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지역
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11월 15일 (수) 23:38  [자시(子時):삼경(三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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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 벽해 양세봉 장군 행장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행장
朝鮮革命軍 總司令官 梁世奉 將軍 行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 장군의 휘(諱)는 세봉(世奉)이고 이명(異名)으로 서봉(瑞鳳) 또는 윤봉(允奉)을 쓰기도 하셨다. 장군의 호(號)는 벽해(碧海)이며 가문의 연원(淵源)과 세계(世系)는 전하지 않는다. 장군은 개국505(1896:고종33)년 음력 6월 5일에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셨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늠름하셨다. 장군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장군의 부친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장군을 교육하고 싶으셨다. 그러던 중에 마을 어느 서당에서 문지기를 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식을 듣고 장군의 부친께서 서당 훈장을 찾아가 밤에 문지기로 서당을 지키면서 낮에 글을 배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셨고, 장군은 서당의 문지기로 일하면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배울 수가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통감부(統監府)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국권을 피탈당하고 있었다. 개국516(1907:융희1)년부터 개시된 정미 의병 전쟁때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은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많은 의병이 전사하였다. 그런데 개국518(1909:융희3)년 10월 26일에 일대 의거(義擧)가 발생한다.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安重根) 의사께서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하시니, 그 소식이 곧 대한제국 전역에 퍼졌다. 철산군 벽촌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고 장군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깊이 감동하면서 그 기개에 경탄하는 마음을 품으셨다.

개국521(1912)년에 장군은 부친을 여의고 16세의 어린 나이로 가장이 되셨다. 개국525(1916)년에 임씨 부인 휘 재순(再順)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린 장군은, 어렵게 가계를 이끌어 가셨다. 그러나 개국519(1910)년부터 계속된 일본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으로 조선의 농민은 나날이 궁핍해져 갔으며 장군의 집안도 가세가 기울어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장군은 조선에서는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판단을 내리고 만주로 넘어가기로 결심하셨다. 개국526(1917)년 겨울, 장군은 가족들과 함께 매서운 추위를 견디면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전현(寬甸縣), 환인현(桓仁縣)을 거쳐 흥경현(興京縣)의 영릉가(永陵街)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어느 만주족 농가의 도움으로 정착하여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셨다.

만주에서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으로 생활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다. 더구나 영릉에는 조선인 가구가 장군의 가족밖에 없었기 때문에 장군은 더욱 외로움을 느끼셨다. 개국528(1919)년 봄에 장군은 가족과 함께 흥경현 경동부(境東部)에 있는 조선인 집단 거주 지역인 홍묘자(紅廟子) 사도구(四道溝)로 이주하셨다. 그곳에는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이주해 온 조선인들이 정착해 있었는데 장군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정착하셨다. 장군은 그들에게서 작은 땅을 빌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셨다. 동년 3월 1일에 서울 탑골공원에서부터 시작된 3·1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만주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 당시 홍묘자에 흥동학교(興東學校)라는 조선족 사립학교가 있었다. 흥동학교의 이세일(李世日) 교장은 홍묘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조선인들을 모아 시위대를 조직했다. 이 때 장군은 시위 대오의 맨 앞에 서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셨다.

3·1 만세 운동에 대하여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대응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만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 무렵, 남만주 삼원보(三源堡)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3년 뒤인 개국531(1922)년 봄에 장군은 독립단 대장인 김명봉(金明奉)과 정창하(鄭昌夏)와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닿아 독립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셨다. 장군이 맡은 역할은 주로 식량의 공급이었다. 장군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독립단을 위해 금구자의 조선인들을 집마다 방문하여 식량 지원을 해달라는 호소를 하셨다. 그 무렵 남만주에서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대한독립단을 포함하여 각 지역에서 분산 활동하고 있던 독립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는데, 독립단원으로 활동하던 장군은 계속해서 통군부의 군량을 모으는 일을 도우셨다. 장군은 모은 곡식을 사도구에 있는 정재생의 집에 모아 두었는데, 정재생이 그 곡식을 빼돌리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곡식을 횡령하였다는 누명을 쓰게 된 장군은 군법(軍法)의 즉결 처분을 받을 위기에 처하셨다. 장군은 일단 화를 피하고자 황급히 몸을 피해 고향인 철산군을 향해 길을 떠나셨다.

