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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대표] <간행> 보덕문집(寶德文集) 23
* 여성시대_女性時代 <4> * 사신도_使臣道 여성시대_女性時代 <4> 신경에서 소학교 일을 보던 어느날이었다. 학생들이 하교를 다 한 뒤에 어김없이 날은 어둑어둑해졌다. 이때 웬 낯선 남자가 학교 입구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하얀 빛의 남방을 차려입은 채 운동장 한복판을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검은 빛의 지팡이를 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이미 어둠은 서서히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막 나서려던 한 남교사에게 남자가 다가선다. "저, 여기에 혹시 김무화라는 사람이 근무하나요?" 하고 넌지시 물어본다. 그러자 당혹스러운 빛을 보이던 남교사가, "네, 그런데 누구시죠?" 하며 물어보는 게 아닌가. "혹시 오기옥이라는 이를 아시는지 물어보시고, 아신다고 하거든 오기철이라는 사람이 왔노라고 전해주시오." 남자가 이 이야기를 전하고는 교정에 자리한 계단에 앉는다. 이에 학교를 나서려는 것을 그만두고 잠시 김무화가 있는 교무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무화가 지는 햇살을 한몸에 받으며 교정으로 향했다. 분홍빛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김무화는 뜻밖의 손님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이가 날 찾으려고 했을까.' 사실 당혹스러웁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움이 더욱 앞섰던 건 사실이다. 친구 오기옥의 오빠이기 이전에 그를 은근히 따르기를 좋아했던 한마디로 지름길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타지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더욱 반가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기철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연유가 무엇인지 무화는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그래서일까. 낯선 사람도 아닌데 무척 불안하고 가슴이 울렁울렁 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사람을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도 아닐테고. 무화는 울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오, 오빠." 오라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촌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오빠'하며 불러보았다. 그러자, "어이구. 우리 김무화 양이 어떡하다가 이 험하디 험한 만주 땅에서 고생을 할꼬." 안쓰러운 눈으로 오기철은 무화의 품을 덥석 껴안았다. "오빠, 이러지 마세요. 서방 있는 몸인데." 피식 웃으며 무안을 준다. "그래, 재원 군은 잘 있나?" "네. 그럭저럭 잘 지내요. 덕분에 신혼 느낌이 물씬 나는 걸요." 무화의 얼굴에선 웃음꽃이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는 듯 기철은 머뭇머뭇 거리기 시작한다.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련지 김무화에게 신경을 곤두서고 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닌 자원이 아닌 학무국 당국에서 만주국의 시찰을 하고 오라는 통보를 받아 송아지가 끌려가듯 이곳 신경에 온 것이다. 기철은 만년에 가깝게 누려온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지인이 경영하는 사립학교의 교원으로 있어 왔는데, 그때 마침 자기가 고학력 수준이라는 것을 빌미도 있어왔고 또 그 학교가 신사참배를 강요받는 과정을 받아온 터에 은밀히 그에게 만주의 교육 실태를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교장이 직접 기철로 하여금 그리해야 한다고 우기던 터였다. "그랬군요." 그 내막을 확인한 무화로서는 얼떨떨해갈 수밖에 없었다. "근데 지금 보다시피 신경은 아직도 번화하려면 한참 더 걸릴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말야?" "하하하하." 이들이 주고받는 소리로, 고요한 소학교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헤어지지 않았다. 무화가 신경에 온 김에 재원을 만나보고 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기철은 무화의 뒤를 따라 재원이 있는 집에 들어섰다. 마침 재원이 갓 세수를 마친 모양인지 속옷 차림으로 이들을 맞이했다. "이거 오래간만이군 그래." 기철이 던진 말 한마디에 재원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이 옷차림이 누추해서리." 재원은 주체할 수 없는 반가움과 함께 이럴 바에야 겉옷이라도 진작 입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기철은 무화의 안내를 받아 대청 위에 올라간다. 대청 위에 올라가자마자 기철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바로 갓 네 돌이 된 정숙의 모양이었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된 정숙은 어머니를 보자마자 아장아장 걸어가 반갑게 맞이한다. "아이구 귀여운 내 새끼." 무화는 그런 정숙을 번쩍 들어안아 볼살을 비빈다. 그러자 아이는 방긋 웃는다. 이때 기철은 어떻게 아이가 생겼나 하며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무심코 그는 무화가 껴안은 아이는 그러나 껴안은 어머니와는 생판 다른 얼굴이었던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자초지종을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고 물어보았다. 순간 무화가 강화의 아이라고 하자 기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 기옥과는 동기간처럼 잘 지내다시피한 강화의 자식이라니. 그런데 어쩌다가 이 아이를 키우느냐 물으니 무화는 강화가 감옥에 갇힌 과정부터 이야기하며 이미 옥고를 치르고 있는 몸인데다 백 후작네 친척들이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직접 맡아 기르고 있다고 하였다. 날이 갈수록 험악해져 가는 정세 속에서 기철은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였다. 거기다 기옥이 부친을 여읜 뒤로 줄곧 주위의 친구들과 왕래조차 하지 않은 채 칩거를 하던 터였다. 자신의 결혼도 미룬 채 홀로 독수공방을 하던 누이를 기철이 나무랄 때면 으레 짜증을 내고는 했다. 그랬는데 무심결에 기옥이 편지 한 장을 남겨놓고 집을 비웠다. 그 사실을 알아낸 어머니는 사방팔방 찾아다녀 보았으나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옥이 놓고 간 편지를 읽던 기철은 순간적으로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에서야 이렇게 두서 없이 남기고 떠나게 될 줄 몰랐어요. 내가 한때 다녔던 여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지 않겠느냐고 제게 통보를 했지 뭐예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미국으로 건너가야 될 것 같아요. 아마 이 편지를 보시는 것이 마지막 인사일지는 모르지만. 암튼 잘 지내세요. 기옥. 기옥이가 방에 박혀 있는 이유를 알게 된 기철은 순간 누이의 넓은 마음씨를 알게 되었다. 자신이 마치 조롱에 갇힌 새처럼 지내는 것이 다른 가족들에게는 누가 될까 싶어 큰맘을 먹고 유학을 떠난 것이다. 사실 기옥에게는 여전 졸업이라는 이력만 있었을 뿐. 다른 부분은 없었는데 기옥이 더욱이나 독실한 크리스천이니 미국이라는 곳은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합리화를 취하며 기철은 그렇게 누이를 보냈던 거다. 그러니 무화가 강화의 딸자식을 양녀로 들인다는 이야길 들을 새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큰 아픔은 바로 자신의 코 앞에 있는 강화의 딸. 정숙이었다. 아이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지켜보던 기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에구, 이게 누구셔?" 여자의 기척 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며 눈물을 거두었다. "허허, 내가 왜놈의 밀정 노릇을 하고 오라기에 얼떨결에 왔네 그려." 재원의 사촌누이 찬희였다. 무화가 만주로 올라올 때, 자신의 식솔들을 비롯해, 군산댁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발을 내딛었는데 그 생활이 녹록치 않았음은 당연한 이치였다. 더구나 재원의 부친인 노 참찬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 집의 재산을 분배해야 하겠는데 이 과정에서 재원과 찬희가 몸소 재산 정리를 해줌으로써 하인들을 면천하다시피 내보낸 것이다. 이들의 생활수단이라고는 비록 채소를 파는 자그마한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지만, 생계는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왜놈의 밀정이라뇨?" 무화가 놀란 듯 묻는다. "사실 서울에 있을 때 학무국이란 데서 내게 만주를 시찰해보고 오라는 식으로 통보를 했지 뭔가. 그래서 얼떨결에 그 일원이 되어서 들른 거라네." "하하하하, 그게 무슨 밀정이라구." 그때 찬희가 코웃음을 치면서 어이없어 한다. 