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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_01 (제1화)
―세도정치의 서막 <보덕 작> 김조순(金祖淳)이 죽었다. 나이는 예순 다섯. 한 시대를 풍미할 법했으나 오직 겸손으로 두 임금을 섬긴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왕은 이에 장사를 후히 치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으며 아비를 여읜 중궁으로 하여금 위로를 해주기도 하였기에 그의 마지막 길은 결코 험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김조순의 사후에 누가 정권을 이어받을 것인가 하는 이목이 집중되었다. 일찍이 지아비인 세자를 여읜 빈궁의 친정인 조만영의 일가와 김조순의 큰아들 황산(黃山)에게 쏠리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황산은 곧 김유근(金逌根)의 호이다. 명목상 맏이인 것도 있었으나, 자신의 아랫동생인 원근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장 노릇을 해야 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판이었다. 더구나 자신은 일가붙이로 있는 김용순의 양자로 입적이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친아버지 소유의 재산은 물려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대신 아비의 뒤를 이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자 한 것은 사실이니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지는 못해도 한몫은 거두었으니 이제 팔자 좋게 사는 일만 남았다. 유근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한데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막내인 김좌근(金左根)이 문제다. 좌근은 아버지의 육순을 기념해서 상감이 직접 벼슬을 내렸는데 은혜를 원수로 아는 모양인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덕으로 살려고만 하는 동생을 나무랐건만 동생은 대성통곡하며, “나는 어떡하라고 이러시오!” 하며 오히려 역정을 내며 대드는 것이었다. 역정을 내도 분수가 있지. 유근은 막냇동생과 아버지의 빈소에서 고성(高聲)을 주고받았다. 생각만 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자칫 아버지가 죽으면 집안이 풍비박산나기는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감의 너그러운 마음 탓인지 몰락으로의 길은 접어들지 않았다. 상감의 전교가 내려지고 이틀이 되어서야 부친상을 거둘 수 있었다. 유근은 회색관복을 차려입은 뒤 총총히 어디론가 걸음을 재촉한다. 유근이 찾아간 곳은 바로 아래동생 원근을 보기 위함이다. 원근은 아버지를 여의기 삼 년 전에 자식 하나를 두었다. 그러니까 아들인데, 이름이 병지(炳地)인 그는 금년에 세 살이 되는 것이다. 원근이 아버지의 상을 채 치르기도 전에 병상에 누웠으니 실질적인 상주는 형인 유근과 동생인 좌근이었다. 비록 각자의 집안에 양자로 들었지만 불가피하게 직접 장례를 치렀던 것이다. ‘세 살짜리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거의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우의 곁에서, 핏덩어리를 품에 안은 채 흐느끼는 계수(季嫂)의 모양이 애처롭다가도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쨌든 원근의 장례를 마친 지 이틀 뒤에 어전에 찾아가 뵙고 중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마, 소인이옵니다.” 안에서 들라는 기척이 들렸다. 중궁에 들어서기 무섭게 유근은 멈칫 놀라는 눈치다. “마마, 밤새 우셨사옵니까?” 순간 왕후의 놀라는 모습에 유근은 오만상을 찡그리는 것이다. “작은 오라버니가 세상을 하직하게 생기셨다고 하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궁이 대답한다. “사가(査家)의 일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염려하는 어투로 중궁을 바라보는 유근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돌리며, “사가의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까요. 생각해보세요. 사가에 남아 있는 남정네라고는 세 살짜리 핏덩어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 “게다가 아버님이 삼십 년이 넘도록 세도를 누리셨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자손을 두시기라도 하셨던가요? 나는 그 꼴 못 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마마!” 우울한 심사에 뒤틀린 채 푸념을 해대던 왕후를 유근은 근엄하게 제압한다. “마마께서는 뒤에서 그저 구경만 하십시오. 아버님이 비록 삼십 년 넘게 왕실을 유지하시는데 온몸을 바치기도 하셨으나 아버님이 계시지 않은 이상은 우리 김씨 일문이 더 이상 마마가 계시는 궁궐을 지키지 못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어찌하겠습니까.” 중전의 둥그렇게 놀란 눈은 유근을 바라본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가에서의 생각을 하지 마시옵소서. 소인이 궂은일은 맡을 것이오니. 마마께오선 누워서 떡 먹듯이 기다리시옵소서.” 황산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던 중궁은 그제야 눈물을 거둔다. 황산은 말을 잇는다. “마마. 마마께오서 만에 하나 사가의 일을 염려하신다면, 그것이 결국 저들의 귀에 들어가 우리 집안을 몰살시키려고 들 것이옵니다. 말이 좋아 왕실이지 만에 하나 전하께오서 승하하신다면 저들은 더 들고 일어나 마마를 내치려고 들 것이옵니다.” “허면.” “마마. 이대로 두고만 볼 수 있겠사옵니까. 마마께오서는 작은 아우에 대해 염려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이 오라비를 굳게 믿으시옵소서. 행여 작은 아우한테 변이 생기거든 아랫것을 시켜 알려드리겠나이다.” 하며 물러나는 오라버니의 뒤를 지켜보던 왕후는 얼굴을 돌려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유근의 말은 적중했다. 김조순이 죽고 일 년이 채 되지도 않아 원근이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중궁이 아랫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접해듣고는 대궐이 떠나가라는 듯이 울부짖었다. 기어이 집안이 결단 나는구나, 하는 찰나에 “마마!” 하며 울상인 채로 찾아온 것이다. “무슨 일이냐.” “전하께오서” “전하께서” “전하께서, 몸져누우셨사옵니다.” 상궁은 그만 엎드려서 울부짖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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