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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병욱
작성일 개국628(2019)년 12월 22일 (일) 23:26  [자시(子時):삼경(三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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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일간] 제011호
 

 
 
전라도 전주부 백성 시사일간사 발행 - 개인 발행 소식지 제011호 - 개국628(2019)년 12월 22일
 
 
[보덕] 창세기(創世記) <마지막편>
 
뒤이어 과전제(科田制)를 실시하면서 선사국 개국 이래 벼슬아치들이 사적으로 마련한 땅을 모조리 국가에 귀속해 백성들에게 공을 세운 대가로 땅을 매기니 정운에게 1000결, 백을에게 900결, 장보공에게 800결, 도국에게 700결, 온하수에게 600결, 봉용서에게 500결, 온일홍에게 400결, 온연방에게 300결, 궁호보에게 200결, 궁보조에게 100결, 영랑과 길보에게 각각 50결, 길석과 황보국, 남궁부에게 각각 40결, 옥보와 이봉소, 이운소 형제에게 각각 30결, 이방소와 도원, 도위, 도봉, 도진, 도우, 도석, 고태수에게 각각 20결을, 동방일, 동방속, 동방봉우 형제와 구영성, 호판성, 신강, 권봉달, 유월야, 양광웅, 임희량, 김공달, 설언호에게 각각 10결을 하사하였다.
당시 과전제를 실시한 것은 실로 파격적인 발상이었으며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재위 25년 태후(보왕의 왕비)가 세상을 떠났다.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온 조정은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고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하였다.
재위 30년 온하수의 딸을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 온하수가 이때 기쁨을 금하지 못한 채 낙루(落淚)를 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듬해에 왕은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보종의 전례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다.
재위 32년 왕이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나 태자에게 왕위를 이어줄 것을 선언하였다. 인사는 그대로였다.
즉위년 10월에 온하수의 딸을 문호왕후라 칭하였으며, 상왕의 허락을 얻어내어 후궁을 맞아들이니 그 후궁은 궁보조의 딸로 정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선대의 왕비들에게 각각 시호(諡號)를 내렸다. 덕종의 왕비를 선덕왕후(宣德王后), 봉종의 왕비를 신덕왕후, 보왕의 왕비를 인덕왕후(仁德王后)를 추숭하고, 방왕의 왕비를 명덕왕후(明德王后)라 봉하였다.
재위 2년에 상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후의 근심은 더해갔다. 마음을 의탁할 길이 없어 근심하던 터에 임금에게 별궁을 마련하도록 청하니 왕이 눈물을 머금어 허락하였다. 그래서 왕이 서울 남부에 별궁을 마련하니 자애를 베풀 줄 아는 태후의 덕행을 높이 사 자애궁이라 하사하였다.
재위 4년 봄에 인사가 개편되니 의정부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정운을 영의정에, 백을을 좌의정에, 장보공을 좌의정, 도국을 좌찬성, 온하수를 우찬성, 봉용서를 좌참찬, 온일흥을 우참찬, 유월야를 의정부사인, 양광웅을 의정부검상, 임희량을 의정부사록에 제수했다.
같은 해 여름에 강원도에 부사를 폐지할 것을 명하고, 감영(監營)을 설치하여 관찰사(觀察使)가 직접 관리하도록 하여 그 아래로 도사(都事), 검률(檢律), 심약(審藥)을 두도록 했다. 이후 온연방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파견하고 궁호보에게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 김공달에게 강원도검률, 설언호에게 강원도심약에 명하였다.
왕은 선왕의 전례에 따라 오위의 병력을 다시 뽑으니 오위장 12명, 상호군 9명, 대호군 14명, 호군 12명, 부호군 54명, 사직 14명, 부사직 123명, 사과 15명, 부장 25명, 부사과 176명을 뽑았다. 그만큼 군사체계가 잘 갖추어졌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재위 5년 자애궁에 기거하던 태후가 외국에서 사신으로 온 승려 하나를 불러들였다. 승려는 태후에게 불교라는 종교를 전파하니 그 교리를 터득하여 스스로 신도가 되었다. 이 소식이 조정에까지 전해지니 설왕설래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영의정 정운이 직접 나서서 왕에게 아뢰니,
“소신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시되 온건적 태도로 수용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큰 위험 없이 잘 넘어갈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러면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니 하루 속히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일 것이옵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영돈녕부사 이봉소가 이를 의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왕에게 간언(諫言)을 올리길
“신 영돈녕부사 이봉소가 아룁니다. 이번 일은 우리나라의 균형을 깨뜨리려는 획책인 줄로 아뢰옵니다. 한낱 하잘 것 없는 신분이 한 나라 임금의 어머니를 욕되게 하였으니 이는 한 나라의 여론과 국론을 이간질시켜 득을 보려는 술책인줄로 아뢰오.”