이렇듯 만주에서의 혹독한 생활처럼 무화와 그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차츰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조선사람들을 총알받이로, 혹은 몸종으로, 혹은 하급노동자로 부리는 식민지 하의 자본주의에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이 장차 어떻게 되려고.' 무화는 일행들을 모두 불러다 저녁을 대접해보였다. 물론 조선에서 먹어온 음식을 차려주었다. 이곳 만주도 조선과 비슷한 풍토이기에 조선 음식 자체를 차리는 것이 결코 번거롭지는 않았다. 사실 정숙을 양녀로 맞이하려는 연유가 바로 제 생모의 비극적인 삶을 대물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기실은 이 아이에게만큼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키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 정작 자신들은 모두 식민지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이후 무화도 일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무화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 협화회에 가입하지 않겠느냐며 제의를 하곤 하였는데, 협화회는 순전히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어달라는 말과 다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재원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만주를 침략하고 기고만장해진 일본은 1937년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국 대륙으로의 침략을 강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점차 병참기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1937년 일본은 마침내 꿈을 이루지 못했던 중국으로의 진출――실질적으로는 침략――을 강행했다. 조선에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했던 도요토미(豊臣)의 이루지 못한 한을 마침내 이룩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신문사에서는 마치 아첨을 하는 모양으로 하나같이 대서특필(大書特筆)로 다루었다. 어떤 날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에 진출했다고 하더니 이제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라 하는 남경에까지 진출하여, 왕조명(汪兆銘) 중심의 괴뢰정권(傀儡政權)을 수립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이 일련의 소식 안에 선량(善良)한 중국인들을 지나인(支那人)으로 낮추어가며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고, 또 임산부와 어린 아이를 참혹하게 죽이기까지 하였으니――임산부와 ××하여 죽이고, 어린 아이의 목을 베기까지 하였으니――그야말로 패륜(悖倫)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중국인들을 가지고 목베기 시합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렇듯 파렴치(破廉恥)한 행위를 일삼던 일본은 결국 조선의 백성들을――대한의 백성들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세우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 만주에 있는 무화는 큰 걱정을 하였다. 양딸 정숙이의 생모 강화의 생사여부 때문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제 딸과 자신의 안부를 물으며 자기는 북경에 있다고 소식을 알려준 것이다. 이에 무화로서는 그가 무사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소용없음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자신의 무기력함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무화는, 자신을 엄마라 부르며 보채는 정숙을 껴안은 채 안타까운 심정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네 엄마가 북경에 있다는데 무사할까. 무사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정숙을 달래던 무화는 어두운 창밖에 무심히 비치는 달빛을 보며 원망 아닌 원망을 하는 것이었다. 그 오랜 기다림이 지나쳤던 걸까. 무화는 나흘 동안 잠 한 번 자보지 않은 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잠에 골아떨어졌다. 그런데 무화 집의 일꾼 하나가 다급하게 다가와서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북경에서 오셨다는데요." 하는 소리에 무화는 깨어났다가 멈칫 잘못 들었다는 식으로, "뭐라구요? 어디서 오셨다구요?" 하며 물어보았다. "북경에서 손님이 오셨답니다." 똑같은 답변을 하는 일꾼의 말을 듣고 비로소 경화가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무화는 버선발로 경화를 마중하였다. 경화는 차파오 차림의 모습을 하고는 무화 앞에서 싱긋 웃는 것이다. "경화야. 어서 오렴. 너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 줄 아니?" 무화의 투박 어린 말에 아랑곳없이 경화는 집 전체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제 핏줄을 찾는 모양이다. "애기는 잘 자고 있어." 경화는 비로소 안심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경화는 북경에 점령한 일본군의 위세에 눌려 조직이 해체된 것을 보고 난 뒤 자신 스스로가 만주에서 마지막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각오로 무화 앞에 찾아온 것이다. 조직이 해체되면서 그 조직의 수장이 특별히 명한 것이 있었다. 만주국의 주요 기관들에 폭탄을 투척하라는 밀명을 받고 부리나케 만주로 찾아든 그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딸을 마지막으로 본다는 심정으로 무화의 집에 찾아온 터였고, 그런 그의 심정을 무화는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화야. 내 아기 어딨니?" 경화의 입에서 떨어진 첫마디에 무화는 어리둥절한 모양으로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어 딸이 잠든 방으로 안내한다. 그 방에 들어선 경화는 곤히 잠든 딸의 얼굴을 바라보고 행여 추워할 세라 얼어붙었을 손을 입김을 불어가며 녹이더니 바른손으로 딸의 얼굴을 더듬거리듯 만졌다. '네가 이 어미를 알아보지 못한다만 나는 너를 알아보겠구나. 하지만 이 어미는 너를 차마 데려갈 수 없겠구나. 이것이 너와의 마지막 만남이니.' 그녀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곁을 지켜보는 무화의 마음도 매우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원이 잘 있느냐는 식으로 말할 줄 알았던 경화였는데 자식을 낳은 어미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자책할 수 밖에 없는 어미의 모습을 보일 적마다 무화는 비로소 모성애라는 것이 강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순간이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들 왜놈의 앞잡이가 되려고 드니 무어라고 말하기가 거북하더구나."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차나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담소를 나누기는 하마 오래간만인 것 같았다. 이 과정에서 오기철의 이야기도 했었고, 가끔 서울로부터의 소식을 편지로 주고 있는 옥화의 경우도 그러했다. 옥화가 전한 이야기로는 안희옥이 일본에 협조하는 연극무대를 개최하여 변절자의 길로 갔다고 했으며, 문인협회의 간부로서 열렬하게 파시즘을 신봉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주위 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라는 단체에 활동하라고 압박을 가하는데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 지 망설이게 된다고 하며, 추신으로 남편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를 두고 강화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전혀 없었다. "헌데 네가 웬일로 만주로 오겠다고 한 거니?" 무화는 마시던 찻잔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경화에게 집중시켰다. 아무 말없이 묵묵히 차를 마시던 경화가 조용히 입을 뗐다. "괴뢰정부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화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경악을 금치 못하던 무화는 친구에게 잘못 들은 이야기인 것처럼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사실이야. 내가 소속된 조직이 왜군(倭軍)에게 해체되고 불가피하게 혈혈단신으로 만주 땅을 밟은 거야. 그러던 차에 우리 딸도 보고. 여차저차 찾게 된 거야." 애써 웃어보이는 경화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오는 걸 느꼈다. "말도 안 돼."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일본군에 잡혀서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차마 끔찍한 말이라." 