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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사무엘 제06화
팔레스타인 땅, 그러니까 가자에서 잠시 묵은 뒤 일말의 희망을 찾으러 머나먼 길을 떠돌았던 사무엘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하느님께서 점지(點指)해주신 그 땅. 그러나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민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된 채 제 갈 길을 잃은 유다 민족이 타락한 채로 다른 민족의 신들을 우상으로 만든 채 숭배하고 있었다. 결국 온 유다, 아니 이스라엘 민족들은 우상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예루살렘에 다다르자마자 사무엘은 곧장 성소라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 또한 우상의 흔적이 배어나 있었다. 사무엘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성전을 나섰다. 그는 속으로 절규하였다. ‘주여! 어찌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저토록 망가져 있었나이까!’ 판관으로의 지위를 내팽개쳤다시피 한 삼손이었다지만 아직은 삼손의 힘이 건재해 있었다. 삼손의 집을 수소문하여 찾아보니 그곳에 버젓이 삼손이 있었다. 이방인의 여자를 취하여 하느님의 은사를 받아온 힘을 빼앗긴 채 행방을 감추었다던 삼손이었는데 자신의 눈에 버젓이 나타나다니. 사무엘은 그에게 경건한 자세로 인사한다. “삼손 판관님, 판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무엘의 눈에 나타난 삼손의 모습은 반백(半白)의 중년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몸은 매우 건장해 보였으나 지혜로 빛나던 눈동자가 사그라든 상태였다. 삼손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무슨 소리요. 나는 보다시피 예루살렘의 어느 초라한 필부(匹夫)에 불과하오,” 삼손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당연한 대접이었다. 그 곁에는 며느리인 법한 젊은 처녀가 삼손을 보살피고 있었다. “한두 해 전에 마누라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일거리를 찾으러 인근 마을로 떠난 지 오래되었소. 며느리가 손자를 둔 덕분에 이렇게 얌전히 앉아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소.” 한때 이방인의 여자에 눈이 멀어 그녀가 소속된 도시의 관청을 무너뜨리고 그 폐허더미를 빠져나오지 않은 채 죽었다고 했던 삼손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구명줄로 삼은 모양인지 용케도 살아 돌아왔다. 결국 이방인의 여자는 이후 폐허더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삼손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고 했다. 이토록 사람의 욕심이 이토록 질기고도 질길 줄 미처 몰랐다. 사무엘은 그런 삼손을 보며 하염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생각이 깊어져만 갔다. “그대는 어째서 이 보자는 것 없는 예루살렘에 찾아오셨소.” 삼손의 물음에 사무엘은 “주님께서 무작정 가라는 데로 말씀하셔서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답했다. 그러자 삼손이 순간 놀라며 벌떡 일어나더니 “오! 세상에!” 감탄사(感歎詞)를 토하며 사무엘에게 다가와 큰절하는 게 아닌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무엘은 당황해하며 벌떡 일어난다. “아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제게 절하시다니요.” “이틀 전부터 내게 하느님께서 별안간 꿈속에 나타나시더니 새 판관을 맞이하라고 하시더군요. 그 새 판관이 될 사람이 스스로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서 내 집에 찾아올 것이라며, 그때는 겁을 먹지 말고 융숭히 대접하고 그를 새로운 판관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삼손의 말을 듣던 사무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삼손의 간절한 눈빛은 어느새 새로운 빛으로 가득 찼다. 그 눈에 기쁨의 눈물이 가득 차다 못해 넘쳐났다. 진실하고 진실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순명으로 받아들인 마음은 굳건했던 거다. 가뜩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문제로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에서 분쟁이 가득하던 찰나에 이렇게 귀한 손님이 오시다니. 이내 눈물을 거두고 며느리더러 “가서 성전의 사제를 모셔오너라.” 분부하였다. “네.” 