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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20편
한명회와의 밀회를 나눈 뒤 수양대군은 의정부로, 육조거리로 떠돌아다니며 실성한 체 했다. 궁녀에게 넋두리를 늘여놓았다는 소문이 한양 장안에 널리 퍼졌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과연 호걸(豪傑)이라고 생각했다. 권람이 직접 수양대군에게 더욱 몸을 낮추라는 직언을 아끼지 않은 탓일는지도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는 조정 대신들, 그 중에, 김종서나 안평대군의 편에 선 일부 대신들은 수양대군의 검은 속내를, 깊이를 모르는 검은 속내를 모르고 그저 깔깔대며 웃기에 바빴다. “이보시게 자준, 수양대군이 실성하셔도 너무 실성하신 거 아닌가?” 지인의 물음에 명회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설마 실성하셨을까. 이 한명회가 보기에는 안 그런 척하시려는 거지.” 장담하는 것이다. 단종 원년 계유년 10월에 접어든 조정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안평대군이 몸소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서 고성이 오갔다는 소문이 났다. 칠삭둥이 한명회는 ‘기어이 종서와 안평하고 등갈 나긴 났구먼.’ 자신의 혜안이 적중했음을 알아챘다. 계유년 10월 9일 아침이 밝아왔다. 명회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느끼었다. 명회는 달손이와 윤성이, 그리고 양정이를 불러다가, 젊으면서 혈기가 왕성하며 힘이 센 남정네들을 모두 불러다 수양대군의 사저로 모이라고 하였다. 장정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때 아닌 술잔치가 벌어지니, 수양대군의 사저인 명례궁에 모인 장정이 백 명은 거뜬히 넘고도 남았다. 이날 술이 가득 찬 술독을 양정이와 홍윤성이가 주고받는 재주를 보여주어 뭇 장정들의 흥미를 자극하고도 남았다. “먹고 마시는 자리에 격식이 있소이까.” 수양대군이 행차하자 일순간 조용해진다. 양정과 윤성이가 칼을 빼 들자 뭇 장정들이 우르르 일어선다. “내가 오늘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케 함이다. 지금 간신(奸臣) 김종서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독단하여 군사와 백성들을 돌보지 아니하므로 원망이 하늘에 닿아, 왕실을 무시하고 업신여겨 그들이 비밀히 안평대군과 붙어 장차 불귀한 일을 벌이려 함이다. 이에 나서기로 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충신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하지 않겠는가.” 정란(靖亂)을 도모하라는 밀지를 금상에게서 받았느냐는 묻는 선비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시국이 워낙 각박하고 경황이 없는 차라 받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일제히 남정네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미리 금상께 고하였다. 이러고도 너희들이 나를 믿지 못하느냐. 나는 문종대왕의 위패 앞에서 간적들을 처단하리라고 맹세하였다. 나는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결단코 살지를 못하니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면 나를 따르고, 스스로 죽기를 사양한다면 내집에서 몸소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수양대군의 결의에 찬 눈빛으로 외치는 웅변(雄辯)에 그곳에 모인 남정네들은 모두 수양대군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정난을 도모하기에 앞서 부부인과 도원군 내외를 사랑으로 불러들여 들이고는 “이미 짐작을 할 것이니 무슨 말을 할까만, 만약 일이 잘못되면 사돈께서 연경으로 보내줄 것이니 목숨은 보전할 것이다.” “백제 장수 계백(階伯)이 마지막 전장에 나가기에 앞서, 제 처자를 죽였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대사를 앞두시고 공연한 걱정을 하십니다.” 본래 영리한 성품답게 며느리 한씨는 시아버지의 심기를 평안케 하였다. “고맙구나.” 며느리의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부부인 윤씨는 그 곁을 묵묵히 지킬 따름이었다. 윤씨도 간혹 절에 오고 가며 민심의 동태를 살피던 처지였다. 시정(市井)에서는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수하들에게 온갖 학정(虐政)에 시달리어 신음하던 처지였다. 그걸 알기에 윤씨는 지아비가 하는 일을 옳건 그르건 개의치 않았다. 부부인은 손수 갑옷을 준비하였다. 갑옷은 생전 시아버지인 세종대왕께서 대군께 손수 하사하신 것이었다. 윤씨는 수양대군에게 손수 그것을 넘겨주며 “대군께서는 더는 주저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다 죽기로 하였습니다. 대군께서는 죽기로 각오하셔서 나가셔야 할 겁니다.” 굳게 다짐했다. 윤씨는 수양대군에게 몸소 갑옷을 입혀드렸다. 저녁이 되어 명회와 윤성, 유수, 양정, 권람, 홍달손 등이 모여들자 “종사(宗社)가 이 한 몸에 달려있다.” 결의를 다시금 다지고 수양대군은 서둘러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그 곁에 임운이 따랐다. 이때 칠삭둥이 한명회는 도성의 안팎은 물론, 시좌소(時坐所)에 이르기까지 철통으로 지킬 것을 명했다. 