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여 제35화
- 선안 작
그 수렁을 건진 사람은 안타깝게도 연평이 아니었다. 황충포라는 사람이었다. 평소 연평에 대한 사랑을 꿈꾸기도 했던 숙향이 꿈 속에서 연평을 보게 된 것이다. 연평의 학문과 덕망, 그리고 사람 됨됨이가 더 없이 있다고 생각하는 탓도 있지만, 그로 인해 숙향이 자신에게는 롤모델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상 달라질 게 없는 현실 속에서 숙향은 헛된 꿈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망하다 못해 우울하기만 했다.
"여기는 어떻게."
그러나 숙향은 태연하게 충포에게 어떻게 교회에 왔는지 묻는 것이다.
"그야 예배 드리러 왔지요."
이에 실망 어린 눈초리로 숙향은 약간 떨떠름하게 충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근데 여기 연평 씨, 아니 연평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나요?"
"아, 연평이 지금 서울엔 없지요."
순간 숙향의 실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낙담하다 못해 허탈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어디로 출타하셨나요? 아니면 출장 가셨나요?"
그러자 충포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 연평이 그 친구 논산으로 선산 보러 간다고 갔는 걸요."
하긴 연평이 이미 졸업한 몸이고, 자신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사업을 하겠다고 한 것도 무시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부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군다나 논산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해들은 숙향은 한달음에 논산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올해 솔직히 숙향의 신변에 있어서도 좋지 않은 나날이 많았다. 첫째로 권번 주인장이 내일 모레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자칫 까딱하다가 권번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대륙침략의 야심을 보인 일제의 서슬퍼런 규제도 있는 까닭도 있지만, 최근 경제 대공황이 전세계적으로 불어온 까닭에 맘껏 소비할 수 있는 여력도 못된 탓도 있었다.
장사도 되지 않아 본전도 뽐내지 못한 권번 주인이 혀를 끌끌 차대며 밑전도 건져 보지도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결심했다. 우선 나이 든 퇴기부터 권번을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한데 퇴기들이 정작 들고 일어나서는 제 눈 속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안 된다며 파업하듯 들고 일어났다. 게다가 자신은 죽을 병에 걸려들어 운영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양날의 칼도 이보다 날카롭지 않을까. 밤이면 밤마다 권번 주인은 눈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 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으로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갔다.
정작 이를 지켜보던 숙향은 심장이 타다 못해 애간장이 녹을 지경이었다. 이를 하소연해보고 픈 마음이 든 참에 연평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예배당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더구나 연평이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런 그가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그저 야속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하며 숙향은 충포에게 인사를 하고 예배당을 나섰다. 숙향은 곧장 권번으로 발길을 돌렸다.
권번 안은 기괴하게도 조용했다. 거문고 소리며 가야금 소리며 둥둥 덩덕쿵 덩덩 덩덕쿵 북이며 장구치는 소리가 휘황찬란하게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는 낙으로 사는데 오늘처럼 야속하게 조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주인인 병자가 있는 때문이겠지만, 주위의 식도원이 우후죽순 생겨난 바람에 손님이 뚝 떨어진 까닭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내 숙향이 권번 주인을 만나기 위해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형님. 방에 있수?"
숙향이 방문 안으로 들어서자 일어나며
"이런 우라질 ×!"
하며 웃는다.
그러더니 주인장은 숙향을 물끄러미로 바라본다.
숙향이도 이제 퇴기에 접어든 탓이었다.
나이는 숙향이보다 두 살 위였다. 권번 주인 행세하는 옥선(玉扇)이라는 이름의 이 퇴기는 넋두리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반기는 것이었다.
한번은 숙향이 그녀보고 식도원 하나 차리는 게 어떠냐고 묻자, 옥선이 대답이 가관이었다.
"왜놈한테 몸 팔 일이 있어? 그깟 식도원을 갖다가 왜놈들이 세우고 생 난리를 치는 판국에 얼어죽을."
