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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時代) 05 제06화
원자를 낳았다. 중궁이 몸을 푸니 왕실의 홍복(洪福)이 아닐 수 없었다. 원자의 탄생에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다름 아닌 인수왕대비였다. 새 중궁의 거처는 대전의 서 온돌이었다. 중궁의 원자 탄생 이후 정국의 형세는 새롭게 변했다. 인수왕대비가 더 이상의 정무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신진 관료들이 가로막고 나서려고 움직였던 것이다. 한술 더 떠 중궁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지고 궁인들의 입방아가 오르내렸다. 뒤에서 중궁이 겉으로 예의범절을 지키는 체하다가 시어머니 흉을 보았다던가, 대비의 동의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내외명부(內外命婦)를 불러 모은다는 등이었다. 이때 인수대비가 새 중궁의 행실을 두고 기막히게 여겼다. 인수대비 못지 않게 정귀인 같은 이가 덕으로 다스려야지. 다 같이 전하를 뫼시는 후궁인 것을. 하며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다른 후궁인 윤 숙의와 하씨(河氏), 권씨(權氏), 심씨(沈氏) 등은 중궁의 권위를 인정하거나 동조했지만 엄씨(嚴氏)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 누구보다 우려스러워하는 것은 한명회였다. 노사신의 방문을 받아 한밤중에 술상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중궁이 득세하고 있다 하자 인수대비를 염두에 두고 급하면은 체통이고 뭐고 간에 다 내던지실 양반이야! 역정을 내기까지 했다. 한명회는 인수대비의 검은 속내를 유독 알고도 남았다. 인수대비는 내심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중궁의 원자 탄생을 경하드리기 위해 영의정 정창손과 김질, 김국광이 하례를 드리기 위해 인수대비전에 찾아왔다. 경하를 드립니다. 며느님을 얻으시어 중궁으로 세우시고, 게다가 손주까지 보셨으니 이야말로 경사가 겹친 것이 아니옵니까. 이야말로 왕실의 홍복이옵니다. 상락군(上洛君) 김질의 아부(阿附) 섞인 치하에 인수대비가 고마움을 표하며 상락군께서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때였다. 그간 중궁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신들이 대비마마를 뵈옵기가 민망하였습니다. 하오나 이젠 명실공히 일가를 이루셨으니 마마의 노후가 편안하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광산군 김국광이 거들고 나섰는데, 지켜보던 한치형이 한심스럽게 쳐다보다가 서먹함을 느껴 헛기침을 뱉었다. 설령 며느리를 얻었어도 시어머니의 나이는 사십 초반이었다. 딴은 망측스러울 만했다. 이제 손주를 보셨으니 손주의 재롱이나 보시면서. 나이가 들 법했지만 눈치 없이 덕담이랍시고 말을 늘어놓는 광산군의 말을 가로막듯 인수대비가 그래야지요. 손자든 손녀든 나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맏아들 월산대군 내외를 염두에 두고 던진 말이었다. 아니 이제야 할머니가 되시다니요. 월산대군께서 아직 소생이 없으셨습니까? 광산군이 물었다. 월산대군에게 측실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기는 했으나 서자에 지나지 않았다. 적서를 엄연히 구별하던 조선 사회인 까닭에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했던 나머지 뱉은 겸양의 뜻을 몰랐다. 옆에서 한치형이 이를 전하자 광산군이 무릎을 치며 아하 그랬습니까? 아이고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참. 능청을 떨자 정창손이 혀를 차며, 광산부원군께서는 웬 말씀이 그리 많습니까? 주의를 줬지만, 이 자리가 좋은 자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덕담을 올리는 것이. 덕담을 두고 두 늙은이가 옥신각신하는 틈에 나는 걱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인수의 말이 가로막고 나섰다. 주상께서 가정을 이루셨으니 위아래가 화목하는 것이요, 주상께서 친정을 펴시어 강건한 군주가 되시는 것이요, 주상께서 세종대왕에 못지 않은 후사를 두시어 주상의 자손으로 하여금 천년만년 종묘사직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창손이 그 세 가지를 능히 이루시고도 남음이 있사옵니다. 말씀을 올리자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주상께서는 아직 유약하시고, 이제야 겨우 손을 보셨으니 그게 어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까. 그뿐입니까. 새 중전께서 덕을 쌓으시려면 아직은 요원합니다. 걱정 섞인 마로 인수대비가 넋두리를 늘여놓자 김국광이 기우(杞憂)라며 위로하고 주상과 중전에게 맡기라고 위로했으나 나는 쉬고 싶으나 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나를 도와달라고 이렇게 청하는 겁니다. 시아버님이신 세조대왕께서 말씀하시길, 나무는 쉬고 싶으나 바람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말씀하시길 바람이 거세면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가 바람이 그치면 나무를 베어다가 땔감으로 쓰는 것이 인심이나 나는 기꺼이 바람을 막아주는 나무가 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 사람은 말문이 막히고 치형의 눈에서는 존경의 눈빛으로 마마를 바라본다. 