고향으로 향하던 장군은 동년 겨울에 평안북도 의주, 삭주 일대의 천마산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天摩山隊)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항일 무장운동을 시작하셨다. 천마산대는 개국529(1920)년 최시흥(崔時興), 최지풍(崔志豊), 박응백(朴應伯)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항일 무장단체로, 재래식 총검으로 무장하고 유격전을 벌여 일본 행정기관의 파괴, 일본 관리 사살, 친일파 처단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장군은 의주군 옥상면 주재소를 습격하는 작전에 참여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유수동 습격전에도 참전하여 용감하게 앞장서 적들을 사살하셨다. 그러나 이듬해인 개국532(1923)년 초에 개시된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천마산대는 근거지를 잃게 되었고, 수많은 대원과 인근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천마산대는 어쩔 수 없이 조선 땅을 벗어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장군은 만주로 향하는 길을 잘 알았기에, 대오의 길잡이가 되어 대원을 인솔하셨다. 천마산대는 만주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무장 독립 단체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합류하였다. 재만(在滿) 독립군 중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 산하 직할 부대였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가 있었는데 이 부대가 개편된 것이 바로 광복군총영이다. 천마산대와 합류한 광복군총영은 다시 광복군철마별영(光復軍鐵馬別營)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장군은 동영(同營)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병사들의 군기 확립과 전투력 상승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고, 총영장인 오동진(吳東振) 장군의 신임을 얻게 되셨다.

천마산대가 만주로 건너가기에 앞서 개국531(1922)년 8월에 재만 독립군의 통합 군 단체인 대한통군부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개편하였고, 광복군총영도 이에 합세한 상황이었다. 천마산대를 따라 광복군총영에 합세한 장군은 대한통의부의 산하 의용군 제3중대에 배속되셨다. 개국532(1923)년 2월에 대한통의부는 공화정 수립파와 복벽파(復辟派) 사이의 갈등 때문에 복벽파들이 탈퇴하여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통의부와 의군부의 대립 속에서 통의부 산하 의용군의 제1, 2, 3, 5중대는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고, 자신들의 조직을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 단체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다. 임시정부와 교섭 끝에 승인을 받아내어 동년 8월에 남만주 집안현(輯安縣)을 중심으로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결성되었고 압록강 연안을 관할하게 되었다. 통의부 산하 의용군 제3중대 소속이었던 장군은 이때 참의부 산하 의용군 제3중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셨다.

개국533(1924)년 5월 16일에 장군은 국내 진공 작전에 투입되어 평안북도 초산군 성남동에서 일경(日警)과 교전을 벌이며 적 네 명을 사살하셨다. 이때 조선 총독 재등실(齋藤實:사이토 마코토)이 압록강 국경 지역을 순시한다는 첩보를 입수되어, 동월 19일에 장군은 재등실 저격 작전에 투입되셨다. 장군은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장 한웅권과 힘을 합쳐 강계군 고산 강변에서 재등실 저격을 노렸으나 총탄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아 작전에 실패하셨다. 비록 작전은 실패하였지만, 3·1 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文化統治)라는 명목으로 우리 조선인들을 기만하려고 했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하였고, 만주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계기가 되었다. 동년 6월에 장군은 강계군과 위원군에서 일경과 교전을 벌였고 이후 부대를 정비하여 만주로 회군하셨다.

앞서 통의부를 이탈했던 의용군 소대가 참의부를 조직한 가운데, 동년 7월에 참의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통의부 잔류파들은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소집하였고, 동년 11월에 남만주의 광정단(匡正團), 의성단(義成團) 등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였다. 이듬해인 개국534(1925)년 3월에는 러시아에서 탈출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북만주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의 독립군이 합세하여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분할하여 통치하는 형국이 되었는데, 각자의 목적은 항일 독립투쟁으로 일치하였으나 그 방법을 두고 의견이 합쳐지지 않았다. 동년 6월에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미쓰야 미야마쓰)이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과 손을 잡고 만주 지역 독립군의 무장 해제와 체포를 결의하는 삼시 협정(三矢協定)을 맺자 만주 독립군의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다. 개국535(1926)년 11월에 장군은 부대를 이끌고 정의부에 합류하여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셨다. 정의부는 3부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고 참의부는 일제의 탄압과 내부 갈등으로 점차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다. 장군이 참의부를 나와 정의부에 합류한 것은 참의부 지도부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공산당(共産黨) 사이에 체결된 제1차 국공 합작(國共合作)의 영향을 받아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은 3부 통합 운동을 전개하여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존 단체를 모두 해산하고 개인 자격으로 완전히 새로운 당을 조직하자는 개인 본위 조직론과 기존 단체들이 연합하는 형태로 통합하자는 단체 본위 조직론이 서로 대립하여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개인 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는 세력은 개국537(1928)년 북만주에서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결성하였고, 단체 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는 세력은 개국538(1929)년 4월에 남만주에서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하였다. 장군은 국민부의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동년 12월에 국민부 중앙회의에서 민족 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하고 산하 부대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결성하자, 장군은 부사령이라는 중임을 맡게 되셨다.

