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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 女性時代 제14화
주옥화를 놀려먹기 재미가 붙었던 황주형은 완전히 왜놈의 앞잡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공립학교에 교사로 교편을 잡더니, 마침내는 황국신민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학도들에게 손수 강요를 하기 까지 했다. 심지어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읽으라고 매일 아침 조회마다 닦달을 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서울 장안의 그와 아는 사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르면 간첩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주옥화는 한편으로 그와 관계가 엮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느꼈다. 마침 설석중네 어르신이(옥화의 시부모가) 병을 얻어 죽으면서 재산을 모두 옥화에게 상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남편인 설석중과 그 어머니가 학을 떼고 하자 오히려 시아버지가 역정을 내더라는 것이다. 아이를 낳게 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인해 시부모로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죗값으로 여기라며 잠자코 있으라며 입막음을 하였다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재산을 얻은 옥화는 양육원(養育院)을 차려 놓아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놓기도 했다. 한때 설석중에게 양자를 두려고 했던 한 자락의 사라진 꿈을 이렇게나마 결실을 보게 되었다는 생각에 그저 행복감에 젖은 채 물심양면으로 어린애들에게 열성적으로 돌보는 터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큰 변화가 생긴 것이 있다면 바로 소홀히 했던 교회에서의 주일예배였다. 신혼 때까지만 해도 남편과 함께 억지로 예배를 드리곤 했던 것이 다반사였지만 오히려 자신이 시댁의 가풍에 반기를 들기 어려운 나머지 소홀히 했던 교회 출입을 시댁으로부터 독립한 채 교회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그녀가 양육원에서의 일손을 다른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바깥나들이를 한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김무화의 신혼집이었다. 김무화의 집은 단출하고 또 집은 한옥인데, 규모는 꽤 자그마했다. 김무화 내외의 살림은 소박하지만 의외로 깔끔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무화의 집에서 짐을 싸는 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이애, 무화야. 이게 무슨 짐들이니?” 그러자 무화가 말했다. “우리 그이가 보천보에서 전투가 벌어진 걸 보고서 만주나 연해주로 가볼까 싶었대. 그런데 그 소식을 알아보던 도중에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어.” 무화의 말에 옥화는 휘둥그레진다. “그게 뭔데?” “그 소식통에 의하면 어떤 여자가 연해주에서 나와 만주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아가면서 왜경의 기밀정보를 유출시키는 밀정노릇을 시켰나보더라구. 그랬던 게 왜경에게 들통이 나서 하필이면 그 정부한테 붙잡혔다는 거야.” “그 여자가 누군데.” “그 여자가 다름이 아닌 경화라는거야.” 경화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듯이 무화의 눈은 의문을 드러내었다. “백경화.” 백 후작의 딸 이름 석 자가 나오자 무화는 무엇인가에 헛것에 들린 듯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러나 이미 사실임이 밝혀졌다고 옥화는 확신을 시켰다. “그럼.” “그 애가 한때 같이 왜놈 밀정으로 있었던 사내에게 발각되었다는 거야.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건.” “……?” “그이하고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대.” “딸?” “그 딸아이 때문에 사내가 이에 앙심을 품고서 밀고했다는 얘기두 있구.” “그럼. 그 애는 어디에 있다니?” “내가 알아들은 바에 의하면 한때 보육원에 맡겼다곤 하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는 알 길이 없어.” 무화는 잠자코 생각을 해보는 눈치더니, “그 보육원 이름부터 알아봐줘.” 하고 옥화에게 부탁을 한다. “그나저나 연해주는 위험한 곳이잖아. 스탈린이 거기에 있는 우리 조선 사람들을 모조리 외딴 황무지에 내보내곤 했어. 그래도 가고파?” “그래도 가야할 건 가야지.” 짐을 정리하며 무화는, “그럼 경화가 있다는 감옥이 어딘지만 알려줘. 우리 그이랑 같이 가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옥화는 친구의 한마디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다. “걱정하지 마. 내 아버지가 김 모 남작이라고 하면 장안에 다 아는 사실인걸.” 무화의 자신감을 보고서야 옥화는 경화의 소재지를 알아내었다. 그 이튿날로 이들은 곧바로 만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만주에 이사하게 된 무화와 재원은 곧바로 경화의 행방을 알아보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단동에 있는 경찰서에 갇히게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곧바로 그리로 향했다. 이곳에 다다른 무화 내외는 얼굴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경화의 모습을 보고 오열하고 말았다. “무화야 왜 울어.” 경화의 첫마디였다. “왜 이렇게 옥고를 치러야만 했니.” “흐흐흐흐.” 무화의 걱정스런 마음을 알는지 모르는지 경화는 그저 웃음으로만 대할 뿐이었다. “생각하면 내가 너무나 안하무인으로 살았던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아버지한테 돈이 많다는 이유로 괜히 아버지의 등 뒤에서 부유하게 산 것이 오히려 후회가 된다. 