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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時代) 05 제05화
상당군의 세력이 평정된 정국이었다. 그 와중에 인수대비가 발 벗고 나선 덕분에 중궁을 새로 간택하였다. 좌의정으로 있던 한명회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기에 스스로 사직을 청해 조정 일에서 손을 떼었다. 인수대비는 더 이상 외척의 유세나 발호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막아보고자 했다. 만약 한명회의 막내딸이 계속 국모(國母) 자리에 있었다면 한명회가 나라를 통째로 삼키고도 목이 마르다고 나설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죽은 왕비의 시호를 공혜왕후(恭惠王后)로 봉하였다. 한씨가 물러간 자리를 채울 왕비를 간택하고자 직접 인수대비가 서둘러서 두 대비전, 곧 세조비와 예종비를 불러들여 같이 왕비의 간택을 추진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후궁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중궁의 자리에 나선다며 너도나도 설치곤 했다. 그런데 이들 중 윤숙의가, 그것도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던 그 윤숙의가 회임했다는 소문이 대궐을 뒤덮었다. 하여 인수대비가 진상을 알아볼 겸 겸사겸사 그에게 문안을 드리게 했다. 세 대비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보니 배가 확연히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겉과는 다르게 상궁 나인의 부축을 받은 채 세 대비전에 절을 올리는데 자못 자연스러웠다. 궁중의 법도를 깨우친 까닭이다. 명색이 시할머니가 되시는 자성대왕대비가 한 마디 건넨다. 고생이 많구나. 그러자 윤숙의가 당치 않으시옵니다. 소인은 그저 본분을 다할 따름이옵니다. 대답하였다. 윤숙의의 언행(言行)은 시원해 보였지만 어쩐지 겸양(謙讓)을 차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을 낳으시게. 자네가 아들을 낳으면 오랜만에 대궐에서 태어나는 원자(元子)가 아니신가. 안순왕대비가 덕담을 내리시자 망극하옵니다. 왕대비마마. 윤숙의가 고분고분 대답하였다. 이때 인수대비는 숙의의 행동거지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대왕대비가 인수대비에게 덕담하도록 허락하니 겸손해야 한다. 투기(妬忌)하지 말고 덕을 쌓아야 한다. 사치하지 말고 탐욕을 버려라. 말을 삼가고 몸가짐을 바로 해라. 음식을 가려 먹고 마음 속에 좋은 것을 생각하고 담아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시어머니 되실 인수대비의 엄한 가르침을 들어야 했다. 윤숙의는 대답했다. 예, 마마. 인수대비의 분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러가서 쉬거라. 해산 전에는 바깥출입을 삼가도록 해라. 요염(妖艶)한 자태가 흐르는 데다 색(色)을 즐기고도 남았다. 인수대비 당신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상감의 친정을 지켜보기에는 매우 위태하였다. 그래서였는지 중전의 자리를 두고 신중(愼重)에, 신중을 더 한답시고 중궁을 책립하지 않았다. 신진 관료들은 급기야 조득림(趙得林)과 유자광(柳子光)을 탄핵하여 걸고 넘어졌다. 두 사람 모두 인수왕대비의 수족이었다. 덕치(德治)로 다스리고자 하던 금상의 간곡한 청이 있기에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덕분에 인수대비는 수족을 잃어버릴 일은 면했다. 윤 숙의는 윤숙의대로 신경이 쓰이기만 했다. 걸핏하면 잔병치레 치르고 있기에 상궁 하나를 보내어 각별한 예우로 대해주었다. 장래에 원자를 탄생시킬 막중한 몸이기 때문이다. 하여 큰며느리인 월산대군(月山大君) 부인을 불러다가 논의하고는 했다. 애당초에 곤전의 자리를 본래 큰며느리에게 주고자 했다. 그런데 큰아들이 병약하여 보위를 물려받을 수 없기도 했지만, 덕종의 생시와 같게 포용(包容)이 부족하여 임금의 재목이 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마음 한구석에다 미안한 마음을 담은 채 큰며느리에 대한 일종의 부채(負債)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행여 내명부에서 일말의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윤숙의와 뱃속 아기씨를 각별히 보호하도록 엄히 당부하였다. 요괴(妖怪)한 물건을 소지해 두 분 마마에게 해를 가할라치면 인수대비가 몸소 나서서 상벌을 엄히 하였다. 매번 인수대비가 몸소 나서서 상벌을 엄히 하였다. 매번 인수대비가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것에 감격하여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데도 윤씨는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임금은 오로지 용종을 잉태했다는 구실로 아침 문안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섭섭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어찌하겠나. 