경화가 말을 잇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모두 생체실험 대상자로 선정하여 그들의 실험도구로 삼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딸 생각을 안할 수 없게 되었다고 그녀는 암묵적으로 무화에게 답했던 거다. 한낱 일본의 앞잡이의 자식이었던 그녀가 이렇게 전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어 폭탄을 투척하는 의로운 거사를 치르다니. 그녀의 진면모를 몰랐던 게 못내 후회가 되었던 무화로서는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야한다는 아픔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불쌍한 것." 울먹이며 무화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자 경화가 그 곁에 다가가 무화를 껴안고 토닥거려주었다. 그러자 무화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리 허망하게 친구를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무화는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인연의 끝은 여기까지였다. 경화는 친구의 마중을 받으며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나가는 길에 무화에게 자신의 딸을 평생토록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나올 때 경화는 마음의 짐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인생이 새옹지마인데 그예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자책 아닌 자책을 했다. 노구교 사건을 기점으로 기세가 등등해진 일본은 베이징을 점령한 것에 그치지 않고 해안 지역을 점령해 마침내는 남경(南京)에까지 이르렀다. 남경은 바로 국민당 정부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중화민국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정치 사회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중화민국이라는 국호 아래에 국민당 정부를 창설한 손문(孫文)이 묻힌 중산릉이 위치해 있었다. 남경을 점령하면서 수많은 양민들을 단지 중국민족이라는 이유로, 혹은 국민당의 간부와 내통했다는 구실을 들어 모두 참수하는 패륜을 범했다. 자금산 자락에 자리했다는 중산릉은 말없이 왜놈의 총칼에 죽임을 당하는 가엾은 백성들을 말없이 지켜보아야만 하는 심정은 어이 말로 형언하랴. 신문지상에 난징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경화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속으로 제 부친을 원망했다. 죽 쑤어 개 준다는 속담처럼 아버지는 후작이라는 작위를 이용해 애꿎은 동족을 핍박하였고 그 결과로 자신은 죄값을 받게 되었다고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렴 그렇지.' 하지만 일본의 난징 점령 기사를 다룬 신문을 읽어가는 동안 경화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드러나고 있었다. '훗, 우리 조선 민중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할 망정 원수로 갚으려고 드는구나. 네놈 공을 인정받아 후작 작위를 받았다지만 그 말년은 참으로 비참했지.' 신문 기사를 읽은 뒤 그것으로부터 시선을 거둔 경화는 아득하게나마 자신의 십 년을 되돌아보았다. 십년이 가까운 세월에 경화는 많은 일들을 겪어냈다. 김 비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상심이 컸을 무화에게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일관해온 아버지. 그 아버지가 끔찍이도 싫었던 탓에 방탕을 일삼았다――방탕이라고 해봐야 값비싼 금은보석을 몸에 치장한 것과 모피로 만든 코트 같은 것이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재원과의 사랑을 꿈꾸었던 그녀로 하여금 김무화라는 그림자가 다시 드리워지고 부터는 친구에서 연적(戀敵)으로의 관계까지 이어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온갖 수단방법으로 경화는 노씨 집안에 찾아가 자신을 며느리로 삼게 하고자 노력했으나 참찬 어르신의 반대로 이는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무화에 대한 일말의 정 마저 지워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무화의 무한한 사랑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지 백 후작의 죽음과 관련해 무화는 서로 부모 없는 천애로의 관계로 다시 맺어진 것이다. 비록 재원과의 사랑이 일말이라도 있었지만 그는 노재원과의 관계를 청산하듯 서둘러 머나먼 타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머나먼 만주에 들어가 한때 왜인들의 정탐꾼 노릇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같은 소속이라는 이유로 접근한 무뢰한(無賴漢)에게 걸려들어 아이를 불가피하게 낳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아이를 낳았으니 장차 어찌 살아갈 건가.' 하며 깊은 눈물을 흘린 뒤에 이리저리 방랑하다가 그 정조를 짓밟힌 한 남자를――더 나아가서는 왜놈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굳은 다짐을 안고 순순히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큰 변화를 이끈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불가항력(不可抗力)에 의해 경화는 유일한 벗인 무화에게 아이를 맡겼으나, 무화는 이미 재원과 결혼을 했고 그 두 사람의 양녀로 들이겠다고 한 순간 자신이 일말의 정도 없는 비정한 어미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렇듯 자숙을 갖게 된 그녀는 끊임없는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속죄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결심했다. 내 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이미 해체된 조직의 몇몇 사람들을 규합해 만주에서의 거사를 실행에 옮기려고 중심지인 장춘(長春)으로 향했다. 협화회의 연설대회가 열리는 즈음에 이들은 거사를 치르기로 마음을 먹었던 거다. 이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일본인의 복장으로 일장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인파로 위장했다. 그때 경화는 한 남자에게 응시하여 고개를 끄덕거리자 남자는 곧바로 연설하는 곳으로 나아가 그곳에 폭탄을 던졌다. 그때였다. "숙여!" 하는 소리와 함께 폭탄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 다음으로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고 불발상태가 되어버렸다.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스레 들리고 사람들은 모두들 피해다녔다.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여자의 새되게 높은 소리를 듣던 경찰들이 일제히 그리로 몰려가 여자를 연행했다. 다음날 신문으로 협화회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을 보도하였다. 그러면서 범인은 바로 백경화라는 이름의 조선 여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독립운동 조직이 사라질 줄 알았던 일본 당국으로서는 당혹스럽게까지 생각되었다. 그것도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은 이의 딸이 왜 거사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심겨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양손에 포승줄이 묶인 채 곧장 재판소로 향했다. 재판소 안은 그야말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이전에 보천보에서 전투가 일어나 호외로 뿌려지기도 했던 현실이었다. 독립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백경화 일파는 김일성과 버금가는 영웅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거다. 재판소로 끌려가는 경화의 뒷모습을 무화는 남편 재원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재원은 안타까움에 고개를 돌렸으나 무화만큼은 꿋꿋하게 이를 지켜보며 오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재판은 열렸다. "지난번 보천보 사건과 관련이 있는가?" 재판관의 물음에 경화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어째서 이 사건을 벌이게 되었는가?" 경화가 묵묵부답으로 나오자 곁에 있는 사내 하나가,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거사를 한 거외다!" 하자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조용!" 재판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를 막기는 역부족이란 듯 웅성거림은 여전했고, "그렇소! 나는 아버지의 치부를 감추려고 한 것이오!" 경화의 소리치는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웅성거림은 그칠 줄 몰랐다. 이에 보다 못한 경관들이 일제히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정숙!" 소리쳐댔다. 그러자 경화는 앙칼진 소리로 웃어 제꼈다. '저런 미친 사람을 봤나.' 