政院)과 옥당(玉堂)의 신하들이 속히 어좌(御座)에 오르시기를 연이어 청하니, 거듭 사양하시다가 비로소 받아들이시어 행궁(行宮)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셨다.

왕은 즉위 후에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두루 살피는 것과 국가의 기반을 재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셨고, 붕당(朋黨)의 정쟁(政爭)을 혁파(革罷)하는 것과 적소(適所)에 재야의 동량(棟梁)을 발탁하여 쓰는 것에 관하여 늘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다. 즉위하신 해 2월에 정쟁을 개탄하시며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기를, "하늘이 한 세대의 인재를 내심에 있어 한 세대의 일을 충분히 완성시킬 수 있게 하는 법이다. 근래 국가가 불행하여 사론(士論)이 합일되지 않아서 외처럼 나뉘고 콩처럼 튀어서 각기 명목을 만들어 서로 배척함에 있어 전혀 꺼리는 기색이 없으니, 이는 매우 국가의 복(福)이 아닌 것이다. 지금은 의당 피차를 막론하고 오직 인재만을 천거하고 어진 사람만을 기용하여 다 함께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게 하라. 이 뒤로 또 사심(私心)에 따라 공정하게 하지 않는 습관이 있게 되면 전장은 또한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시었으니, 붕당 타파에 대한 강한 의지를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왕의 형인 임해군(臨海君:1574-1609) 진(珒)이 왕의 정사를 비방하고 다녔다. 이러한 일을 두고 이이첨(李爾瞻:1560-1623), 정인홍(鄭仁弘:1535-1623) 등이 임해군을 사사(賜死)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영의정(領議政) 이원익(李元翼:1547-1634),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1556-1618) 등이 형제의 도리를 들어 임해군을 살려 줄 것을 청하자, 왕께서 답하시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임해(臨海)의 일은, 내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자라났으므로 당(唐)나라 송왕(宋王)과 우리나라의 월산대군(月山大君)과 같게 되기를 간절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과인의 부덕함으로 인해 동기(同氣)의 변이 있게 되었다. 비록 부득불 조정 신하들의 청을 따라 외방(外方)에 귀양을 보내기는 하였으나, 내 마음의 망극함은 어떠하겠는가. 가령 대의가 지극히 엄하고 왕법이 지극히 중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의 타고는 성품이 거칠고 망령되어 흉적(兇賊)의 꾀임에 빠진 것일 뿐이다. 하물며 선왕의 유교(遺敎)가 간곡하니, 어떻게 은정(恩情)을 끊을 수 있겠는가." 하시며, 이이첨, 정인홍 등의 청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시었다.

5월에 대구부사(大邱府使)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백성을 보살피고 국가를 견고하게 하는 방책 등을 아뢰며 선왕의 실정(失政)을 언급하자, 왕이 승정원을 통하여 비답(批答)을 내리시며 이르시기를, "신하가 진언함에 있어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리낌 없이 크게 말하고 곧바로 배척하는 것은 바로 간관(諫官)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사람마다 의당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간관일지라도 선왕에게 너무 관계되는 말일 경우 가벼이 꺼낼 수 없는 것이다. 정경세는 바로 선조(先朝) 때 경악(經幄)의 신하이니 조금은 지식이 있는 자이다. 그가 만약 선조 때 이와 같은 실덕(失德)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의당 선왕께서 임정(臨政)하던 때에 면전에서 극력 간했어야 하였다. 그런데 10년 동안이나 한마디 말도 안하고 있다가 내가 대를 이어받은 처음에 아직 들어보지도 못하던 선왕 때의 결점을 주워 모아 차마 들을 수 없는 못된 말을 낭자하게 하였으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무릇 자제(子弟)를 보고 그 부형(父兄)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차마 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가 어찌하여 감히 내 앞에 이러한 소장을 던져 이토록 모욕한단 말인가. 참으로 이른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다[無父無君]'는 것이다. 신하로서 이러한 죄를 졌으면 본디 상형(常刑)이 있는 것이나 언로(言路)를 방해하는 점이 있을까 염려하여 내가 우선 용서해 준 것이다. 이 뒤로는 선조를 침범하는 말이 들어있는 소장은 들이지 말라." 하시며 선왕에 대한 도리를 다하셨다.

예로부터 나라의 녹(祿)을 먹는 자가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지 않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는데 전란 이후 형편이 빈궁하다 보니 염치마저 사라져 공물의 방납(防納)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에, 동월에 영의정 이원익이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청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貢物)이 각 관청[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몇 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하고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이에 왕이 대동법의 시행을 윤허하셨다. 또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라.' 명하시어 대동미(大同米), 대동포(大同布), 대동전(大同錢) 등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시었다.

11월에 장만(張晩)이 오랑캐 지역의 지도를 그려 왕께 바치며 아뢰기를, "신이 북쪽 국경지대에서 4년 동안 근무하며 오랑캐 지역의 산천을 두루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랑캐에 잡혀갔던 사람들과 이 지역 지리를 잘 아는 군사들에게 거리의 원근과 산천 형세, 부락(部落) 이름들을 상세히 물었습니다. 또 오래 근무한 군사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참고해 높은 곳에 올라가 확인하면서 오랑캐 지역에 관한 작은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감히 이 지도를 바치니 조용할 때 보셨으면 합니다." 하니, 왕께서 지도를 받으시고 기뻐하며 이르시기를, "나라를 걱정하는 그대의 정성이 가상하다. 지도를 옆에 두고 유념해서 보겠다."고 치하(致賀)하셨다.

왕의 즉위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후금(後金)의 위협이 조야(朝野)를 불안하게 하였다. 무신년 8월에 후금이 압록강(鴨綠江) 일대에서 수군(水軍)을 일으켜 침략하려 한다는 풍문이 무성하였다. 12월에는 사신으로 명에 다녀온 황신(黃愼:1560-1617)이 아뢰기를, '후금의 위협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이 술렁이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은 방책으로 기미책(羈縻策)과 자강책(自强策)을 드시며 이르시기를, "생각하건대 조정의 인심이나 군(軍)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소. 한편으론 저들을 기미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계책이 될 것이오." 하시었다. 기(羈)는 말의 얼굴에 씌우는 굴레를, 미(縻)는 소를 붙잡아 매는 고삐를 뜻하니, '기미'란 본래 중국이 흉노와 같은 주변 오랑캐를 다루는 방법으로,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방책이 아니라 '오랑캐를 다독거려 온다고 하면 막지 않고, 간다고 하면 잡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방책이었다. 왕은 미개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의리와 명분을 이야기해야 우이독경(牛耳讀經)이므로, 잘 구슬려 안정을 도모하시겠다는 생각이셨던 것이다. 이는 나라의 실정이 후금과의 대응할 여력이 없었던 데서 나온 고육책(苦肉策)이기도 하였다. 왕은 기유년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를 체결하여 임란(壬亂) 이후 끊어진 통교(通交)를 재개하는 것으로 삼남(三南)의 안정을 도모하고 북방의 후금을 대비하는데 전념하시고자 하셨다. 왕은 후금이 침략할 것을 상정(想定)하고 방책을 마련하는데 혼신을 다하셨다. 우선 적정(敵情)을 살피시기 위해 후금의 인근 부족에게 면포를 보내시어 환심을 사신 뒤 적정을 탐문(探聞)하셨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해년에 후금의 포로가 되었던 여진역인(女眞譯人) 하세국(河世國)에게 관직을 내려 회유한 후 적정(敵情)을 탐문하셨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의 정세가 외부로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조정의 주요 결정을 조보(朝報)에 올리지 못하게 하는 등의 여러 조치를 행하셨다.

