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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時代) 05 제10화
중궁의 권세는 친잠례를 행하면서 더욱 절정에 다다랐다. 오랫동안 친잠례를 지낸 적이 없었다. 대왕대비와 두 왕대비는 말할 것도 없었고 문무백관들이 하례를 드리며 기뻐하였다. 특히 인수대비는 만감이 매우 교차했다. 시시때때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중궁이 눈엣가시였다. 미운 정만 가득한 며느리였다. 그런 며느리를 떠올릴 때면 신물이 오르는 것 같고, 물만 마셔도 연방 헛구역질을 해대었다. 아들이 며느리한테 엇나가면 왕위는 물론 종묘사직(宗廟社稷)에 해를 입을까 근심하였다. 건원의 일을 비롯하니 이미 농사를 권장하는 큰 규모를 열었고, 곤등의 일을 순응하여 또한 누에치고 길쌈하는 성대한 의식을 행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이 옥례(玉醴)를 행하는 것은 진실로 나라가 문명한 날에 속하나이다. 정창손이 아뢰는 축사에 화답하듯 옛일을 상고해 보니 왕자가 친경(親耕)하여 먼저 농사에 힘쓰고 후비(后妃)가 친잠해서 잠업(蠶業)을 권하였다. 대개 백성의 근본은 의식보다 큰 것이 없고 의식의 근원은 농상(農桑)에 있다. 추울 때는 갈고 더울 때 김매는 것은 농사에 심한 괴로움이고 가시를 뚫고 뽕을 따는 것은 물론 누에 치는 일의 수고로움이 더 심하다. 오늘 왕비는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친잠의 예를 행하였으니…… 왕의 옥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왕 내외와 문무백관의 축사가 이어지는 동안 인수대비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러더니 다시 이내 흐느껴 울었다. 작은 며느리가 얼마나 얄미웠으면. 공경히 생각건대 왕비 전하께서 비로소 성대한 예식을 치르시고 몸소 잠상(蠶桑)을 지도하시니 우리 신첩은 경하함을 금치 못하나이다. 친잠을 끝낸 뒤에 내외명부를 거느리어 뒤풀이로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한명회의 부인이 축사를 내리니 중궁의 자리가 우뚝 서고도 남았다. 당대 실력가의 집안에서 그리 나오니 어련할까. 그러나 정귀인이 왕자를 낳았기에 산후의 문제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에 중궁은 산독이 번져 자리보전하지 못하는 귀인을 두고 원자보다 오래 살라고 했다는 게 사실이냐? 따지니, 정귀인이 억울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석고대죄(席藁待罪)를 청한단 말입니까? 중전마마나 신첩이나 다 같은 전하의 부인이거늘. 세상에 어느 조강지처(糟糠之妻)가 후실의 아들을 낳는다고 석고대죄를 드린단 말입니까? 악에 받쳐 따졌다. 중전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저런 죽일 것을 보았나? 다 같이 전하를 모시는 부인이라니? 저런 악독한. 소리쳤다. 이 소문은 인수대비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인수대비는 잠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어허,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낙담한 인수대비는 ‘중전이 투기를 부리다니, 이런.’ 깊은 한숨을 쉰다. 깊은 밤에 상감을 불러다가 놓고 이를 꾸짖었다. 중궁이 투기라니, 이것이 경우가 닿는 소리입니까? 상감은 매우 난처해한다. 누구보다 덕성이 앞서야 할 중궁이 투기라니요. 정귀인이 주상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귀한 몸이 아닙니까! 그런 정귀인을 끌어다 놓고 석고대죄를 하다니. 이것이 경우가 닿는 소리랍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상. 석고대죄는 중궁이 드려야 합니다. 상감의 얼굴은 이내 흙빛이었다. 물러가는 상감을 보고 인수대비는 한숨을 쉬었다. ‘천한 것 같으니라고.’ 딴은 그렇다. 인수대비는 중궁이 내명부의 수장으로써 아랫사람을 단속할 때 엄하게 하려는 것이 문제였다. 궂은 일이든 아니든 조용히 와서 훈계를 내려야 하는데 야단법석을 피운 것이 화근이었다. 지켜보다 못해 대왕대비에게 찾아가 문제를 삼았으나 대왕대비가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내명부의 수장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생각이 깊으시다? 흥, 그러실 만도 하시겠지. 손뼉이라도 치고 싶으셨겠지. 새파란 며느리한테 당하는 내 꼴이 얼마나 고소하실꼬.’ 인수대비로서는 당신의 시어머니이신 대왕대비의 처사가 야속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대왕대비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나설 일이 따로 있지. 간섭할 일이 많으면 한이 없을 것이니 못 본 척하면 그만인 것을.’ 중전은 원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야생에 사는 이리나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앙탈을 부려대었다. 이것이 어긋난 모성애(母性愛)의 시작이었다. 한차례 소동이 있고 난 뒤 내명부 사이에서는 중궁의 일을 두고 투기인지 아닌지 설전을 벌였다. 보다 못한 홍응(洪應)이 종친의 웃어른 효령대군(孝寧大君)에게 찾아가 직언을 구하였는데, 업보(業報)일세, 세조대왕(世祖大王) 때부터 이어온 업보가 아닌가. 거절의 뜻을 표했다. 홍응은 기가 찼다. 홍응은 인수대비의 딸 명숙공주(明淑公主)의 시아버지이니 인수대비와는 사돈이었다. 게다가 상감이 아침 문안을 드리지 않게 되니 인수대비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갔다. 월산대군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인수대비에게 찾아갔으나 안타까워 울상을 지었다. 마음 쓸 것 없다. 때가 되면 며느리한테 집안 살림을 며느리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책을 읽으며 인수대비는 애써 감정을 숨기었다. 섭섭하기야 하지. 며느리는 그렇다 치고 주상께서도 어미를 모른다고 하시니. 월산대군 부인이 시어머니를 딱하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날이 갈수록 백발이 느시는 시어머니를 보다못해 참지 않고 울음을 터뜨린다. 옷소매로 감추려고 해도 눈물이 그치지 않으니. 나는 괜찮대도 그런다. 인수대비전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원자가 병치레를 치렀다. 이 소식이 자연 대비전에 전해졌다. 인수대비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상궁 고씨(高氏)를 부르니, 상궁 조씨의 후임으로 왔던 사람이다. 궁중의 법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차였다. 원자 아기씨를 피접(避接)시키심이 어떠하나이까? 하고 상궁의 묻는 말에 인수대비가 솔깃했다. ‘피접이라.’ 피접은 왕이나 왕족이 병을 얻으면 으레 명망(名望)이 있는 대신의 집에 가는 것이니, 원자는 강희맹의 집으로 모셔다드렸다. 인수대비는 사촌 오라버니 한치형을 불러다 다과를 놓고는 득의양양했다. 어디서 그런 묘안(妙案)이 떠오르셨습니까. 참으로 기막힌 묘안이 아닙니까? 인수대비의 얼굴에서는 만족의 웃음이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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