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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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
작성일 개국620(2011)년 3월 14일 (월) 23:39  [자시(子時):삼경(三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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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주서] <일기> 승정원일기 : 개국614(2005)년 3월
상(上) 2년, 개국614(2005)년 3월 1일 갑신(甲申)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실록청총재관 서양갑이 실록청사관 충원에 대하여 계목을 올려아뢰기를,
"전하, 현 실록청의 관원은 신을 포함 3명인데, 실록을 찬수하기에 그다지 효율적인 인원이 되지 못하옵니다. 하여 한 명의 관리를 더 충원하고자 하니 윤허를 바라옵니다. 병조 좌랑 손오공은 개국 611년 5월 5일에 입조하였으며, 사사로이는 장익공의 생질이라, 사관으로서 충분한 경력을 갖춘 이로, 지난번 실록청 복설후 사관 모집기간에 피혐중인 관계로 응하지 못하였으나, 신이 그를 적임자라 여겨 의중을 살핀 결과 실록청 사관으로서 소임을 맡을 의향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를 실록청 기사관으로 등용하고자 하옵니다. 전하께서 살펴 윤허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계목을 윤허한다."
하였다.


3월 2일 을유(乙酉)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3일 병술(丙戌)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4일 정해(丁亥)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홍문관부응교지제교 박상진이 성균관 복설에 관하여 계본을 올려 아뢰기를,
"일찍이 강희맹은 "한 시대가 부흥하는 것은 반드시 그 시대에 인물이 있기 때문이라" 진언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시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니 어찌 군왕으로서 이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더욱이 근자에 권성유가 어전에 상소하여 성균관을 복설하라 주청을 올림 또한 본조가 개창한 이래 인재를 육성하여 기르고자 하는 근간을 만들고 모범을 보일 것을 청한 것이니 실로 그 중대함을 살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다만, 신이 우려하는 바는 성균관 복설에 따르는 제반의 문제에 있어 훈련원 주부 박한의 지적처럼 그 문제점이 없지 않다는 점 때문이옵니다. 훈련원 주부 박한은 이르기를 "성균관의 면학 분위기를 극대화할 수 있고 유생들이 신뢰할 수 있는 여건과 교수진의 충원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섯불리 복설을 논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 또한 일면 이 점에 대해서 일부 공감하는 바가 있습니다. 박한이 예시로 지적한 유학이 적절한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의 과목을 설정하여 개설하고 이를 끌고 갈 교수진의 편성은 현재의 여건으로 볼 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전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조정 내 원로들은 이미 그 접속체력이 쇠하여 적절히 공무를 돌보기에 벅차니 감히 성균관과 같이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일을 맡기에 어려움이 많고, 참상관 이하 중에서도 이러한 업무를 감당할만한 인재가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또한 박한이 이른 말처럼 "면학을 위해 유생들이 노력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는 말 또한 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옳은 말이라 사료됩니다. 권성유가 지적한 것처럼 팔도의 만 백성들이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복설된 이후의 운영이나 이를 끌고 갈만한 교수진의 충원, 생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혼연일체 되지 않는다면 결국 파행을 거듭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생도들이 입학만 해놓고 수업 참여, 과제 제출에 소홀한 경우, 과거 교수진의 파행적 운영 등으로 비추어 볼 때 이 두 가지 문제의 해결이 없는 섯부른 복설은 오히려 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신 아뢰옵건대, 우선 후일 유품자와 관헌 중 명망있고 유능하며 성균관 출사에 열의가 있는 이를 가려 성균관에 출사할 뜻이 있는지 살피게 하고 난 후 다시 고려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조건이 충족된 후, 성균관 절목 중 입학의 요건에 생도들의 참여도에 따른 고려를 첨부한다면 그 때 천천히 복설을 추진해도 가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성상께오서 영명하게 결단하시어 만인의 요청에 부합하고 진정한 국학으로서 성균관이 거듭날 수 있는 묘책을 만들도록 하신 연후에 복설을 고려하셔도 늦지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니, 전교하길를,
"아뢴 바는 알겠다."
하였다.


3월 5일 무자(戊子)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예조참판 이동진이, 성균관(成均館) 복설(復設)에 대하여 계본을 올려 아뢰기를,
"전일(前日)에 전하께옵서 성균관의 복설과 관련하여 예조의 의견을 하문(下問)하시니 신 등은 충심을 다하여 논의한 결과를 아뢰고자 하옵니다. 예조 권지봉상시참봉 권성유가 간원을유태설소(諫願乙酉太設疎)를 올리었고, 이에 대하여 훈련원 주부 박한이 다시 성균관 복설과 관련한 상소를 아뢰옴에 시작된 이번 논의에 있어 쟁점은 대략 다음의 세가지라 보여지옵니다. 우선은 성균관의 위상(位相)과 관련한 사안이옵니다. 현재 성균관이 운영되고 있으나 조정에서 운영하고 있는 교육기관이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여타의 관립,민립서당과 다를 바가 없으니 박한이 상소에서 아뢴 바와 같이 "과거의 성균관이 유학을 가르친 것은 유학자체가 조선의 정치철학으로 사실상 성균관은 학문의 전당일 뿐만아니라 고급 관료와 정치인을 배출하는 관료.정치인 양성기관이라 할 수 있사온데." 현재의 성균관은 개인이 개설한 지방감영의 민립서당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상태이옵니다. 또한 학문의 수준이나 강의의 내용 등이 과거의 성균관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지경이니 과연 이를 성균관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옵니다. 신 등이 논의한 결과를 아뢰오면, 우선 본조(本朝)의 특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본조가 사이버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사오니 어찌 과거 조종조의 영화(榮華)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하겠사옵니까. 교육 또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자들이 후학(後學)을 위하여 서당을 개설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약간의 지식이나마 타인과 공유(共有)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개설하는 것이 본조의 교육기관의 취지이니 성균관 역시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할 것이옵니다. 과거 조종조에서와 같이 유학의 총본산으로서의 성균관을 현재에서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니 다만 조정에서 널리 교육을 장려한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을 개설하고 강좌(講座)를 여는 것이라 할 것이옵니다. 뜻이 이러하니 과거의 태학(太學)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옵고 다만 본조에서 성균관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할 때에 교육을 장려한다는 조정의 뜻을 확고히 하는 차원에서라도 성균관의 상설(常設)은 필요한 것이라 사료되옵나이다. 두 번째로 교수의 임명에 관한 것이옵니다. 과거의 성균관이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망라하였으나 본조의 성균관은 일분야에 있어서나마 전문인력이라고 내세우기조차 어려운 형편이니 과연 그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옵니다. 이 또한 앞에서 아뢴 것과 같이 본조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어찌 과거 성균관의 전례만을 고집할 수 있겠사옵니까. 교육이라 하는 것이 한 분야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후학을 가르치고 기술을 전수(傳授)하는 것이라 한다면 마땅히 성균관에서의 교육 역시도 당대의 최고는 아닐지라도 해당 분야의 전문인력의 수준은 담보할 수 있어야할 것이나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본조의 교육은 서로의 얕은 지식이나마 전수하고 정보를 공유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니 어찌 그와 같은 전문지식을 요구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는 본조의 현실을 생각지 않고 다만 과거의 전례만을 생각한 처사라 할 것이옵니다. 다만 현재 성균관 교수의 수급이 원활치 않아 본조 교육의 본산이어야할 성균관이 문을 닫아건 상태이오니 이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어야할 것이옵니다. 신이 생각컨대 성균관의 교수들을 임명함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지방 감영의 민립, 관립서당에서 교육을 통해 그 자질을 인정받은 훈장들을 적극 등용하여 성균관의 교수로서 임명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생각하옵니다. 즉 민립, 관립서당의 훈장으로서 꾸준한 강의와 일정 수준의 내용을 담보할 수 있는 훈장들을 성균관의 교수로 임명함으로서 성균관 강의의 충실성을 어느정도 확보하면서 동시에 교수인력 수급에 원활을 기하자는 것이옵니다. 만일 서당의 훈장이 무품자로서 좋은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면 이를 천거의 형식으로 등용하여 성균관에서 강의를 이어갈 수 있게 한다면 조정에 인재를 더하여 가는 좋은 방편도 될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세 번째로 논의할 점은 성균관 유생들의 참여도가 낮아 학업에 불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대한 대책이라 생각하옵니다. 실제 성균관의 학기 중에 강의에 불참하거나 과제를 제출하지 않아 원점을 취득치 못하는 유생은 다반사(茶飯事)이며, 입학만 한 이후로 강의에 참석치 않아 제명(除名)된 유생도 있는 지경이니 불성실한 모습이 한계에 다다랐다 여겨지옵니다. 하여 성실한 자에게 포상을 주고, 불성실한 자에게 징계를 주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고수하여야 한다 생각하옵니다. 현재 성균관을 졸업한 자로서 대과에 급제하게 되면 일계를 더하여 주고, 각 학기 졸업생 중에 수석, 차석 졸업생은 조정에 천거한다는 조항이 있기는 하나 이는 성균관 졸업생에 대한 포상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 여겨지옵니다. 하여 부족하나만 신이 생각컨대 문관으로서 문과를 수료하거나 무관으로서 무과를 수료하면 근무일수 20일을 더하여 주고, 문관이 무과를 수료하거나 무관이 문과를 수료하면 근무일수 10일을 더하여 주는 포상을 내리고, 수석과 차석에게는 각 10일을 더하여 포상한다면 조금이나마 향학(向學)의 의지를 북돋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옵니다. 또한 유생이 성균관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한을 2학기로 제한하여 2학기 내에 졸업 혹은 수료하지 못한다면 자동적으로 제명이 되도록 하옵소서. 제명에 처해진 유생은 향후 3개월 동안 성균관 재입학을 제한하여 본조 교육의 본산으로서 성균관의 위상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다면 그나마 성균관의 교육을 활성화하는 데에 일조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옵니다. 신이 예조의 수장으로서 성균관의 활성화 또한 소임의 일부이니 이와 같은 논의가 조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도 죄가 적지 아니하다 할 것이옵니다. 다만 지금은 죄를 청하기에 앞서 성균관의 활성화를 위한 대책이 우선되어야할 것이므로 차후 적절한 시기에 다시금 죄를 청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성균관 효과가 국가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음을 감안할 때, 유생(청강생)들에게 필요 이상의 은전(恩典:특별한 배려)을 베푸는 것은 적절치 않다. 성균관은 조정의 여건과 민국(民國:대한민국)의 학사 일정을 고려하여 일 년에 한 두 차례 정도만 운영토록 하고, 교수진은 복설(復設) 시기에 즈음하여 예조에서 천망(薦望)토록 한다."
하였다.
○ 예조참판 이동진이 제24차 소과 채점에 참여한 시관진 포상에 대해 계목을 올려 아뢰기를,
"지난 2월 23일에 소과가 마감되어 3월 2일에 제24차 소과의 모든 절차가 종료됨에 따라, 전례에 의거하여 수고한 시관들에 대한 포상을 아뢰옵니다. 이번 제24차 소과 생원시(生員試)의 시관으로는 전라도 검률 권율(權律), 강원도 찰방 천입성(天立星), 전라도 병방 권성유(權性有) 등 3인이옵고, 진사시(進士試)의 시관으로는 황해도 봉산군수 한종훈(韓宗勳), 강원도 찰방 천입성(天立星), 전라도 병방 권성유(權性有)의 3인으로서, 시관들은 생원시 5개, 진사시 8개의 시권을 채점하였사옵고, 생원시에서 3인, 진사시에서 5인의 입격자를 각각 배출하였습니다. 삼가 청하오니 전례에 따라 생원시 시관들에게는 5일, 진사시 시관들에게 근무일수 7일을 각각 더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아뢰오니 이번 소과의 생진시 시제를 제출한 홍문관 부응교 박상진(朴商鎭)과 부수찬 박지하(朴志昰)에게도 각각 근무일수 5일을 가산하는 포상을 내려주시옵기를 청하옵니다. 또한 이번 소과에 입격한 인재들 중에 조정에 천거하여 쓰일만한 인재는 신 등이 따로이 탐문하고 있사온즉 조만간 따로이 어전에 아뢰겠나이다."
하니, 전교하기를,
"계목을 윤허한다. 병조도 별도로 계(啓:보고)하라.
-전교를 내린다. 이후로는 대과(大科)를 비롯한 각종 과거가 종료되면, 예조와 병조에서 그 시행 결과를 계본토록 한다. 계본에는 응시 인원, 급제(입격)자 명단 및 점수, 포상자 명단(시관 및 시제 출제자), 특이 사항(부정행위 적발 등) 등을 포함한다."
하였다.