수양대군은 호랑이굴과 같은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는 내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한때나마 아버지 세종대왕의 태평성대를 이룩하는데 한몫 했던 바로 그 김종서가 이제는 역신(逆臣)의 반열에 올라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임을 알게 되었을 때 수양대군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집의 문 앞에 자리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종서의 가노들이 무장을 한 것이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집사에게, “좌상 대감을 찾아뵈러 왔소이다.” 하고 고하자 김종서는 영문 모른 채 문밖으로 나왔다. 문밖에 나온 김종서가 일이 급박함을 들어 문밖에 나오기를 간청하자, 마지못해 김종서와 그 아들 김승규가 같이 나왔다. 나오자마자 김종서의 뒤통수를 누군가가 후려쳤다. 임운이다. 임운은 제품에서 철퇴를 꺼내어 김종서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뒤이어 비명을 질러놓고 서둘러 승규가 달려들었으나 뒤에서 임운이 이어서 철퇴를 후려쳤다. 이 과정에서 승규는 즉사(卽死)하고, 김종서의 숨길은 남았다. 뒤이어 수양대군은 직접 시좌소로 찾아갔다. 시좌소에 조정 대신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야심한 밤중이었다. 명회는 시좌소 밖에서 살생부를 꺼내 들었다. 뒤이어 자하문 밖 무계정사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삽시간에 퍼지는 불길에 안평대군은 혼비백산했다. 연신 이현로를 찾아댔지만 기세등등하게 퍼지는 화마는 안평대군의 소원을 산산이 조각났다. 김종서를 도모하고, 시좌소 앞에서 황보인, 조극관, 민신, 이현로 등이 한명회의 살생부에 놀아나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다. 장정들의 손에 쥐어진 칼날 앞에서 무기력한 가엾은 영혼들이 아닌가. 그것도 모른 채. 계유년의 정란이 일어난 지 이틀 뒤에 세간에서 들린 소문에 의하면, 김종서가 아녀자의 복색으로 변장한 채 작은아들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들에게 숨통이 끊어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선 천지가 이제는 수양대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수양대군은 이튿날 밤에 금상을 이끌고 대궐로 향하였다. 이내 어린 금상의 보호자로 우뚝 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계유년의 정난이 수습된 뒤 수양대군을 1등 공신으로 봉하여졌다. 계유년 10월 17일 왕이 수양대군에게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란공신이란 공신호와 식읍 1천 호, 식실봉 5백 호, 전 5백 결, 노비는 아울러 3백 명, 별봉으로 해마다 6백 석, 근수 10면, 안장 갖춘 내구마 네 필, 금 25냥, 은 1백 냥 등을 하사하였다. 10월 18일 신축일에 수양대군을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으로 명했다. 이후 경태(景泰) 4년 10월 25일에 의정부에서 이용이 반역 모의한 정상을 조목으로 열거했다. 그 내용을 들어 말하길 "이용의 모역한 정상을 대소 인민이 알지 못하니 청컨대 조목을 자세히 열거하여 중외에 보이소서." 하자 왕이 이를 받았다. 당시 실록에서 열거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1. 용의 역모는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이 아니라 세종과 문종 때에 있어, 맹인 지화가 용의 운수를 보고 망령되이 군왕의 운수라고 말하였고, 이현로 또한 말하기를, 귀하기가 말할 수 없어 국군의 팔자라 하고, 참서에 의거하여 하원갑자에 성인이 나와서 목멱정의 물을 마신다고 하였다. 백악 북쪽이 바로 그곳인지라 참으로 왕업을 일으킬 땅이니 그곳에 살면 복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하였다. 이용이 그것을 믿어 그 자리에다 집을 짓고는 무계정사라 칭하여 부참에 응하였다. 2. 용이 성녕대군의 부인인 성씨를 간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종 때 궁궐의 담을 넘어 출입해 계집종을 범하고 문종 2년 동안에 여러 소인들과 어울려 미복 차림으로 마을에 나가 남의 아내와 첩을 범하였다. 3. 용이 가만히 대소의 조사와 불령한 무리에게 후하게 베품으로써 후일을 도모하였다. 4. 용이 집정 대신들과 결탁하고, 환관 김연과도 결탁하여 내외로 상응해 화를 자초하였다. 5. 용이 정분에게 후히 뇌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이명민으로 하여금 선공감의 공장과 재목, 기와를 나누어 주게 하여 사사로이 착복하였다. 6. 허후가 용의 집에 자주 왕래하고, 황보인과 김종서에게 여우처럼 아첨해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사위를 발탁하여, 매양 황보인과 김종서의 뜻에 맞추기를 바랐다. 10월 25일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의 집과 이현로의 집에 있는 모든 글을 태워 없애버리도록 명했다. 경태(景泰) 4년 11월 1일, 의정부사인 황효원이 당상의 의논을 아뢰길 "영의정과 좌의정 정인지 등은 의논하기를, '안치한 사람들을 이미 너그러운 법에 따라 구처하였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 하고, 우의정 한확과 좌찬성 이사철, 좌참찬 이계린(李季) 등은 의논하기를, '법사의 말이 옳다. 