왕은 이봉소의 간언을 듣고서 태후의 처소에 갈 것을 명하여 친히 태후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 야심한 밤에 출궁해 자애궁에 도착하니 태후가 문밖으로 몸소 나와 왕을 맞이하였다. 세간에 나도는 소문의 진위를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왕을 위해 태후가 직접 승려를 만나도록 하니 승려가 합장하며
“소인 승려 도림(道林)이옵니다.”
자기를 소개했다. 출신이 어디인줄도 모르는 이 승려의 옷맵시는 누추하기 이르기 없었다. 울어 나오는 누더기를 덕지덕지 붙인 것 같은 누더기 법의에 구멍 난 것을 꿰맨 듯 보이는 버선이 눈에 들어왔으나 승려의 양 눈에는 총총한 빛이 역력했다. 태후는 웃으며
“나는 불교라 하는 것이 이렇게 내 심사를 편안히 하는 것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석가모니가 귀한 몸으로 태어나 온갖 권세와 지위를 버리고 백성들 안으로 들어와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감회에 젖곤 한답니다. 그뿐입니까. 도림 선사(禪師)의 법문을 하나하나 듣고 있노라면 웬일인지 마음이 차츰 편안해지더이다.”
왕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이 이 나라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한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라가 안정을 되찾았다고는 하나 우매한 백성들이 제 잇속에만 눈독 들이는 대신들의 농간에 놀아나 하루하루를 근심 속에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야지요.”
왕은 태후에게서 넓은 혜안을 발견하였다. 태후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 현혹시켰는지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었으나 속는 셈 치고 승려에게 다가갔다. 승려에게 출신을 물으니 껄걸 웃으며 승려가 말한다.
“소승이 어느 출신이라고 해서 그게 무엇이 중요합니까.”
왕이 그 이야기의 내막을 알아들은 듯 파안대소하기에 이르렀다.
“딴은 그러하이.”
“기실은 이 나라의 산간벽촌(山間僻村)에서 났으나 어려서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두루 유람하다보니 이치를 두루 깨우치게 되었나이다. 소승이 타국에서 불법(佛法)을 터득하고 난 뒤 이 나라에서 널리 진리를 퍼뜨리고자 하는 포부로 돌아왔습니다. 하여 시정에 이르러 설법을 하니 일부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여 마지않으니 태후께서 친히 소승을 불러들여 이렇듯 말벗으로 지내고 있사옵니다.”
왕은 그제야 안심하였다. 이후 태후에게 문안을 드릴 때마다 늘 도림을 찾아 불교의 교리를 들으며 차츰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이에 왕은 도림을 궁궐에 살게 하여 그의 설법을 깊이 새겨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적지 않았으니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속셈이라는 이유로 내쫓을 것을 청했으나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왕이 상심하기 시작했는데 고태붕(高泰朋)이라는 이가 나서서 도림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고태붕은 고태수에게는 먼 친척동생이 되니 왕족의 신분이나 미천하기 그지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그가 불가에 귀의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니 백성들은 새로운 체제에 낯설어해하며 혼란스러워 하였다. 이런 충직한 태도를 눈여겨 본 왕은 그 동생 태박을 고태수의 의사를 고려하여 영량의 양자로 입적하도록 하니, 태박을 충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충부는 인사권과 그 밖의 나라 안팎의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직무를 맡아 하는 행정기관이었다. 그런데 이 관청에서조차도 구세력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니, 그 기능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마비되어 있었다.
왕은 한때 외척이기도 했던 이봉소에게 은밀히 불러내어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국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방법은 오직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임을 밝혔다. 이에 이봉소는 왕의 뜻에 반대할 의사를 밝힐 명분을 찾지 못한 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봉소는
“대신 신에게 좋은 묘책이 있나이다.”
“말씀해보시오.”
“불가에 독실하다는 고태붕을 시험해야 할 것이옵니다.”
“시험이라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고태붕의 목을 쳐서 그 본을 보이셔야만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신심을 돈독히 할 것이오니 하는 말이옵니다.”