3월 6일 기축(己丑)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7일 경인(庚寅)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8일 신묘(辛卯)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9일 임진(壬辰)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병조참의 서양갑이 제24차 소과 원시 시행결과에 대하여 계본을 올려 아뢰기를,
"제24차 소과 원시 시행결과를 아룁니다. 이번 24차 원시에는 총 4명이 응시하여 그 중 병조 좌랑 손오공, 한량 권준, 경상 검률 김대현이 각각 입격하였습니다. 이번 제24차 원시의 시관으로는 신 병조 참의 서양갑, 훈련원 주부 박한, 군기시 직장 정언신이 참여하였으며, 응시자 수와 입격자 수를 감안하여 이들에게 근무일수 5일의 포상을 할 것을 주청드리옵니다. 이외 특이 사항으로 이번 소과 원시에서 부정응시 시권이 있다는 제보가 있어 형조로 이첩에 수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포상을 윤허한다."
하였다.
○ 실록청총재관 서양갑이 실록 제21권 찬수에 대해 계목을 올려 아뢰기를,
"실록청에서 실록 제21권을 찬수하여 사고에 보관하게 하였음을 아뢰옵니다. 실록 21권의 찬수 대상기간은 개국 610년 3월 11일부터 동월 20일까지 이오며, 실록의 찬수에는 신을 비롯, 기사관 박지하, 박한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번 실록 제21권은 지난 2월 16일부터 편찬에 착수하여 동월 28일에 완결하여 당일로 사고에 봉안하였음을 전하께 아뢰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수고한 바가 크다. 찬수에 참여한 관리들은 전례대로 근무일수 10일을 가산토록 한다."
하였다.


3월 10일 계사(癸巳)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이조참의 양지원이 승정원 관리 임명 문제에 대하여 계목을 올려 아뢰기를,
"어제자로 종5품 봉훈랑 행홍문관부수찬지제교 겸실록청기사관 박지하를 행승정원주서(정7품직)에 명하였음을 아뢰옵니다. 박지하는 전라도검률과 교서관박사 등의 관직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있으며 다섯 번의 평정에서 모두 중중(中中) 이상의 점수를 받은 만큼 승정원 업무를 수행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령한 바를 알겠다."
하였다.


3월 11일 갑오(甲午)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12일 을미(乙未)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13일 병신(丙申)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이조참의 양지원이 당상관과 권지의 평정 결과의 문제에 대하여 계목을 올려 아뢰니, 전교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권성유(權性有)의 정직 임명을 윤허한다."
하였다.
○ 호조참판 이완이 사직을 청하는 차자를 올려 아뢰니, 전교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사직을 윤허한다."
하였다.


3월 14일 정유(丁酉)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함경도여력도위 겸호방 강감찬이 함경도의 행정권에 관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현재 함경도에는 민지훈 현 전라도 찰방을 대신하여 새로이 관찰사 대행으로서 검률직에 부임한 주공단의 활동이 저조하여 현재 함경도의 행정은 거의 마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지방관은 많은 접속체력으로 백성들과 가까이 있어 민원을 처결해야 하오나, 주 검률은 약 1개월 가까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하였사오니 어찌 지방관으로서 자격이 있겠습니까. 또한, 그로 인하여 소신의 평정이 나오지 않아 이월되었습니다. 이 역시 지방관의 태도에 부합하다 여겨지지 않아 이에 신 강감찬은 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그래서 신 강감찬은 전하께 잠시나마 함경도의 임시 행정권을 위임하여 주십사 소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정은 알겠으나, 검률이 사임하거나 해임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용(勵勇)의 직무 대행을 윤허할 수는 없다. 사헌부는 검률 주공단(周公旦)을 추고하라."
하였다.
○ 병조참의 서양갑이 제25차 소과 시행에 대하여 계본을 올려 아뢰니, 전교하기를,
"계본을 윤허한다."
하였다.
○ 병조참의 서양갑이  제25차 소과 원시 시제에 대하여 계본을 올려 아뢰었다.


3월 15일 무술(戊戌)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예조참판 이동진이 3월에 시행할 제25차 소과(小科)에 대하여 계본을 올려 아뢰니, 전교하기를,
"2인만으로 시관진을 구성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니 군수 한종훈(韓宗勳)은 생원시 시관을, 참군 권율(權律)은 진사시 시관을 겸하게 하라."
하였다.
○ 예조참판 이동진이 제25차 소과 시제에 대하여 계본을 올려 아뢰었다."
○ 전라도찰방 민지훈이 공문수령제도에 관련하여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일전에 전하께서 공문수령제도를 개선하실적에 감영과 관련된 공문중에서도 백성과 직결되는 것만 읍내장터에 게재하도록 하신바 있습니다. 이는 관아게시판의 효용도와 불필요한 공문 방치로 일어나는 피해등에는 상당히 효율적일 것이옵니다. 허나, 팔도에서 자주 발생하는 행사관련 알림내용과 관속 모집 공문 등 지역감영의 발전에 사활이 걸렸다 해도 지나치지 않은 내용등이 읍내장터에 게재되기 시작한 후 부터, 여러가지로 불합리한 요소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읍내장터는 아직 본조내 여러사람들에게 익숙치 않은 장소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읍내활성화를 계획으로 공문수령제도를 개선한바 있지만, 이 제도 시행후에도 읍내장터는 여전히 신규백성들만이 간간히 글을 올리는 공간이며, 팔도의 백성들 또한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곳이옵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거의 팔도에서 빈번히 올리는 알림글로 도배가 되어지다 싶이 하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읍내장터에 행사알림글을 게재한다 한들 그 홍보성이 얼마나 높겠으며, 그로인한 관아 및 관청의 행정력 또한 낭비되니, 어찌 실(失)이 득(得)보다 많다 하겠사옵니까? 처음에 공문수령제도를 개선할때에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각 관리들은 등청시마다 공문게시판에 들러 각 관청과 관련있는 공문을 확인해야 할것이라 하셨으나, 이 제도 개선이후 오히려 이전보다 관리들의 공문확인이 늦어지고 있사옵니다. 미천한 소신이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각 지방과 관련된 공문의 게재가 읍내장터에서만 이루어지도록 되어있고, 설사 공문게시판에 게재가 되고 각 감영의 수령들이 확인을 하더라도 도내에 공문을 올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나이까? 전하, 부디 신의 뜻을 들어주시어 백성과 지방의 발전이 직결되는 행사와 관속 모집등의 공문을 이전처럼 각 팔도 감영에서 수령하여 도내에 알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관속 모집에 관한 내용은 '관직 신청 안내문'에 기재되어 있으니 별도로 공문을 발송할 필요는 없겠다. 관속의 빠른 충원을 원한다면 개별 서찰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역별 행사 시행에 관한 알림글은 행사 수 일 전에 관리자 게시판에 요청하면 '주요 행사 및 사이트 공지안내'에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니, 그 방법을 통하도록 함이 좋겠다."
하였다.


