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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34편
부인네들이 물러간 안채에 수빈은 얌전히 정좌해 있었다. 그 맞은편에 한치형이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자산군의 명석함이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습니다.” 치형이 칭찬하는데 수빈은 한숨을 쉰다. “웬 한숨이십니까, 마마.” “곁가지가 총명해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때로는 나무줄기가 상하면 곁가지를 꺾어다 새로이 나무를 심지 않습니까.” “말씀을 삼가세요.” 수빈은 사촌오빠의 말을 막는 것이다. “마마께서는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세종대왕께서는 적장 승계를 삼으셨습니다. 세손이신 자산군이나 월산군이 보위를 물려받는 것이 흠이 아니지요.” “그런 시아버님께서 장자이셨습니까? 그런 시아버님이 적장 승계라니요?” “오늘날 전하께서 당하신 곤욕, 다 그 때문입니다.” “오라버니.” “대궐의 끊이지 않는 우환. 노산군을 교살한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민심이 그리 돌아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적장승계를 세우는 것이.” “나는 다 버렸습니다. 지아비를 묻고 어린 세손의 손을 잡고 대궐문을 나서면서 온갖 한을 다 내 가슴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잠저로 돌아오시면서 마마께서 하신 말씀을 잊으셨나이까. 마마께서는 반드시 대궐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셨나이다.” “그랬지요.” “신의 가슴 속엔 마마의 그 말씀. 아직도 생생히 맺히어 있나이다.” “그때는 그랬지요. 너무나 분하고 원통해서 대궐을 나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지요. 가슴에 맺힌 한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루라도 눈을 감고 잠든 날이 없었습니다. 잠든 세손의 얼굴을 볼 때마다 눈에서 피눈물이 솟구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 잊었습니다. 대궐로 돌아가다니요. 그게 꿈이나 꿀 일입니까.” “마마.”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과욕입니다.” 치형이 물러간 뒤 수빈은 낮게 탄식하며 울었다. 다음날, 수빈은 시어머니인 자성왕비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 고부간에 서로 안부를 물었다. 온천행을 떠날 준비하며, 임금이 지난달에 친히 활을 쏜 것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마, 신첩의 장남이 다음 달에 혼사를 치르나이다.” 왕비가 아차하며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임 상궁.” 서온돌의 임 상궁에게 월산군에게 보낼 예물을 가지고 오도록 했다. “내가 따로 예물을 놓아두었다.” “마마.” 수빈이 황송해하였다. “섭섭했다면 거두거라. 내가 잊지 않고 있었거늘.” “신첩은 마마를 잊고 계신 줄 알았나이다. 신첩의 옹졸함을 용서하소서.” 수빈은 그동안의 설움이 복받친 듯 눈물을 흘렸다. 때아니게 정창손이 주연에서 선위하라고 윽박지른 것을 이유로, 4년 전에 영의정에서 파직당한 뒤, 신숙주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 곁에 권람이 좌의정으로, 한명회를 우의정으로 명하였는데 권람이 병환을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명회는 한직(閑職)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랬는데 신숙주가 금상으로부터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강권하다시피 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신숙주는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그 후임을 구치관이 맡았다. 이를 보다 못한 홍윤성이 명회의 작은집에 찾아와서는 그 소문을 꺼냈다. “사임이라니, 범옹이 그 자리서 물러났단 말인가?” 진위가 의심된 듯 명회가 묻는 것이다. “사임이 아니라 해임을 당했답니다. 형님.” 윤성이 대답하니, “해임?” “전하께서 범옹 형님을 대전에 불러다 놓고는 그만큼 해먹었으면은 염치를 알아야 한다면서.” “저런, 저런.” 숙주의 처사를 딱하게 여기는 명회였다. “형님, 전하께서 공신도 아닌 구치관을 영상에 앉힌 것이 더는 공신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윤성의 말에 납득한 듯 끄덕이는 명회. “아 형님, 이대로 두고만 보시겠소이까?” “그럴수야 없지.” 이때 곁에 앉은 향이가 “대감, 어찌하시려구요?” 물었다. “따져야지.” 향이가 명회를 “공연한 화를 부릅니다.”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질 건 따지고서 죽어야지.” 관복을 차려입고 나서 명회가 대전에 찾아 들어갔다. “신이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여한이 없나이다.” 부복하여 아뢰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금상이 서안을 탕탕 쳐댔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여한이 없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여한이 없으니 할 말을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명회가 대답하려 치니, “듣기 싫습니다. 