무신년에 이어 기유년에도 흉년이 이어지자, 팔도 전역에 온역(瘟疫)이 발생하였다. 백성들은 생계의 방도를 찾아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였고, 그나마 남은 백성들은 공역(公役)과 과한 징세로 인해 고초가 극에 달하였다. 사정이 이러 하니 왕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이듬해인 개국219년(경술:1610) 정월에 전교(傳敎)하시기를,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만나 초목과 온갖 생물이 모두 즐거워하는데 유독 우리 백성만이 위망(危亡)의 입장에 처하여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하늘을 본받아 하민에 임하는[臨下] 백성의 부모된 도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농사마저 큰 흉년이 들고 국가에는 일이 많아 백성의 노역이 매우 번잡하니, 생령(生靈)의 곤궁함이 극에 달하였다. 부득이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마음으로 항상 측은하게 여기고 있으니, 백성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서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제거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일을 십분 착실히 거행하여 목숨을 잃는 노약자가 없도록 하라. 옥에 갇혀 있는 자들 중에도 원통하거나 억울한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죄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래도록 구속하여 화기(和氣)를 손상하게 해서는 안 되니, 혐의가 있는 자는 조속히 관대하게 처결하여 병생의 혜택을 베풀 것을 해당 관청에 말하고 각도의 감사에게도 아울러 하유(下諭)하라." 하시면서 방책을 마련토록 신하들을 채근(採根)하셨다.

전란 이후, 온역으로 의약(醫藥)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당시 통용되던 약재와 의서(醫書)는 모두 중국의 것으로 공급이 매우 부족하여 시세가 높았으며 의서 또한 번잡하였다. 사정이 이러 하니 토산(土産) 약재를 이용하여 처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선 고유의 의서가 시급하였다. 선왕 대에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의서를 찬집(纂輯)하고자 한 이가 양평군(陽平君) 허준이었는데, 선왕의 승하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유배되었기 때문에 의서 찬집을 마치는 것을 기대하기가 실로 힘든 형편이었다. 왕자 시절부터 잔병치레가 유독 많으셔서 양평군을 자주 접하셨던 왕은 이러한 사정을 아신 후, 신하들의 반대 속에서도 허준에게 도성과 내의원(內醫院)의 출입을 윤허하시고 의서를 계속하여 찬집하게 하는 등의 편의를 내려주셨다. 경술년 8월에 양평군이 의서《동의보감(東醫寶鑑)》을 지어 올리니, 왕이 이를 치하하며 이르시기를, "양평군 허준은 일찍이 선조 때 의방(醫方)을 찬집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하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하게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하시었다.

경술년 11월에 내의원정(內醫院正) 강효의(康孝義)가 호패법(號牌法) 시행에 대하여 소(疏)를 올리니 "소를 해사(該司)에 내려 회계(回啓)하도록 하라." 하시었다. 이후, 호패법 시행을 앞두고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시기를, "호패법을 실시하는 것이야말로 1백년 이래로 있지 않았던 큰 일이니 외방에서 조금 소요가 일어나는 것은 사세(事勢)상 당연한 일이다. 그중 민간에서 의아심을 갖고 불편하게 여기는 것으로는 오직 통주연좌법(統主連坐法)이 있을 뿐이니, 만약 이 한 조항을 변통하여 편의대로 명부를 작성하게 하되, 협호(挾戶)에 수십 인이 있다 하더라도 여정(餘丁)의 목포(木布) 1필만 납부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주호(主戶)도 필시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고 품팔이 생활을 하며 들어와 사는 사람들도 필시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게 될 것이다. 호패청(號牌廳)에서 현재 사목(事目)을 줄여 고치는 일을 의논하고 있으므로 관원을 보내 이 뜻을 효유(曉諭)하는 바이니, 경들은 우선 열읍(列邑) 민간에 명백히 알리도록 하라." 하시었다.

왕은 상고(上古)에 전례가 없을 만큼 왕실과 관련한 전각(殿閣) 등을 새로 짓고 중건(重建)하는 것에 관심을 두셨다. 이는 전란으로 실추된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신 것이다. 무신년에 전란으로 소실(燒失)된 종묘(宗廟)를 중건하시고 신해년에 창경궁(昌慶宮)을 중건하셨으며, 그 직후에는 창경궁(昌慶宮)을 다시 중수(重修)하셨다. 또한 개국226년(정사:1617)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시여 돈의문(敦義門) 안에 경희궁(慶熙宮)을, 인왕산(仁王山) 부근에 인경궁(仁慶宮)을, 북학(北學) 자리에 자수궁(慈壽宮) 등을 새로 건설하셨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난은 백성들에게 염세의식(厭世意識)을 심어 놓았다. 전례에 없었던 망극한 체험이라 생(生)의 의욕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늘어갔다. 이것은 자연이 현세(現世)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어 속세(俗世)에서 도피하여 은둔하는 사대부, 곡기(穀氣)를 끊고 생식을 하면서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에 빠져 도인 행세를 하는 자 등이 급속히 늘어갔다. 이에 중외(中外)에 예의와 염치가 사라지고 기강이 땅에 떨어지니, 부모의 망극한 상(喪)을 당해도 반듯한 상례를 치르지 아니하고 상중(喪中)에도 버젓이 기생을 끼고 음주와 가무를 즐기다가 탄핵(彈劾)을 당하는 벼슬아치들도 많았다. 또 민간에서는 거사(居士)와 사당패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소란을 피우거나 승려 복장을 하고 무리를 지어 걸식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재(齋)를 지낸다고 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사정이 이러 하니 왕은 흐트러진 기강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교범(敎範)할 만한 서적이 시급함을 거듭 강조하시고 전란 중에 흩어진 서적들을 수습하시는 한편, 새로 서적을 간행하거나 명(明)에 사신으로 나가는 신하들에게 자금을 내어 필요한 서적을 구해오게 하셨다. 이로 인하여《고려사》,《국조보감(國朝寶鑑)》등이 새로 간행되었고,《좌전(左傳)》,《후한서(後漢書)》,《남북사(南北史)》,《요사(遼史)》,《금사(金史)》,《원사(元史)》,《태평어람(太平御覽)》,《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義)》등이 마련되었다. 경술년 정월에 예조(禮曹)에서 전란 중에 절의를 지킨 인사들과 임진년 이후로 포상이 내려진 충신, 열녀, 효자 등의 행적을 새로 발굴하여 중외에 알리고자《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간행을 청하니, 답하시기를, "아뢴 뜻이 옳으니, 아뢴 것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시었다.

임자년에 신하들이 '전란 당시 왕께서 종묘사직을 보위하시고, 나라를 부흥시키셨다.'는 명분으로 존호(尊號)를 정해 올렸다. 왕은 거듭 사양하셨으나, 신하들이 연일 청하였으므로 결국에는 이를 허락하셨다. 왕의 처음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體天興運俊德弘功)'이었는데,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글자가 더해져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體天興運俊德弘功新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凞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의 48 자(字)에 이르셨으니, 왕의 치세(治世)를 헤아리는 근거가 된다.