3월 16일 기해(己亥)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형조정랑 조병옥이 병조에서 이첩된 부정응시자 논죄에 대한 계사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예조에 있을 때에, 형조의 판결후 비변사를 통하여 올라온 보고에 대하여 전하께서 비답을 내리시기를 전례에 따라 예조에서 직접 계하라 하신 바 있기로, 이번 건에 대해서도 병조를 통하여 보고하는 것이 순리라 생각하여 병조에 공문으로 판결을 알렸사옵니다. 허나, 현재 병조가 소과 준비로 눈코뜰새없이 바쁜 와중이라 미처 손쓰지 못하는 듯 하여, 신이 직접 어전에 계하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24차 소과 훈련원시에서 도월천이라는 유생이 제출한 시권(무과 시험장 255번 문서)이 부정응시라는 제보가 있었고, 3월 1일에 병조에서 이 사건을 형조에 이첩하였나이다. 조사결과 시권 내용 중의 한 단락이 인터넷 상의 한 블로그의 내용을 베껴온 것임이 드러났사옵니다. 응시자가 도용한 내용이 담긴 블로그에 따르면, 그 글 또한 "전략구상력 트레이닝"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히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즉 블로그 게시자가) 다른 자료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으로, 응시자가 인용한 블로그나, 또는 원작자의 출처를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니 마땅히 올바르게 표기했어야 하온데, 그리 하지 않았기에 부정응시가 명백하다고 판단하였나이다. 또한 유생은 남의 글을 인용하면서 합당한 인용부호는 커녕 그 출처조차 밝히지 않아 마치 자신의 글인양 하였으니 명백한 도용이라 판단되어 형조에서 규정에 따라, 지난 3월 12일에, 형옥 1개월과 응시자격 박탈 1회로 판결하였나이다."
하니, 전교하기를,
"관리가 아닌 초범(初犯)은 2회 정도의 정거(停擧:과거 응시 제한) 처분만을 내리도록 한다."
하였다.
○ 예조참판 이동진이 사직(辭職)을 청하는 차자를 올려 아뢰니, 전교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사직을 윤허한다."
하였다.

 
3월 17일 경자(庚子)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18일 신축(辛丑)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호조정랑 김영일이 공조의 행사 문제에 대하여 차자를 올려 아뢰니, 전교하기를,
"다소 회의(懷疑)적이긴 하나 호조의 별다른 반대가 없고, 행사를 기안(起案)한 초임 관리의 열의를 감안하여 시행을 윤허할 것이니 가급적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
하였다.


3월 19일 임인(壬寅)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행병조좌랑 겸실록청기주관 손오공이 국정제현안에 대하여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먼저, 지난 번에 불미스러운 일로 구설수에 올라 상께 큰 누를 끼친 점에 대하여 진심으로 청죄하옵나이다. 신이 불민하여 이전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사오나, 상께서 이렇게 은전을 베푸시어 신의 직위를 보존하옵게 하오시고 위로는 전하와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대민봉사를 통하여 신의 존재여부를 다시금 깨닫게 하시오니 다시 한번 상의 성은에 감읍하옵나이다. 신이 탑전에 부복하여 아뢰고자 하는 국정 현안은 크게 세 가지이옵나이다. 첫 번째로, 중추부의 원로 임명 건에 대한 사안이옵나이다. 현재 덕수군 前호조참판 이완과 예조참판 이동진이 사직을 청한 상태에서, 현재 덕수군의 사직은 이미 윤허되었고, 참판 이동진의 사직마저 윤허된다면 조정에서는 큰 수장을 잃는 것이옵고, 상께서는 양팔을 잃으시는 것과 진배 없사오니 이대로 간다면, 본조의 조정이 어렵게 되지 않을까 신의 걱정이 태산과 같나이다. 이에 대하여 신이 짧은 소견으로 생각해 보았사온데, 이 두 명의 원로의 사직을 윤허하여 조정의 기둥을 잃는 것보다는 이들의 접속체력을 감안하여 당상 우대 아문인 '중추부'의 관직을 제수하여 다시금 조정에 봉직하게 하심이 여러모로 이득이 될 것이라 사료되나이다. 중추부라면 본디 직무가 없는 당상관을 예우하여 만든 관청으로 덕수군과 참판 이동진이 부임하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사옵니다. 이들에게 중추부의 관직을 제수하여, 좁게는 국정 주요 사안에 대하여 옥당과 함께 상께서 자문을 구하시고, 넓게는 조정의 임의 아문이 위기에 봉착할 때 겸직을 제수하여 임의의 아문 수장의 고문 역할을 하여 조정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니 득보다는 실이 되는 것이 사실이옵니다. 대행대왕께서 이르시길, "인용은 군주의 대권이다." 라고 하셨사오나, 본 인사는 신의 애국심에서 나온 생각이오니 부디 살펴 주시길 간청 드리나이다. 두 번째로, 현 녹봉재산제의 수정과 관련하여 아뢰옵나이다. 신이 승정원주서로 봉직하고 있을 당시에, 녹봉재산제의 수정과 관련하여 주청 드린 바가 있사온데, 상께서 하교하시길 "손주서가 아뢴 바는 과인도 염두에 두고 있는 사안이다. 추이를 지켜보면서 점차적으로 개선해 나갈 것이니 크게 심려치 말라." 하셨나이다. 이에 대하여 다시금 아뢰고자 하오니, 상께서 삼가 살펴 주시길 청하옵니다. 녹봉재산제의 첫 번째 수정 사안으로는 '호조에서 백성들의 재산을 매입' 하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옵니다. 녹봉재산제가 시행된 8월 중순 경에는 백성들에게 자금이 유통되지 않아 백성들이 경제활동을 펴는데 어려움이 많았사오나, 현재 녹봉재산제가 시행된지 약 7개월이 지났고 백성들도 경제 홛동을 통하여 자금이 많이 유통되어 호조에서 매입한다면 본래의 녹봉재산제의 의미를 퇴색하게 할 수 있사오니 이 제도를 폐하심이 마땅할 줄로 아뢰옵니다. 두 번째 수정 사안으로는 '토지, 어장, 목장 등의 아이템을 통하여 추가 수익이 발생하는 제도' 를 새롭게 제정하는 것이옵니다. 현 녹봉재산제의 가옥 이외에 토지라는 개념이 있사온데, 실상 토지는 가옥에 비해 실효성이 없고 그 가격조차 비싸니 본조에서 실용성 논란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옵니다. 민국의 토지 등과 관련한 경제물품에는 추가 수익이 따라오는 것이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앞서 아뢴 바와 같이 본조의 토지 등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사오니 추가 논의를 통하여 이들의 물품에 대한 추가 수익을 도입케 하시옵고, 백성들의 경제 활동에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고, 본조의 녹봉재산제가 더욱 분명하게 자리 잡을 것이라 생각 되오니 관계 관청에 명하시어 대대적인 논의를 하게 하시옵소서. 이에 이어,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각각의 토지세, 염전세, 가옥세 등의 세금도 부과하여 더욱 실제적인 녹봉 재산제로 정착화 시킨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나이다. 세 번째 사안으로 '조례 등록 업무'에 대하여 아뢰옵나이다. 현재 서고에 등재되어 있는 각종 조례 등록을 보면 승정원을 주축으로 본조의 관리자가 그 업무를 행하여 각종 어명을 조례로 묶어 등록하고 있사옵나이다. 허나, 전하의 전교는 늘어가는데 관리자의 갱신 속도는 분기별 1회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에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새로운 조례를 확인하지 못하여 여러차례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니 중요한 어명은 즉시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옵나이다. 이에 계청하오니, 승정원에 명하시어 서책보관소에 개국614년 1월 1일 이후의 중요한 어명과 전교를 모아 서책보관소에 조례로 등록하게 하신다면, 더욱이 어명을 봉행함에 있어 소홀함이 없을 것이오니 득이 되는 것이 사실일 것이옵니다. 신이 아뢴 사안에 대하여 상께서 한번 생각해 보시옵고, 국정에 도움이 된다면 실로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과인의 생각으로도 현직에서 물러난 당상관들은 예우 차원에서 중추부의 관직을 제수하고, 녹봉을 지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전조(銓曹:이조와 병조)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 '녹봉재산제도' 개선에 관한 문제는 고려할 부분이 많으니 시간을 두고 상량한 후에 필요하다면 별도로 전교를 내리도록 하겠다. 승정원에서는 '조례 등록'을 찬하여 서책보관소에 보관하고, 관리토록 한다."
하였다.


