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전(景春殿) 안에서는 때아닌 노성(怒聲)이 들린다. 인수대왕대비가 거처하던 바로 그 경춘전이다. 그런데 야심한 밤에 때아닌 소동이 일어나자 상궁이며 내인이며 내관과 호위 무관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비키세요―

안에서는 젊은 임금이 눈앞에 둔 할머니와 실랑이하고 있다. 임금은 왕비의 늙은 상궁을 직접 잡아가려고 하는데 대왕대비의 몸으로 있던 할머니는 몸을 가로막고 나섰으나,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병에 찌들고 나이도 찰대로 찬지라 거동이 불편한 가련한 노파에 지나지 않았다.

나부터 죽이라고 했다―

칼을 든 채 손자는

비키라고 하지 않습니까!

별안간 할머니의 가슴을 손으로 밀쳤다. 그러자 힘없이 대왕대비는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할머니의 가슴을 밀쳤다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때는 갑자년(甲子年) 사화(士禍)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序幕)에 지나지 않았다. 임금과 대왕대비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악연이 있었기에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던가.

인수대왕대비는 손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이토록 자신의 등에 비수를 꽂을 일을 저지를 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손자의 패륜(悖倫)을 자초(自招)한 걸 절실히 느낀 인수대비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인수대왕대비는 한숨을 쉬었다.

(업보(業報)다. 업보니라. 내 손으로 거두지 못한 업보다.)

상감은 할머니를 쓰러뜨리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경춘전에 있는 궁녀들한테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망나니가 칼을 휘두르며 춤추는 상감의 눈에는 그야말로 광기에 어린 사나운 축생(畜生)의 눈빛이 되어 있었다. 이 같은 광경을 보려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던가. 자신이 어쩌다가 못 볼 꼴을 겪었는지. 이때까지 살아남으면서 내가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온갖 생각이 늙은 인수대왕대비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복잡할 뿐이다. 한바탕 광란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친 뒤에도 경춘전의 궁녀들은 모두 능욕을 당한 것에 대한 분을 풀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며 울 뿐이었다. 가련하고 처량한 늙은 대왕대비는 가슴을 부여잡더니

물러가거라.

하고 명을 내려보지만, 궁녀들은 요지부동이다.

물러가라고 했느니라!

울음이 섞여 분에 찬 목소리로 대왕대비가 소리쳤다. 그러나 궁녀들은 아무런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늙은 상궁이며 젊은 무수리에 이르기까지 꼬부랑 허리를 펴지 못하는 노파에 지나지 않은 이 왕실에서 높은 웃어른의 말씀을 따르기는커녕 자신들의 신세에 서러워 울 뿐이었다. 대왕대비는 참다가 못해 벌떡 일어나서는 서둘러 휘덕전(輝德殿)으로 발길을 옮긴다. 휘덕전은 세종대왕과 그 왕비이신 소헌왕후의 위패를 모신 혼전(魂殿)이다. 혼전 안에 들어서자마자 위패들 앞에 주저앉으며 체통도 내버린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크게 그리 지었기에 이리 시련을 주시나이까. 시아버지이신 세조대왕의 피비린내를 신첩의 손으로 씻고자 했습니다. 피로 얼룩진 보위를 성종대왕(成宗大王)에게 넘겨주어 오늘날까지 왕실을 건사하고자 했습니다. 한데 그 천하디, 천한 피를 가진 손자에게 보위를 넘겨주었습니다. 오늘날 이 꼴을 보려고 보위를 남긴 것이 아니었는데. 신첩은 이 모습을 겪고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았습니다. 열성조시여, 말씀하소서. 손자에게 빌어야 합니까. 빌까요? 신첩이 빌면 손주가 성군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해야 이 나라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이어지겠습니까!)