붕당의 정쟁을 혁파하고자 한 왕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대북당(大北黨)과 다른 붕당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특히 개국220년(신해:1611)에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이황(李滉:1501-1570)을 비판한 '회퇴변척(晦退辨斥)'을 계기로 대북과 사림(士林) 사이의 반감이 크게 높아졌다. 이듬해 임자년 2월에 황해도 봉산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1572-1613)이 관인(官印)을 위조한 죄로 김경립(金景立)을 잡아 취조하던 일이 김직재(金直哉:?-1612)의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어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는 봉산옥사(鳳山獄事)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어 계축년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고 일이 불거져 폐모론(廢母論)까지 언급되자 왕은 참으로 난감해 하셨다. 두 번의 옥사로 많은 이들이 참수되거나 사사되었고, 선왕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의 생모(生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는 서궁(西宮)에 유폐(幽閉)되었다. 영창대군은 폐서인(廢庶人)이 된 후 증사(蒸死)되었고, 부원군(府院君) 김제남(金悌男:1562-1613)은 사사되었다. 계축년 5월 30일에 영창대군의 폐서인 전교를 금부(禁府)에 내리시며 이르시기를, "영창이 물론 어린아이라서 아는 것이 없지만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설이 누차 여러 적들의 공초(供招)에 나왔고 보면 그 누가 화의 근본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역적들을 제거했다 할지라도 화의 근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국가의 걱정이 오히려 전일보다 더 심해질 것이다. 예로부터 동기(同氣)의 변에 대처할 때에 천륜이 중한 것을 모르지 않았지마는 그 일이 종묘사직과 관련될 경우에는 대부분 의리에 입각하여 은정(恩情)을 덮어두고 정을 굽혀 법대로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해서 임금이 개인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적들이 최고로 가치 있는 이용물로 삼고 종묘사직에 화를 초래하는 근본이 실로 여기에 있는데, 지극히 가까운 자리에 거처하면서 용납하기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으므로 삼사가 서로 소장을 올리고 백관이 대궐 문에 엎드려 상소하는가 하면 유생들이 항소(抗疏)를 하고 군민(軍民)이 피를 뿌리며 읍소(泣訴)하고 있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에서 아래로는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군민 모두가 '한 시각이라도 궁중에 편안히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공론이 지극히 엄하고 여정(輿情)이 날로 격렬해지고 있으니, 읍호(邑號)를 깎는 것만으로는 그 죄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고 공론을 신장시켰다고 말할 수가 없다. 영창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하시었다. 영창이 졸(卒)하자 초상 치르는 의례를 대군(大君)의 예(禮)로 시행하려 하시니, 승정원에서 옳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왕이 이르시기를, "어린아이로서 철이 없었으니 이미 죽은 후에는 후한 예로써 대우함이 무엇이 해로우랴. 그러나 아뢰는 바가 실상 공론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로 따르겠다." 하시었다.

갑인년에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에 사고(史庫)를 새로 짓는 등의 일을 명하시어 전란 중에 훼손된 사고들을 대거 정비하셨다. 이듬해 을묘년에는 왕이 세조대왕(世祖大王) 대의 전례를 드시며 원구단(園丘壇)을 짓고 교제(郊祭)를 지내려 하셨는데, 신하들이 '제후국 국왕의 신분으로 교제를 지내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 하고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하여 거듭 반대하였으므로 훗날을 기약하셨다. 개국225년(병진:1616) 11월에 삼각산(三角山) 백운봉(白雲峰) 기슭에 있는 조식(曺植:1501-1572)의 서원에 '백운(白雲)'이라 편액을 내려 사액(賜額)하셨다.

왕은 '편안한 때일 수록 위태로움을 잊을 수 없다[安不忘危之意]'고 거듭 강조하시며 계축년에 조총청(鳥銃廳)을 화기도감(火器都監)으로 확대 개편하시어 화포를 생산하게 하시는 등 군비강화에도 각별히 관심을 두셨다. 개국227년(무오:1618)에 후금의 공격을 받은 명나라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들어 원군의 파병을 요구해 오니, 왕이 명의 계략과 대세를 간파하시어 여러 사유를 들며 거듭 파병을 거부하셨다. 그러나 친명파(親明派) 신하들의 설득과 명의 선공 위협으로 인해 이듬해 기미년 2월 초1일에 어전통사(御前通使) 출신의 강홍립(姜弘立:1560-1627)을 도원수로 삼아 조총수 5천을 포함하여 1만 3천의 군사로 조명군(助明軍)을 파병하셨다. 어전통사 출신을 도원수에 삼으신 것은 싸움보다 외교를 우선하여 명과 후금 사이를 적절히 조율하기 위한 지략이셨다.

강홍립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왕이 강홍립에게 이르시기를, "원정군 가운데 1만은 조선의 정병(精兵)을 선발하여 훈련하였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숙달하게 되었노라. 그러니 그대는 명나라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하시었다. 3월 12일에 원정군이 삼하(三河)에서 후금의 군대에 패하니, 수천의 사상자가 생겼다. 직후, 후금의 역관이 출병의 연유를 물으니, 강홍립이 왕의 영(令)대로 '부득이 한 출병'이라 답하여 후금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이것으로 왕이 당초 의도한 뜻은 이루었으나, 심하(深河)에서의 패전은 조정의 내분과 반발을 초래하였고, 명과 친명파에 의해 무리하게 강행했던 원군 파병은 백성들의 원망을 초래하였다. 왕이 이르시기를, "비록 혼미하고 병들어 맑은 정신은 아니지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 지난해 격문이 왔을 때부터 내가 우려하던 것은 징발한 병사를 보내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 견고하지 못하고 군병(軍兵)은 평소에 교련되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몰고 들어가면 전쟁에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진달(進達)하되, 서둘러 경략(經略)이 나오기 전에 주달(奏達)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비록 오늘날에 패배를 당하더라도 지난해에 주달한 것과 서로 부합되었을 것이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경들은 나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막으려고만 하고 있는데 단지 사정을 주달하는 것이 무슨 사리에 어긋난 점이 있다고 끝내 내 말을 이행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이것이 통탄스럽다. 지난해 군병을 들여보낼 때 경들은 마치 일거에 평정할 것처럼 여겼는데, 병가(兵家)의 일은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옛사람들이 감히 가벼이 사용하지 아니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명나라에서 만약 군병을 진열하여 무력을 과시하고 중국의 국경을 굳게 지킨다면 마치 호랑이나 표범이 산 속에 있는 형세와 같아 적이 비록 날뛴다고 하더라도 감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생각하지 않고 가벼이 깊이 들어갔으니,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내가 이 점을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우려하고 답답해하다 보니 마음의 병이 더욱 심해져 마치 미친 병을 앓는 형상과 같았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가 모르겠는가. 이제 우려하던 것과 같이 되었으니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적의 용병(用兵)하는 지혜와 계략을 실로 당해내기 어려우니, 앞으로의 화환(禍患)을 예측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위한 계책으로는 군신 상하가 마땅히 잡다한 일은 버리고 오로지 부강에만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군병을 양성하고 장수를 뽑고 인재를 등용하며, 백성의 병들고 막힌 곳을 풀어주어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며 둔전(屯田)을 크게 개척하며 무기를 만들고 익히며 성지(城池)와 척후(斥候) 등을 모두 정비해야만 믿을 곳이 있어서 위급할 때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 태만하거나 소홀히 한다면 큰 화가 즉시 닥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시었다.

