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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35편
명회가 수양에게 대놓고 정난공신에게 홀대(忽待)함을 섭섭하게 느낌을 내색한 뒤부터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양정이 오랫동안 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를 수비하고 또 오랑캐들을 다스리는 막중한 임무를 내팽개치고 직접 도성에 발길을 옮긴 것이다. 평안도절제사(平安道節制使)로 나간 양정을 임금은 융숭히 대접할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 한밤중에 대신들을 불러들여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양정이 대놓고 “네놈들이 도성 안에 편히 앉아서 호의호식하는 동안에 나는 단 하루도 갑옷을 입고 편안히 쉰 적이 없거늘.” 하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십여 년간을 오랑캐들을 몰아내느라고 좋은 시절을 다 보낸 사람이오. 전하께서는 내 얼굴에 미운털이 박혔는지 나를 함경도로 평안도로 팽이 돌리듯 돌리셨소이다. 그래도 나는 참았소이다. 하나, 요즘 조정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울화가 치밀어 더는 참을 수 없소이다.” 양정은 이내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술상을 대놓고 탕탕 친다. “저 양반이 일을 기어이 내시겠군.” “방금 뭐라 했소이까.” 맞은편에 앉은 박원형이 중얼거리는 말을 가지고 양정이 꼬투리를 잡는다. “어, 아니오이다.” “일을 내겠다.”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못 낼 건 또 뭐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나.” 옆자리에 앉은 홍윤성이 옳다구나 하고 맞장구를 친다. “옳거니,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안 그렇소,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형님.” 윤성의 옆자리에 앉은 홍달손이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한다. 간만 열린 술잔치가 거의 경직(硬直)되었다. 이를 보다 못해 숙주가 “자준.” 명회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청원군께서는 말씀하시되 가려서 말씀하시어야 하네.” “왜 겁이 나시오이까. 상당군 대감.” “할 말은 하시라 그 말씀이네.” “하고 말고요.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외다.” 이윽고 상감이 좌정(坐定)하였다. 일제히 신하들이 일어났는데 양정이 대뜸 예를 갖추지 않는 게 아닌가. “청원군께서는 일어나시어 전하를 맞이하셔야 합니다.” 금상 수양이 양정의 행태를 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마지못해 양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냥 앉아 계시게, 먼 길을 달려오셨으니.” 금상의 다정스러운 옥음을 듣고도, 양정이 이번에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신가. 할 말이 있으시면 먼저 할 말을 먼저 하시고 앉으시게.” 양정이 “전하. 전하께옵서는 신이 먼 길을 달려왔으니 앉아서 전하를 맞이하라고 하셨나이다.” “그랬지, 그랬는데.” 돌발하는 양정의 의중을 모르는 상감이다. “먼 길을 달려온 것은, 신이 아니라 전하이십니다. 쉬시어야 할 분은 신이 아니라 전하가 아니시옵나이까!” “나보고 쉬라고 했소이까.” 갑작스러운 양정의 행패에 수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사옵니다.” “경은 무슨 뜻으로 쉬라고 하시는가.”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오래이시니 오로지 한가로이 편안히 쉬시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내가 평소부터 왕위에서 물러나 편히 쉬려고 했으나 감히 그러지 못하였다. 경은 서방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서방의 백성들의 말 또한 이와 같은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지켜보다 못 한 숙주가 “전하, 청원군은.” 이를 만류해보았지만, “내가 죽고 또한 신숙주와 한명회가 죽고 경이 또한 죽어서 임금과 신하가 모두 죽는다면 그러면 누가 있어 이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차차로 잊게 될 것입니다. 세자저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울화가 치미는 것을 임금은 한숨을 깊게 쉬는 것이다. “청원군은 취하셨는가. 술을 마시고 대전으로 오셨는가.” 명회가 양정에게 버럭 역정을 내는 것이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소.” “어허.” 별안간 양정이 부복하며 “전하, 전하께옵서는 십여 년간을 보위에 앉으셨습니다. 그동안에 과로로 전하께옵서는 병을 얻으셨으니 신이 안타까운 것이 바로 이것이옵니다. 부디 세자저하께 대업을 물려주시고.”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어디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 도승지는 즉시 상서원(尙瑞院)에 가서 대보(大寶)를 가져오너라.” 도승지 신면(申)에게 대보를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상서원은 임금의 도장과 인장을 보관하는 관청이며, 신면은 신숙주의 차남이다. 신숙주를 영의정에 있는 동안에 무한히 신뢰하였는데 신면 또한 임금을 잘 보필하므로 이를 기쁘게 여긴 처지였던 만큼 임금과 신하 사이로서 매우 돈독하기 그지없었다. 도승지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청원군의 망언이 이와 같으니 먼저 의정부 대신들과 청원군을 죽이시어 신들의 불충을 엄히 다스리시옵소서.” 영의정 구치관 이하 조정 대신들이 모두 어명을 거두라고 주청하였지만, 임금의 의지는 확고했다. 양정의 돌변에 임금은 한명회의 농간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명회가 자신의 선위를 충동질을 시켰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한명회의 권세가 그만큼 막강했다. 금상의 어명을 듣던 세자는 강녕전 앞에 앉아, 선위의 명을 거두라고 석고대죄를 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선위 파동을 듣고 일제히 신하들이 세자를 옹위(擁衛)하듯 석고대죄를 드리는 것이었다. “대보를 강녕전에 두고 물러가라. 오늘 밤은 늦었으니 밝은 날 아침에 선위할 것이다.” 어명을 듣고 나자 정난공신들은 양정의 말에 동조하였다가 주춤하는 것이었다. “선위를 내일 아침에 하시겠다니!” 일제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외면을 하였다. 양정이 민심을 잃었다는 말로 구슬리기도 하였음에도. “예끼, 쓸개 빠진 놈들! 말이 피곤하여 달리지 못하면 싱싱한 말로 갈아타는 것이 순리거늘, 무어가 무서워서 슬슬 피하는 게야!” 양정의 역정은 온 대궐을 울리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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