3월 20일 계묘(癸卯)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21일 갑진(甲辰)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22일 을사(乙巳)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23일 병오(丙午)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사헌부지평 장운익이 함경도검률 주공단 추고에 대하여 계사를 올려 아뢰기를,
"모름지기 관리의 본분은 위로 주상전하의 지극정성한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하여 그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펴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는 데 있사옵니다. 하물며,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어 지방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지방관으로서의 중책과 대임은 결코 가볍게 볼 수가 없는 것은 명명백백한 일일 것이옵니다. 함경도 검률 주공단은 일찍이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천거되어 출사한 자로서, 조정에 열과 성의를 다해 오다 한때 불미스러운 일로 파직이 되었으나 다시금 전하께 봉사하고자 재출사하여 변방인 함경도 검률에 제수되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하오나 그는 부임해 오자마자 처음 등청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 달이 넘은 이때까지도 등청하지 아니하고 있어 함경도의 민심이 날로 흉해지고 있으니 비록 토관으로서 강감찬이 있고 관속으로 도월천이 있다고는 하나 지방관의 근무 태만으로 인한 함경도의 피해는 실로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무릇 주상전하를 대신하여 함경도민들을 보살피고 변방의 방어를 책임져야 할 중책을 맡은 자가 한 달이 넘도록 등청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관리로서의 직무를 소흘히 한 것이요, 거듭된 등청 독려를 받고도 등청하지 아니하는 것은 신자로서 군상이신 전하를 기만하는 일이니 어찌 중죄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몇 일전 전하께옵서는 함경도 여용 강감찬의 차자에 따라 헌부에 추고를 명하셨사옵니다. 이에 신은 전하의 어의를 공손히 받들어 주공단에게 몇 차례에 걸쳐  공문을 띄워 등청을 독려함과 아울러 업무 소흘과 관련하여 자세한 경위를 파악하고자 지난 22일까지 헌부에 답변할  것을 재촉하였사옵니다만, 기한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아 그가 함경도에 대한 직무 소흘이 심하다고 여겨 이에 전하께 삼가 탄핵하게 되었음을 아뢰옵니다. 비록 그가 민국의 학업이라는 사정이 있어 불가피하게 등청하지 못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고는 하나 변경지방의 민정을 안정시킬 책임이 있는 관리로서의 근무 태만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오니 삼가 중죄로서 다스려 뭇 관리들에게 본보기로 삼도록 단단히 일깨워 주소서. 이와 아울러 함경도에도 조속히 후임관 파견을 명하시어 동요되고 있는 함경도의 민심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실 것을 청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검률 주공단(周公旦)은 파직하고, 불서용(不敍用)한다. 아울러, 직무감찰 소홀의 책임을 물어 사헌부 지평 장운익(張雲翼)의 근무일수를 10일 감(減:감산)한다."
하였다.


3월 24일 정미(丁未)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사헌부지평 장운익이 2월 근무 성적 우수 관리 및 징계 관리 선정에 대하여 삼가 옥당과 헌부의 의견을 함계하여 아뢰기를,
"신등이 2월 포상 및 징계 관원들을 찾아 해당 관청들을 두루 탐문하여 본 바, 2월은 예조, 홍문관, 형조, 이조, 병조, 공조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사온데,  이 가운데 2월 포상자로 공조의 선공감 봉사 한유찬과  형조의 홍유풍을 선정하여 만장일치로 결정하였음을 아뢰옵니다. 선공감 봉사 한유찬을 선정한 까닭은 초임관이고 특별히 창의적 업무가 많지 않은 공조임에도 불구하고 본조의 활성화를 꾀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창의적인 업무를 진행하고 있사오며, 전임 선공감 제조 이휘가 물러난 이후에도 공조의 업무를 무난하게 파악하여 차질없는 업무 수행으로 뭇 관원들의 모범이 되었사옵기에 선정하옵니다. 형조의 전옥서 봉사 홍유풍을 선정한 까닭은 불미스러운 일로 파직당한 이후 다시 출사하여 형조의 관원으로서 맡은 직분에 충실히 수행할 뿐만 아니라 형정에 있어서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진행한 까닭에 이 역시 포상자로서 손색이 없사오니, 한유찬과 홍유풍에게 각각 근무일수 5일을 가산하시어 그들의 공로와 노고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심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또 2월 중 징계자로는 형조의 전옥서 봉사로 있는 송왕한과 참봉 양귀헌을 선정하여 만장일치로 결정하였음을 아뢰옵니다. 형조내에서 전옥서를 책임지는 중책을 맡은 관원으로서 홍유풍만 맡은 직분을 충실히 하였으나 송왕한과 양귀헌은 2월의 활동이 저조하여 관리로서 업무에 충실치 않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징계자로 선정하여 아뢰오니 이들에게 각각 근무 일수 5일 감산의 조치를 취하시어 이들의 안일함에 단단히 주의를 주실 것을 청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계본을 윤허한다. 다만, 봉사 홍유풍(洪柔風)이 어전에 아뢴 바가 있으니 송왕한(宋旺韓)은 징계 대상에서 제외토록 한다."
하였다.
○ 전옥서봉사 홍유풍이 전옥서봉사 송왕한의 징계에 대하여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우수자로 됬고, 또 같은 전옥서의 봉사 송왕한과 참봉 양귀헌이 징계자가 되었다는 합계를 읽고 이에 대해 아뢰옵니다. 참봉 양귀헌은 현재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허나, 봉사 송왕한은 이조에 사직서를 내고, 등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허나, 형조 정랑인 조병옥이 이를 알고는 송왕한의 사직서 여부에 대해 이조에 문의를 했더니, 이조 참의인 양지원이 평정기간까지 기다렸다가 평정이 끝난 후, 사직을 수리한다고 답변을 해왔습니다. 물론 봉사 송왕한은 사직서가 처리 된 것으로 파악하고, 현재 등청하지 않은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허니 봉사 송왕한은 징계자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을 주청드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직서 처결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성급히 낙향하는 것은 관리로서 적절치 못한 행신(行身:처신)이다. 허나, 송왕한(宋旺韓)은 아직 법도에 익숙치 못한 초임관(初任官)이니 크게 책망하지는 않겠다."
하였다.


3월 25일 무신(戊申)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26일 기유(己酉)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27일 경술(庚戌)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이조참의 양지원이 예조 수장 임명과 평정을 청하는 계목을 올려 아뢰기를,
"전예조참판 이동진이 사직하여 예조 수장이 비게 되었사옵니다. 이에 예조 업무에 차질이 생기고 있사오니 이동진이 사직서에서 아뢴 바와 같이 전예조정랑 겸시호도감낭청 성혼을 다시금 예조정랑에 명하시어 수장으로 삼으시옵소서. 성혼은 경기도검률,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사헌부감찰 등의 관직을 거쳤으며 여덟 번의 평정에서 모두 중상(中上) 이상의 점수를 받은 만큼 수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또한, 1월 16일부터 이달 15일까지 2개월간에 대한 신의 평정을 다음달 2일까지 시행하게 되어 전하께옵서 평정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이는 신이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른 뒤 두 번째 받는 평정이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조봉대부 성혼(成渾)을 예조정랑으로 사령하라. 참의의 평정은 곧 조처하겠다."
하였다.
○  전라도찰방 민지훈이 전라도 지방관으로써 임기를 마치며 장계를 올려 아뢰니, 전교하기를,
"단지 기간만을 연장한 것이니, 장터에 기간 연장에 관한 알림글만 내걸면 될 듯하다. 대행의 근무일수를 5일 가산한다."
하였다.