한때나마 시아버지 세조대왕에게 폭빈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까지 아랫사람들을 예의범절에 어그러짐 없이 다그치듯 다스리고 윗사람들에게는 깍듯이 공경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맏며느리였다. 어머니와 계양군의 부인인 둘째 언니를 따라 불가에 귀의하여 불도에 몸을 담갔으며 천성적으로 타고나기를 똑똑하고 영리한 성격인 까닭에 친정아버지 한확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시누이들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있었기에 자연히 명나라에 왕래하기도 했는데 이때 들여온 책을 어릴 때부터 가까이했던 까닭으로 인해 범어(梵語)까지 능통할 정도로 똑똑했다. 이 때문에 세상의 이치까지 통달하기에 이른 여걸이었었다. 그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손수 <능엄경언해>까지 간행하는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둘째 아들 자산군(者山君)을 보위에 올린 자랑스러운 어머니였다. 자산군이 보위에 막 오를 당시 대왕대비의 몸으로 있던 시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와 함께 직간접적으로 정사를 보좌하기까지 한 그녀가 하루아침에 뒷방의 늙은이로 전락하였다. 가련하고 처량한 인수대왕대비의 말년이었다. 이제 대왕대비에게 닥쳐올 말년의 비운은 예견된 일이 되었다.

성종 재위 7년― 칠삭둥이인지 팔삭둥이인지 한 나라의 국구(國舅)로 천하를 호령할 성싶든 한명회의 막내딸이 단 하나의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왕실은 물론 조정 대신들까지도 우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잖아도 후사를 두지 못한 게 매우 근심되었던 인수왕비(仁粹王妃)는 자성대왕대비에게 금상의 후궁을 들일 것을 주청하였다.

“마마, 신첩이 상감에게 자손이 없음을 매우 근심하고 근심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중궁에게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지 저어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때마침 대왕대비전을 찾은 한명회의 처 민씨가 인수왕비의 처사를 보고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마음이 항상 불안하여 중궁을 대하기가 매우 부끄럽다고 핀잔을 주는 걸 묵묵히 듣고만 있던 부부인 민씨. 대궐을 나서자마자 그만 졸도하고 말았다. 그러지 않아도 딸들의 박복한 운명을 두고 마음고생을 심하게 가졌던 처지에 윗전이나 진배없는 인수왕비의 푸대접이 너무나 막심하여 좌불안석이었건만, 그만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막내딸은 단명하여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인수왕비는 며느리 천안부부인의 허약함을 내내 근심하여 하루라도 빨리 중궁을 새로 뽑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하여 대왕대비에게 말씀을 드려 새로이 중궁의 자리를 비운 채 새로이 후궁들을 뽑았다. 먼저 봉상시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 윤기견의 딸을 뽑기 시작하여, 윤호(尹壕)의 딸까지 뽑아 모두 숙의(淑儀)에 봉하였다. 뒤이어 정씨(鄭氏)와 엄씨(嚴氏), 하씨(河氏) 등을 뽑아내 귀인(貴人)으로 삼았다. 이렇게 후궁들을 뽑아낸 뒤 인수왕비는 새로운 결심을 굳혔다.

‘내가 직접 내명부(內命婦)의 기강을 다스려야 하는데, 어떻게 다스려야 한담.’

인수왕비는 밤이 새도록 궁리한 끝에 새로이 책을 만들어 후궁들에게 교육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임(任) 상궁.”

임 상궁이 왕비의 부르심에 순순히 왕비 앞에 이르렀다. 임 상궁은 처음에 대왕대비가 왕비의 몸으로 있었을 때부터 잠저에 살던 인수왕비와의 중간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네, 마마.”

왕비가

“조(曺) 상의를 부르게.”

분부하니 상궁이 이를 따랐다. 이윽고 상의 조씨가 왕비전(王妃殿)에 들어서자,

“지필묵(紙筆墨)을 준비하여라. 내 친히 글을 써서라도 후궁들을 단속해야겠다.”

생각을 굳힌 왕비가 마침내 붓을 들어 한 자 한 자를 종이 위에 적는다. 인수왕비는 하루하루를 오로지 내명부를 가르치기 위한 글들을 적어 내려갔다. 인수왕비는 자신의 전각에 있는 책들을 가져다 읽으며 왕실의 후궁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고자 밤낮을 마다하지 않고 인용(引用)하기도 했다. 그러기를 반년. 반년이나 지나고 나서 인수왕비가 한밤중에 촛불을 켠 채 자신이 적은 원고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