왕은 명과 후금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모두 유지하는 외교를 행하려 하셨는데, 측근이자 대북파의 영수인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이 왕과 뜻을 달리하니, 그를 대신하여 반대당의 박승종(朴承宗:1562-1623)을 영의정으로 삼으셨다. 왕은 원만한 외교를 위해 문장과 외교를 겸비한 인재들을 중용하고자 하셨으므로 영의정 박승종의 권유에 따라 계축옥사 등으로 유배 중인 이들을 사면한 후 중용하려 하셨다. 이를 두고 대북파에서 반발하였는데, 과거에 역모로 사사된 김제남의 사람들을 등용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왕이 전교하여 이르시기를, "김제남이 너희들의 덕이 된 지 오래되었다. 무릇 다른 사람들을 모함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 반드시 제남을 함정으로 삼아왔다. 너희들의 말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고, 듣기에도 피로하다. 이제 이러한 말을 그만두도록 하라." 하시었다.

개국231년(임술:1622)에 사면된 자들에게 관작(官爵)을 내리시고 중용하셨다. 이들 중에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제수된 이귀(李貴:1557-1633)가 있었는데, 경신년부터 은밀히 반정(反正)을 도모하던 자였다. 이귀가 평산으로 부임하기 전에 왕이 이르시기를, "평산에서 개성(開城)을 이르는 길에 범이 자주 출몰하여 인명의 피해가 그치니 않고 있으니 범의 퇴치에 만전을 기하라." 하시었다. 이귀가 범을 자주 포획하여 왕께 받치니 왕이 그를 의심치 않고 신임하셨다. 하루는 이귀가 장계하여 청하길, "범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 경기도와 항해도의 접경(接境)입니다. 사냥을 하다가 범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 퇴치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군사를 동원해도 중도에 그만두기 일쑤이니, 청컨대 범 사냥 시에는 범을 좇아가는 것이 경계에 국한되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왕이 이를 윤허하셨다. 이귀가 반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1580-1637)와 합세해야 했는데, 중간의 개성을 통과하는 것이 난관이었으므로 범 사냥을 이용하여 경계를 넘으려 한 것이다.

12월에 조정에서 '이귀와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이 반역을 꾀하니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는 공론이 일어났다. 왕은 이귀에게 사주된 궁인(宮人) 김씨(金氏)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혜안(慧眼)이 흐려지시어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고 넘기셨다. 당시 왕은 궁인 김씨를 매우 총애하시어 그의 부탁을 들어주셨다. 궁궐 수비를 총괄하는 훈련대장(訓練大將)이 이전 6년 간 11회나 체직(遞職)된 것도 대개 그로 인한 것이었다. 조정의 논죄 공론이 이어지자 이듬해 계해년 정월 초4일에 이귀가 상소하여 억울함을 아뢰면서 명(命)을 담보로 고변자와 대질신문[頭面]을 청하고 궁인 김씨가 또 간계(奸計)하니, 왕이 이를 무마하여 넘기셨다. 3월 초8일까지도 대북파에 속한 대간(臺諫)들은 연일 간(諫)하였음에도 왕은 이를 그대로 넘기셨다. 11일에 영의정 박승종 등이 입시하여 사안이 심각함을 아뢰니 비로소 왕이 금부(禁府)의 당상(堂上)들을 들어오라 명하셨다. 허나 12일 새벽 인시(寅時) 경에 반군(反軍)이 궁에 진입하고, 훈련대장 이홍립(李興立)이 투항하여 반군을 맞이하니, 이로써 반정이 이루어졌다.

계해년 3월 14일에는 인목대비[昭聖貞懿王大妃]께서 교지를 내리시어, "왕을 폐하여 광해군(光海君)으로 삼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능양군(綾陽君)을 책명(冊命)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하시었다. 3월 23일에는 왕 내외와 세자 내외가 강화(江華)에 각각 안치(安置)된 후, 중사(中使)와 별장(別將)들이 감호(監護)하였다. 왕은 일찍이 이를 예견하신 듯하셨는데, 무오년 10월에 홀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내게 무슨 죄가 있기에 어쩌면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을 벗어버리듯 인간 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저으며 멀리 떠나 바닷가에서나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노라." 하고 탄식하셨다. 안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자 내외의 죽음을 맞이하시고, 10월에는 왕비의 죽음을 맞이하셨다. 이때의 비통함은 형언(形言)할 수 있겠는가.

개국233년(계해:1624) 정월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왕을 다시 복위하여 추대할까 의심하여 충청도 태안(泰安)으로 옮겼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로 옮겨지셨다.

개국245년(병자:1636)에 호란(胡亂)이 일어나니, 다시 교동(郊洞)으로 옮겨지셨다. 이때 신경진(申景禛) 등이 경기수사(京畿水使)에게 "선처하시오."라고 하면서 왕을 해(害)하라는 암시를 하였으나, 수사는 이 말에 따르지 않고 왕을 보호하였다. 이듬해인 정축년에 제주도(濟州島)로 옮겨 안치되셨다. 왕이 제주(濟州)에 계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바람 불어 빗발 날릴 제 성 앞을 지나니, 장독 기운 백 척 누각에 자욱하게 이는구나, 창해의 성난 파도 저녁에 들이치고, 푸른 산의 슬픈 빛은 가을 기운 띠고 있네, 가고픈 마음에 봄의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경성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낀 강 위로 외로운 배에 누웠네." 하시었다.

개국250년(신사:1641) 7월 초1일에 유배지에서 승하하셨다. 왕은 승하 하시면서 "내가 죽으면 어머님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 하시었다. 사흘 동안 철조(輟朝)하고 왕의 유지(遺志)대로 경기도 양주목(楊州牧)에 있는 공빈 김씨 묘(墓) 옆에 왕의 능(陵)을 모셨다. 왕의 천수(天壽) 67세이셨다.

[주(註)] 왕께서 폐위(廢位)되신 지 377년만인 개국609년(경진:2000) 8월에 본조(本朝)에서 처음으로 복위(復位)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조야의 공론을 거듭 수렴하고 마땅한 의절(儀節)을 마련하는데 두 해가 흘려 개국611년(임오:2002) 6월 초1일에 복위가 결정되었다. 7월에 묘당(廟堂)과 예조에서 어전(御前)에 복위 절차를 아뢰니 동월 12일에 전교하시기를, "왕으로 추숭(追崇)하고 종묘에 신위(神位)를 모신다. 기존 대왕들의 전례에 준하여 행장을 마련할 것이다." 하시었다. 이에 예조에서 이튿날 행장 찬술을 시작하여 동월 22일에 완결한 후, 의정부의 검토를 거쳐 전하의 재가를 받았다. 11월 15일에 고유(告廟)하는 것으로 위호(位號)가 추복(追復)되셨으며, 묘호(廟號)는 혜종(惠宗), 능호(陵號)는 열릉(烈陵)이다. 행장은 봉정대부 행예조정랑 조조(趙造)가 짓고 선무랑 행의정부사록 강자아(姜子牙)가 고쳐 썼다.