재판 장면을 보고 있는 군중의 사람들 중 절반이 생각한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경화는 마치 정신병자로 취급당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무화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그의 간절함을 망각이라도 하듯 치안유지법 및 내란죄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 판사의 말에 따라 징역 5년을 언도받은 경화는 피식 웃음을 보이고 말았다. '오냐, 내 아비의 죄값을 치렀다. 언젠가는 나한테 했듯이 너희들도 그 죄값은 치러지겠지.' 죄인 아닌 죄인들은 모두 밖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후 경화는 징역을 언도받으면서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며 고문을 당하면서도 제 아버지의 죄를 들먹이며 다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순수한 정조를 유린당한 네놈들에 대한 치욕을 두 눈에 담고 가겠다고 악다구니를 퍼부어댔다. 그러자 어김없이 칙쇼 하는 소리를 내어 이뺨 저뺨을 갈구다가 못해 전기고문과 고추가루를 탄 물을 퍼먹여가며 괴롭히고 했으나 그녀는 그저 비명소리 하나도 내지 않은 채 그를 비웃듯 웃어댔다. 약이 오르다가 악에 복받친 나머지 한 가지 극단적인 선택을 가했다. 그녀를 생체실험 대상자로 몰아넣는 일이었다. 당시 일제는 만주에 있는 관동군을 중심으로, 소위 731부대라는 조직을 만들어내어 반일 감정을 드러내는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그밖의 다른 민족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행하였다. 맨 손으로 냉동기계를 넣게 하여 얼리게 한 다음 그것을 뽀개는 실험과 두 모자(母子)를 밀실(密室)에 가두어 독가스를 주입하여 실험한 것, 그리고 그밖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잔학한 실험을 행한 것으로 악명 높은 곳에 경화가 끌려갔다. 그녀에게 취해진 최후의 방법은 주사기로 세균을 주입시키는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미치광이로 낙인이 찍힌 채 실험 대상자가 되다가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이런 그의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화는 또다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경화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지 4년 뒤에 재원이 사상범(思想犯)으로 낙인이 찍혀 교화를 명목으로 연루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대륙침략을 성취한 나머지 일본은 태평양에까지 영역을 확장해 미국을 상대로 정면전에 돌입하면서 경화의 말마따나 정신분열에 가까운 광기를 맘껏 표출하였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미국이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하면서부터 일본은 전세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서구의 독일과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도 모두 손을 든 상황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외로이 항전을 거듭하다가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로――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일본은 마침내 항복을 하였다. 해방이 되고 한달 뒤 재원은 무사히 감옥에서 나왔다. 이를 지켜보는 무화의 가슴은 너무나 뜨거운 나머지 재원을 와락 껴안았다. 자신의 양딸인 정숙이도 그 곁에 있었다. "정숙이 잘 있었니?" 재원의 다정한 말에 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양쪽에 땋은 채 빨간 원피스를 입은 딸의 모습을 재원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를 지켜보던 무화는 웃음을 보였다. "아니 이게 누군가." 그때 무화 일행의 모습을 보고 놀란 이가 있었다. 바로 설석중이었다. "나를 알아보겠는가." 석중이 재원을 보고 물어본다. "뉘신지." "나, 설석중이야." 자신을 몰라보는 재원에게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옥화 애인." 그러자 무화가 놀라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석중은 자신의 친척동생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에 심취하다가 사상범으로 몰려 감옥에 들어갔다는 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화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기실 그의 친척동생이 우연히 경화를 목격했는데 경화가 감옥에 있으면서도 연실 미치광이처럼 웃어댔다는 것이며, 이를 보다못한 일경이 생체실험 대상자로 몰아넣었다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무화는 순간 주저앉았다. 그 곁을 정숙은 영문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축하였다. "그럼. 죽었다는 건가요?" 무화는 얼떨떨한 모양으로 석중을 응시했다. 그렇다고 석중이 끄덕이자 무화는 정숙의 볼살을 하염없이 만지며 울컥한 마음을 부여잡고 있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무화는 집의 뒷산에 올라 머나먼 북녘을 향해 절을 하였다. 그리고 정숙에게 너를 낳은 분이 따로 있다고 하며 불가피하게 태어나게 된 경위를 밝히자 정숙은 혼란에 잠겨 있다가 이내 울부짖고 말았다. 어렴풋이 제 어미를 알아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 생모가 잠든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사라진 모습을 떠올리게 되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정숙은 이내 눈물을 거두고 무화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제 어머니는 좋은 분이었어요. 나라를 위해 희생하셨잖아요." 이 말을 들은 순간 무화는 언니 선화에 대한 죗값을 친구인 경화가 대신 짊어진 것에 대하여 못내 미안하다는 표현을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내 인생이 그야말로 여성시대(女性時代)였다는 것을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 끝. 사신도_使臣道 1 서기 918년 고구려(高句麗)의 왕이라 칭하고 자처하던 궁예(弓裔)라는 걸출한 요승이 배현경(裵玄慶) 등이 일으킨 정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송악(松嶽)의 귀족으로, 고구려의 재상인 용건 왕륭의 아들 왕건(王建)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자리였던 왕위에 올라섰다. 그리하여 자신의 수도를 송악으로 하되, 수도 이름을 송도(松都)로 하여 한때 국호로 삼았던 고려(高麗)를 다시 세웠다. 이것이 고려왕조의 첫 시작이었다. 왕건은 본래 성정이 어질고 온화하기로 소문이 난지라 후삼국(後三國)이라는 난세에서 주변의 세력들에게 침착한 태도로 온건한 정책을 추진하여 주변의 호족들이 그를 따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신라와 후백제를 끝내는 통일시켜 삼한(三韓)을 일통(一統)하였다. 서기로 936년의 일이었다. 이후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세력들 사이에서의 전쟁과 거란과 여진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국토는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이 과정에서 문신을 우대하는 데에 불만을 품은 무신(武臣)들이 들고 일어나 문신들을 깡그리 죽이고 정권을 잡았으니 이를 무신정권이라 하였다. 그러나 최충헌(崔忠獻)을 위시한 삼대 세습으로 인해 왕권이 크게 추락하여 백성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드디어는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네 명의 임금을 모셨던 최씨 정권도 이제는 꼴좋게 망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왕실을 이끌고 수도인 송도를 버리고 강화(江華)로 임시거처를 옮겼다. 왜 몽고가 침입을 하였는가 하니 금나라가 거란족에게 망하여 구실도 못하자 거란족이 이번에 다시 고려를 침입하고자 했던 거다. 결국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몰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몽고족의 강경하게만 느껴지는 고지식한 성격이었다. 몽고는 말로는 형언키 어려우리만큼 무리한 조공을 요구해왔다. 사실 성길사한(成吉思汗) 이래 구라파(歐羅巴)와 더 나아가 안남(安南)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뻗더니 기어이 페르시아를 거쳐 동구라파(東歐羅巴)에까지 손을 뻗쳤다. 그렇기에 몽고는 기고가 만장하였으리라. 이에 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국왕은 훗날 고종(高宗)이 되는 임금이었다.처음으로 몽고의 사신이 알현을 청하였다. “전하, 소인이 요구한 바가 있는 공물을 바치셨사오리까?” 임금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것은 당연하였다.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은 임금으로서는 최씨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어려웠으리라. “거란과 여진을 쳐냈으니 고려의 근심은 덜어낸 셈입니다. 