만주에 가서 보니, 우리 동포는 머나먼 타국에서 쥐꼬리만 한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그러다보니 밥을 굶기가 일쑤지 않나. 심지어는 그 낯선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니 양심의 가책도 느끼곤 했단다.” 그러면서 경화는 눈물이 쏟아져 나와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있노라니 내가 첩자노릇을 한 것 자체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 나머지 동포를 박해하면서 받은 돈을 독립군에다 군자금으로 써줄 것을 청해가면서 대주었단다. 그랬는데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최가라는 작자가 왜경에게 이를 얘기해준 바람에 내가 이렇게 감옥에 갇힌 거란다.” “그럼. 너한테 아이가 있다는데 사실이니?” 무화의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경화는 할 말을 잃기도 했다. “그 아인 내 기억에는 없다.” 철창 속에 갇히어 죄수복을 입은 채 초췌한 모양을 하고 있던 경화는 곁에 있던 재원을 보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애써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럴 리가.” 화를 주체할 길이 없는 무화는 윽박지르듯 경화를 대했다. “그 아인 보육원에 맡겼단다. 그러고는 내가.” 달리 말을 이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기에 두 사람에게 털어놓는다. “사실 그 아이. 내가 낳은 아이가 맞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생아나 다름이 없는 아이였다. 정부나 다름이 없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았다. 그이는 이미 아내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나를 만난 뒤로는 실질적으로 동거하며 살았었다. 그이는 나면서부터 어머니를 여읜 뒤 아버지 슬하에 자랐으나 아버지는 주벽(酒癖)이 심해질 만큼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러대곤 했다. 그래서 가출하고 이 만주 바닥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왜경의 앞잡이가 된 거구.” 덤덤한 말투의 경화를 두 사람은 어떻게 위로해주어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그러던 차에 내가 ‘에토’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리고 하니 그이가 내게 접근을 해왔다. 그래서 기밀정보를 유출하는 임무를 같이 맡게 된 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인지 그 사람이 왠지 싫어졌다. 그래서 탈출을 했구, 해란강으로 달아났단다.”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경화는 참아내었다. 굳센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기에. ‘경화야. 경화야. 네 업보를 감당하기에 힘이 들었겠구나.’ 진심으로 무화는 경화의 손을 덥석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면회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면회 시간이 지났소!” 철창 안에서 경관의 호령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경화와 무화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화가 낳은 아이의 행방을 알고 싶어 했으나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발길을 되돌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방을 수소문한 끝에 경화의 딸을 찾으러 만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끝에 만주의 수도 신경(新京)의 어느 보육원에 경화의 딸 정숙을 찾을 수 있었다. “참 불쌍한 아이더군요. 엄마를 찾아달라고 악을 쓰지를 않나.” 보육원장의 한마디에 이들은 다시금 눈시울을 붉히고야 말았다. “아가야. 이리 온.” 무화의 손짓에 처음에는 낯가림이 심하던 아이였으나, 자신을 잘 키워줄 것을 알았던 모양인지 아장아장 거리며 무화 내외에게 다가갔다. ‘아가야, 네 엄마는 이미 감옥에 갇히어 있단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너를 키우려고 이렇게 찾아왔단다.’ 이윽고 백강화, 아니 백경화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은 다소 시간이 걸렸다. 두세 시간이 지났을까. 백강화는 졸지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을 위반한 까닭으로 징역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때 무화는 그의 딸아이를 데리고 왔다. 재판을 마치고 돌아선 그때 강화는 무화의 품에 안긴 자신의 딸아이를 바라보고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자신을 부르는 딸아이를 외면하려고 했으나 인정에 끌리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거 알고 있던 경화는 수갑을 채운 채 자신을 끌고 가는 경관들에게 눈짓을 한 뒤 가까이 다가갔다. “아가야. 미안하다.” 비로소 무화가 자신의 딸을 돌보아준다는 심중을 헤아렸다. 그리고 무화에게, “내 딸을 잘 부탁한다.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울음 섞인 듯, 애써 울음을 참는 듯 경화는 무화에게 부탁을 하였다. 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경화의 딸 최정숙은 김무화와 노재원의 양녀(養女)가 되었다. 스탈린의 대숙청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이 모두 물설고 낯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뒤 독립운동의 횃불도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때 김무화 내외는 어쩔 수 없이 만주의 신경에다 살림을 차리고 김무화는 신경에 있는 어느 소학교에서 교사 일을 맡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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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