범옹의 사직을 받아들여 직첩을 받아들이고 구치관을 새로 영상에 앉힌 걸 두고 따지러 오신 겁니까. 그래서요, 나보고 어찌하라는 겁니까.” “신숙주가 조정 안에 정란공신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요.” 금상이 코웃음을 친다. “의정부에 구치관과 황수신(黃守身)이 공신이라고 할 수 없나이다. 좌찬성 윤사분(尹士昐), 우찬성 박원형, 좌참찬 최항 등이 전하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이라 할 수 있겠나이까.” 황수신이 좌의정에 있었다. 황수신은 오늘날 청백리로 일컬어지는 황희 정승의 셋째아들이며, 윤사분은 다름 아닌 자성왕비의 작은 오라버니다. “일등이면 어떻고, 이등이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모두 공신록(功臣錄)에 이름이 오른 충신들이 아닙니까.” 자신을 비롯한 정란공신들이 근래에 들어, 푸대접을 한 것에 대해 섭섭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외직이든 한직이든 공신들만큼 배불리 먹고 마시고도 남아서 온갖 재물을 곳간에 가득 쌓아둔 적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았습니다.” “전하, 더러는 부패가 있을 것이옵니다. 축재(蓄財)한 공신들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들이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나이까.” “그 대가는 이미 충분히 치르고도 남았는데, 그만큼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되었지, 무얼 또 바라시는 겁니까?” “전하.” 순간 명회는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공신, 공신 이제 공신 얘기 듣기만 해도 지겹습니다. 홍윤성이는 간통하다 죽게 생겼기에 살려주었어요. 홍달손인들 다릅니까?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에요. 죽은 사람을 들먹이기 뭣하지만 권람은 어땠소이까. 장사치를 비용이 없을 것 같기에 내관 하나를 시켜다 용처(用處)를 전달하려고 했더니 곳간마다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합디다.” 이제는 궁지에 몰렸다. “그만큼 해 먹었으면 물러들 가세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열두 해째가 아닙니까. 염치들이 있어야지요!” 명회에게 삿대질을 하며 금상의 옥음이 격앙되었다. 명회가 표현하던 ‘공신들’은 곧 정란공신을 일컬음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옹립된 금상에게 무한한 충성을 다하였는데 또다시 성삼문의 옥사와 같은 사건이 재현되기를 극구 꺼린 까닭이다. 그러는데 금상이, 개나 소나 공신으로 봉하고 보는 판국이니 명회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디 기가 찰 뿐인가.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지 모르는 지경이었다. 그만큼 한명회를 수장으로 한 정란공신들이 수양으로서는 눈엣가시처럼 느꼈을 것이다. 명회가 물러간, 그날 밤. 신숙주와 구치관을 불러들여 술상을 차렸다. 전이며 신선로며 나물 종류들이 두루 놓여 있었다. “이보시오, 신정승.” 하며 수양이 부를라 치는데 “예, 전하.” 하며 신숙주가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하하, 이번에 틀렸소이다. 내가 신정승이라고 한 건 이번에 영상이 되신 능성군(綾城君)을 부른 것인데, 전임 영상이신 고령군(高靈君)이 잘 못 듣고 대답하였으니 틀리셨소이다.” 금상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농지거리를 즐기는 수양의 독특하고 유별난 술버릇 때문에, 의정부 삼정승은 물론, 육조 당상(六曹 堂上)과 하급 관리들이 곤욕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정인지와 정창손과도 일화를 남겼는지도 모를 일일 것이다. 세 사람은 그렇게 밤이 새도록 술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 날이 밝은 대로, 왕이 조정의 대신들을 거느린 채 중궁과 함께 표훈사(表訓寺)와 장안사(長安寺)를 두루 둘러보았다. 그리고 장안사에 머무르며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도록 간경도감에 명하였다. 이때가 세조 12년 3월 21일의 일이다. 유관불심(儒冠佛心)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엄연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를 모를 수 없는 임금이 불상에다 놓고 절을 하는 진풍경(珍風景)이 벌어졌다. 물론 태조대왕을 비롯해 태종대왕, 하다못해 세종대왕까지 불교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인 왕실의 내력이 있건만, 임금이 불상에다 대놓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모든 대신이 들고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다못해 불심이 깊다기로 소문이 난 김수온(金守溫)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임명하여 중궁의 측근으로 삼기도 했다. 그만큼 수양 자신의 얼룩진 과거사를 회개하고자 하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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