이봉소의 말에
‘가뜩이나 죽임을 당한 궁씨들의 피비린내가 수십 년 동안 풍기는 판국인데 아까운 인재를 또 죽여야 한단 말인가.’
왕은 거부를 하고자 했지만 목숨 하나를 거둘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을 체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다음날로 이봉소의 뜻에 따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고태붕을 즉결 처형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왕이 이 광경을 친히 보고자 신료들을 거느리고 행차하니 왕이 친국(親鞫)하여 그를 추궁한다.
“네놈은 어이하여 민심을 현혹하여 사교(邪敎)를 퍼뜨리려고 드느냐.”
“소인은 나라의 혼란을 바로잡을 이가 없는 것에 통탄한 나머지 도림의 도량에 감복하여 믿은 것일 뿐. 그 이상은 없었나이다.”
“네 이놈! 진정으로 그리 믿었더라면 네가 스스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을 어찌하여 사교를 퍼뜨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려고 드느냐!”
왕이 윽박지르다 시피 하니 죄인이 그제야 본심을 드러내었다.
“전하! 작금의 사태를 살펴보건대 필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이옵니다. 지금 정국은 구파(舊派)의 손아귀에 놀아나 아수라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저 멀리 서역(西域)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싸움과 더불어 점차 문화가 탁해져 미개하기 그지없사옵고 우리나라 같은 동역(東域)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임에 있어 문화가 발달하였으니 하루 속히 동역의 문물을 받아들여 선사국의 부흥에 힘을 쓰고자 역모를 꾀하였나이다.”
이에 죄인을 살리자는 입장과 죽이자는 입장으로 갈라져 논쟁을 하니 기존의 제도(궁씨가 세운 제도)에 지지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부의 관리를 대표로 하는 후진(後進)과 정운을 대표로 하는 선진(先進)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번 일은 왕이 신중히 생각하겠노라 하며 다음날에 다시 국문을 열어 결정을 짓자고 하며 잠시 신하들에게 물러나라고 명했다. 그날 밤, 태후가 친히 왕의 처소에 찾아와 죄인을 죽이지 말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한 생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음을 피력하였다. 이에 태후가
“차라리 말벗을 삼고 있는 도림과 함께 죽이심이 어떠하오?”
왕의 의사를 물으니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림을 죽이다니요?”
“도림은 이미 후학을 양성하였고 그 후학들도 도림 못지않게 법력(法力)이 높다 하더이다. 그러니 이 어미를 염려하지 마세요.”
평소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닌 태후이건만 이런 슬픈 현실 앞에서도 왕을 위해서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실은 도림도 이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알았다고 하더이다. 하여 미리 나라에 들어올 때부터 자연을 벗 삼아 깊숙한 동굴이며 숲이며 어느 장소든 마다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며 남몰래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하더이다. 그랬던 게 거의 삼십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인들 거두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겠느냐며 파안대소를 하더이다.”
태후도 섭섭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었으나 나라의 대사이니만큼 찝찝한 마음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왕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황상. 도림을 죽이시어 나라에 본을 보이세요. 어디 도림뿐입니까. 그 밖의 피붙이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내놓을 것이니 마음을 놓으시어 선정을 베푸세요.”
왕이 그제야 끄덕이며 그리 하겠다고 하니 태후는 웃으며 조용히 물러났다. 태후의 집안은 한때 궁정승의 권세에 버금갈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권세가 땅에 떨어질지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 살았던 태후는 든든한 버팀목을 찾아보던 끝에 불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태후는 당신의 처소에 대놓고 불상을 들여놓아 기도를 드리고 도림의 후학들인 승려들을 불러다가 선왕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대신들을 불러들여 백성들이 지켜보게끔 한 뒤 고태붕과 도림을 잡아들여 그들을 즉시 처형하고자 했다. 그런데 죄인들은 임금 앞에 잡혀왔음에도 얼굴에는 근심 없이 태평한 표정을 지으니 그 영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수군대었다. 그런데 두 죄인이 입으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중얼거린 말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었다.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진실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왕은
‘어찌하여 위험이 닥쳐옴에도 불구하고 저리 편안한 표정을 지을까. 역시 믿음은 그만큼 진실하면서도 깨끗한 마음이구먼.’
진실한 마음과 깨끗한 마음을 두루 본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주체하지 못하는 눈물을 억누른 채 명을 내렸다.
“죄인들을 즉결 처형하라.”
지엄한 명령에 의해 죄인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죄인들이 처형되는 순간 왕은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지 못하는 마음을 거두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잘들 가시게.’
