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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時代) 05 제12화
갑작스러운 어마마마의 말씀에 임금은 어찌하지 못했다. 평소 인정이 많은 성격인데다 편모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라왔다. 잠저에서 살 때에 엄한 어머니의 밑에서 큰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다. 좋게 말하면 잔정이 많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유약함을 드러낸 나약함이 그것이다. 중궁의 실덕(失德)함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세상천지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일찍이 중궁이 후궁들을 질투하여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거늘. 투기라니 될 법이나 한 소리랍니까. 어미는 수치심에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조정 대신들이 중궁을 폐하라고 하는 상감의 어명을 거역하고 있으니, 중전의 보복이 두려워서겠죠. 만약 중궁을 폐하였다가 원자가 보위에 오르면 필시 자신들에게 화를 입게 될까 바른 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마마마의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어미의 마음이라고 아프지 않겠습니까. 며느리와 무슨 사원(私怨)이 있어 폐비하는 곤욕(困辱)을 자초하였겠습니까. 종묘사직을 생각하는 탓이지요. 주상께서 아무리 번듯하신들 중전의 품행이 바르지 않으면 주상의 흠이요 나아가서는 종묘사직에 누를 끼치는 겁니다. 중전과 원자를 모두 폐하세요. 그래야만 조정 중신들이 바른말을 할 것입니다. 사리분별에 투철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돌변하자 어떻게든 이 난국을 수습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중궁이 원자를 내세우고 있어요. 저를 폐하면 훗날 원자가 보위에 오른다면 보복하려 들 것이라고 떠들 겁니다. 대비전의 마음을 돌아세우기 어려워졌다. 대비전에서 역정을 내셨기 때문이다. 중전을 감싸지 마세요. 중전을 감싸면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 일찍이 부덕한 중궁이 없었습니다. 사소한 인정에 얽매어 종사를 망쳐서야 되겠습니까. 임금은 어머니의 역정 내는 모습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얼마 전 빈으로 강등된 중전의 일을 생각한다면 가엾은 일이지만 완강한 어머니의 슬하에 있는 한 동정할 수도 없었다. 문맹이신 대왕대비의 의지를 빙자하여 중궁을 몰아세우는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못해 월권(越權)하는 지경이었다. 영문도 모르게 원자가 고립무원될 소지가 있어 상감이 아랫것을 시켜다가 유폐된 중궁이 보살피게 했다. 은밀하게. 상감은 승정원 승지들에게 좌절에 젖은 말씨로 절망에 찬 채, 원자도 폐하라고 하십니다. 나직이 뇌자, 승지들은 모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것에 놀랐다. 대비전의 노여움이 조금 풀리시면 중전의 허물을 덮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되레 원자도 폐하라고 하십니다. 옥음을 듣던 임사홍이 중궁의 강샘이 그리 큰 죄라고 합니까. 하옵고 원자 아기씨께서 어리신데 무슨 큰 죄가 있으시기에 폐하신답니까. 사가의 시어머니가 함부로 며느리를 대하지 않거늘 하물며 중궁이 아니십니까. 대비전에서도 중전마마의 허물을 벗기에 앞서 다른 측실들을 엄히 단속하셔야 할 것입니다. 안타까워 아뢴다. 중궁의 강샘이 그리 큰 죄는 아니지요? 폐위시킬 허물이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요? 임금의 물음에 여부가 있겠나이까? 사홍이 대답하니 다른 승지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고부간의 일이니만큼 임금으로서도 난감할 수밖에 없다. 며느리의 단속은 시어머니가 하는데. 머뭇거리는 상감을 가로막듯 왕실의 일입니다. 어찌 사가의 일이라 비유할 수 있습니까? 사홍이 간하자 임금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대비전의 엄포였다. 한편 졸지에 자신을 뒷방에 앉히어 농락하는 큰며느리(인수대비)가 괘씸하게 보였던 대왕대비로서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손자며느리의 일 말이다. ‘원자를 살리고 싶으면 중궁을 버려라.’ 코웃음을 쳤다. 대왕대비는 당신 시어머니이신 소헌왕후의 성품을 물려받아 왕실이 화목하기를 누구보다 원하고 바랐다. 그랬는데 자신의 명이라고 빙자하여 중궁을 폐하라고 의지를 내리게 하니 도에 지나친 처사가 아니던가. 밤에 한치형이 상감에게 찾아가 대비전의 의지와 절충을 시도했으나 상감의 말이 없었다. 그저 옥루(玉淚)를 흘리신다. 치형이 그 일을 두고 얘기하니 인수대비가 버럭 역정을 낸다. 마음이 아플 것이 무엇입니까? 악처(惡妻)를 저 모양으로 감싸고 도시니 덕빈궁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격이지요. 중궁을 빈궁에 강등해 자수궁에서 유폐되어 살게 한 일을 두고 젊은 관리들이 의중을 물었는데 이때의 일을 두고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허종이 “한무제(漢武帝)가 진황후를 폐한 것과, 송인종(宋仁宗)이 맹황후를 폐한 전례가 있는데 그 같은 실수를 범하시려 하시옵니까?”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니, 좌부승지(左副承旨) 김계창(金季昌)이 보다못해 송나라 인종이 곽황후(郭皇后)를 폐해 옥청궁(玉淸宮)에 둔 전례를 들었으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자수궁으로 보내어 오위(五衛)의 군사들에게 윤씨를 지키게 하였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자, 인수대비는 전각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임금은 빈 전각에 들어서서 체통을 내팽개치시고 끝내 울음을 터뜨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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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