생떼 같이 키운 상감이 무던히 좋아하던 측실인 것을. 인수대비는 말벗으로 같이 있던 큰며느리에게 말하길 내가 윤기견의 여식이 어떻게 궁색하게 사는지 알아보려고 아랫것들에게 시켜 은밀히 조사해보니, 아버지는 죽고 위로 오라버니가 둘 있으나 모두 하급 관리로 지낸 까닭에 살림이 궁색했다는구나. 그래서 생각해보니 외척이 생길 우려가 적어보이니 중궁으로 간택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 대왕대비전에서도 저토록 성화이시니 할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윤숙의 마마께 뵈러 가보니 몸 풀 날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며느리가 역성을 들어주니 대비로서는 손해되지 않겠다 싶어 윤숙의를 중궁에 앉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윤기견의 여식으로 곤전(坤殿)을 세우는 것이 순리일 성싶다. 윤숙의가 벌써 회임해서 점점 배가 차오르니. 어떻겠느냐?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큰며느리의 대답이 나왔다. 다만 순종(順從)의 자세로 시어머니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대비전의 눈에서는 아쉬운 빛이 역력하다. 다 좋은데 덕이 부족해. 월산대군 부인은 대비전의 고민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월산대군 부인의 눈에서는 시어머니의 의중을 헤아리듯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상(像)을 보니 이내 시어머니가 말문이 막히자 상이라 하셨습니까? 가난한 여식이니 제대로 먹고 입히지 못했을 겁니다. 사는 것이 풍족하지 않으니 언제 덕을 쌓았겠습니까? 하오나, 시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보듯 대답하려는 며느리 박씨에 대답하길 천기(賤技)가 넘친다는 뜻이야. 내가 처음부터 윤기견의 여식을 곱지 않게 보아서 편견이 심한지도 모르겠다. 같이 가서 보시고 자네가 어찌 보셨는지 말씀하시게. 인수대비는 오히려 박씨에게 자문을 구했다. 한편 중궁에 간택될 윤씨는 왕대비가 되시는 시어머니가 직접 당신의 처소에 찾아오신다는 전갈을 전해 받으니 나인 하나를 시켜다가 누더기옷을 한 벌 가져오라 분부하였다. ‘대비전께서 달라시면 간이라도 내놓을 것이야. 호랑이가 제말만 하면 온다더니 대비께서 들어오시는구나.’ 누더기 옷을 준비한대로 입은 윤씨는 대비전이 밖에 계실 때 몸소 나와 정중히 맞이했다. 한번 윤숙의에게 찾아가서 보니 누더기를 걸친 옷을 차려 입고 윤숙의가 맞이한 것이다. 인수대비의 눈에서는 만족의 빛을 띠었다. 그러고는 이내 대비전이 돌아갔다. ‘대비전 앞에서는 벙어리 시늉이 약이다.’ 대비전의 뒷모습을 보던 윤씨는 코웃음을 쳤다. 인수대비의 혜안(慧眼)은 적중했다. 윤씨는 사가의 어미를 시켜다가 장떡을 시켜 먹었고 걸핏하면 밖에 나돌아다녀서 궁인들로 하여금 위태하게 보였다. 중궁이 될 윤씨가 외척이 없기는 했으나 다만 그의 아버지가 생전에 임사홍(任士洪)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맡았다. 임사홍의 부친 임원준(任元濬)이 이조에 있었을 당시에 임의 고모의 간청도 있고 해서 봉상시(奉常寺)에 종사하도록 했다. 임원준이 마침 좌참찬(左參贊)에 몸담았던지라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임사홍 일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데 이번 중궁 간택 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문무백관이 하례를 드리는 자리에서 새 중전이 간택되니, 이이가 훗날 폐비윤씨(廢妃尹氏)로 불리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때가 성화 12년 성종 7년 8월 9일의 일이다. 실록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교명(敎命)에 이르길, 예전에 현명한 임금이 국사를 다스리는데 있어 반드시 내치를 먼저함은 그 근본을 바르게 한 것이다. 아! 내가 어린 몸으로 대통을 이어받아 영구히 부하(負荷)해야 할 막중한 중한 책임을 생각하건대 반드시 내좌하는 현명한 사람의 도움에 힘입어야 하는데, 중궁의 자리가 빈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에 대왕대비의 의지를 받든다. 윤씨는 일찍이 덕행으로 간선되어 오랫동안 궁궐에 거처하면서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은 겸손하면서도 공경하므로 삼궁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에 예법을 거행하여 왕비로 책봉한다.” 중궁이 된 뒤에도 윤씨에게 산달이 다 찼는데도 활달한 모양이었다. 인수대비는 중궁을 잘 골랐다고 느꼈다. ‘산달이 다 찼는데도 활달하니 아들을 낳을 징조구나.’ 인수대비는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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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