혜장왕후 행장
惠章王后 行狀

왕비(王妃)의 성(姓)은 유(柳)로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유자신(柳自新)의 차녀(次女)이며, 모(母)는 영인(令人) 정씨(鄭氏)이다. 조부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잠(潛)이고 외가는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의 손(孫)으로 명문가의 규수이시다. 왕비는 성정(性情)은 온화하시고 주관이 분명하셨으며, 품행이 반듯하고 강하셨다. 평소 후덕(厚德)하시어 만백성이 그 덕화(德化)를 입은 지 오래이며, 왕세자(王世子) 지(祬)와 공주(公主) 이씨(李氏)를 강건(强健)하게 낳으셨으니, 진실로 하늘이 내리신 홍복(洪福)이셨다.

개국193년(갑신:1854)에 가례(嘉禮)를 치르신 후, 군부인(郡夫人)이 되셨으며 궁(宮)의 법도에 따라 왕(王)의 사가(私家)에 거처하셨다. 임진년 4월에는 일본(日本)이 침략하여 불시에 난(亂)을 만나니, 왕실의 파천(播遷)을 따라 이듬해 계사년 7월까지는 평안도(平安道)에 거처하셨다. 파천 전인 4월 29일에 왕이 세자로 책봉(冊封)되셨으므로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셨다.

개국217년(무신:1608) 2월 초1일에 왕의 부왕(父王)이신 선조소경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 승하(昇遐)하시어 왕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니 왕비가 되셨다. 이듬해 기유년 2월에 선왕의 친제(親祭)가 시행되어 자전(慈殿)을 배행(陪行)하시고 영모전(永慕殿)에 행차하시어 제(祭)를 올리셨다. 경술년 4월에 왕비의 책례(冊禮)가 마련되었으므로, 왕이 면복(冕服)을 갖추시고 서청(西廳)으로 거둥하시어 좌의정(左議政)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보내시어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을 전하시니 왕비는 내전(內殿)에서 예(禮)를 갖추어 책봉을 받으셨다. 왕이 교서(敎書)에서 이르시기를, "왕은 말하노라. 하늘과 땅이 지위를 정하니, 덮어주고 실어주는 공이 이루어지고, 해와 달이 함께 밝으니 곳곳을 밝게 비추게 되었다. 왕화(王化)의 올바른 시작은 인도(人道)에서부터 비롯된다. 옛 법을 상고해 보면 반드시 배필을 두는 법이 엄중하였으니, 이는 나라 다스림을 삼가고, 종묘의 계승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의식을 갖추었으니, 이 은혜를 미루어 널리 고하는 바이다. 왕비 유씨(柳氏)는 유순하고 정숙하니, 충효의 명문에서 동궁으로 시집을 왔다. 훌륭한 슬기가 일찍 드러났고, 서쪽에서 어려움 겪을 적에 큰 업적으로 많은 도움 주었다. 몸에 덕을 닦아 백성이 그 덕화(德化)를 입은 지 오래고, 원사(元嗣)를 튼튼히 낳으니 진실로 하늘이 내린 상서이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즉시 중전 지위 맡겼으니 찬란한 명복(命服)은 하늘이 내린 광영(光榮)이다. 정성 다하여 함께 삼년상 마치고, 교서 반포하는 날 고명(鑒命)은 내렸지만, 성대한 예는 선왕(先王)의 부묘일(祔廟日)을 기다렸다. 이에 예절을 갖추어 옥책(玉冊)과 보장(寶章)을 주니, 이 경사를 백료(百僚)에게 미치게 한다. 이에 나라에 유시하니, 관직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資級)을 더하고, 자급이 한계에 이른 자는 자손에게 대신 더하라. 아, 길이 자손을 위하여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움 크게 열고, 백성에게 복을 내려 함께 태평성대(太平聖代)의 복을 누리게 할 것이다." 하시었다.

개국220년(신해:1611) 10월에는 세자의 친영가례(親迎嘉禮)가 시행되어 세자빈 박씨(朴氏)를 맞이하시니, 왕비의 마음이 경사스러움으로 가득하셨다. 참으로 종사의 복록(福祿)이었다. 세자빈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박자흥(朴自興)의 따님으로, 명문에서 자라서 정숙하고 단아(端雅)하며 후덕하였다. 이듬해 임자년 2월에 사가에서 부친의 부음(訃音)을 전해 오니, 아비를 죽음을 지극히 애도(哀悼)하셨고, 왕세자와 대내(大內)에서 의절(儀節)대로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셨다. 왕은 7월에 왕비의 모친 정씨을 위로하시고자 하셨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여 이르시기를, "국모의 편친(偏親)으로 나이 70이 넘어 햇볕이 서산에 육박하듯이 세상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과부로 가난하게 지내되 관름(官凜)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너무 야박하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사계절 첫 달마다 미두(米豆)를 보내게 하되, 석수는 1품 녹봉에 의하여 마련하여 시행할 것을 호조에 말하라." 하시었다.

개국227년(무오:1618) 11월에는 왕비의 옥후(玉候)가 시작되셨다. 이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던 왕이 26일에 승정원에 전교하여 이르시기를, "중전이 평안하지 못하니 '6, 7일 동안은 삼사의 계사(啓辭)와 차자(箚子)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라' 삼사에 전하고 우선은 받아들이지 말라." 하시었다. 이어 27일에 전교하여 이르시기를, "옛 사람들은 병이 위독하면 죄인을 사면하여 은혜를 베푸는 일이 있었다. 중전의 병이 위독하니 사형 이하의 죄인들을 대대적으로 사면하는 일을 구례(舊例)대로 거행하라." 하시었다. 또 익월 12일에 전교하여 이르시기를, "중전의 증상이 아직까지 차도가 없으니, 결코 이러한 때에 직접 제사를 지낼 수는 없다. 고묘제(告廟祭)를 정월 20일 무렵으로 다시 택일하여 연기해서 지내는 일을 해사에 말하여 속히 여러 도(道)에 하유(下諭)하게 하라." 하시었다. 이에, 왕비는 우악하신 성은(聖恩)에 송구함을 금치 못하시었다.

이듬해 기미년에 왕이 명(明)과 후금(後金)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를 펼치시니, 왕비가 옥후 중에도 왕께 서한(書翰)을 보내시어 말씀하시길, "후금과의 관계를 버리시고 명을 도우소서" 하셨다. 이에 왕이 참으로 난감해 하셨다. 12월에는 왕비의 옥후가 회복되시어 왕세자와 백관이 진하(進賀)하였다. 왕이 기뻐하시며 반사(頒賜)할 것을 전교하니, 백관이 덧붙여 청하기를, "잡범(雜犯) 중에 사죄(死罪) 이하를 아울러 석방하소서." 하였으므로 이를 윤허하셨다.

개국229년(경신:1620) 4월에는 내외명부(內外命婦)를 거느리시고 몸소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셨다. 이해 11월에 모친 정씨가 졸[歿]하여 상심(傷心)이 크셨다.

개국232년(계해:1623) 3월 12일 새벽 인시(寅時) 경에 반군(反軍)이 궁에 진입하고, 훈련대장 이홍립이 투항하여 반군을 맞이하니 반정이 성공하였다. 이때 왕비께서 반정을 일으킨 자들의 면전에서 질책하시길, "오늘의 반정이 대의(大義)를 위한 것이오, 아니면 일신(一身)의 영달 위한 것이오." 하셨다. 이에 반정한 자들이 매우 곤혹스러워 하였다.