일제는 대륙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어 개국540(1931)년 9월에 만주 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개시하였다. 일본의 대륙 침략으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점차 고조되자 독립군은 공동의 적 일본에 맞서기 위해 한중 연대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동년 11월에 장군은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彤軒)의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협의하여 연합부대를 편성하셨다. 그러나 동년 12월에 부일(附日) 단체인 보민회(保民會)의 밀고로 조선혁명당 주요 간부들의 회의 장소가 발각되어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이호원(李浩源),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보안(金輔安) 등 13명의 간부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만주 전역이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괴뢰 정부인 만주국(滿洲國)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추가로 83명의 간부가 체포되면서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실질적으로 와해될 지경에 이를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장군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혁명군 각 지역 부대를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고, 회의에서 각 부대장의 추천을 받아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셨다. 총사령관에 부임한 장군은 내부적으로 부대를 재정비하고 외부적으로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요녕 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을 조직하여 한중 연합 작전으로 항일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셨다.

개국541(1932)년 3월 11일에 장군은 조선혁명군은 3개 중대를 이끌고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하여 돌격전을 감행한 끝에 일본군이 수비하던 신빈성을 함락시키셨다.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계속 일본군을 추격하여 신빈성 서쪽에 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였고, 다시 추격전을 감행하여 상협하(上夾河)까지 점령하셨다. 한중 연합 작전에 첫 전투에 큰 성과를 거두자 한중 민족 간의 갈등은 완화되었고 유대는 더욱 공고해졌다. 동월 하순에 일본은 영릉가 전투의 패배를 갚기 위해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흥경성을 점령하자, 장군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다시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하여 전투를 벌이셨다. 조선혁명군의 동문을 공격하고 중국 의용군이 북문을 공격하자 기진맥진한 적군은 패퇴하였고 마침내 흥경성마저 한중 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동년 10월까지 조선혁명군은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2백여 차례나 치렀다.

이듬해인 개국542(1933)년 1월에 장군은 조선혁명군 수뇌부 소집 회의에서 총사령관에 재임용되었고, 부대를 개편하여 한중 연합 작전을 계속 추진해 나가셨다. 동년 4월에 장군은 조선혁명군의 활동무대를 집안현, 임강현()일대의 한중 국경지대로 옮겨 유격전과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셨다. 동년 7월 7일에 일본군이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은 과감한 반격을 하여 일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과 중포 1문, 소총 8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무순현 노구대(老溝臺) 전투와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 전투에서도 조선혁명군은 일본군을 무찌르고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일본은 조선혁명군과 요녕민중자위군의 연합 부대에 큰 곤욕을 치렀고, 점차 장군의 명성은 남만주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만주의 우리 동포들은 장군을 군신(軍神)이라고 부르며 칭송하였다. 일본은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모략을 짜내어 밀정 박창해(朴昌海)로 하여금 조선혁명군을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王明藩)을 매수하게 하였다. 개국543(1934)년 음력 8월 12일에 일본에 매수된 왕명번은 작전 회의를 한다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小荒溝)의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장군은 부관과 함께 왕명번을 따라나섰고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괴한이 나타나 장군의 일행을 포위하였다. 왕명번은 장군의 가슴에 총을 겨누면서 이 탄환을 받지 않으려거든 일본에 항복하라고 하였다. 장군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위엄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박창해, 왕명번 등 소인배들의 저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하셨다. 향년 39세였다.

장군은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나라를 위한 애국심만큼은 어느 지식인이나 명문가 자제들에게 뒤지지 않으셨다. 장군은 독립군에 사병(士兵)으로 입대한 이후 소대장, 중대장, 부사령을 거쳐 마침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오른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며 치열하게 항일 전쟁을 이끌며 사살한 적군의 수가 천여 명이었다.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시점부터 사실상 만주 지역에서 항일 전쟁은 막을 내린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장군은 만주 독립군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졸필(拙筆)이나마 장군의 행장을 적어 내려는 것은 장군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삼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 장군의 행적을 남겨 그 기록을 만대(萬代)에 전하고자 한다.

[주(註)] 경기도 이방 정제두(鄭齊斗)가 장군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국626(2017)년 10월 25일부터 행장을 찬술하기 시작하여. 동년 11월 14일에 완결하였다. 행장 찬술에는 아래 문헌들을 참고하였다.

[참고 문헌]
경향신문(2005).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Ⅱ중국편.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링크]
국가보훈저. 1994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양세봉 [링크]
두산백과. 천마산대 [링크]
위키백과, 대한통의부 [링크]
위키백과. 정의부 [링크]
위키백과. 조선혁명군정부 [링크]
위키백과. 참의부 [링크]
조문기(2007).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나무와 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복군총영.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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