하온데 어째서 이를 거절하시는 겁니까?” 이에 왕이, “내 그, 그리하겠소.” 허겁지겁 왕이 승낙을 하자 몽고 사신인 저고여는 사신들이 묵는 객사로 사절단을 거느린 채 들어갔다. 하지만 깊은 밤에 객사에 웬 강도 하나가 몽고 사신 저고여를 죽이고야 말았다. 밤에 객사는 어처구니없게도 비명소리가 우렁찼다. 다음날 객사 주위로 백성들은 웅성대며 모여들었다. 몽고 사신의 시신을 덮은 들것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건의 경위를 알아보고자 하였던 고려 조정으로서도 당혹함을 금치 못하였다. 저고여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몽고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몽고의 가한(可汗)이, “은혜를 원수로 알고 있겠다.” 하며 고려로 진격할 것을 명하였다. 이 소식이 개경으로 전해지자 왕은 당장 신료들을 거느리고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몽고는 여러 차례 침입을 하여 황룡사의 구층 석탑을 비롯해 고려의 진귀한 보물들을 다 털어 먹어놓고 고려의 선량한 백성들을 유린하고서 살육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최씨 정권의 무능에 분개한 이가 있었다. 바로 김준(金俊)이라는 자다. 김준은 본래 천인 출신으로 최씨 정권에서 수하로 있었던 자인데 졸지에 반기를 들어 최씨 정권을 몰아놓은 공으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최씨 정권의 마지막 수장을 죽여 스스로 무신의 수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드디어 몽고가 강화 앞에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협상을 합시다.” 하며 몽고와의 화친을 제안하였다. 이에 무신들은 몽고와의 화친에 대해 반발하기 시작했다. “한낱 오랑캐와 화친한다 하심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격이옵니다!” 하는 가운데 임금은 무신들에 시달리는 가운데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세력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밤중에 난데없이 김준을 불러내어, “최씨네 치맛자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하며 임금이 하소연을 시작한다.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몽고와 화친을 청할 때 반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 어느 누군가가 마마의 말을 헤아리겠습니까.” 서력으로 1271년 최씨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김준에게 왕권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하고 최씨 정권을 몰아내었다. 그러한 뒤에 김준의 뒤를 따라 개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성에 돌아온 왕실은 또다시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은 최충헌 집안에 사병엔 세 개의 별초(別抄)가 몽고와 항전을 벌이는 까닭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삼별초(三別抄)의 대장은 배중손(裵仲孫). 배중손의 지휘 아래 삼별초는 강화도에 진을 쳤다. “우리는 황제폐하를 위하여, 종묘사직을 위하여 몽고와 맞서서 싸우도록 하자.” 그러는 통에 배중손은 강화도를 시작으로 서해 바다를 주름잡다가 육지로 나아가 기호(畿湖)와 호남(湖南) 일대에 주름잡더니 드디어는 제주(濟州)에까지 내려왔다. 한편으로 왕이 개성으로 다시 돌아갔단 소식을 접하고서 배중손이 으르렁거렸다. “왕실이 다시 개성으로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는 곧 몽고와 항복하는 것이다. 화친을 주장하는 김준이 따위는 필요가 없다!” 뒤에 지켜보던 부하들은 배중손의 뒤를 따르게 되어 진도(珍島)에 다다랐다. 이곳 진도에 이르렀음에도 몽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감히 작은 것이 간 크게도 제 코를 건드리는 양인 것만 같았다.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고려에 대해 이러한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대의 나라 군사들 중에 삼별초란 것들이 우리 몽골을 건드리려고 하고 있소.’ 이후 고종이 죽고, 원종(元宗)이 즉위하였다. 김준도 병들어 죽지 않고, 부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제 무인들의 시대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의종 대부터 이어진 무인들 세상은 졸지에 한순간에 막을 내렸다. 원종은 몽고에게 시달림을 당해야만 했다. “저 삼별초라는 잡것들을 깡그리 없애야 하지 않겠소!” 몽고사신이 분기탱천하여 으름장을 놓자 왕은 하는 수없이 삼별초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을 시작하였다. 몽고군과 고려군의 연합으로 삼별초는 점차로 소탕되기 시작했다. 이 연합군은 드디어 진도에 이르렀다. 진도에 포위당한 배중손의 군사들은 몽고군에게 어김없이 항전을 벌였으나 정작 동족인 고려의 군사들이 배반했다는 사실에 전의를 상실하고야 말았다. 하여 배중손이 전사하여 호서와 호남 지역에 기세를 떨쳤던 삼별초 세력은 드디어 탐라에 침입하게 되었다. 삼별초의 수장은 김통정(金通精)이었다. 그러나 삼별초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수많은 제주 사람들이 그들에게 온갖 착취를 당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지역적인 차별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 천하의 역적놈들 같으니라고.’ 제주도 사람들의 감정은 점차로 삼별초 사람들, 더 나아가 고려의 백성들에게 원망을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말미암아서 삼별초는 졸지에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 제주도에서 포위당하였다. “네 이놈!” 몽고군의 수장이 김통정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네놈이 어찌하여 우리 몽고와 고려에 반기를 드는 게냐!” “나는 한낱 모름지기 고려에 충절을 지키며 살아왔다. 한데 어째서 네놈들이 우리 고려를 욕보여 유린하려는 것이냐!” “이런 고얀 놈이!” 몽고군의 수장은 김통정으로 하여금 처형하도록 하여 이곳 제주도 일대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의 관할로 유지하여 실질적으로 원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철령의 이북(以北)하고도 서경에다 동녕부(東寧府)와 길주와 함흥 일대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라는 이름으로 몽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한편으로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자 윤씨네 일가는 어김없이 이곳 쌍성총관부로 향하였다. 이들은 모두 노비에서 면천된 양민이었다. 그것도 무인정권 아래 노비였던 일가였다. 무인정권이란 무엇인가. 천민이라던 이의민(李義旼)이 장군으로, 더 나아가 실세(實勢)로 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고로 만적(萬積)이라는 최충헌의 노비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들먹거려 반기를 들고 주인을 대들다 다른 노비가 이실직고하여 만적은 순교자와 같이 죽었다. 그러한 시절이 있었건만 윤 서방의 의지는 왜 보이지 않았던가. 고종에 이어 원종, 그리고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였다. 몽고는 원(元)이라는 국호를 새로 하여 고려로 하여금 조공토록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서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여 일본을 정벌토록 독려하니, 고려와 원, 두 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두세 차례 바다로 나아가다가 그만 하늘의 뜻이 무심하던가. 그만 전군(全軍)이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 고려와 원나라에 큰 타격을 가져다주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두고 신풍(가미카제)이라 했던가. 뒤이어 왕은 홍규(洪規)라는 이를 불러들였다. “전하, 무슨 일로.” 왕이 얼굴을 붉히며, “원에서 경의 딸을 공녀로 바치라고 하였소.” 홍규는 누구인가. 남양 사람으로서 높은 벼슬을 하던 이였다. 그런 그의 딸에게 조공으로 바치라니. 조공이라 하면 노비로 살라는 말인가. 귀한 집안의 여식이 노비로 산다는 것은 옳아도 당치도 않다. 하는 수없이 홍규는 자신의 딸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 소식을 들은 원나라 조정은 대노하기에 충분하였고 원나라 조정에 으름장을 당한 고려 조정에서는 그를 심문하였다. 그러나 홍규는 침묵을 지켰을 뿐. 딸이 대신해서 심문을 능히 받아냈다. “제 스스로 머리를 잘랐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르시는 일이옵니다.” 한편으로 아버지를 구하고자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나라로 끌려간다는 생각에 한탄하기 그지없었다. 두 모녀는 모진 고문을 겪고 딸은 원나라로 기어이 끌려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씨 일가도 하는 수 없이 상전의 딸을 따라 원나라로 건너가고야 말았다. 그리운 산천을 뒤로한 채. 몽고의 수도 연경(燕京). 이곳에 윤씨는 어디서 어떻게 살았던가. 