14일에 인목대비[昭聖貞懿王大妃]께서 교지를 내려 왕이 폐위된 후 군(君)으로 강봉(降封)되시니, 왕비도 폐위되시어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으로 격하되셨다. 23일에는 왕과 강화(江華)로 안치되셨는데, 얼마 후에 세자 내외(內外)가 자진(自盡)하자 크게 상심하시어 식음을 전폐하시더니 10월에 역시 자진하셨다. 이에 왕이 애통해 하시며 말하시길, "슬픔을 스스로 참지 못하겠다." 하시고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시었다.

왕이 개국250년(신사:1641) 7월 초1일에 유배지 제주(濟州)에서 승하하시자 왕의 유지(遺志)대로 모비(母妃)의 묘(墓)가 있는 경기도 양주목(陽州牧)에 능(陵)을 모셨다. 이에 왕비의 능도 강화에서 이장하여 옆에 모셨다.

[주(註)] 왕비께서 폐비(廢妃)되신 지 377년만인 개국609년(경진:2000) 8월에 본조(本朝)에서 처음으로 복위(復位)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조야의 공론을 거듭 수렴하고 마땅한 의절(儀節)을 마련하는데 두 해가 흘려 개국611년(임오:2002) 6월 초1일에 복위가 결정되었다. 7월에 묘당(廟堂)과 예조에서 어전(御前)에 복위 절차를 아뢰니 동월 12일에 전교하시기를, "왕으로 추숭(追崇)하고 종묘에 신위를 모신다. 기존 대왕들의 전례에 준하여 행장을 마련할 것이다." 하시었다. 이에 예조에서 이튿날 행장 찬술을 시작하여 동월 22일에 완결한 후, 의정부의 검토를 거쳐 전하의 재가를 받았다. 행장은 봉정대부 행예조정랑 조조(趙造)가 지었다.



혜종대왕 시책문
惠宗大王 諡冊文

사왕(嗣王) 신(臣), 삼가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말씀을 올리나이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지 같으신 크신 덕을 비록 형용하여 다 말할 수 없으나,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리(情理)에 오직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는 데 간절하여, 조심하며 상헌(常憲)을 따라 공경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삼가 받들어 올리나이다. 신이 엎드려 공손히 생각하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는 국난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피폐함을 늘 슬퍼하시고 오로지 이 나라 신민(臣民)들의 안위(安慰)를 위하시어 성책(聖策)을 내리심에 백성을 우선으로 하시었으니, 애민(愛民)하시는 정성이 마치 아비가 자식을 아낌과 같으심이라 이는 천하만민(天下萬民)의 홍복(洪福)이나이다. 밝은 도리에 통하심이 마치 바다처럼 깊으셨고, 마음이 온화하시어 상하(上下)를 존중하시었으며, 조석으로 밝은 정치를 하심에 모든 정력(精力)을 다 쓰셨고 정치하는 강목(綱目)을 천하에 널리 펴셨나이다. 전란으로 무너진 열조(列朝)의 밝은 문명(文明)을 다시금 일으키시어 밝고 굳건하게 세우시었으며 적을 사랑하시어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다시금 조정의 밝은 문명을 전하시어 깊고 넓으신 성심(聖心)으로 원수를 교화(敎化)하시었나이다. 농사를 권면(勸勉)하시고 형벌을 측은히 여기시어 전란(戰亂)으로 인해 제 길을 잃은 백성을 구제하시었으니 백성들은 모두 옹희(雍熙)한 다스림에 편안하였나이다. 쇠약한 명국(明國)을 대하심에 의리(義理)를 다하시어 이웃나라와 사귀는 도리를 다하시었고, 강성해지는 호이(胡夷)를 대하심에 오직 두터우신 성은(聖恩)으로 대하시니 호이(胡夷)들이 이에 감복(感服)하였나이다. 나라의 국방에 힘쓰시어 군사를 다스리고 병기도 장만하시며, 변방을 굳게 하여 성을 쌓으니, 백성들이 베개를 높이 하여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고, 변방에는 변경의 봉화(驚烽)가 끊어졌으니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했던 국운이 흥함이라 조야(朝野)에서 크고 넓으신 성덕(聖德)을 칭송하는 백성의 소리가 다투어 일어나 천하를 크게 울려 전란으로 당한 어려움을 태평의 융성으로 화(和)하시었나이다. 삼가 엎드려 공손히 생각하건대 천재(千載)에 만나기 어려운 다행이라 신민(臣民)들은 하늘과 같이 영원히 계실 줄 알았더니, 어찌 하늘이 무너질 줄 않았나이까. 신민들은 그 부여(付與)하신 당한 어려움을 함께 헤치려 하였으니, 그 슬픔이 어찌 작다 하겠나이까. 마치 어둠을 밝히시는 밝은 일월(日月)과 같으셨으니 한순간에 빛을 잃은 천하와 이 나라 신민들은 과연 어찌 그 어둠을 헤치오리까.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 부여잡고 슬픔으로 통곡하며 발을 굴러 그 슬픔을 통곡하니 그 호곡(號哭)이 천하를 덮고도 남음이라, 그 슬퍼함을 그 무엇으로 이길 수 있겠나이까. 그 영명(英明)한 빛을 잃은 지 삼백 년이 지나도 천하가 그 크신 성덕을 잊지 못하고 흠숭(欽崇)하게 되어 조금이나마 크고 은혜로우신 성덕을 사모(思慕)하고자 공경하며 시호 올리는 의식을 시행하여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諡)를 '경렬성평민무헌문(景烈成平愍武獻文)'이라 올리고 묘호를 '혜종(惠宗)'이라 올립니다. 우러러 공경하며 생각하건대 아름다우신 성령(聖靈)께서는 깊이 살피셔서 조그만 정성을 깊이 헤아려 주시고 굽어 명흠(明歆)을 드리우시어 대대로 영원(永遠)토록 살피시어 본조(本朝)에 순전한 만복(萬福)을 내려 주시와 무궁한 보조(寶祚)를 도우시어 종묘와 사직이 만년에 이르게 하시고, 그 후손들이 높고 깊으신 성덕을 길이 칭송할 수 있게 하소서. 삼가 책문을 올리나이다.

[주(註)] 왕께서 폐위(廢位)되신 지 379년만인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에 복위되셨다. 복위 후인 12월 초2일에 신주(神主)를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모실 때에 즈음하여 장묘(章廟) 전하께서 시책문(謚冊文)을 올려 시호(諡號)를 '경렬성평민무헌문(景烈成平愍武獻文)', 묘호(廟號)를 '혜종(惠宗)'이라 하였는데, 시호법(諡號法)에 생각이 깊고 뜻이 큰 것[耆意大圖]을 '경(景)', 강직하게 일을 결단하는 것[强以能斷]을 '렬(烈)',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정책을 세운 것[安民立政]을 '성(成)', 정치를 행함에 강직하고 기강이 있음[有剛治記]을 '평(平)', 나라에 있으면서 환란을 맞이하신 것[在國遭艱]을 '민(愍)', 화란을 장 평정하신 것[克定禍亂]을 '무(武)', 지혜롭고 질박하며 이치가 있는 것[智質有理]을 '헌(獻)',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 읽기를 부지런한 것[勤學好文]을 '문(文)'이라 하였으므로 시호를 그리 정한 것이다. 묘호를 '혜(惠)'로 올린 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좋아하시어 그들과 함께 하셨기[愛民好與] 때문이다. 능호는 열릉(烈陵)인데, 백성을 평안하게 한 공[安民有功]을 '렬(烈)'이라 하였으므로 그리 정하였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나라와 백성을 위하시어 오로지 성책(聖策)을 내리심에 그 우선을 나라와 백성으로 하셨으니, 대동법을 시행하시어 피폐해진 나라 재정과 백성을 살찌우시고 의서(醫書), 병서(兵書) 등 수많은 서책을 간행하시어 재야에 권학(勸學)을 장려하셨으며, 혼란한 중원정세를 간파하시어 성채를 보수하고 총포를 제작하시는 등 국방에도 힘을 기울이시고 실리적인 외교를 취하시어 나라의 근간인 백성을 전화(戰禍)에서 구제하시는 등의 은혜를 베푸신 까닭이다. 시책문은 승훈랑 행사헌부감찰지제교 강자아(姜子牙)가 지었다.



