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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봉당] 시대05 제03화
대왕대비가 장성한 상감을 두고 더 이상 수렴청정을 행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확고했지만 엉뚱한 익명서(匿名書)가 붙어 있던 관계로 왕실과 조정의 관리들 사이가 얼어붙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대왕대비가 들어선 조회에 예를 갖추듯 일어서려니까 대왕대비는 일어설 필요가 없으니 그대로들 앉아 계세요. 언짢은 어조로 대신들을 앉힌다. 그러고는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듯이 대궐 안팎 요처(要處)마다 나를 탄핵하는 익명서가 수도 없이 붙어 있었으니 구구한 변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영상이 대왕대비 마마. 말씀을 가로막았지만, 제 말을 마저 들으세요. 제가 본디 배운 바가 없으나 상하 대신들이 내게 간곡히 청하였기에 나어린 주상을 대신해 정사를 청단(聽斷)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물러날 때가 왔습니다. 주상의 보령이 이제 열아홉이시니 만기(萬機)를 친정(親政)하셔도 됩니다. 이 할미는 물러나니 그런 줄 아세요. 대왕대비의 어조는 확고하다. 영상이 다시 의견을 내놓을 찰나에 한마디 더 하고 물러날까 합니다. 대체 익명서란 무엇입니까. 할 말 있으면 정원(政院-승정원(承政院))을 통해 올리든지 공론(公論)을 통해서 할 것이지 이름 석 자 밝히지 못하고 남의 허물을 비판할 수 있습니까. 이는 마치 어둠 속에 숨어서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같은 비열(卑劣)한 행위가 아닙니까. 만사를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당당하게 처리하세요. 여기 앉아계시는 분들은 모두 고매한 인격을 갖춘 분들이 아니십니까. 익명서라니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대왕대비 당신으로서는 낯 뜨거울 지경으로 체통을 내팽개치며 모진 소리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왕실의 큰 어른이지만 문맹(文盲)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보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지내왔던 삼사 년 동안의 세월. 그 세월을 보상받기는커녕 오히려 명예롭지 못한 채 물러나야하는 당신의 신세가 매우 처량했다. 마마, 노산군의 전례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나랏일이 그릇되므로 세조께서 정난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후에도 성삼문의 변고(變故)와 남이의 옥사(獄事)가 있었습니다만 금상께서 보위에 오르신 뒤로 대왕대비께서 직접 나랏일을 보필하시니 나라가 태평하였나이다. 대왕대비 마마. 청컨대 정사를 돌리지 마십시오. 신숙주와 홍윤성이 모두 작고한 뒤 한명회가 유일하게 살아남다시피 한 정난공신이 되었다. 그런 한명회의 말에 발 뒤의 대왕대비가 마음이 움직인 듯 맞장구를 친다. 상당군(上黨君)께서는 덕담(德談)을 하십니다그려. 그 전에 익명서를 붙인 그 주인을 찾아서 한번 물으시지요. 누구 덕으로 이만큼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리게 되었는지요. 그동안에 쌓인 묵은 때를 씻어내듯 대왕대비의 역정이 터져나왔다. 그제야 명회는 울음 섞인 어조로 중궁이 자리가 비어 있음을 이유로 수렴청정을 유지하라고 간청한다. 여기에 김국광(金國光)이 소인배(小人輩)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며 맞장구친다.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보고 개가 짖는 것이니 괘념하지를 마시옵소서. 대왕대비는 십년감수했다. 조정 대신들의 의중을 떠본 것이었다. 비록 문맹이기는 할지언정 대왕대비의 혜안을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대왕대비가 누구던가. 세조대왕의 정비로써 잠저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했던 내조자가 아니었던가. 당신의 부군이 옥좌에 오른 뒤에 몸가짐을 조심하게 처신한 덕분으로 내외명부(內外命婦)가 우러러 받들었다. 덕망(德望)이 매우 깊은 대왕대비는 두 명의 아들을 모두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손주를 여의기까지 했으니 참척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그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대왕대비는 자연히 정치의 섭리를 깨우쳤다. 글자를 깨우치지 않았다고 하나 세상의 이치만큼은 깨우칠 만큼 깨우친 대왕대비였기에 정치는 그 누구보다도 성실히 임했던 것은 분명하다. 