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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39편
명회가 영상으로 승차하였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명회의 집에서는 한밤중에 정란공신들만 모여서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었다. “명색이 공신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던 쥐色氣는 어딜 갔누?” 윤성이 취기를 빌려 김질이라든지 최항이라든지 하는 위인들이 보이지 않는 걸 보고 조롱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장안에 내로라하는 기녀들을 불러들여 풍악을 울려대고 있으니 임금이 베푸는 연회보다는 더 화려했다. “정란이 있던 해 상당군 대감의 집을 처음 찾았지요. 그날에 비하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없지 않습니다. 하기는 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인 영의정이 되셨으니.” 수빈이 직접 찾아와서는 안채에서 민씨부인과 찻상을 앞에다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이날 밤 명회의 집에서 벌어진 주연을 두고,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공신들도 공신 나름이라며 정란공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공신들을 푸대접한다느니, 금상의 맏며느리인 수빈이 직접 찾아왔는데 사돈이 될 상황이라느니 하며 소문이 오르내렸다. 급기야 대궐 안에까지 소문이 퍼지자 자성왕비는 화들짝 놀라며 행여라도 해양세자(海陽世子)에게 해가 갈까 보아 밤낮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해양세자는 일찍 요절한 형님 의경세자에 못지않게 병약하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 천연두(天然痘)에 시달렸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금상은 금상대로 약이 올랐다. 기어이 젊고 혈기 있는 소장 대신들을 두루 등용하고자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 무엇에 홀린 탓인지 맏며느리 수빈이 눈물로 하소연하는 것을 미처 외면하지 못하였던 거다. 몰락한 왕손의 미래랍시고 한사코 한명회와 사돈을 맺기를 극구 원하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던지듯 사령(辭令)을 내린 것이다. 그랬는데 다른 공신들과 척진 채 편 가르기만을 일삼는 태도가 금상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명회를 비롯한 정란공신들을 길들여놓기 위해 공신전(功臣田)과 과전(科田)을 내놓게 하는 것이다. 공신전을 내놓으라는 임금의 엄명을 들은 명회는 그야말로 바늘방석에 앉은 심정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이거 내 정신을 좀 봐라.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 전하를 찾아뵙고 과전과 공신전을 헌납해야 할 것이 아닌가.’ 우왕좌왕하던 차에 의정부(議政府) 청사에 들어섰다. 집무실에 명회가 들어서고 보니 전임 영의정 신숙주가 집무와 관련된 두루마기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명회는 정신없이 물었다. “하하하, 아 천하의 한명회가 그걸 나에게 물으시는가.” 숙주가 뜬금없는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내가 전하께 뒤통수를 맞았네.” “짐작했던 일 아닌가.” 숙주가 태연하다. “이렇게도 내 숨통을 빨리 조이실 줄 몰랐네. 영상을 주겠다는 전교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수를 내셨으니.” “전하의 말씀이 틀린 게 아닐세. 과전을 폐하는 것은 국가 재정을 위해서도” 명회가 숙주에게 돌연 “범옹. 범옹께서는 전하께서 얼마나 오래 더 사시겠다고 보는가.” 하고 금상의 일을 들먹이자 숙주가 화들짝 놀란다. 그러고는 말문이 막힌 듯 헛기침을 한다. “불손한가. 전하의 수를 논하는 것이.” “어허, 불손한 정돈가.” 범옹의 얼굴은 무안함으로 일시에 빨갛게 달아오른다. “불충하다.” “자준. 말이 나온 김에 내 생각을 말해두겠네.” 범옹은 신중한 어조로 다짐한다. “하시게.” “보위를 세자저하께서 잇는 것이 순리일세. 행여나 다른 생각을 할까봐 내가 미리 밝혀두는 것일세.” “그거야.” 