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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병욱
작성일 개국628(2019)년 12월 7일 (토) 20:00  [술시(戌時):초경(初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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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일간] 제009호
 

 
 
전라도 전주부 백성 시사일간사 발행 - 개인 발행 소식지 제009호 - 개국628(2019)년 12월 07일
 
 
[보덕] 창세기(創世記) <제4편>
 
그제야 보왕은 궁씨에 대한 탄압을 멈추고 태정대신이라는 명칭의 벼슬을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궁 정승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한 나라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고 왕위를 둘러싼 다툼도 많았으므로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동안 벼슬에 변천이 있어왔다. 이에 보왕은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기구를 새로 신설하니 이름을 돈녕부(敦寧府)라고 명명하였다. 재위 5년의 일이었다. 이때 우두머리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라는 이름으로 하여 명명하게 되니 이때 수장을 맡은 이는 조재라는 이름의 대신이었다. 조재는 재야에 묻혀 있다가 장자성의 추천으로 조정에 출사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조정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나라 안팎의 내치에 힘쓰고자 하여 금상의 신임을 얻었으며 농부들의 애로사항인 세금 징수와 곡물 수확을 관리함에 있어 공평히 일을 처리해 백성들로부터도 덕망이 높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영돈녕부사의 수장에 오르게 되니 조재가 기뻐하며 몸둘바를 모르고 왕에게 큰절을 하며 아뢰길,
“신 조재, 성심을 다해 나라에 이바지하겠나이다.”
하며, 포부를 밝혔다. 돈녕부는 태정대신과 같은 기구로서 한 나라의 대소사(大小事)를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보왕 재위 6년 7월. 장자성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조정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왕이 승낙하였다. 그러나 9월에 장자성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친히 빈소에 찾아가 장자성의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재위 7년에 왕자를 낳았다. 왕비가 왕실에 홍복(洪福)이 깃들여지기를 크게 소원하며 왕자의 무사함을 빌었다. 이를 기회로 왕은 이보고에게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봉하였다.
재위 8년 삼월에 대궐에서 봄놀이를 즐기도록 왕이 대신들을 불러다 잔치를 후하게 베풀었다.
재위 8년 십일월에 판돈녕부사 이보고가 총리대신이라는 직제를 폐지하도록 청하였다. 총리대신 또한 태정대신의 직제와 기능이 동일하여 역할의 모호함이 생기니 국정운영을 보다 원활해야할 뿐만 아니라 구습으로 인해 생긴 민심의 안정을 도모함을 들어 간하였다. 왕이 흔쾌히 받아들이니 총리대신을 폐지하여 영돈녕부사로 통합케 하고 그 기능을 담당하였다. 영돈녕부사를 맡은 조재와 이보고는 두 살 차이이며 이보고가 연장자로서 무인의 기질을 타고났으나 나이 어린 조재의 인품을 크게 존중해주었다. 그리하여 돈녕부의 기능이 더욱 원활하였다. 이에 조재의 추천과 이보고의 승낙에 힘입어 봉운무에게 지돈녕부사에 임명하였다.
재위 9년 십이월에 덕왕의 왕비인 태황태후가 하세하였다. 눈이 내리는 날에 온 대궐에서는 통곡소리로 차고 넘쳤다. 궁씨와 왕실 간의 권력싸움을 지켜보았던 목격자인 그는 왕실의 어른으로서 권위를 회복시켜 주지 못했던 평생의 죄책감으로 인해 병을 얻었다. 그러나 금상이 상잔(相殘)을 거두었음을 안도해 말년에 이르러서야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재위 12년에 온희구로 하여금 청정대부라는 직책과 궁 정승이 집권할 때 받은 덕광공신이라는 칭호를 거두도록 명하나, 이에 선조성 좌상과 우상이 반발하자 왕이 대노하여 극변에 유배토록 하였다. 하지만 온희구는 왕비의 장인이므로 왕위에 앉은 사위에게 비위를 거스를 수 없으므로 흔쾌히 승낙하여 고향에 내려가 근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상대등이 이에 반발하였다.
“온희구가 대관절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고향에 나가 근신을 하라 하시나이까? 권세를 탐하였사옵니까, 축재(蓄財)를 일삼았사옵니까?”
왕은 상대등의 과거에 대해 돈녕부로 하여금 조사해 보도록 하니, 궁 정승이 왕위에 오를 때 공신록(功臣錄)에 올라 있음을 알게 되어 즉시로 처형을 명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길,
“제 영화와 이익에 눈이 멀어 짐의 지혜를 흐리게 하고 신하들 사이에 이간질을 일삼으니 이를 본보기 삼아 처단할 것이다.”
왕의 하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길돌의 아들 길석(吉碩)과 길응의 아들 길보로 하여금 사면케 하여 길보와 길석에 대한 죄를 사해주니 길씨 집안에서는 기쁨의 눈물을 뿌리고 말았다.
이윽고 온희구에게 낙향해 근신하도록 하자 온희구는 왕명을 따랐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서야 상대등의 직책을 길석에게 일임하고, 길응에게 공영대신(선임이 병사하였음)에 임명하니 기존의 세력을 포용할 뜻을 천명한 셈이었다.
 