이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빌어주었다.
 
 
불자란 아름답구나.
 
이 나라 최초의 불자가 된 도림과 고태붕의 목이 베어져 죄인들은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그들의 피가 저자 바닥에 뿌려지자마자 푸르른 새싹들이 자라나더니 풀잎이 무성히 자라나는 게 아닌가. 그 광경이 하도 기이하여 왕과 신하들은 말할 거 없고 백성들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하지만 풀잎들 사이에 검은 막대기 같은 것이 솟구치더니 점점 자라나서는 한 그루의 큰 나무로 자라났다. 모두들 신묘(神妙)한 광경에 감복하여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런 노래가 불리게 되었다.
불자란 아름답구나.
신성하구나.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지 아니하고
꿈같은 향내가 궁궐을 맴도는 구나.
불자의 푸른 눈은
빛으로 보답하고
그 빛은 화려한 비단결보다
더욱 아름답구나.

왕은 이에 감복하여 그 이튿날에 두 죄인이 처형된 장소 부근에 터를 사들여 절을 세우게 되니 그 절을 흥국사라 하여 도림의 제자들을 불러다 이들의 명복을 빌어주도록 했다. 뒤이어 왕이 건국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만드니 국내에서 박해를 당하는 불교를 도입하여 태후의 불도(佛道)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여 한 나라의 국교로 삼기 위함이었다.
뒤이어
“대신들은 들으시오.”
왕의 말에 대신들이
“예, 전하.”
대답하자 왕은 명을 내렸다.
“어제의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대신들은 들으라. 차후에 이와 같은 흉사를 빌미로 당파싸움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노라. 짐의 말에 추호라도 거스른다면 즉결 처형하되, 삼족(三族) 하다못해 오족(五族)을 멸할 것이며 이는 내 후대에 이르기까지 대대손손 이어질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고태붕과 도림의 그 거룩한 희생을 결코 헛되게 할 수 없음을 밝히니 차라리 그동안의 미움을 거두어 탕평을 함이 어떠하겠는가. 그대들을 신하로 둔 죄가 너무나도 무겁도다. 그리하여 과인의 뜻에 묵묵히 따라주기 바랄 뿐이오.”
신하들은 일제히 왕의 뜻을 받아들여 천세를 높이 부르니 왕이 이에 화답하듯 선왕인 방왕에게 법종(法宗)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재위 6년 유월에 태후가 병이 들자 왕이 근심하여 자애궁에서 나와 자신과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를 태후가 받아들여 함께 왕 내외와 함께 살았으나, 그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나니 온 백성들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정월에 태후인 명덕왕후가 생전에 쓰던 자애궁에 있는 불상을 흥국사에 기증하니 흥국사 안에 있는 불상이 낡고 녹슬었으므로 보기가 매우 흉측하여 근심이 자심했던 흥국사의 승려들이 이에 화답하듯 그 불상을 새로이 받들어 모시고 이를 위한 잔치를 성대히 열었다. 이에 왕이 친림(親臨)하니 백성들도 한마음으로 부처에 기도를 드렸다. 그날 하늘이 맑았음에도 굵은 빗줄기가 잠시 내리더니 그치면서 오색 무지개가 뚜렷한 형체로 빛나며 불상에 영롱한 빛을 발하니 온 사람들이 크게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재위 10년 후궁인 궁비(궁보조의 딸)가 회임하자 이에 왕은 덕흥비(德興妃)로 봉하고, 왕비인 온씨를 폐위하여 자애궁에 유폐(幽閉)하였다. 뒤이어 왕은 궁비를 왕후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덕종과 법종에 이르기까지의 기록들을 간추려 내도록 명하여 실록을 편찬하도록 돈령부에 명하였다. 실록은 2년 동안 찬수(撰修)한 끝에 그 빛을 보게 되니 나라의 근본이 탄탄하기에 이르렀다.
재위 12년 윤사월에 왕은 법종에게 문흥대왕(文興大王)이라는 칭호를 보태 올렸다. 뒤이어 한 나라의 실록이 완성되어 대궐의 서고에 보관되었다.
 
 
그동안의 미움을 거두어 탕평을 함이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후진에 속한 인사들을 모두 척결(剔抉)하는 의지를 표명하여 인사권을 담당했던 충부를 혁파하니 대신 고태박만 제외한 이하의 관리들을 모두 유배 보내고 파직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이를 대체할 기구로 이조(吏曹)를 세우니 그 수장인 이조판서(吏曹判書)에 고태박을 임명하여 인사권 전반을 담당하도록 지시하였다.