당연한 소리로 받아들이는 명회를 “수빈과 가까이하지 마시게나.” 거듭 못 박듯 다짐하는 것이었다. 명회가 대전으로 들어갔을 때 보니 도승지 신면을 비롯해 귀성군 이준과 승정원 부승지(副承旨) 두 사람이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들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도승지 신면이 영상이 들어온 것을 눈치채고 들으라는 듯이, “이것은 좌의정 황수신 대감이 올린 것이옵고, 이것은 능성군 구치관 대감이 올린 것이옵니다.” 하나, 하나 문서들을 들추며 보여주는 것을 금상이 읽는다. “으음, 공신전까지 내놓을 것이 무어냐. 과전을 폐하기로 했으니 과전만 내놓으면 될 것이지.” “이중삼중(二重三重)으로 하사받은 공신전이 많은 지라.” 귀성군의 대답이다. “뜻이 그렇다면야 할 수 없는 일이네만.” 명회가 기척을 내었음에도 짐짓 모른 척하더니 “아이구, 영상께서 오셨습니다.” 하며 보던 문서를 덮으며 임금이 반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갸륵한 일이 아닙니까. 조정 대신들과 공신들이 앞장서서 과전은 고사하고 공신전까지 국가에 헌납하고 있어요, 충신들입니다. 조정에 충신들이 넘치고 있어요.” 생색내듯 하는 임금의 말에 명회의 입은 쓸 수밖에 없다. 수빈의 간청도 간청이지만 자신을 이렇듯 옭아매려는 임금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영상, 아무래도 내가 천벌을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해야 되겠어요. 세자가 어리니 그 나이에 등극하면, 무슨 힘으로 이 나라를 통치하겠습니까. 재정이 튼튼히 해야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일전에 내가 사헌부장령을 하나 쓰려고 했더니 녹봉 대신 하사할 전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전이든 직전이든 나눠줄 전답이 있어야 사람을 쓸 게 아닙니까. 중국에서도 천자보다는 제후들이 부자인 경우가 많다고 합디다마는 거렁뱅이 천자라. 이러다 우리가 그 짝이 나게 생겼어요.” 가뜩이나 공신들의 횡포에 시달려야만 했던 금상 수양이기에 자연 넋두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금의 체통은 공신들 덕분에 깊이 모를 바닥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러니 명회의 세도가 왕실의 권세를 능가할 수밖에. 더구나 자신의 막내딸이 자산군의 배필로 점지되었다는 소문까지 더하니 칠삭둥이 한명회를 시샘하는 소리가 오고 갈 수밖에 없다. 중궁전 안에서는 왕비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거미는 새끼를 낳으면 제 몸을 먹여 키운다고 합니다. 신첩이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이까. 의경세자께서 남기신 세 점 혈육을 키워 가정을 이루게 해두려는 것이 신첩의 소망이자 소임일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신첩의 충정을 그리도 몰라주시옵니까. 신첩은 제 살을 먹여 키우는 거미의 심정으로 살아왔나이다.’ 자산군이 한명회의 막냇사위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질 즈음에 찾아온 수빈의 눈물 어린 넋두리가 귓가에 쟁쟁히 들려오자 자칫하다가는 맏며느리의 손에 놀아날까 싶은 것이다. 수빈이 돌아오자마자 둘째 언니인 계양군부인이 찾아왔다. 둘째 언니와 담소를 나누던 차에 중궁전에 있었던 일을 들먹이자, “행여 공신들의 농간으로 그 자리가 바뀔까 보아 전전긍긍하신 게 아니십니까. 월산군은 그 양반의 혈육이 아니신가. 흥, 아들만 귀하고 손주들은 생각을 안 하시니.” 군부인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부군 계양군을 여의고서도 여전히 청산유수로 말하는 습성은 여전하다. “그 어른이야 당연히 그리 생각을 하시겠지요.” 언니의 투덜거리는 모양을 보고 수빈은 웃음꽃을 피웠다. “심술이 지나치십니다. 나 같으면 비명에 가신 의경세자를 생각해서라도 며느리의 사랑이 지극하건만.” “나라도 그리했을 겁니다. 세자께서 어리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시겠습니까.” “마마께서는 스물에 청상이 되셨습니다. 중전마마께서 눈곱만한 인정만 베푸셔도 그리 섭섭한 말씀은 안 하셨을 겁니다.” 답답한 듯 계양군부인이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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