혜장왕후 시책문
惠章王后 諡冊文

사왕(嗣王) 신(臣), 삼가 재배하고 머리 조아려 말씀을 올리나이다. 명가(名家)에서 태어나시어 한결같이 단아하고 성실하고 아름다우며, 그윽한 넉넉함과 곧고 고요함을 갖춘 명문의 빼어난 규수로, 일찍이 언월(偃月)의 자태를 이루어 이미 견천(俔天)의 덕을 드러내시니, 열조(列朝)께서 나라에 큰 복이 내리심이라, 저저(儲邸)에 들어오시어 매양 상전(上殿)의 안색을 살펴서 받들되 기쁘고 즐겁게 하시었고, 항상 아랫사람을 거느림에 정숙하고 화목하시었나이다. 그 후덕(厚德)하심이 선대왕과 짝하시어 여망(與望)을 밝히셨으며, 국모(國母)로서 상서로움이 궁궐(宮闕)의 안 길에 서리어 모이게 하시었고 중궁(中宮)의 위에 오르시어 왕화(王化)를 천하에 기틀을 잡게 하시었고 국모의 의표(儀表)를 온 천하에 비추시었으니, 그 경사스러움이 우리 종묘와 사직으로 돌아오게 되었나이다. 중궁의 자리에 오르신 후에 늘 성신(聖身)에 덕(德)을 닦으시니, 이 나라 강토가 덕화(德化)를 입어 그 후덕하심을 천하가 다투어 칭송하였으나, 그 성덕이 일백 년도 지나지 않아 사라짐을 어찌 알았겠나이까. 삼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반짝이는 이슬 꽃이 널리 퍼짐이여, 달빛도 수심에 젖었나이다. 후덕(厚德)하신 용모와 착의(着衣)를 펼쳐 그려 뵙는 것이 여전히 계신 듯하고, 버려두신 선패(仙佩)를 뵙는 것이, 마치 어디서 쉬고 계신 것만 같나이다. 이에 사왕(嗣王)인 신이 건곤(乾坤)처럼 크고 일월(日月)처럼 밝으신 그 후덕하심을 사모하고 그리며, 존시(尊諡)를 '혜장(惠章)'이라 올립니다. 부디, 이 보책(寶冊)을 받드시고 오직 그 후덕하심을 천하를 위해 다시 보이시고 종묘와 사직을 굽어 살피시어 그 후손(後孫)들이 천만년이 지나도 그 후덕하심을 높이 칭송할 수 있게 하소서. 삼가 책문을 올리나이다.

[주(註)] 왕비께서 폐비(廢妃)되신 지 379년만인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에 복위되셨다. 복위 후인 12월 초2일에 신주(神主)를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모실 때에 즈음하여 장묘(章廟) 전하께서 시책문(謚冊文)을 올려 시호(諡號)를 '혜장(惠章)'이라 하였는데, 시호법(諡號法)에 부드럽고 질박하며 자혜롭고 어진 것[柔質慈仁]을 '혜(惠)', 따뜻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모양을 지닌 것[溫克令儀]을 '장(章)'이라 하였으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시책문은 승훈랑 행사헌부감찰지제교 강자아(姜子牙)가 지었다.



혜종대왕 옥책문
惠宗大王 玉冊文

사왕(嗣王) 신(臣) 모(某)는 삼가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상언(上言)합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지난 임오년에 조야(朝野)의 뜻으로 대왕의 복위를 종묘에 고할 때 미처 다하지 못한 예(禮)가 있어 경건한 마음으로 책문(冊文)을 밝혀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지혜가 남다르고 비범하신 분으로, 임진년(壬辰年)의 국난(國難) 속에 백관(百官)의 추대(推戴)를 받아 세자(世子)로 책봉(冊封)되셨습니다. 약관(弱冠)이 채 되지 못한 보령(寶齡)에 권섭국사(權攝國事)로 나아가시어 북방(北方)의 민심을 수습하셨으며, 분조(分朝)의 지휘를 맡아 왜적에 대항하여 도성(都城)을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우셨으니, 세상이 대왕을 능히 일국(一國)을 맡을 군왕(君王)의 재목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정유년에 다시 왜적이 침입하자, 대왕께서는 몸소 전라, 경상도로 내려가시어 군사들을 독려하고 백성의 안위를 돌보셨으니, 국본(國本)의 빛나는 업적이 조종조(祖宗朝)의 으뜸이셨습니다. 보위(寶位)에 오르시고 나서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시어 방납(防納)의 폐단을 막고자 하셨고, 양전(量田)을 시행하시어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수습하고자 하셨습니다. 또 왜란(倭亂)으로 잿더미가 된 도성(都城)을 재건하는데 힘쓰시어 창덕궁(昌德宮)을 중건하셨으니, 흔들렸던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데 이루신 공이 열성조의 성군(聖君)에 비할 수 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북방의 정세를 유심히 살피시어 명(明)과 후금(後金)의 국운(國運)을 통해 나라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셨으니, 외세(外勢)를 읽는 통찰력은 어느 군왕의 안목(眼目)보다 뛰어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시대의 불운을 맞아 보위를 잃고 군(君)으로 강봉되시는 참극(慘劇)을 맞이하셨으나, 지난날 경성정효대왕(景聖定孝大王)께서 대왕의 복위를 선포하시어 행장(行狀)을 찬하고 시호(諡號)와 묘호(廟號), 능호(陵號)를 올리니, 비로소 만백성이 정성을 다하여 불세출(不世出)의 공적을 받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조야의 공론을 모아 생전에 받으신 마흔여덟 자 존호(尊號) 중에서 삼가 그 거룩한 업적을 받들어 존시(尊諡)를 가상(加上)하기를 '체천흥운준덕홍공융봉현보무정중희(體天興運俊德弘功隆奉顯保懋定重熙)'라 올립니다. 바라건대 신령하신 성덕(聖德)으로 어리석은 후손들을 굽어 살피시고, 상서로운 빛을 내려 주시옵소서. 삼가 책문을 올리나이다.

[주(註)] 왕께서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에 추복(追復)되셨으나, 복위(復位) 당시에 존호를 의정(議定)하지 못하였다. 이에 개국617년(무자:2008) 9월에 빈청 논의를 거쳐 10월 초4일 윤대(輪對)에서 존호를 확정하였다. 왕께서 재위에 계실 때에 받으셨던 존호 가운데 종묘사직의 운명에 관계되어 올리진 16자를 취하였는데, 개국221년(임자:1612) 10월 19일에 올려진 '체천흥운준덕홍공(體天興運俊德弘功)'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이고, 개국227년(무오:1618) 9월 29일에 올려진 '융봉현보무정중희(隆奉顯保懋定重熙)'은 임진왜란 때 묘사(廟祠)를 받들어 모신 공로에 의한 것이다. 옥책문은 개국617년(무자:2008) 10월에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시호도감제조 서양갑(徐羊甲)이 지었다.