아무리 세파에 시달렸어도 자존심을 헌신짝 버리듯이 던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오직 절개를 중요시 하며 살아왔다. 그걸 알기에 숙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옥선이 병들어 시름시름 앓을 때 되자 숙향은 눈물을 흘리는 슬픔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
조선(朝鮮)의 봄_02
- 보덕 작
문옥희가 재산을 탐낸다는 소문은 온 동네에 퍼져갔다.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더니 기어이 제 한몫을 챙기려고 드는구나. 하며 실인심(失人心)한 터였다. 때문에 유원복에 대한 동정은 당연지사였다.
제 문중에 이득이 가지 않은 행실로 시댁으로부터 냉대를 받아온 문옥희는 이렇듯 자기 보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를 부추긴 사람도 다름아닌 정현수. 그는 사교계의 마담으로 그녀를 불러들여 어디 만찬회가 있다고 하면 찾아가 줄곧 상류층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렇다 보니 밤늦게 돌아오는 형수를 원복은 애써 피하였다.
생전에 옥희에게 내게 자식이 없으니 원복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게 당연하다며 나무라던 원수였다. 그러나 불과 열여덟의 나이인 그에게는 이미 성년이나 다름이 없는 모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문옥희는 자연 외면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동네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옛 정인이나 다름 없는 정현수를 보러 가야겠다. 해서 정현수와의 밀회를 즐기려고 밤이면 밤마다 현수네 집에 찾아다니는 것이다.
"동네에서는 그렇게 인심을 잃고 짝도 잃고 하니 내게 붙어서 살려는 건가?"
낄낄거리며 현수는 초라한 모습의 옥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지."
"이를 어쩌나. 내 마누라가 이혼을 해주려고도 않으니."
결혼생활에 그러잖아도 싫증을 느낀 현수는 아버지에게 이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하지만 마누라가 정작 이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하니,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는 건 당연지사다.
"마누라를 죽이면 되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옥희가 답했다.
"마누라를 죽이라고? 내가? 친일파의 핏줄인 내가 죄를 하나 더 지라는 건가?"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묻는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새삼스럽게 듣는단 듯 옥희는 키득키득 웃어댄다. 이 풍진 세상에 살면서 저마다 죄는 하나씩 지게 마련인데 이를 모를리 없는 옥희는 현수에게 무어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거두었다.
"허허, 이거 웬 소란이야?"
중년의 남자가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들이 바라보니 정현수의 아버지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옥희냐?"
웬 여자 하나가 들어있음을 알아챈 현수 부친은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 오셨어요?"
옥희가 스스럼없이 인사를 해댔다.
"그래, 남편을 그렇게 잃고 우리 현수에게 의탁을 하는 모양인데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 창피하더구나."
어서 그녀가 제 아들에게서 떼려는 심보를 모를 리는 없었다.
"그 동네 뜨면 그만이지요 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옥희는 바로 제 집으로 가는 것이다.
해가 바뀌고 날이 가도 원복은 제 집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다. 마땅한 직장도 거처도 마련하지 못한 원복은 형수에게 공연한 신세를 지는 것이었다. 이를 참다 못한 옥희가 원복에게 말을 걸었다.
"아우님은 어디 나가지 않소?"
그러잖아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동생에게 서운한 모양이었다.
"어디 일할만한 데가 있어야 말이죠."
원복은 그저 멍텅구리처럼 집에 콕 박히는 것이었다.
"에휴."
복장이 터지니 차마 내색은 하지 못하겠고, 하기는 재산 문제가 아직 해결이 나지 않았으니 저렇게 고래심줄로 버티는 것이지. 옥희는 하루빨리 재산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골똘해 있었다. 게다가 그 즐기던 사교계에 드나들지도 않게 되면서 점차로 근심거리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하여 어떻게 해볼 수 없어 시동생에게 바깥에 다녀오겠다고 하여 현수와 날을 잡았다.
무교동에 자리한 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둘은 추후에 유씨 집안의 재산을 가로챌 수 있을 지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 둘의 생각은 치밀하면서도 단순했다(?). |
정병욱
[문학회지] 제0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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