3월 28일 신해(辛亥)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29일 임자(壬子)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 행병조좌랑 겸실록청기주관 손오공이 사간원 관리 임명 문제에 대하여 계목을 올려 아뢰기를,
"금일 자로 종5품 창신교위 前전라도 찰방 민지훈을 행사간원 정언(정6품직)에 사령하였음을 아뢰옵니다. 민지훈은 토관으로 출사하여 함경도 검률과 승정원 주서, 전라도 찰방의 관직을 역임하고, 일곱 번의 평정에서 1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상 이상의 점수를 받았고, 근무일수 감산 외에 특별한 징계가 없었고, 도덕적으로도 허물이 없음을 판단하였기에 사간원으로 사령하였음을 고하나이다."
하니, 전교하기를,
" 병조에서 사령한 바를 알겠다."
하였다.
○ 병조참의 서양갑이 전직 당상관 예우 문제에 대하여 계목을 올려 아뢰기를,
"전하의 명을 받들어 얼마전 관직에서 물러난 전직 당상관들을 중추부에 관직 제수하고 녹봉을 지급하는 문제에 대하여 병조에서 논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찬성을 하였음을 아뢰옵니다. 또한 앞으로 2품 이상의 당상관은 그 관직이 없을 시 중추부에 자동 임명하도록 조처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이조의 의견을 듣고 결단하겠다."
하였다.
○ 시호도감제조 하빈군 이휘가 대행대왕의 행장과 관련하여 별단과 함께 계본을 올려 아뢰기를,
"지난 1월 20일, 시호도감에서는 대행대왕의 행장을 찬술하여 어전에 아뢴 바가 있사옵니다. 이에 전하께서는 당시 예조참판 이동진에게 정서하여 다시 아뢰라 명하시었으나, 이동진이 민국 사정으로 업무를 돌보지 못하다가 오늘에 이르렀사옵니다. 이미, 초안을 찬술하여 아뢴 것이 두 달 전이었사오니, 더 이상 나라의 막중 대업을 미루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신이 다시금 행장 초안을 정리하고, 정서하여 별첨으로 아뢰오니, 전하께서는 살펴주시고, 후속 절차에 속히 들어 갈 수 있도록 하교를 내려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별첨>
왕(國王, 대행대왕을 이름이니 이하 왕이라 칭함)의 휘(諱)는 모(某)이요, 자는 자산(子珊)이며, 호를 소명(昭明)이라 하였으니 시경(詩經) 대아편(大我)편 기취에 ‘군자는 만년토록 밝은 빛을 더하리라’ 는 뜻에서 취하신 것이다. 음력 5월 10일에 탄강하셨으니, 금상 전하께서는 바로 왕의 친아우님이시다. 태조고황제께서 왕조를 세우신 지 519년 째 되던 해 종사(宗社)에 위태로움이 날로 더하여 흉악하고 불측한 마음을 품고 있던 섬나라의 흉한 이웃 오랑캐들이 그간의 은혜를 저버리고 배반하여 일신의 영달만을 꾀하던 역적들과 더불어 야합하여 누차에 걸쳐 동방(東方)에 비추어 오던 찬연찬란한 왕업(王業)이 이들의 흉악한 횡포로 쇠하여지는 비운을 맞았고, 그로 인하여 난세(亂世)의 사악한 기운이 이 동방을 뒤덮어 온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온 하늘과 땅을 흔들고 또 뒤흔들매, 그들이 흘리는 피눈물이 내를 이뤄 온 천하를 덮었다. 이에 하늘과 땅의 신성한 혼령들과 지하의 열성조(烈聖祖)께서 이 비참한 광경을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어 잠저(潛邸)에서 국운의 쇠약함에 슬퍼하고 애통해 하시는 왕께 천명(天命)을 내리시어 뭇 사람들을 힘써 위무하도록 명하시니 우리 왕께서는 하늘이 내리시는 천명을 두려워 감히 받들지 못하시다 계속되는 천명을 어기지 못하시어 높이 받드시고 난세로 어지러운 동방을 왕화(王化)로서 깨끗이 없애시고자 종묘와 사직을 받들어 27대에 이른 조종조의 대를 이을 것을 결심하셨는데, 이때가 개국 609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이러한 깊은 뜻을 간직하여 왕께서는 친히 종묘에 나아가 열성조들께 고유하시니,  태조께서 밝히신 개국 성의(開國 聖意)와 함께 종묘와 사직을 다시금 받듦에, 천하의 모든 만 백성들은 일제히 거리로 뛰쳐 나와 재흥의 경사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왕께서는 종사를 공경히 받드시고 연호(年號)를 정하시어 종묘에 고유한 날부터 개국 609년이라 명하셨으니 이는 왕께서 태조 고황제의 창업 정신과 종통(宗統)을 그대로 이으시고, 더 나아가 태조 고황제 이후 열성조(烈聖祖)들의 아름다운 치적(治績)과 덕망을 본받으시고자 함이며, 조종조 이래로 지속되어 오던 중국에 대한 사대를 과감히 깨치시고, 자주 조선의 국본을 세우심이었다. 왕께서는 정사를 돌보실 때 항상 백성들을 생각하시고 염두에 두셨다. 그러므로 정사와 관련된 일년의 문서들을 일일이 재가하실 때에도 늘 신중하게 차질없이 정확하고 명석하게 처리하셨다. 행여 정사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지를 염려하시면서 백성들에 해를 입힌 관리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히 일깨워 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신임 관리들에 대해서는 백성들에 대한 정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고, 신임 관리 뿐만이 아닌 다른 모든 관리들에 대해서도 양심에 맞게 책무를 다하도록 북돋워 주셨으니, 적어도 민국 정부처럼 백성들의 비탄을 자아내는 정치를 지양하고, 오로지 백성들의 희망을 일으키는 정치로 그 근본을 삼고자 정하셨기 때문이다. 왕은 신상필벌을 엄히 적용하여 백성과 나라를 위해 힘써 노력한 관리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렸고, 직무를 태만히 하여 백성들에게 폐를 일삼은 자는 엄히 치죄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옥에 있어서도 신중히 하여 행여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이로 인하여 갇힌 자들은 없는 지 신중하게 처리하셨다. 공평 정당하면서 신중하게 이루어진 왕의 이러한 신상필벌과 형옥의 원칙은 뭇 관리들에게 본이 되었고, 모든 백성들은 이러한 왕의 식견에 크게 감탄하며 존경해 마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나고 새 해를 맞이하매 왕께서는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연두교서를 내리시면서 지난 날에 행한 정사에 잘된 것이나 잘못된 것이 있는 지를 되돌이켜 보고 잘못된 점들에 대해서는 늘 반성하셨다. 언제나 늘 백성들을 생각하며 정사에 임해 오셨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연두교서가 늘 그러 했지만 특히 그 가운데 611년에 내리신 연두 교서에서 왕께서는 그동안의 수많은 전교(傳敎)와 비답(批答)이 있었으나, 과인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하시며, 관리된 자들의 기강해이를 한탄하시고, 기풍을 바로잡고, 옛제도의 충실한 수행과 현실에 맞게 고치는 것에 대한 신중함을 강조하셨으니,  첫째가 어명과 관계된 것이고, 둘째가 인사에 대한 것이며, 셋째가 요즘 사람들의 경박한 풍속을 논한 것이고, 마지막이 시책을 펴는 원칙과 그 원칙 적용의 어려움에 관한 것으로서, 위로는 관리에서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와 법, 그리고 질서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바로 잡아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일에도 왕께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은 힘을 기울이셨다. 609년 8월 29일 전(前) 의정부 사록 서태후(徐太后)가 차자(箚子)하여 아뢰기를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본조의 국법으로 정할 것을 청하니, 조선경국전의 포괄적이고 광범위함을 지적하시고, 국법으로의 부당을 지적하시었으며, 본조의 사직을 지탱해온 경국대전에 준한 새로운 법전의 찬술을 하교하셨으니, 이런 지극한 뜻을 받들어 조정내의 모든 대소신료들이 힘써 노력한 결과 창국 2년째 되던 610년 2월에 창국대전이라는 이름의 법전이 완성되고 반포 되기에 이르렀다.  창국대전의 완성은 본조의 체계가 확실히 잡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왕께서 기뻐하시며, 친히 서문을 지어 내리시니, 조정의 모든 신료들이 성은에 감복하였다. 또한 왕께서는 대전이 미처 등록하지 못한 민생의 해결을 위하여, 세법(細法)을 제정토록 하시고, 백성들에게 함부로 적용되는 것을 금하시기 위해 제정 또는 개정할 때에는 왕의 재가를 득한 연후에 다시 양사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시니, 국법의 제정을 이와 같이 신중하게 하심으로 민폐를 사전에 예방코자 하셨다. 대전 등 법전의 반포로 나라의 모든 사무가 법에 의해 진행되니, 비로소 법치국가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예전 성종대왕때 경국대전 반포에 준한 사안으로 그 업적이 성종대왕과 같은 것이었다. 인사에 있어서도 왕께서는 역대 어느왕보다도 공정하고 공평한 인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자 노력하셨다. 창국 원년 (609년) 10월 23일에 의정부를 새로 구성하고 삼사(三司: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의 관리를 새로 뽑았고, 이때 출사된 인재들을 대거 발탁하여 이조 및 예조, 병조, 형조의 관리를 보강하고 각 관청에 관리들을 대거 충원하도록 하니, 침체된 질서와 기강은 바로 잡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왕의 마음 씀씀이는 매사 공정하고 올바른 인사가 될 수 있도록 승품체직절목과 인사체직절목을 제정하여 시행토록 한 데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또 엄격한 법집행을 위하여 수사논죄절목을 제정하여 시행하셨으니, 이는 형옥을 신중히 하려는 왕의 지극한 뜻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개국 609년 8월 15일 종묘 고유 후 처음 정사를 돌보시면서 정사를 돌보심이 마치 아비가 자식을 돌봄과 같으심이라 첫 전교(傳敎)를 내리시면서 함께 이르시기를 문왕(文王:공자)께서 '내가 일찍이 종일토록 밥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생각해 보았으나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 것은 배움의 중요함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움에 충실한 연후에야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과 밝은 이치를 깨달음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후에야 비로소 덕(德)과 지조 있게 실천하는 행동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비의 기상과 기개를 가진 문무관(文武官)들이야말로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할 수 있다. 각 고을마다 서당을 설치하고 도서를 간행하여 면학의 기풍을 조성토록 하라. 