혜장왕후 옥책문
惠章王后 玉冊文

사왕(嗣王) 신(臣) 모(某)는 삼가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그윽이 생각하건대 왕후(王后)께서는 명가(名家)에서 태어나시어 성정(性情)은 온화하시고 주관이 분명하셨으며, 품행이 반듯하고 강하셨으니 이는 조종(朝宗)의 넓은 덕에 따른 홍복(弘福)일 것입니다. 왕후께서는 국난(國難)을 맞아 갑작스럽게 세자빈(世子嬪)이 되셨으나, 결코 중심을 잃지 않으셨고, 혜종대왕(惠宗大王)을 정성으로 보필하여 나라의 어지러움을 수습하는 데 큰 힘을 주셨습니다. 또한, 대왕께서 어려움을 겪으실 때마다 곁을 지키며 참된 조언(助言)을 아끼지 않으셨고, 대왕께서 대업(大業)을 이루시는 데 평생의 조력자(助力者)가 되셨습니다. 왕후께서는 항상 정숙하시고 화목하시며, 저저(儲邸)에 들어오시고도 매양 위와 아래를 함께 살피시며 덕을 펼치시니 상서로운 기운이 궐 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중궁(中宮)에 오르신 후에도 늘 겸양(謙讓)하시고, 임금과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셨으니, 국모(國母)의 자애로움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망극하옵게도 혜종대왕께서 시운(時運)을 타지 못하고 보위를 잃으셨고 왕후께서도 군부인(郡夫人)으로 강봉되시는 변을 당하셨으나, 지난날 장종경성정효대왕(章宗景聖定孝大王)께서 천의(天意)를 받들어 종묘에 혜종대왕의 복위을 고하시니, 마침내 왕후의 덕성(德性)이 다시 빛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왕(嗣王)인 신이 다시 옛 일을 돌아보건대, 왕후의 고귀하신 덕을 받들 존호(尊號)가 없으니 어찌 후손의 도리를 다 하였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조야의 뜻으로 존시(尊諡)를 받들어, 삼가 '소온사헌(昭溫思獻)' 넉 자를 올리니, 다시금 그 후덕하신 뜻을 칭송하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그 후덕하심을 천하를 위하여 다시 보이시어 종묘와 사직을 굽어 살펴 밝은 기운을 내리시옵소서. 삼가 책문을 올립니다.

[주(註)] 왕후께서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에 추복(追復)되셨으나, 복위(復位) 당시에 휘호(徽號)를 의정(議定)하지 못하였다. 이에 개국617년(무자:2008) 9월에 시호도감(諡號都監)에서 휘호를 논의하여 10월 초4일 윤대(輪對)에서 '소온사헌(昭溫思獻)'으로 확정하였다. 시호법(諡號法)에 차림새와 태도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容儀恭美]을 '소(昭)', 덕성으로 온화하고 너그러운 것[德性寬和]을 '온(溫)', 도덕이 순수하고 한결같은 것[道德純一]을 '사(思)',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슬기로운 것[聰明睿哲]을 '헌(獻)'이라 하였으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옥책문은 개국617년(무자:2008) 10월에 중직대부 행사헌부장령 겸시호도감낭청 천어(天漁)가 지었다.



혜종복위고유종묘영녕전제문
惠宗復位告由宗廟永寧殿祭文

무신(戊申)에 선대왕(先大王)의 성업(聖業)을 이으시고 계해(癸亥)에 이르러 창졸간(倉卒間)에 황망(慌忙)한 일을 겪으시어 그 위호(位號)가 일시 폐(廢)하게 되는 망극(罔極)한 일을 당하신 이래, 그 세월이 누백년(累百年)동안 이어져 당대(當代)까지 위호(位號)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연대가 무천(貿遷)하여 감에 원울(怨鬱)함이 한(恨)이 없었습니다. 이제 곧 육례(縟禮)를 거행하고, 보책(寶冊)을 추상(追上)하여 혜종(惠宗), 혜장(惠章)이라 하니, 묘호와 시호가 오직 새로워져, 진실로 정리(正理)와 예문(禮文)에 맞아 거의 신인(神人)을 위로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이유를 고하고 삼가 명연(明禋)을 드립니다.

[주(註)] 왕과 왕후의 복위를 종묘(宗廟) 정전(正殿)와 영녕전(永寧殿)에 고유(告由)한 제문(祭文)이다.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에 고묘(告廟)하고 동년 12월 초1일에 승부(陞祔)하였다. 제문은 단종대왕(端宗大王)의 고유제문에 기초하여, 선교랑 행홍문관박사 이동진(李東珍)이 지었다.



열릉표문
烈陵表文

비면(碑面) 전서(篆書).
大朝鮮國惠宗大王烈陵 대조선국혜종대왕열릉
惠章王后祔左 혜장왕후부좌

후면(後面) 음기(陰記).
혜종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은 개국184년 을해(乙亥)에 탄생(誕生)하셨고, 개국201년 임진(壬辰) 4월 29일에 왕세자(王世子)에 책봉(冊封)되셨으며, 개국217년 무신(戊申) 2월 초2일에 즉위(卽位)하였다. 개국232년 계해(癸亥) 3월 14일에 폐위되어 군(君)으로 강봉(降封)되신 후, 개국250년 신사(辛巳) 7월 초1일에 유배지 제주(濟州)에서 승하(昇遐)하셨다. 동월에 경기도 양주목(陽州牧)에 대군(大君)의 예장(禮葬)에 준하여 장사(葬事)하였다. 재위(在位)는 15년이고, 수(壽)는 67세이시다. 비(妃)는 혜장왕후(惠章王后) 유씨(柳氏)로서, 개국217년 무신 2월 초2일에 왕후(王后)로 책봉되셨다. 개국232년 술해 3월 14일에 폐위되신 후, 대왕의 이전 유배지인 강화(江華)에서 동년 10월에 승하하셨다. 개국611년 임오(壬午) 6월 초1일에, 지난 2년간의 조야(朝野) 공론(公論)을 수렴하여 광해군(光海君)에 대한 복위 절차를 마련하라는 전교가 있었고, 동월 12일에 묘(墓)를 능(陵)으로 격상하는 하교가 예조(禮曹)에 내려졌다. 이에 경기감영(京畿監營)에서 공역(工役)을 주관하여 6월 20일에 능(陵)으로 승격하였다. 동년 10월 25일에 능호를 열릉(烈陵)으로 정하고, 11월 15일에 대왕과 왕후로 복위하였다.

개국611년 12월 립(立)

[주(註)] 왕과 왕후를 모신 열릉의 비문(碑文)이다. 개국611년(임오:2002) 6월에 묘(墓)를 능(陵)으로 격상한 후 조선대부 행예조정랑 겸녹훈도감부사 조조(趙造)가 지은 비문을 비(碑)에 새겨 왕릉 앞에 세웠으며, 복위 후인 동년 12월 초4일에 조봉대부 행예조정랑 정재안(鄭宰安)이 첨각(添刻) 후 다시 새웠다. 본 비문은 개찬본(改撰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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