나는 세조대왕의 뒤를 따라 그리할 것입니다. 나는 물러납니다. 머지 않아 물러납니다. 물러나지 않을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물러나기 전에 할 일이 많습니다. 그 일을 다 이루고 나면 물러나지 말라고 해도 물러날 것입니다. 염려들 하지 마세요. 인수는 못을 박듯 곡해의 말을 털어놓는다. 인수대비의 눈에서는 먹이를 놓치고 굶주린 맹수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시아버지 세조대왕의 전철을 미연에 막고자 한 의지였다. ―윤 중전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임사홍과 함께 직간접적으로 정사에 관여한다는 소문이 대궐 안팎에 퍼져 나갔다. 중궁이 원자를 낳았으나 윤씨의 체통은 어디까지나 미천했다. 몰락한 반가의 처자였는지라 체통을 내팽개친 지 오래였고 예의범절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중전에 오르고 보니 자연 내명부가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이제 갓 용종을 잉태한 귀인정씨(貴人鄭氏)의 뺨을 갈겼다. 중전으로서 체통을 내팽개치니 인수대비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명부더러 <내훈>을 읽으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되었누?’ 다른 한편으로 상감의 체면을 봐주는 선에서 물러났다. 중궁의 어미도 정귀인과의 일을 두고 투기를 부린다는 얘기로 와전되어 버릴까 저어하여 대비전에 가서 빌어보라고 했지만, 전하께 다짐을 받아두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두 번 세 번 다짐을 받아두었습니다. 중궁의 어미 신씨(申氏)가 마마, 대비마마께선 시어머님이 되십니다. 상감마마이신 임금보다도 더하셔도 안방 살림을 간섭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궁중의 살림 또한 사가의 살림과 비슷하다고 타일렀지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안방 주인은 납니다. 시어머니가 아니시라. 중궁 윤씨가 펄쩍 뛰었다. 아들만 낳았으니 됐습니다. 그때는 대비께서도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못하실 겁니다. 인수대비는 인수대비대로 며느리를 잘못 골랐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장 믿음직한 큰 며느님에게 어김없이 넋두리를 늘인다. 마마, 부녀간의 투기는 예전부터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소실을 통해 아들을 본 큰 며느님 박씨가 제법 연륜이 쌓인 덕분인지 인자한 표정으로 시어머니를 위로하는데, 그러니 답답한 일이 아니냐. 인수는 답답하여 한숨을 쉬었다. 모른 척 하시옵소서, 마마. 손찌검을 해? 박씨의 위로에도 인수대비가 기막혀한다. 중궁의 행실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인수대비를 비롯해 대왕대비전과 인혜왕대비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보다 사소한 일도 일어나기 무섭게 소문이 퍼지는 곳이 대궐 안이 아니냐. 하도 해괴하여 나머지 두 대비전에서는 쉬쉬했다. 그러나 금상의 잠저에 살고 있는 인수의 장남인 월산대군이 인수왕대비가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며느리를 잘못 골랐다고 조소를 터뜨렸다. 한편 중궁의 사가로 외명부의 부인들이 각종 패물이며 예물들을 바리바리 나르는 통에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병조판서 강희맹(姜希孟)의 처도 그곳에다 패물을 바치러 왔는데 그 집 몸종더러 이보게. 하며 부르니 몸종이 직접 안채로 인도하였다. 신이 났는지 몸종이 궁뎅이를 흔들어대며 안내한다. 안채에는 벌써부터 중궁의 어머니 신씨가 몸소 인사를 받고 있었다. 생전에는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지내다가 죽었으나 그 여식이 중궁에 있는지라 영의정에 추증되니 신씨로서는 그보다 더한 부귀영화가 있었을까. 강희맹의 처가 큰절을 올리며 패물이 든 함(函)을 바치니 신씨의 얼굴에서는 만족의 빛이 띠었다. 이 소식은 상당군의 집에도 퍼졌다. 상당군의 권세를 능가하였다. 궁궐에서는 인수대비가 갓난 아기이신 원자를 어루만지시며 만면에 웃음을 띠신다. 영락없는 주상이십니다. 이 눈매를 보세요. 영락없는 주상이 아니십니까? 강보에 싸인 채 옹알거리는 원자의 모습이 귀여운 모양이시다. 기쁘십니까, 어마마마. 금상 또한 웃음을 띤다. 기쁘다마다요. 주상의 뒤를 이어 보위(寶位)에 오를 원자가 아닙니까. 대비전 말씀에 윤씨는 놀라며 시어머니께 시선을 돌렸다. 아가, 고생했다. 원자가 탄생했으니 왕실의 걱정을 덜었느니라. 인수대비의 말씀이 따뜻했던지라 중궁의 눈시울이 붉어지다 못해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중궁이 원자를 놓자 신진 관료들 사이에서는 인수대비로 대표되는 훈구세력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일파만파로 퍼져 임금의 친정을 촉구하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여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동분서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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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