바로 보니 연경의 번화가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다. 완전한 몽고 사람이었다. 때마침 그 권세가 고려의 여느 지배층보다도 더 드높았다. 윤도라는 이가 바로 그였다. 고려에서 유행하는 ‘매’라는 새를 길러다 고려에 팔아먹어 입신출세(立身出世)하게 되었다. 이를 본받기라도 하듯 조만술이 윤도의 부하로 있었다. 조만술. 그는 본래 노예 신분으로 있던 이였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투사(鬪士)나선 덕분에 거금의 돈을 축적할 수 있었지만 그만 그 쓰임이 없어짐을 알고서 바로 이곳 연경에 이르렀다. 그는 윤도의 집에 이르렀다. “이리 앉으오.” 윤도 대감이 웃으며 그를 자리에 앉힌다. “내 자네의 용맹(勇猛)함을 알고 내가 이렇게 자넬 보려고 불렀다네.” 대감의 집요한 유혹에 조만술은 윤도의 사병 대장으로 살면서, 그와 동시에 윤도도 왕과 못지않은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동안 이 윤씨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권세를 누리게 되었던가. 그 사연은 그야말로 고추 당초가 맵다는 여자의 삶을 알기라도 하듯 몽고에서 모진 타향살이를 살아왔다. 몽고 관료의 하인으로 십년, 잡상인으로 십년, 그 이듬해에 시작한 고려의 인삼을 무역하는 일가지 하지 않는 일이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도움이 필요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 것이 이 윤도가 누리는 부의 비법이었다. 이윽고 윤도는 한 번화가의 상권을 어느새 주름잡는 갑부의 반열에 이르렀다. 조만술은 그런 그의 처지를 본받기라도 하듯 자신의 사병을 관리하는 대장으로 명하였다. 고려는 한마디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직면하고 있었다. 지겹디 지겨운 몽고와의 항쟁을 견디다 못하여 조공국이 된 고려. 결국 몽고에 무릎을 꿇은 채 몽고에 충성을 한다는 서약을 남긴 뒤로 부마국(駙馬國)의 신세에 직면했던 것이다. 왕비는 몽고에서 보내주는 공주. 그 공주는 아비의 성격을 닮았는지 고려의 왕보다 더 심한 권세를 누리고 살았다. 또 그들 사이에 난 자손들은 충성 ‘충(忠)’ 자를 돌려서 왕위에 올랐다. 충렬왕, 충숙왕(忠肅王), 충혜왕(忠惠王), 충정왕(忠定王)…… 이렇게 많이 불려졌다. 그리하여 충렬왕의 재위 기간에 윤도는 연경에서의 재산을 정리하여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려로 발을 들였다. 자신이 돌아온 고려는 변화가 일어나기는커녕 그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해야 할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그는 연신 혀를 끌끌 찼다. “그토록 그리운 고려. 이 나라에 와서 보니 그게 그 꼴이로군.” 쩝쩝 다시며 거들먹거리는 상전을 만술이, “나리, 누구를 만나시겠습니까?” “여기에 누굴 만난단 말이냐.” 투덜거리는 도는 그렇게 의주 땅에 밟았다. 이곳이 과연 국치민욕(國恥民辱)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구나. 2 윤씨 일가는 의주에서 터를 잡아 권문세가(權門勢家)에 속해 있었다. 고려에 있는 윤씨 성을 가진 명문가라고 자부하는 집이란 집을 모두 뒤져 족보(族譜)에 기재토록 하고자 돈을 갖다 주기도 하였다. 서손(庶孫)을 적손(嫡孫)에 넣는가 하면, 첩을 정처(正妻)로 삼아놓는 등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니 윤씨 일가는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던가.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반원정책의 추진으로 자신의 누이가 원나라 황후가 된 것을 빌미로 횡포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비롯한 권문세족 대부분이 멸족을 당하였다. 윤씨 가문에서도 이를 피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윤도는 조정에서 불러내는 통에 나서다가 변을 당하였다. 그의 마지막은 처참했다. “나, 나 자 잘못이 없다네. 나 나 좀 살려주게, 제발, 제 제발!” 그렇게 윤도의 최후를 시작으로, 사병으로 있던 조만술은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윤도의 부인과 그 자식들을 모두 도륙하여 그 집 재산을 가로챘다. 조만술의 이 태도에 주변 사람들은 상전을 저버리는 파렴치한 놈이라고 손찌검을 하였다. 하지만 만술 자신에게도 생존은 더욱 시급했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는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만술은 이 윤씨 가문을 몰락시킨 공으로 벼슬자리를 받았다. 그리하여 만술이 조정에 나아가 어버이와 처자식을 찾아줄 것을 청하였다. 이렇게 수소문을 하다가 처자식이 있다는 고을로 찾아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남편을 그리워 하다가 얼굴 깊숙이 주름진 아낙네가 되어버린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 부인.” 사내의 기척에 아낙네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방울이 굵어졌다. “서… 서방님!” 부인을 껴안은 만술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나왔다. 부인의 손은 초라하게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부인의 말라버린 몸뚱어리를 업은 채 부인이 있다는 집으로 향했다. 자식들은 요행히도 성장하였다. 조만술, 그는 귀향하고 난 지 몇 달 뒤에 자신의 옛 이름을 버리고 조민수(曺敏修)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민수는 금상인 공민왕의 추천으로 벼슬자리를 잡았다. 그에게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홍건적들의 침입을 물리치라는 중대한 명이었다. 그는 왕의 진심을 간파하고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홍건적의 고집은 여간하지 않게 꺾이지 않았다. 이 골치 아픈 홍건적으로 인하여 왕은 무심하게도 안동(安東)으로 사랑하는 왕비와 피신(避身)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 홍건적을 용케 진압한 민수는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잖아도 원나라는 추풍낙엽으로 연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홍건적 대장이라는 주원장이 세운 명조(明朝)가 들어섰다. 남경(南京)을 수도로 삼은 주원장의 세력은 기고만장하여 북경에 다다랐다. 그러나 원나라 왕실은 이 연경의 황궁을 버리고 멀리 북으로 달아나 북원(北元)을 세워 세력의 건장함을 과시하니 명나라로서는 귀에 가시가 얹은 듯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시 북원의 왕은 기황후(奇皇后)의 소생이라는 태자가 왕위에 오른 뒤였다. 이 정국에서 공신인 민수는 왕의 명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에 정든 가족과의 만남을 버린 채 떠나는 발길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 청을 거절하고 싶었으나 국운이 기울어지고 있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 그러자 주원장의 거침없는 말이 나왔다. “요동성(遼東城)을 원하오.” 이에 조민수는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성. 이곳은 본래 고려의 영토였던 곳이다. 한데 이 요동성을 겨우 금상에 의하여 되찾은 옛 영토를 한낱 오랑캐인 하물며 홍건적 장군이었다던 주원장의 손아귀에 넘어가야만 하다니. “천자폐하의 분부가 있잖소.” 내친김에 수하인 환관이 조민수의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성미를 모르는 것을 눈치 챈 듯 순응케 했다. “만일 그대가 그 요동 땅을 내주지 않는다면 나라를 짓밟아 없애는 수밖에 없소.” 기고만장한 주원장(명태조)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요동성은 오랑캐의 침범으로부터 막기 위한 중추한 군사기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중화사상에 기치를 단 한족의 자존심을 내세움에 있어서도 대단히 용이했다. 고려가 계승하고자 했던 고구려 역시 요동성을 통해서 수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요동을 확보함으로써 적군으로부터 안전하게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그러한 덕택으로 내치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겨우 되찾은 고려의 입장에서도 이와 같았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그대가 나라를 본받고자 한 송나라의 후예인 이 주원장이 감히 고려에게 조공을 요구하는 바외다. 그러니 내 이 말을 고려의 국왕에게 칙서로 적어내어 고려국왕에게 전해주기를 바라오.” 단 한마디 대꾸도 없이 고려로 돌아온 조민수는 왕에게 칙서를 전한 채 집에서 앓아누웠다. 조민수의 이번 일로 인해 금상은 주원장에 대한 태도에 괘씸하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치욕을 남기고도 모자랐다. 그 일이 있은 뒤 공민왕이 대노하였다. 조민수에게 꾸중이 날아왔다. 이때 구세력이 왕의 의중을 떠보려하자, “전하, 그리하시다면 다시 북원과 화친하심이.” 이에 신진사대부들의 반발이 심하게 일어났다. “네 이놈들! 감히 뉘라고 전하의 심기를 건드리느냐!” 그러잖아도 임금은 왕비인 공주의 죽음으로 심신이 쇠약해져 이를 이유로 정사를 내던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땡땡이 중이라는 신돈(辛旽)이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터였다. 