과인은 이를 지켜볼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는 모든 성왕(聖王)들의 한결 같으심이라 면학을 조성하고 학풍을 불러 일으키는 데 힘쓰시어 온 천하에 밝은 이로움을 펼치시고자 함이셨으니, 면학과 학풍의 진작을 위하여 610년에 성균관을 개설하도록 명하시어 인재 양성에 힘쓰셨고 이듬해 611년에 교육기관개설절목과 성균관설치운영절목을 반포, 시행하도록 명하셨으니 학풍과 면학을 장려하여 인재를 키워 나라의 큰 재산으로 삼고자 하심이 지방 곳곳에 미치지 않음이 없었다. 한 나라에 임금과 백성이 있으되, 임금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아끼고 어루만질 참한 인재들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점을 헤아리신 왕께서는 참된 인재야말로 나라의 값진 재산이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시면서 나라의 동량지재가 될 참신한 인재의 선발을 당부하시고 이와 같은 취지로 학문과 문풍을 크게 장려하셨으니 본조가 재흥한 이후로 수백에 이르는 인재들이 나와 조정에 출사하여 일하고 있다. 생각건대, 실로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시는 왕의 이러한 혜안과 총명은 백왕 가운데 과히 으뜸이라 할만 하리라. 왕께서는 유교에서 비롯된 전통도 중히 여기고 소중히 하셨으나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비롯된 악습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고 있는가를 잘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즉위 초 남녀 차별과 신분제에 많은 악습과 폐단으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이 그 폐단에서 신음하고 고통받고 있음을 아시고 이를 안타까이 여기시어, 남녀 차별과 신분제를 완전히 혁파할 것을 명하셨다. 609년 9월 3일에 호조로 하여금 호패(號牌:신분증)를 발급하도록 명하시어, 10월부터는 호패를 가진 백성만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정하셨는데, 이로서 오늘날까지 무릇 사조의 모든 백성들이라면 호패를 발급받고 활동을 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호패의 법을 몰라 간혹 실수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바로 잡도록 일깨워 주시니 뭇 사람들이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왕께서는 사악함과 부정함을 경계하고 멀리하며 선하고 본이 될만한 것을 가까이 여기시어 옳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바르게 행하도록 하고, 악하고 그릇된 일이 있으면 결단을 내려 과감히 버리시었다. 609년 9월, 전(前) 의정부 사록 겸 병조 훈련원 본사 서태후(徐太后)가  수차례에 걸쳐 어전(御殿)을 문란(紊亂)하게 하고, 어명불이행 및 무고하여 그의 사악함으로 치죄(治罪)하기를 청하는 소(疏)가 수없이 올라왔다. 이에 왕께서 이에 태후를 전옥서(典獄暑)에 투옥하였으나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그 언행이 방자함이 극에 이르자 왕께서 다시 형조에 명하시어 정형(正刑)에 처하심으로. 왕법의 지엄함을 내외에 널리 알리셨다. 또한 익년 2월 역신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켜, 불측한 행실과 언동으로 대동계를 조직하여 사람을 끌어모아 왕을 기만하고 더 나아가 조정과 온 나라의 백성들을 일대 혼란에 빠뜨리니, 왕께서 엄히 이들을 치죄하여 바로 잡으시는 동시에 더 이상 이런 불순한 행실이 없도록 내외에 단단히 경계하도록 이르시니, 법의 집행에 있어 그 위엄이 추상같아 조야가 왕의 위엄에 고개를 숙였다. 또 611년 2월 한 가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관리를 뽑는 시험인 과거에서 부정이 일어나 조야를 비롯한 나라 안팎이 큰 충격에 휩싸이매 왕께서는 홀연히 개탄하시고 해당 관원 및 연루자들을 엄벌할 것을 명하시며 전교하시기를, '과거에 급제하여 품계를 받거나 승품이 되어 조정의 관직을 받아 경외관에서 일할 자들이 그 시작에서부터 속임수를 쓰게 된다면 종묘사직의 앞날을 기약할 수가 없다' 하시며, '과거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곧 임금과 조정을 기만하는 것이니, 시관들은 물론이고 예조와 병조의 관리들도 과거가 이미 끝났다고 하더라도 시권(試券:답안지)을 부지런히 살펴 부정한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한때 속임이 통했을지라도 끝내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것을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과 한량 및 전현직 관리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추상과 같이 하교하시었다. 대의(大義)를 바로잡고 억울함을 밝혀 살피고 다스리는 일도 왕께서는 잊지 않으셨다. 왕께서 대의를 바로 살펴 본조의 재흥을 다짐하시고 즉위한 이래 재야에서는 인조조때의 반정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폐위된 혜종 (광해군) 대왕에 대한 복위를 청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는데, 마침내 동년 9월 16일에 한성부 유생 최영(崔瑩)의 상소를 받아들여 복위에 대한 논의를 허락한다는 비답을 내리셨다.  곧 복위에 대한 논의를 시행케 하여 마침내 611년 12월 15일 광해군으로 강봉되어 있던 선대왕을 추시하여 혜종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 으로 높이고 부인 유씨를 혜장왕후로 높이어 종묘 영녕전에 몸소 납시어 그 신주를 공손히 봉안하셨으니, 안팎의 모든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왕의 대의를 받들어 효를 숭상하는 지극 공경한 뜻에 감격해 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으며, 왕의 이러한 업적은 민국에까지 영향을 미치어 혜종대왕(광해군)의 평가를 더욱 신중히 하는 추세가 되었다. 또한, 한때 보위에 계시다가 쫓겨 억울하게 승하하신 후 영월 장릉과 남양주의 사릉에 따로이 계시면서 저승에서조차도 부부로서의 연을 제대로 맺지 못한 채 그 한을 품고 계시는 단종대왕과 정순왕후를 사릉으로 한데 모셔 두 선대왕 내외분의 지극히 원통함을 풀어주시어, 열성조를 모시는 일에 그 모범됨을 행하시었으며, 재위 기간 중, 의롭고 올바른 일을 행한 이들에 정문을 하사하시거나, 칭송비를 세우시어 의롭고 올바른 일들은 모든 백성들이 두루 본받고 장려하도록 하셨다. 또한 611년 7월, 지난 을사년(1905)에 신자로서 감히 군상(君上)을 능멸하고 기만하여 일신의 영달을 위해 백성들과 나라를 저 간악한 섬나라 흉적들과 함께 도적질하는 데 앞장 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등 5역신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도록 하고 그 죄상을 따져 악시(惡諡)를 내리는 동시에 그 죄책비문을 새기도록 하여 후세에게 길이 경계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왕의 선대이신 고종태황제와 순종효황제께서 당하신 저들의 간악한 흉계에 대한 역사의 정당한 심판이었으므로 나라의 온 백성이 기쁨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또한 나라와 종사에 충성한 우국지사들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으셨으니, 저 악독한 섬나라 흉적들의 참혹한 횡포에 맞서 나라를 구하고자 분열히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과 꿋꿋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다한 최익현에게 각각 벼슬과 시호를 내려 그들의 충절과 절개를 위안하여 길이 현창 하시어, 모두가 불의를 멀리하고 정의를 가깝게 하여 대의를 보다 바르게 하신 왕의 지극하고 결의에 찬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옛 문화와 풍속을 바르게 지키고 올바로 보존하는 일에도 왕께서는 어느 누구 못지 않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간 민국에서 공휴일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영묘 (세종장헌대왕) 께서 심혈을 기울여 창제하신 한글을 기념하는 날을 소흘히 취급하고 홀대시키니 이런 처사에 뜻 있는 식자들과 사람들은 홀연히 개탄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개국 609년 10월 4일에 이르러 다시 국경일로 재 승격시켜 영묘(英廟 ; 세종장헌대왕)께서 지극한 애민의 정신으로 창제하고 반포하신 참 뜻을 되새겨 뭇 사람들의 문자 사랑의 정신과 전통 문화의 우수함을 일깨우셨고, 통신수단의 발달과 함께 통신체라는 괴이한 문체가 생겨나고 퍼뜨려짐에 있어 여러 문체가 바르지 못함을 개탄하시고 일찍이 정묘(正廟; 정조선황제)때의 문체반정 고사(故事)를 따라 610년 11월에 문체를 바르게 할 것을 지시하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심으로 외계어나 통신어 사용을 엄금하셨으니,  나날이 변모하는 문명에 따라 전통 문화와 풍속이 쇠함을 애석히 여기시고 바로 잡으시고자 왕은 늘 노심초사하셨고, 적어도 아조에서는 비속어나 통신체가 그 자취를 감춘 바 되었으니, 이 모두 세종장헌대왕의 대를 이으신 왕의 업적이 아니겠는가. 이때 입조한 일부 관리들 가운데에는 예의를 잃고 언사를 함부로 하거나 혹은 함부로 직함을 남용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폐를 끼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 기괴한 현상에 한탄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니,왕께서는 예의를 잃고 무례한 언행을 하거나 직함을 함부로 남용하여 폐를 끼치는 관리들에 대해서는 늘 경계하고 잘못된 점을 따끔하게 지적하여 이르셨다. 관리가 직함을 악용하여 백성들에게 위화감을 끼치는 것은 물론 무례하여 폐를 끼친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개탄하시며 609년 12월에 사사로이 직함을 함부로 남용하지 말 것을 엄히 금하셨으므로, 전통적으로 존중되어 온 예의를 언제나 변함없이 공경하시고 늘 존중하며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왕의 사려 깊으신 뜻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왕께서는 백성들에 의한 적극적인 논의를 장려하셨다. 