권세를 탐하였사옵니까, 축재(蓄財)를 일삼았사옵니까?
 
이에 그치지 않고 이보고에게 총리판서(총리대신의 아래 관직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서야 궁 정승 때 신설된 총리부의 수장으로 승격된 것이다.)를 제수하였다. 정토장군이라는 직제는 본래 임시관직이었으나 이때 폐지하였다. 왕이 이렇듯 돈녕부 중심의 체제로 운영하여 왕의 친위세력으로 키움과 동시에, 기존의 체제도 동시에 수용케 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도모했던 것이다.
재위 13년에 태자비였던 궁진 왕비에게 연보왕후(蓮寶王后)로 추숭하였다. 이는 왕비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재위 16년 궁 정승 때 연회장으로 쓰였던 죽서루(竹西樓)를 국자감(國子監)이 쓰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국자감은 주자감(胄子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재위 17년 정월에 인사가 단행되었다. 정운을 동지돈녕(同知敦寧) 부사(府事)로, 백을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으로, 장자성의 아들 장보공을 돈녕부정(敦寧副正), 도국을 돈녕부첨정(敦寧府僉正), 온희구의 아들 온하수를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에 제수하였다.
같은 해 사월에 궁국의 아들 궁호보에게 돈녕부직장(敦寧府直長)에, 금상의 친척 관계인 영랑에게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로 임명했다. 궁 정승에 의해 희생된 임금과는 사촌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세상의 환란(患亂)을 피해 산속에서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서야 벼슬을 제수받은 것이다. 그리고 길보에게 이보고의 후임으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물러나게 한 뒤 판돈녕부사에 임명하였다.
재위 17년 구월에 세자가 장성함을 들어 태자비를 간택하니 총리판서 이보고의 딸로 점지되었다. 이에 왕이 알성부원군에 봉하였다.
재위 18년 알성부원군 이보고에게 총리판서 직에서 물러나게 한 뒤 총리판서 직제를 혁파하고 중추부(中樞府)라는 기구를 만들어 그 수장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게 임명하였다. 중추부는 돈녕부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재위 19년 온희구가 세상을 떠났다. 구세력의 수장이었으나, 여러 신료들을 구신의 관계를 떠나 포용하고자 노력한 정 많은 사람이었다고 왕은 회고한다.
재위 20년 봉운무의 추천으로 황보국, 남궁부, 옥보가 천거되었다. 이들은 각각 선조성 좌상, 선조성 우상, 총리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구세력의 기득권층에서 반발하자 왕이 말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짐은 한사코 물러나지 않고 개혁을 단행하리라.”
이는 구세력에 대한 왕의 선전포고였다. 재위 22년 봄, 봉운무를 영돈녕부사에 임명하고 길석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앉혔다. 조재를 공영판서(이때 공영부의 수장으로 격상됨. 이때 공영부는 총리부와 동급이었음.)에 임명하고 공영대신이라는 직제를 폐지하였다.