같은 해 구월에 태자가 태어났다. 태자의 이름을 운(雲)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기쁨이 오면 슬픔이 오는 법. 불행이 찾아오게 되니 영의정 정운이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슬픔을 감출 새도 없이 인사를 단행했다. 백을에게 영의정, 장보공에게 좌의정, 도국을 우의정, 온하수에게 좌찬성, 봉용서에게 우찬성, 온일흥에게 좌참찬, 궁보조에게 우참찬, 영랑에게 영중추부사, 길보에게 판중추부사, 길석에게 지중추부사, 황보국에게 동지중추부사, 남궁부에게 첨지중추부사, 옥보에게 중추부도사 겸 경력에 명하였다.
재위 14년 순교한 고태붕을 흥국공(興國公)에 봉하였다. 이후 왕이 백성들의 본보기로 불가에 귀의할 것을 천명하니 대신들은 모두 왕의 명령 앞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토를 다는 일은 사라졌다.
재위 15년 왕은 친히 한 나라의 법전이라 할 수 있는 선사법전(善思法典)을 편찬하도록 명하니 신료들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법전 편찬에 만전을 기하였다.
재위 20년 법전이 완성되어 온 나라에 공포하니 혼란스러운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순간이었다. 이 법전에서는 고씨(高氏) 중심으로 왕위를 계승할 것이며 왕실의 성씨로 삼을 것을 천명하며 숭불(崇佛)로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천명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이 해에 최초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여 시험을 치르게 하니, 왕이 직접 나서는 알성시(謁聖試)를 실시하게 하여 한때 일국의 재상으로 있었던 조재의 아들 연을 알성급제(謁聖及第)하는 영광을 안았다. 조연을 눈여겨 본 왕은 전관(前官) 인부대신을 파직하여 유배를 보내고 조연을 인부대신으로 삼아 인부를 혁파하는 작업을 하도록 명하였다.
재위 22년 인부를 혁파하여 충부 혁파의 전례에 따라 인부의 관리들을 유배하고, 조연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명하였다. 인부의 업무는 각각 돈녕부와 중추부에서 담당하도록 명하였다.
재위 24년 이조참판 조연이 왕에게, 전임 영의정인 아버지를 여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던 정말다를 천거하여 의부대신으로 명하여 의부를 혁파하는 임무를 맡겼다.
재위 25년 의부를 혁파하도록 하여 인부 혁파의 전례에 따라, 의부의 업무를 각각 돈녕부와 중추부에서 담당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정말다를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명하였다.
재위 26년 예부대신과 지부대신, 신부대신으로 있는 전관들을 모두 전례에 따라 파직하여 유배 보내고 후임으로 각각 이봉소, 이운소, 이방소 세 형제들을 겸임하여 맡게 하고 이들 기구를 혁파할 것을 명하였다.
재위 27년 예부, 지부, 신부를 모두 혁파하고 이에 속한 관리들을 모두 파직하여 유배를 보내었다. 뒤이어 두 번째로 치른 과거에서 두 사람을 장원급제(壯元及第)하니 바로 남궁부의 아들인 남궁병, 옥보의 아들 옥상이 그들이다.
이들을 급제시키자마자 바로 남궁부를 이조정랑(吏曹正郎)에, 옥상을 이조좌랑(吏曹佐郎)에 임명하였다.
재위 31년 태자가 장성함을 본 왕이 대리청정을 명하였으나 태자가 이를 거둘 것을 주청하니 왕이 스스로 보위를 태자에게 물려줄 것을 명하여 상왕으로 있을 것을 명하니 신하들이 이를 만류하였다.
재위 35년 칠월. 부왕이 유명(遺命)을 남기니 자신이 불가에 귀의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궁씨들과 온 나라의 백성들을 핍박하지 마라. 그 사람들은 본디 순한 사람이니 그 사람들도 한 핏줄이 아니던가. 부디 불도를 하루 속히 받아들여 죄를 씻도록 하라. 마음의 도를 닦아야 나라가 살아난다.”
그 해 초가을인 구월에 왕이 승하하였다. 왕의 승하를 백성들은 크게 슬퍼하였다.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왕이었다. 태자 운이 왕의 시호를 개종(開宗)이라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태자가 보위에 오르니 이이가 바로 운왕이다. 왕위에 오른 것을 본 태후가 이 말을 한 뒤 홀연히 궁궐을 나서니 그가 한 말은 이렇다.
