走馬圖(주마도)
4. 극선이 (3)
이 소식을 접한 영인은 며칠 전부터 만주에 출장차 머물던 김명석에게 급히 부탁을 하였다. 그러잖아도 만주에 있는 공장이 관동군의 군수공장으로 강제 매각한다는 통보를 받고 전전긍긍하던 터였다.
그리하여 김명석은 산영약품에 있는 만주의 네 개 지점을 처분하고, 그로 말미암아 모은 돈으로 서점을 하나 세웠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간다던가. 하는 수 없이 서울에서 콕 박혀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명석에게 찾아온 남석이 갑작스런 이야기를 꺼냈다.
“나 참. 이를 어찌한다.”
투덜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이때 명석에게 남석은, 자신에게 창씨개명을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창씨를 하면 장차 의식주도 보장될 것이고 또 자신의 사업이 망할 리가 없으니 하루빨리 개명을 하라는 독촉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구먼. 흥.”
명석은,
“자네 아들 소식을 듣긴 하나.”
“응.”
“어떻게 되었던가.”
“장씨네 집도 어수선하다.”
재작년에 영인의 백부가 죽고, 장례를 치른 호기 노인의 자식들이 황해도에 있는 호균의 집에 모두 모였다.
“재산의 문제도 문제지만 추후에 우리 집안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듣고자 한다. 빠짐없이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구나.”
영인이 먼저 발기하였다. 영인을 비롯해 영철, 영화, 영방, 영도가 모여들었다.
“난 전반적인 살림을 차리지도 못하고 이렇게 말도 없이 산 버릇이 있어서 달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겠네요.”
영화가 앞서서 이야기를 꺼냈다. 간신히.
“나는 뭐 안 그렇겠소?”
영도가 퉁명스럽게 얘기한다.
“작은오빤. 의견이 있나요?”
영철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
走馬圖(주마도)
4. 극선이 (4)
“의견이 있을 리 없지. 나라 일을 하랴, 집안일을 하랴. 몸이 모자랄 지경이지. 내 그 심정은 안다. 다만. 나도 살림에 허덕이는 바람에 만주에 불가피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유념했으면 한다.”
더욱이 영철은 일 년 전부터 다시 터진 별선의 잔병치레로 더욱 골치를 앓고 있었다. 별선과의 사이에 딸자식은 두었으나 지금 여고보(중고등과정)에 입학하였지만 창씨를 하지 않았으므로 입학이 불가하다는 학무국 당국의 통보로 말미암아 학업을 하고 싶어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장영철 일가에게 불어 닥친 ‘불령선인’이라는 딱지는 이들의 살림살이마저 옭아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탈을 하고프지만 거의 불혹(不惑)에 가까운 영철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영철은 일본과의 타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고민을 하였다. 유학 시절에 일본유학을 하면서 빨아들인 사회주의라는 대단한 모험기(冒險記).
그 모험기를 영철은 며칠 전에 사둔 원고지를 서안 위에 놓고 일일이 생생하게 이야기를 적어낸다. 그 이야기가 결국 신문에 나고야 말았다.
이후에 영철은 어준하와 서종필, 그리고 김명석을 불러다가 몇 년 전부터 계획하던 단체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결국 불가피하게 총독부 당국에 허락을 받았다.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를 버리고 사회단체(社會團體)의 결성을 조건삼아 ‘사회협회(社會協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삼아놓고 있었다. 조선어를 금지하여 ‘국어’라 일컫는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하는가하면, 백의(白衣)를 차려입는 것을 버리고 국방색이라는 ‘카키색’으로 된 옷을 입도록 하고, 또, 방공호(防空壕)를 만들게 하거나 혹은 소개(疏開)하도록 독려하고, 또 조선 청년들로 하여금 원치 않는 징병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끌고 가게 하였다. |
정병욱
[문학회지] 제0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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