재위 22년 늦여름. 공석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동조한 동부부사와 그 군대를 이용해 임금과 왕실을 위협하였다. 이에 임금은 서부부사(西部府司)의 도움에 힘입어 민가의 집안에서 피신하던 왕은 태자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태자가 아버지의 뒷배에 힘입어 난을 수습하니 그 즉시로 공석과 동부부사를 처형하고 동부부사라는 직제를 폐지하였다. 이에 왕은 동부부사가 다스리는 지역을 강원도(江原道)로 부르도록 하니 이 지역을 왕이 직접 통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재위 24년 왕은 강원도에 부사를 내려 보내고, 한성 동부를 분할해 동한성부(東漢城府)를 신설했다. 이에 왕은 도성에 돌아와 동한성부에 부사를 내려 보냈다.
재위 25년 정월 상왕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직접 시호를 봉종이라 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 황태후(봉왕의 왕비)가 하세하였다. 뒤이어 왕은 황보국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남궁부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옥보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했다. 뒤에 선조성 좌상과 우상, 그리고 총리참판을 폐지하였다. 재위 26년 왕이 병석에 눕게 되자 태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의정부(議政府)라는 기구를 만들어 조재를 수장인 영의정(領議政)에 봉하였다.
재위 27년 6월에 상감 보가 세상을 떠나니 태자가 왕위에 올라 선왕의 정책을 이어받는다.
상감 방이 왕위에 오르고 왕비를 책봉하였다. 이 시점에 맞춰 공영판서 직제를 폐지하고 부원군의 자제들을 등용하였다. 장남 봉소를 궁내대신으로, 차남 운소를 왕내대신으로, 삼남 방소를 공영판서에 명하였다.
재위 2년에 봉운무가 세상을 떠나자, 이보고에게 영돈녕부사에 명한다. 뒤이어 정운을 판돈녕부사에, 지돈녕부사에 백을, 동지돈녕부사에 장보공, 돈녕부도정에 도국, 돈녕부정에 두 사람을 임명하는데 온하수와 봉용서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돈녕부첨정에 궁호보, 돈녕부판관에 영량을 명하였으며 왕이 그에게 친히 명룡대군에 봉하였다.
영랑에게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는데 아들은 이름이 태수로서 장성했고 딸 또한 장성하여 명란공주에 봉하여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이는 후계자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이어 길보에게 영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재위 4년에 길석을 좌의정(左議政)에 명하여 나이 들어 병든 조재의 옆에서 보좌토록 했다. 이후 태후 온씨가 조카들에게 벼슬을 주라고 이르자 왕이 받아들여 온하수의 장남 일흥을 돈녕부직장에, 차남 연방에게 돈녕부봉사에 명하였다. 신하들이 반발하였으나 개혁을 구실로 묵살되었다. 궁호보의 아들 보조에게 돈녕부참봉에 명했다.
 
 
연예계 비통. 구하라의 자살 사건
 
지난 11월 24일 구하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악플러에 대한 사회적 파장이 일고 있다. 구하라의 극단적인 선택을 '사회적인 타살'로 규정하여 목소리가 커져 가고 있다.
전 남자친구인 최 모 씨가 폭력 시비와 관련하여 성관계 동영상을 공개하겠다는 협박을 한 것에 대해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자살할 무렵 구하라의 관련 기사에 악성댓글이 달려 있었고 인격을 모독하는 내용이 서슴없이 올라왔다.
 
 
실록청이 들어서다
 
지난 10월 16일 실록청이 들어섰다. 실록청 총재관으로 동지중추부사 서민교를 삼았다. 통례원좌통례 겸비변사낭청인 정예림을 실록청 낭청에 임명하여 실록청에 참여하는 이들을 최종 인선함으로써 개국614년 8월 이후에 중단된 장종대왕실록 찬수가 다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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