물론 왕의 마음은 사대부들의 의견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핑계로 들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려는 이 권문세족에게는 완전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나라로부터 온 사신을 이인임이 직접 나서서 처단하고 몽고와의 화친에 대하여 재개를 하도록 했다. 그 뒤 왕의 총명이 탁해져서 자신의 아들이란 사내아이를 데려다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삼았더랬다. 그러나 그 생모라는―신돈의 요종이라는―반야(般若)가 태후의 노함을 받아 임진강 푸른 물에 던져지고 생부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시해(弑害) 당하였다. 이리하여 이인임은 대군을 왕좌에 앉히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때 조민수는 왜구의 칩입을 막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는 이성계(李成桂)의 수하로 있어왔다. 하루는, “몇 년 전 채빈이라는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있었는데 그가 누군가의 손에 당했다고 하지요?” 이성계의 막사에서 민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사신이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내 잘 아오. 다름 아닌 이인임이 그 무소불위를 지닌 손으로 눌러 죽인 셈이지요. 지금 금상의 보령(寶齡)이 겨우 열 살도 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까 여덟이오.” “그러니 그게 문제지요. 이인임이 만일 우리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때 어떻게 수습합니까.” 그러자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엊그제 정도전(鄭道傳)이란 젊은 선비가 왔었소.” “그 젊은이가 어인 일로.” “이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는데 내 힘으로 그 뜻을 펼치고자 한다더군.” “그래요? 한낱 선비라는 자가 칼보다 붓을 숭상하는 부류이니 하기야 무력도 필요하기는 한가보군요.” 조민수의 이 말에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성계, 그의 집안도 한낱 권문세족과는 다름이 없었으나 그의 아버지 자춘(子春)이 원나라가 다스리고 있는 쌍성총관부 안에서 성장한 토호들 중 하나로 군림하였다. 그리하여 조상인 이안사(李安社) 이래로 살아온 집안답게 그 부유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서 선왕인 공민왕이 몽고에 대한 반원정책에 동조하여 그는 식구들과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려 백성이 되었다. 이에 왕은 자춘과 그 아들 성계를 불러다 나라의 인재로 받아들였다. 이후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것을 청하는 왕명에 따라 그 땅들을 무력으로 접수했다. 그 후 선왕의 총애가 돈독해진 성계는 왜구가 들끓는 경상 ․ 전라 전역으로 파견되었다. 조민수도 이 행렬에 끼어들게 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계는 날이 갈수록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걱정하고 또 걱정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지내던 정운경(鄭云敬)과 밀직대언(密直代言)에 있었던 우현보(禹玄寶) 집안의 여종과의 사이에 태어났다. 이를 두고 일부 벼슬아치들이 하나같이 그의 태생에 대해서 노비의 자식이 벼슬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명분삼아 그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정도전은 급진적인 개혁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현보가 이런 그를 얕잡아보기도 하였다. “한낱 젊은 나부랭이가 어느 안전으로 벼슬을 한담. 얼이 빠진 놈. 네놈 어미가 누구건대.” 처음에 어머니의 신분을 두고 대하는 상전을 볼 적에 큰 치욕을 맛보았다. 물론 요승(妖僧)이라 일컫는 신돈의 영향도 그에 상응이야 했지만 정도전에게 힘을 키워줄 조력자를 찾고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벼슬을 마다한 그는 마침내 이리저리 조력자를 찾기 위해 방랑하여 우연히 이성계의 막사에 들른 것이다. “나는 그 눈빛을 잊기 힘드오. 흡사 나라를 삼키고도 모자랄 눈이었소.” 조민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자 이성계가 자신의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조민수는 정도전의 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도전의 글은 가히 나라를 먹고도 모자랄 것 같은 위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그러나 조민수는 자신의 나이보다 낮은 이성계를 존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하늘도 감복할만한 무예에 새 발의 피임을 깨달은 것과 맞먹은 것이었다. 그때 조민수가 과찬을 할 때마다 이성계는 웃음으로 그를 더욱 신뢰하여 응대했다. 세월이 흘러 금상이 성년이 되어 이인임의 손에서 벗어나는 나이가 되었다. 공민왕의 모후가 되는 태후가 죽고, 공민왕의 후궁인 안씨가 태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이인임이 그녀의 정사에 간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지 그녀를 무지몽매하여 정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손에 들어 있는 권력을 놓지 않았다. 한번 맛을 본 권력은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이라던가. 정도전을 비롯한 사대부들은 영원히 정치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인임은 필시 사람의 운명을 타고났으니 하루빨리 권좌에서 내쳐지겠지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생각과는 달리 뒷전으로 물러갔다. 우왕은 영악하게도 충신이라 자부하던 최영(崔瑩)이란 장수를 불러다 그 신표로 이인임을 권좌에서 내치게 했다. 이 소문은 장안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 무슨 일이람?” 탄식 어리게 중얼거리던 정도전은 최영을 두려워하였다. 최영. 그는 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아내는 중대한 장수였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오직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그야말로 외골수에 가까웠다. 그러한 연유로 그에게 융통성 없고 금수에 비견된다는 세인들의 입방아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던 최영이 그 타고난 성격으로 이인임을 파멸시켰다고 하니 서울 장안에 바람이 잘 날이 없었다. 그 뒤 날이면 날마다 밤중이 되기만 하면 이인임이 굳게 닫힌 최영의 집 대문을 붙들어다 문고리를 부여잡아 흔들고는, “나는 억울하오―” 하며 대성통곡하였다. 그러나 냉정한 최영의 성격 상 이인임을 티끌의 먼지와 진배없다고 판단되었다. 그 뒤 이인임은 실각을 당하고 은거하다 세월이 흘러 생을 마감했다. 이에 조정은 최영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었다. 금상(우왕)은 그를 국구(國舅)로 삼았다. 아직 정실을 두지 못했으나 부인을 넷이나 두었다. 그 넷 중에 하나가 왕의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창(昌)이라 하였다. 최영의 영향력은 이성계의 막사에서도 역력히 끼쳤다. 그날 밤. 이성계의 막사에 파발이 도착했다. “지금 전하께서 두 장군님을 모셔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성계와 민수는 야심한 밤에 갑작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날 두 사람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개성에 다다를 즈음에는 날이 밝아왔다. “전하, 신들을 찾으신 연유가 있으시옵니까.” 젊은 금상의 입에서, “요동을 정벌할까 하오.” 이 어마어마한 어명에 달리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나라의 국고는 텅 비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사기는 저하됨은 물론이고 생산력과 군사력조차 키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서 요동을 정벌하다니. 이를 알아챈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상소하였다. 이를 들은 최영은 성계를 죽이고자 했다. 자고로 고려는 황제국이라 칭하였거늘 명나라라는 신생국가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가. 최영은 실리적인 것보다 나라의 자존심을 명분삼아 이를 중시했다. ‘고얀, 네가 감히 내 콧등을 건드려.’ 반면 정도전은 최영의 이 고지식함을 깨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을 정벌하면, 나라는 필시 망한다. 결국 명나라의 신민이 된다.’ 고려 백성의 한 많은 삶을 보듬지 못할망정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은 도전에게 우이독경(牛耳讀經)과 같은 말이었다. 성계는 서둘러 맏아들 방과(芳果)를 시켜 도전을 불러들였다. “삼봉, 그래도 요동을 정벌해야 하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 고집불통 영감의 말을 어찌 들으시려 합니까.” 