즉위 초부터 민본 정치를 정사의 최우선으로 삼으신 바 있는 왕께서는 언로와 활발한 논의가 민본 정치의 최 우선임을 깨달으시고 611년 6월에 조정내 각종 논의와 토론을 활성화시켜 민심을 바탕으로 국정을 끌고 갈 것을 관리들에게 하교하시니, 이는 일찍이 우리 세종(世宗)께서 공법을 시행할 때 백성들의 찬반 여부를 물으신 것과 영조(英祖)께서 창경궁 홍화문(昌慶宮 弘化門)에 납시어 균역을 물으신 일, 그리고 정조(正祖)께서 능행때 마다 백성들의 상언과 격쟁을 듣고 민원을 해결해 주신 일에 버금가는 훌륭한 것으로 모든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수렴하고 정사에 반영하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역대의 어느 제왕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창국 2주년이 되던 611년 8월 8도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국 각지 만민들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각 도에 대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하셨고, 모범 백성들에 대한 표창 제도를 운영하시어 옳고 바른 행실을 널리 알리고자 하셨다. 또 역사를 존중하는 모범을 보이시며 610년 11월 실록청(實錄廳)을 개청하도록 명하시어 글을 잘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왕 당대의 사초를 남겨 후대의 실록으로 삼도록 본을 보이셨으니 역사를 거울로 삼아 후대에게 교훈과 경계로 삼고자 하신 영명하신 왕의 결단에 조야의 모든 선비들이 감복해 마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왕께서 본조의 왕업을 다시 이을 것을 선언하신 609년 8월 이래로 왕께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관련하여 조야의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왔으나 왕께서는 감히 선대왕들과 견줄 수 없다 하시며 여러 차례 고사하시고 이에 응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뭇 신하들이 왕께서 이룩하신 재흥의 업적과 그 공로를 높이 기리고자 삼가 존호를 지어 올리려 하였으나 이 또한 자신의 공로는 선왕들께서 이루신 업적보다 미미하여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하셨으니 지극히 선조들을 공경하시면서도 늘 겸손하시고 조심스러워 하시는 왕의 자애롭고 겸손한 성품은 천성을 타고 나신지라 대개 그러하셨다. 동년 9월 10일에 예조좌랑(禮曹佐郞) 정재안(鄭宰安)등이 왕께 존호(尊號)를 올려 가납하시기를 청하자 사양하시며 전교하시기를“ 가납할 수 없다. 천하에 큰 덕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존호를 올려 그 덕을 칭송해야 하겠지만, 어찌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허송세월하는 과인에게까지 존호를 올린다고 하는 것인가. 진실로 자격이 없어 그런 것이지, 세 번 사양하는 허례를 갖추고자 이러한 비답을 내리는 것이 아님에 유념하라. 앞으로 이 일을 다시 거론하는 자가 있다면 응당 마땅한 처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시었는데 왕께서 스스로 삼가하고 겸허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개국 612년 계미년(癸未年) 정월 초 하루에 연두 교서를 문무백관에게 내려 이르시기를, 주요 국정 지표로, 인재 등용 제도의 보완과 형벌 집행의 형평, 지역별 특색화 등의 3가지 사안을 말씀하시며, 교육을 진흥시키고 선행을 장려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도 누차 언급하셨으니, 이는 왕께서 팔도의 활성화를 위하여 몸소 정책을 수립하시고, 진행하셨으나, 조정 여건 미숙으로 진도가 미진하니, 또다시 신하들을 독려하시기 위함이셨다. 이러한 왕의 노심초사는 옥체에 병환을 가져왔고, 그로 인하여 왕께서 십여일 간 정무를 폐하신 바가 있었는데, 동년 4월 25일 의정부 사인 이휘 등이 이에 대한 부당함을 간언반 바. 이에 성답하여 이르시기를 " 과인은 보통 사람의 자질조차 타고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노력하는 바 또한 범인(凡人:평범한 사람)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말은 구차한 변설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사람이 군주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찌 백성들의 행복이겠으며, 종묘사직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겠는가. 비록 10여 일 동안 정무를 멀리한 것으로 사태가 그쳤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몸과 정신도 예전과 같지 않다. 이제 과인의 거처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된 듯 하니, 멀지 않아 천명(天命)에 따라 의(義)로써 결단하는 바게 있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왕께서 심신의 병환이 깊어지시어, 이런 비답을 내리셨으니, 당상, 당하를 구분하지않고, 모든 신료들은 군주를 보필함에 부덕한 소치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왕께서 심신에 병환이 깊어지기 시작하신 지가 대개 이때부터였다. 왕께서는 옥체가 미령하신 가운데서도, 정무를 게일리 하지 않으시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동년 7월 28일에 그동안 공신도감으로 시작되어 녹훈도감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논의되었던 창국공신 책봉에 대해 결단하시며, 창국공신 정공신 이휘 등 11명. 원종공신 김병호 등 15명을 책봉하시니, 이는 만 백성의 경사와 다름없었다. 창국공신 책봉 별교서에 이르시기를, " 나라가 평온한 치세(治世)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과인이 3년 전에 종묘에 나아가 맹세한 바를 일부나마 지킬 수 있는 된 것을 누구의 공이라 하겠는가. 창국(昌國) 초기에 각 관아(官衙:관청)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각종 법령과 제도를 제정 또는 시행하는 데 크게 일조한 자, 끊임없는 수고가 요구되는 인사, 교육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한 자, 아름다운 일을 칭송하고 그렇지 못한 일을 징계하는 등의 사무에 최선을 다한 자, 과인을 좌우에서 보좌하며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수고로움을 다한 자, 행실을 항상 올바르게 하여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의 이치를 몸소 행동으로 옮긴 자, 활발한 활동으로 팔도(八道) 각지를 흥성(興盛)하게 한 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라도 부족한 점이 있었더라면 어찌 지금과 같은 나날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군주의 도리에 있어 이러한 신하들의 노고(勞苦)에 보답하는 특별한 은전(恩典)을 베풀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시었으니, 이로 인하여 왕과 함께한 고굉지신들에 대한 배려가 그 결실을 볼 수 있게 되어, 공신들이 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 마땅한 나라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왕께서는 왕의 치세가 얼마 남지 아니함을 아시고, 후대를 준비하시기 시작하였으니, 그동안 왕의 옥체 미령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진행되었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하고, 이호예병형공의 육조(六曹) 각 관청에서 정무를 분담 시행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시었으니, 이는 왕께서 직접 정사를 챙기실 것을 내외에 천명한 결단이요, 서사제도 직계제도 아닌 정치제도에 대한 개혁의 한 부분이신 것이다. 드디어 왕께서는 동년 11월 25일에 그동안 잠저에 거하였던 왕제(王弟) 모(某)를 세제로 삼으시고 책봉 교서를 문무백관에 내려 전교하시기를  "전교를 내려 다음 왕위를 계승할 왕세제(王世弟)를 책봉한다. 다소 급작스럽게 세제를 책봉하므로 내외(內外)에 혼란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현재 조정의 상황을 헤아려 보면 이는 실로 필연에 가까운 것이다. 지난 3년여의 시간 동안 과인이 국정을 돌보면서 많은 실책을 범하였는데, 그 허물이 적지 않았으므로 예사 일이라고 하기 어렵다. 즉, 군주된 자의 자질이 근본적으로 크게 부족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또 평소 덕이 없고 품성과 행실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체력과 정신 또한 예전과 같지 않아 더욱 쇠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조정의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마땅히 후사를 세워 종사를 굳건하게 해야 할 때인 것이다. 만일 불행한 사태가 가까이에서 촉발된다면 무엇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금번 책봉은, 세제가 극력으로 사양한다 하여 늦출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문무백관들이 교서를 거둬들일 것을 거듭 청원한다 하여 연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예법에 따른다면, 도리에 있어 적게는 세 번, 많게는 아홉 번에 걸쳐 극구 사양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지금의 급박한 조정 현실에 있어서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허례에 지나지 않는다. 종묘사직이 단절되느냐, 이어지느냐가 하는 문제가 곧 세제 책봉이 성사되느냐 하는 여부와 직결되어 있으니, 세제는 물론이고 만조백관들 모두가 만류하는 글을 올려 세제 책봉이 조금도 늦어지게 하지 말라. 금일, 융(瀜)을 책봉하여 세제로 삼아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한다. 예조에서는 세자시강원의 규모에 맞춰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을 구성하여 세제를 이끌도록 하라. 나라의 존망이 함께하는 사안이므로 교육에 내실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병조에서는 세자익위사의 전례에 근거해 세제익위사(世弟翊衛司)를 설치하여 세제를 호종토록 하라. 이들 관직은 실직 또는 겸직으로 사령하되, 시강원은 학식과 덕행이 출중한 3인, 익위사는 경력과 근면을 갖춘 2인으로 한정한다. 승정원 청사를 동궁 처소로 하여, 그곳에서 시강원을 통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라. 익위사는 세제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하시었으니, 그동안 두어번의 철조 논의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한 것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한 왕께서 대통을 명확히 하심으로, 후세에 종사를 보존하시고자 내리신 나라를 위한 결단이었다. 