“나는 불도를 믿고프다. 그만 물러나고 싶으이.”
선왕이 생전에 불도를 믿는 동안 태후는 왕의 뒤를 따라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의 하세를 지켜보며 깊은 감명을 얻으니 태후가 비로소 불도에 귀의하였다. 그는 남은 생애를 지내는 동안 왕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자애궁에 계시는 폐비를 불러들여 태후로 봉하시어 궐로 불러들이세요. 부탁입니다, 황상.”
왕은 태후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자애궁에 유폐된 온씨를 대궐로 불러들여 문호왕후(文湖王后)에 봉하였다. 이윽고 문호왕후가 돌아오니 태후가 말하길,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이내몸은 불가에 몸을 담글 팔자인가 봅니다. 그러니 내 아들과 이 나라를 부탁드립니다.”
하며 당부하니 문호왕후는 그런 태후에게 당신 손으로 만든 염주를 말없이 태후의 양손에 쥐여 주었다. 문호왕후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후는 흥국사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니 내 아들과 이 나라를 부탁드립니다.
 
재위 24년 이조참판 조연이 왕에게, 전임 영의정인 아버지를 여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던 정말다를 천거하여 의부대신으로 명하여 의부를 혁파하는 임무를 맡겼다.
재위 25년 의부를 혁파하도록 하여 인부 혁파의 전례에 따라, 의부의 업무를 각각 돈녕부와 중추부에서 담당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정말다를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명하였다.
재위 26년 예부대신과 지부대신, 신부대신으로 있는 전관들을 모두 전례에 따라 파직하여 유배 보내고 후임으로 각각 이봉소, 이운소, 이방소 세 형제들을 겸임하여 맡게 하고 이들 기구를 혁파할 것을 명하였다.
재위 27년 예부, 지부, 신부를 모두 혁파하고 이에 속한 관리들을 모두 파직하여 유배를 보내었다. 뒤이어 두 번째로 치른 과거에서 두 사람을 장원급제(壯元及第)하니 바로 남궁부의 아들인 남궁병, 옥보의 아들 옥상이 그들이다.
이들을 급제시키자마자 바로 남궁부를 이조정랑(吏曹正郎)에, 옥상을 이조좌랑(吏曹佐郎)에 임명하였다.
재위 31년 태자가 장성함을 본 왕이 대리청정을 명하였으나 태자가 이를 거둘 것을 주청하니 왕이 스스로 보위를 태자에게 물려줄 것을 명하여 상왕으로 있을 것을 명하니 신하들이 이를 만류하였다.
재위 35년 칠월. 부왕이 유명(遺命)을 남기니 자신이 불가에 귀의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궁씨들과 온 나라의 백성들을 핍박하지 마라. 그 사람들은 본디 순한 사람이니 그 사람들도 한 핏줄이 아니던가. 부디 불도를 하루 속히 받아들여 죄를 씻도록 하라. 마음의 도를 닦아야 나라가 살아난다.”
그 해 초가을인 구월에 왕이 승하하였다. 왕의 승하를 백성들은 크게 슬퍼하였다.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왕이었다. 태자 운이 왕의 시호를 개종(開宗)이라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태자가 보위에 오르니 이이가 바로 운왕이다. 왕위에 오른 것을 본 태후가 이 말을 한 뒤 홀연히 궁궐을 나서니 그가 한 말은 이렇다.
“나는 불도를 믿고프다. 그만 물러나고 싶으이.”
선왕이 생전에 불도를 믿는 동안 태후는 왕의 뒤를 따라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의 하세를 지켜보며 깊은 감명을 얻으니 태후가 비로소 불도에 귀의하였다. 그는 남은 생애를 지내는 동안 왕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자애궁에 계시는 폐비를 불러들여 태후로 봉하시어 궐로 불러들이세요. 부탁입니다, 황상.”
왕은 태후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자애궁에 유폐된 온씨를 대궐로 불러들여 문호왕후(文湖王后)에 봉하였다. 이윽고 문호왕후가 돌아오니 태후가 말하길,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이내몸은 불가에 몸을 담글 팔자인가 봅니다. 그러니 내 아들과 이 나라를 부탁드립니다.”
하며 당부하니 문호왕후는 그런 태후에게 당신 손으로 만든 염주를 말없이 태후의 양손에 쥐여 주었다. 문호왕후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후는 흥국사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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