비록 극형에 처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모두 종으로 삼고 그 가신을 적몰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상감이 이에 수양대군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한사코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안평대군을 죽일 것을 간곡히 청하니 어린 임금은 하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이틀이 되었던 날이던가. 밤이었다. 강화섬(江華島)에 위리안치된 안평대군은 그날로 약사발을 두 사발을 꾸역꾸역 마시더니 이내 즉사하고 말았다. 안평대군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외롭고 외로운 왕족의 말로. 왕실의 곁가지로 자라난 종친의 운명이 이처럼 가혹했던가. 아, 자신의 잘못된 행실로, 큰형인 문종에게도, 작은형인 수양대군에게도, 하다못해 서모인 혜빈의 구원조차도 받아보지 않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서른 여섯. 아까운 나이다.안평을 죽인 그 날 수양대군은 문종의 빈전 밑에서 '형님 나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하였다. "이 수양을 의심하시고 계시오니까!" 조용한 빈전의 적막을 깨뜨리듯 수양대군은 포효하였다. 수양대군이 종친과 문무백관과 더불어 전을 지어 바쳤다. 정난을 하례하도록 청하며 아울러 표리를 올렸다. 그 전에 의하면, 슬기로운 계획이 번개처럼 달리어 하늘과 사람이 화합하고 순응하였다. 흉한 음모가 와해되니 반가가 변하여 졌다. 어찌 뜻하였으랴. 지친이 가만히 역당과 결탁하여 화의 기세는 경각 사이에 절박하였다. 다행히 종묘사직이 돌보시어 신통한 꾀를 내어 능히 결단하니 흉한 무리는 스스로 멸망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자질로서 간절히 만수를 빌며 순하게 환호를 올리나이다. 그동안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하였으면 뭇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었을까.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은 1등 공신, 홍윤성 등은 2등 공신으로 봉해졌다. 이제 남은 건 혜빈과 그 소생 영풍군(永豊君)과 한남군(漢南君)이다. 혜빈은 명색이 궁중의 웃어른으로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한 임금의 후궁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금상을 돌보았다는 인연 하나만으로 궁중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금상을 싸고도는 건 자연히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으나 주위 종친들이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혜빈을 할머니로서, 수양대군을 삼촌으로 각별하게 대하던 금상은 그러나 왕실의 암투가 벌어질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수양대군에게 숙질(叔姪)을 넘어선 관계로서 대하고 있었으니 혜빈으로서는 괘씸하기가 이를 수 없었다. 그것을 트집 잡아 양녕대군은 금상에게 보위를 내놓으라고 대놓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태종대왕이 잡지 못한 그 타고난 성정을 어느 누가 알 것인가. 그것을 아는 금상으로서는 지금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 아닐 수 없다. 한번은 수양대군에게 친히 호피(虎皮)를 가져다 한밤중에 잠든 수양대군의 등 뒤를 덮어주었다. 그러자 수양대군이 잠결에 깨어서는 제 등 뒤에다 금상을 업혀 대궐 뜨락을 드나들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이 퍼지기가 무섭게 혜빈이 나이를 들먹이며 수양대군과 가까이하지 말 것을 다그쳤다. 하지만 금상은 외로운 처지였다. ‘숙부의 등은 따스했다. 숙부의 어깨 너머로 불어오는 찬 바람이 상쾌하리만큼. 수양대군의 등은 따스했다. 부왕께서는 항상 편찮으시기만 하니 허구한 날 부왕의 눈물과 한숨만을 보고 자랐건만. 내 아버지의 등은 숙부의 등처럼 단단하고 따스했더라면.’ 금상의 얼굴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대궐 안의 내관을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전 안에 들어선 양녕대군이 꾸중한다. 내관이 이를 자초지종 설명하였다. “듣기 싫다 이놈! 네놈부터 능지처참(陵遲處斬)해야 할 것이다.” 양녕대군은 공연히 혜빈이 수양대군과 금상의 사이에 이간질하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였다. 정란이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혜빈이 멀쩡히 살아있음을 매우 괘씸하던 것이다. 줏대 없는 어린 상감. 대군의 아우님이신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적장이 승계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대로 따랐건만. 좌찬성 한확이 두고 볼 수 없어 “오늘은 그만 물러나십시오. 이 일은 의정부 안에서 의논하겠습니다.” 양녕대군을 타일렀다. “어디 두고 봅시다!” 양녕대군은 벌떡 일어나 임금에게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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