동년 12월 14일에 왕세제 대리청정에 관하여 전교하시자, 조정의 원로인 한성판윤 하빈군 이휘 등이 그 부당함을 아뢰자, 엄히 하교하시기를 " 세종조와 숙종조 등의 전례에 따라 용인(用人), 형인(刑人), 용병(用兵)은 과인이 직접 결단하고, 이외 국정은 세제의 결단에 의거 시행하게 한다. 다만, 용인 가운데 전조 수장에 대한 평정 및 참하관 이하에 대한 임면, 그리고 형인 가운데 형옥 2년 이하에 해당하는 논죄는 세제에게 일임한다. 관련된 계본, 계목, 차자, 장계, 상소는 모두 동궁을 경유하도록 하고, 그 가운데 중대한 사무와 관계되어 세제가 직접 결단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사항은 어전에 품처(稟處)하도록 한다. 청정을 실시하는 16일을 기해 현행 승정원을 개편하여 실직(實職) 관리로 하여금 승정원 해당 사무를 담당하게 한다. 승정원에서는 어전에 올려지는 계본, 계목, 차자, 장계, 상소 가운데 세제가 재결(裁決)해야 할 것들을 모두 동궁으로 돌리도록 하라. 이조와 병조에서는 승정원에 명할 관리를 의망하도록 할 것이다. 우선 승정원에 관리가 충원되기 전까지 세제익위사에서 해당 임무를 잠정 대행하게 하며, 세제에게 올리는 상소(上疏) 역시 규례에 따라 상서(上書)로 호칭한다. 아울러 명일 15일자로 지역별 특색화제도를 공식 폐지하도록 하겠으니, 관계된 관청에서는 관련 법령을 제도에 맞게 개수할 것이다. 임금이 여러 사유로 정무를 더 이상 담당할 수 없게 되면 세자(世子)로 하여금 청정(聽政)을 하도록 하는 것이 국조 이래 전례였다. 오늘 이 전교는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과인의 깊은 뜻을 잘 알고 문무백관들이 서로 협력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하시었으니, 왕 스스로의 병세가 위중하여 짐을 알고, 혹여 종사에 누가 생기지 않도록 세제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대해 익힐 수 있도록 배려함이었으니, 신민의 입장에서 볼 때 어찌 슬픈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왕께서는 계속된 위중한 병환에서도 종사를 생각하시어, 정무를 돌보는 것을 멈추지 아니하셧으니, 개국 613년 정월 초 2일에 4품관 이상 대부의 평정과 과거 인사등과 관련하여 일부 문제점을 해결하시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동년 정월 초 6일에 왕의 병이 중하메 세제에게 전위(傳位)하시고 아울러 유교(遺敎)를 내려 당부하시기를, "과인의 몸이 평소와 같지 않아 지난 11월에 교서를 내려 세제를 책봉하고 12월에는 대리청정의 전교를 내렸으나, 끝내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므로 유교(遺敎)를 내려 장차 일에 대비하고자 한다. 대보(大寶:옥새)를 세제에게 전해 과인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하고, 그에 관하여 말한다.과인이 비록 덕(德)이 없고 공(功:공업) 또한 없지만, 재위에 있으면서 지켜 고수하고자 한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두교서를 비롯해 그간 내린 교서와 전교를 살펴 헤아린다면 과인이 뜻한 바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 차례에 걸쳐 전교한 명령이 한결같다고 해서, 또 규정과 전례가 시종 일치한다고 해서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朝鮮)'을 '조선'답게 하려는 것만큼은 대체로 분명하게 하였다. 관제, 품계제, 과거제, 천거제 등을 현재와 같게나마 마련하고 유지한 것이나 혜종경렬대왕(惠宗景烈大王)을 추존하고 충의공(忠毅公), 충경공(忠敬公) 등을 추증하고 추시하는 일에 전후와 절차를 상세하게 밝힌 것은 대개 그와 같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을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묘정에 배향하고자 하는 생각이 평소에 있었으나, 결국 시도하지 못한 것은 조정에 그보다 중대한 일이 산적해 있고 사업 자체에 선뜻 진행시킬 수 없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제는 과인의 이러한 말을 유념하도록 하라. 인재를 등용하고 그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임금이 시행하는 매우 특별한 은전(恩典)이다. 때문에 인사 문제는 조정 관리들로 하여금 전담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임금이 결단하여 그 거취를 결정하는 것에 모든 일이 달려 있다. 문관(文官)과 무관(武官), 잡직(雜職), 토관(土官) 가운데 직임을 맡길 자가 누구인지를 신중하게 고려한 후에 관직을 제수하며, 임명이 불가할 때와 다시 등용할 때, 물러서게 할 때 등을 일관되게 하여 전교해야 한다. 세제는 과인의 이러한 말을 유념하도록 하라. 좋은 일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매우 아름다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잘못된 일을 문책하고 징계하는 것 역시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된다. 그리 하여야만 좋은 일을 칭찬하는 모습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칭찬을 받는 사람이 스스로를 명예롭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금이 시행하는 상벌(賞罰:상과 벌)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니, 칭송과 포상만을 위주로 하여 정사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제는 과인의 이러한 말을 유념하도록 하라.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조정에서 하는 일이 치밀하지 못하고 시행할 명분 또한 없게 된다. 기강이 세워지는 것은 바로 의리(義理)가 모여서 되는 것인데, 의리를 진작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인사와 상벌을 모두 합당하게 하고 시책과 제도, 법령, 행실 등을 모두 사리에 맞게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또 어제 내린 명령과 오늘 내린 명령이 서로 다르면 백성들이 점차 따르지 않게 되고, 법(法)을 집행함에 항상 공정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점차 진실로 잘못된 것을 느끼지 않게 된다. 세제는 과인의 이러한 말을 유념하도록 하라. 임금이 장기간 국정을 비우게 되면 조정과 백성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게 된다. 과인이 행한 실정(失政:잘못된 정치)을 돌이켜 고찰해 본다면 능히 그 폐해를 알 수 있을 것이니,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인이 처음으로 종묘에 고(告)한 내용과 실제 행동으로 보인 정사를 대조하여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매사 노력할 것이다. 세제는 과인의 이러한 말을 유념하도록 하라" 하시었다. 그 유교를 받자온 대소신료들이 종사를 생각하시는 왕의 성심과 왕의 병환이 돌이킬 수 없이 위중하여졌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정월 초 6일에 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危重)하여 경각에 이르메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하빈군 이휘를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삼아 뒷일을 부탁하고 당일 자시(子時)에 정전(正殿)에서 훙서(薨逝)하니 향년(享年) 30세요 재위 4년 이었다. 왕은 사저에 있을때부터 덕기(德器)가 이미 성숙하였고 엄중(嚴重)하면서도 관후(寬厚)한 성품이 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고금의 사적을 박람(博覽)하여 학문이 박문강기(博聞强記) 하였으며 문장은 정숙(精熟)하고 문예(文藝)를 이루어 교서를 반포함이 절로 문장을 이루었다. 삼가 성헌(成憲)과 법도를 지키고 정사를 행함에 조정 중신을 예경(禮敬)하고 대간을 예우(禮遇)하여 치도(治道)의 근간으로 삼으시어 충직한 간언을 가납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다. 본조가 창업(創業)의 대업을 이루어 나라를 연 이래 종사(宗祀)가 수백년 승습(承襲)하다가 조정에 권간(權奸)의 무리가 파당을 형성하여 사욕을 취하고 군주의 성총(聖聰)을 옹폐(壅蔽)함이 극에 달하여 청류(淸流)를 도륙하니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탐학(貪虐)한 무리들이 국정을 전횡하니 국운이 날로 쇠하여 남적(南賊)의 무도한 총칼에 종사의 안위가 조석에 이르렀다. 개국 519년 경술년(庚戌年) 오백년 종사의 홍업(鴻業)이 흉적(凶賊)에 참탈(慘奪)되어 종묘와 사직이 일시 폐(廢)하고 국론과 민심이 나날이 흩어져 인륜의 도가 끊어지고 사습(士習)이 날로 침식되니 삼대(三代)의 치를 기약할 길이 없었다.  왕이 대의로서 분연이 일어나 열성조(列聖祖)의 보살핌과 천운(天運)에 힙입어 종사(宗祀)의 대통을 이어 종묘와 사직을 반석위에 굳건히 하고 재조(再造)의 공업을 이루었으니 그 공과 덕이 지난날 동주(東周)의 성세를 이끈 주공(周公)과 흥한(興漢)의 대업을 이룩한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에 견줄 만 하다 할 것이다. 왕이 정월 초 6일에 훙서하메 조정의 문무 백관과 관학의 제생(諸生), 시민(市民), 궁벽한 시골의 촌부에 이르기까지 애통(哀慟)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그 비통함으로 통읍(慟泣)함이 만학천봉(萬壑千峰)에 가득하였다. 하늘이 왕의 수명을 늘려주지 않아 치세의 단명함에 이르렀으니 어찌 애달다 하지 않겠는가 행장은 삼가 조봉대부 행사헌부지평 겸시호도감낭청 장운익과 통덕랑 예조정랑 겸시호도감낭청 성혼이 짓고, 정헌대부 선공감 제조 겸시호도감 제조 이휘가 고쳐썼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卿)의 노고가 참으로 크오. 다만, 원임규장각 제학 이동진(李東珍)의 약조를 믿고 좀 더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소. 경이 찬술한 행장(行狀)은 이동진이 선왕(先王)의 행장을 마무리 짓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믿소."
하였다. 

3월 30일 계축(癸丑)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3월 31일 갑인(甲寅)
○ 상(上)께서 경복궁에 계신다.







승훈랑 행승정원주서 김성이 쓰다.


개국620(2011)년 3월 15일 기록 : 승훈랑 행승정원주서 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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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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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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