대왕대비는 그러나 당초 오래전부터 수렴청정을 거둘 결심을 가져왔기에 철렴(撤簾)을 하겠다고 밝힌 대왕대비는 대신과 종친부 인사들을 둘러보고 나서, 내 목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속 좁은 아녀자(兒女子)의 일이려니 여기고 너그럽게 접어주세요. 대왕대비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다독이고 상감에게는 주상, 이 할미는 눈물이 날 지경으로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부디 성군이 되세요. 다정한 말씨로 상감에게 당부한 뒤 물러났다. 대왕대비는 비로소 마음이 후련함을 느낀다. 하지만 대왕대비의 등 뒤에는 외로움이 묻어 나왔다. 대왕대비의 눈에서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비로소 대왕대비의 시대는 저물었다. 이때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인수왕대비였다. 상감의 친정을 이루었지만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해 한명회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대왕대비께서도 누르지 못한 원상들과 공신들을 젊디나 젊으신 주상께서 어떻게 누르겠습니까. 그전에는 임금이랄 수도 없지요.’ 이에 인수대비는 기꺼이 상감을 위해 한명회의 수족을 자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치형(韓致亨)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명하고 한명회를 권력에서 축출(逐出)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이에 대한 일환(一環)으로, 우선 중궁의 자리를 채우는 것부터 나섰다. 그런데 한명회에게 야심한 밤을 틈타 인수대비가 화해의 표시로 보약을 한두재 보냈는데 한명회가 자신을 독살시키려고 한다면서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보약을 마당에다 내팽개쳤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때아닌 소문에 전전긍긍한 쪽은 대왕대비였다. 대왕대비는 영산군(永山君) 김수온(金守溫)에게 시켜 파천부원군 윤사흔(尹士昕)에게 정확한 전말을 알아오게 했다. 윤사흔은 대왕대비 윤씨의 남동생이다. 이제 막 친정에 나섰던 상감은 인수대비가 자신을 가리켜 사돈인 늙은이를 독살한 악녀라고 불릴 것이라며 늘여놓는 목소리를 묵묵히 들어야만 했다. 생떼쓰기로는 그 누구 하나 따를 자가 없었다. 생전의 세조대왕도 그랬다. 이때 승정원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상당군의 방자함을 들어 탄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때 인수대비가 포착하고, 영상을 은밀히 불러 상당군을 탄핵시켜 물러나게 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원로대신들은 차마 상당군 한명회를 제거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 가운데 젊은 축에 속한 선성부원군 노사신(盧思愼)이 중립을 지킬 뿐이었다. 노사신은 그나마 붙임성이 있어 이편저편을 따지지 않고 포용하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좌상의 자리에 앉은 한명회의 권세가 커질 것을 우려한 인수왕대비의 처사라고 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러나 인수대비의 뜻은 관철되지 않았다. 결국 한치형이 대사헌의 자리에 앉지 못했다. 임금과 신진사류의 관리들이 외척이라는 이유로 제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엣가시 같은 한명회를 상감의 친정에 방해된다는 구실을 내세워 탄핵하려 했다. 한데 좌절을 맛보게 되니 근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런 인수왕대비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금상의 후궁 가운데 윤기견의 딸인 윤 숙의가 용종(龍種)을 잉태했다는 소식이었다. 인수대비는 기뻐하며 상감에게 직접 대왕대비의 조카이자 윤사흔의 아들인 윤계겸(尹繼謙)을 대사헌으로 앉혀달라고 졸라대어 관철시켰다. 인수왕대비는 만전의 준비를 다했다는 듯 득의양양했다. 하여 상당군의 수족인 관리들을 부정축재(不正蓄財)를 이유로 삼아 탄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수왕대비는 자신의 손으로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명부를 적어내어 윤계겸으로 하여금 이들을 사정하도록 했다.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해 상당군에게 연줄이 닿는 사람들을 모두 숙청(肅淸)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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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