며느리가 사제를 모시러 간 사이에 삼손은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삼손 역시 판관의 자리를 내팽개치고픈 마음이 매우 굴뚝 같았지만, 주님께서 한사코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분부하시는지라 할 수 없이 허울뿐이나마 판관 자리를 지키고 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삼손은 말을 이었다. “사무엘 형제, 사무엘 형제는 아마 아실 것 같습니다만, 소금기둥 이야기 말이죠. 소돔이라는 타락한 도시가 있었는데 그 도시의 향락이 매우 극심하여 하느님을 소홀히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해서 하느님 당신의 손으로 그 소돔 땅을 몰락시키려고 하였더랍니다. 그래서 롯이 그 고을에 있었는데 자기도 덩달아서 타락된 것을 알게 되어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하며 말했더랍니다. 그러면서 말하길, 만약 이 땅에 일만 명의 의인(義人)이 있다면 멸망하시겠습니까? 하니 주님 당신께서는 멸망하지 않겠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러면 이 땅에 일천 명의 의인이 있다면 멸망하시겠느냐고 묻자 아니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럼 백 명의 의인이 있어도, 오십 명의 의인이 있어도, 열 명의 의인이 있어도 멸망하지 않으시느냐고 롯이 연거푸 묻자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시더랍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롯의 허울을 용서해주시는 대신 소돔 고을을 벗어나면서 단 한 번이라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소돔이라는 고을을 벗어나는 도중에 롯의 부인이 뒤를 돌아본 나머지 소금기둥이 되었더랍니다. 그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생각해보니 아마 주님께서는 그런 롯의 심정을 십 분 헤아리라며 일말의 숨구멍을 불어 넣어주려고 지혜를 주신 모양입니다. 롯은 마누라를 잃었고, 나는 애첩인 여자를 잃었으니. 이야말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닐는지요. 그 대가로 나는 판관으로 계속 지내게 된 거랍니다. 명목상의 판관입니다만.” 주님께서 머나먼 길을 가라며 자신을 등 떠밀다시피 여행 아닌 여행을 떠돌아다니다시피 한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무엘의 등줄기에서는 찬 기운이 솟아올랐다. 실제 성경에서는 어떻게 사무엘이 판관이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자세하게 나타나는 내용이 없다. 다만 사무엘이 마지막 판관이라는 점만큼은 사실이다. 사무엘과 삼손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삼손의 며느리가 사제를 데려왔다. 사제는 노인이었다. 사무엘을 마주하자마자 큰절을 올렸다. “오셨군요. 새 판관님이 오셨군요.” 별안간 사제는 판관으로 사무엘을 지목하고 나섰다. 사무엘은 “판관이라니요, 제가 판관이라니요. 어림도 없는 소리. 그만 집어치우세요.” 버럭 역정을 내었다. “사무엘 형제, 이렇게 역정부터 내시기요?” 사제의 뒤를 따라 삼손이 강권에 가깝게 권유하는 통에 사무엘은 어찌할 바 몰랐다. 그런데 어쩐 영문인지 소문에 소문이 퍼졌던 모양인지 예루살렘 사람들이 판관의 집에 우르르 찾아 몰려왔다. 구경들이 났느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을 법하건만 삼손이 덤덤하게 사무엘을 손가락으로 지목한 뒤 “이 사람이 새 판관이시오. 앞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실 판관이시오!” 새로운 판관으로의 사무엘을 가리켰다. 그러자 판관 집에 몰려든 사람들을 비롯해 온 예루살렘 백성들은 사무엘의 판관 취임을 기꺼이 반겨주었다. 예루살렘의 사제는 곧이어 사무엘에게 강복하여주며 새 판관임을 선언하였다.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얼떨결에 새 판관이 된 셈이었다. 사무엘은 잠시나마 고향에 다녀올 뜻을 내비치고 사제에게 판관의 자리를 지키게 했다.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못내 무거웠다.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다름없는 판관의 지위를 얻게 된 사무엘은 책임감이 매우 크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고향에 찾아온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에게 찾아갔다. “어머니, 제가 판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순간 어머니가 기뻐하며 “내 그럴 줄 알았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대견해하였다. 그 곁에 있던 작은어머니 프닌나도 사무엘을 기특해하였다. 비록 엘카나는 하느님의 곁에 떠난 채 이 세상에 있지 않지만, 집 근처에 볕이 잘 드는 땅에 묻어두었다. 그 무덤에 네 사람이 찾아가서 절을 올린 뒤 가족들을 거느린 채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다. 이로써 사무엘은 판관의 소임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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