삼봉의 말을 듣고 성계는 방법을 간구했다. “요동으로 가는 길목에 압록강이 있습니다. 그 강 한가운데에 흥화진 벌 앞에 강이 있사온데 그 섬은 위화도(威化島)라는 곳입니다. 그 섬에 주두하고 저들이 모르는 틈에 뒤에서 회군을 하고서는 저들을 치면.” “그, 그것은.” 성계가 주저하였다. 그러나 “충정이 우선입니까, 국운이 우선입니까?” 도전의 꾸짖음에 그만 생각을 멈추었다. 충정이냐, 국운이냐…… 성계는 생각하였다. 오래간만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도전을 맞이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도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개혁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또 혁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큰뜻을 품어줄 수 없었다. 그러하므로 그 생각은 성계가 하루빨리 마음을 다잡아 나라를 바로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것이 성계에 대한 물음이다. “알겠소. 삼봉의 뜻을 알겠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들을 전열시켜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최영에 대한 반란이었다. 자칫하다가 반역으로 몰려 처단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위화도는 명과 고려의 국경지대이다. 위화도에서 요동까지는 지척이므로 바로 건넜다가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외교적인 문제가 제기될 상황이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이상 고려는 사실상 그 땅을 가질 수 없게 될 터였다. 아무튼 이 사건에서 금상은 장인이 되는 최영의 신변을 이유로 군사들을 두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이성계의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최영은 보기 좋게 잡혀갔다. 소식을 들은 금상은 울부짖다 그만 혼절했다. 이튿날 최영이 고봉(高峯)으로 유배를 갔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인 최영의 유배소식을 듣고 백성들은 울부짖음이 마르고 닳을 새가 없었다. 이것이 그의 권세에 대한 실각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이성계의 정권이 들어섬을 의미했다. 나흗날 최영은 처형되었다.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효수당한 최영을 본 백성들은 왕의 붕어 때보다도 더 슬퍼하였다. ‘불쌍한 우리 장군님.’ 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백성들은 이성계를 더욱 저주하고 저주했다. 개성의 궁궐에서는 일대가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네 이놈, 네놈이 누구의 꾀에 넘어가서 보위에 앉은 나를 내치느냐! 네놈들이 세운 나라더냐!” 덩달아서 왕의 부인들도 모두 줄줄이 내쳐졌다. 선왕의 후궁이었던 안씨가 왕을 폐위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하늘을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원성을 마다하고 공민왕의 소생이었던 강릉부원대군의 폐위를 대비 안씨가 승낙하였다. 이 사건이 곧 이성계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아버님.” 조민수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문후(問候)를 여쭈었다. 그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무슨 일이냐.” “지금 금상이.” 그러자 날벼락이 내려진다. “금상이란 말은 닫아라!” 나라의 흥망이 좌우되는 이 시점에서 이성계가 덜컥 왕좌를 내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는 괘씸하게 여겼다. 너무 빨리, 섣불리 폐위를 했다가 다른 세력으로부터 내 자신은 물론, 식구들에게 큰 위협으로 닥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이를 모르는, 몸만 어른인 철딱서니가 없는 아들을 으름장 놓은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뒤이어 강릉부원대군 무니노 곧 우왕(禑王)의 뒤를 이어, 그 아들인 창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재위 십년도 채우지 못한 채 이성계의 손으로 폐위되었다. 그 원인은 신돈의 직계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신돈에게 반야라는 몸종이 있었다. 그런데 반야를 신돈이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는 왕을 현혹하게 하여 왕비가 환생했다고 사칭(詐稱)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그녀와 관계하였는데,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창왕의 아비 우왕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이 이를 듣고서는 공식 상에 아들을 데려다 신료들에게 보이고는, 죽은 후궁인 한씨의 소생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반야가 이를 듣고서 반발하여 대궐 문 앞에 나아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을 두고 생판 모르는 남의 자식으로 바꾸다니 이 무슨 수치냐며 대들었다가 당시 태후에게 미움을 사서 임진강 물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이런 일말의 사태를 알고 있던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치를 떨었다. 내 위의 상전이 이렇게 나라를 망치려들다니. 우직하기 그지없던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리기는 여느 백성들과 마찬가지였다. 송도가 망한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이 와중에 조민수는 수치스럽게도 이성계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성계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성계는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건다. “다름이 아니라.” 술을 마저 마시고서는, “금상을 폐해야할 것 같아서 이리 불러들인 것이오.” 조민수는 무의미하게 이성계의 말을 들었다. “폐주는 지금 강화도에서 생존하고 있고, 더욱이 폐주를 복위하려는 움직임이 역력하니 백성들의 동요가 여간 드센 게 아니오.” 그러나 “나는 왕을 폐할 수 없소.” 거침없이 나온 민수의 말에 이성계가 그 이유를 물었다. “왕을 두 명이나 갈아치우고서 새로 왕통을 이을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소이까. 당초에 금상을 폐하지 않아야 했거늘. 당신의 그 권세가 드높다 못하여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졌소이다.” “아, 아니.” “나는 그대의 명분에 관심도 없으나 나라의 흥망이 달려있기에 위화도를 회군한 것뿐이오. 더욱이 나라를 망치게 하려고 왕을 폐하라는 것 자체를 가타부타할 일이 아니란 것도 그대는 잘 알 것이오. 더욱이 정삼봉처럼 정치에 아둔하기는 하나 그 욕심이 과하면 과할수록 더욱 백성들의 원성만 더할 것이오. 폐하느니 차라리 죽인다면 모를까. 나는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말에 따라 산 채로 폐위시키고 싶지 않소.” 이성계의 계책 가운데 산 상태로 왕을 폐한다는 말 자체를 거부하였다. 이는 일종의 항거였다. 이성계 일파는 이 무지몽매한 충정을 지닌 그를 죽이려고 들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이성계는 그를 죽이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급한 일파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그를 조정으로부터 추방하여 멀리 창녕(昌寧)으로 유배를 갔다. 창녕에 유배를 갔다는 소식에 식구들은 모두 대성통곡(大聲痛哭)하였다. “아이구, 서방님. 서방님―” 식구들의 울부짖음에 조민수는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와중에 이성계 일파는 조민수의 충정도 모른 채 신종대왕의 후손인 요(瑤)를 후계자로 삼아 왕위에 올렸다. 헌데 요는 이성계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알고 있던 조민수는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그 소식을 아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조민수는 자포자기의 삶을 이어가다가 이듬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 이를 본 것은 뒤늦게 온 며느리에 의해서다. 그의 죽음을 보고 있던 부인은 혀를 깨물어 죽었다. 그의 유해는 자손들에 의해 묻혔고 조선이 개국되던 해에 선죽교(善竹橋) 다리 위에서 벌어진 정몽주의 잔인한 죽음을 끝으로 고려는 무너지고 말았다. 종(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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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德 善安 奉堂
정병욱(鄭炳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리스도 말씀) 
http://www.1392.org/bbs?moim09: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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