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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24편
[5] 혜빈과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계유정난의 정당성을 확립시키고자 수양대군 내외가 솔선수범하여 뽑았던 중궁이건만, 두 내외의 뜻과는 다르게 오히려 어린 임금을 감싸고 돌았으며, 내외명부를 통솔하고자 했다. 그런 중궁의 모습에 수양대군은 께름칙하게 느꼈다. 어느 순간에. ‘내가 한낱 호랑이 ㅅㄲ를 끌어들였단 말인가. 하룻강아지처럼 보이던 풍저창 관리의 여식이.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마음으로 경장(更張)하고자 하던 내 포부가 중궁의 손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자칫 자신의 앞날이 중궁 송씨에게 넘어가는 날이면, 자신은 물론 일가족이 몰살될지도 모른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이었다. 혈육과 충신을 죽인 권력의 화신 그 자체였다. 인재(人災)였다.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중궁의 행태에 따라 금성대군과 혜빈이 공공연하게 대궐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처지이고 보면, 양날의 칼에 지나지 않은 자신의 앞길이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아 섬뜩할 지경이다. ―향이를 명회의 소실로 보낸 도원군 부인은 음(陰)으로 양(陽)으로 명회의 가솔을 도와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마를 한 채 주어 내명부의 일원으로서 민씨를 융숭하게 깍듯이 대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향이를 지아비의 소실로 보낸 것이 도원군의 부인이라는 것은 뒤늦게나마 알았다. 집현전 학자들이 국상 중에 혼례를 치르지 않는 것이 옳다는 상소를 무시하고 강행한 중궁의 책봉. 그것이 오히려 수양대군에게 역효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수양대군의 부인 윤씨는 정란공신의 부인들―한명회의 부인인 민씨와 권람의 부인인 이씨(李氏)까지―을 불러다 다과(茶菓)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리라. 그뿐인가. 중궁의 아버지 송현수의 집에 금은보화와 비단들을 비롯해 쌀과 곡식들을 보내었으니 창고에 가득 찼다. 단종 가례 직후에 수양대군이 인사발령을 내리니 최항(崔恒)을 이조참판에, 신숙주를 도승지에, 권람을 우부승지에, 정란공신 가운데 홍달손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양정을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올렸다. 홍달손과 양정은 모두 당상관(堂上官)에 올랐으나, 명회만큼은 당하관(堂下官)인 정사품(正四品)에 버려졌다. 이번 인사의 내막은 수양대군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자준은 천한 신분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한 내 아버님의 중신들을 비롯해서, 내 핏줄을 모두 죽였어. 그런 자준에게 사복시 소윤을 준 것만도 과분하지.’ 인사발령을 내린, 그날 밤. 수양대군은 명회를 찾았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명회에게 전갈했다. 이윽고 명회가 오는 것을 보고 수양대군은 “못난 사람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듯 했다. 그러더니 명회를 같이 데리고 후원에 가서 노닐고는 집사 임 서방 더러 술상을 보라고 이른 뒤 “자네 서운한가.” 숙인 머리를 들어 명회의 생각을 묻는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를 사복시 소윤으로 삼았는데 웬 불평인가? 만나는 사람마다 마구간 지기가 천직(天職)이라고 했다면서?” “사복시에서 관리하는 말은 임금께서 몸소 타는 말입니다. 미련한 소인의 생각에 머지않아 대군께서 사복시의 말을 타시고 사냥길에 오르시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시생(侍生)의 가슴에는 천하가 들어 있습니다. 이 나이에 접어들어 온갖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한 점의 부끄럼이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대군을 만나, 시생의 가슴을 갈라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천하를 바쳤습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려 했다면 진작 안평대군을 섬겼을 겁니다. 시생이 당상관이면 어떻고, 당하관이면 어떻습니까? 사복시의 말들을 기르며 평생을 살더라도 대군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천하를 경영하시는 모습을 뵐 수 있다면 시생이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능수능란하면서도 진실함이 뚝뚝 묻어난 명회의 달변에 수양대군은 한층 숙연해짐을 느낀다. “자네 가슴 속에 천하가 들어 있다더라도 나는 다르이.” 안평대군 때처럼 수양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깊은 속을 간파하는 묘한 재주의 소유자 한명회가 수양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시생은 일찍이 대군 마님의 천하를 보았습니다. 일전에 시생에게 당신께서 직접 천하를 펼쳐 보이셨던 적이 있습니다. 태조께서 개국하시고, 태종께서는 다지셨으며 세종께서는 꽃을 피우시어 천년의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후세의 임금이 그 열매를 거두는 사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천년만년 이어가는 첩경(捷徑)이 아니옵나이까. 하오나 문종께서 병약하시어 그 뒤를 이을 수 없음이 분명한데, 세종께서는 적장 승계의 원칙으로서 그 맥을 끊으셨습니다. 양녕대군께서 간파하시고 염려하신 대로 그 자리는 대군 대감의 자리였나이다. 대군께서 그 자리를 이어받아 열매를 거두셔야 함이 분명하옵니다. 호랑이는 제 ㅅㄲ를 낳으면 높은 산 위에 올라가 벼랑 아래로 내던진다고 하옵니다. 그중에 살아있는 ㅅㄲ는 키우고 남은 ㅅㄲ는 버린다고 합니다. 만일 임금께서 여러 왕자들 가운데 강인하고 강건한 왕자 대신 한낱 장자에게만 옥좌를 넘긴다면, 장차 이 나라의 명맥이 얼마나 오래 이어지리까? 하물며 세 살 난 아이나,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단지 장자라는 이유로 보위에 오르지 말라는 법이 있으리까? 황공하게도 세종대왕께서는 골육(骨肉)의 상잔(相殘)만 보시고 적장 승계의 폐해(弊害)를 보시지 못하였으니, 이를 어찌 자식의 사랑에 물을 일입니까? 전하께서 가례를 치르시어 일가를 이루시고, 머지않아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전하께서는 탄핵(彈劾)의 화살을 대군께 향할 것입니다. 하늘의 해가 하나이듯이 임금의 자리도 하나뿐이니 대군 대감의 장래는 불을 보듯 환한 일입니다.” 명회의 목소리에는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진심 어린 눈에서는 눈물이 머금어져 있다. “시생이 원통한 것은 대군 대감의 몰락이 아니라, 대장부의 포부(抱負)를 안고 태어났다가 그것을 펴지도 않고 거두신 것이니 그것이 원통하고 분이 나서 피눈물이 앞을 가리나이다.” “이 사람, 자준.” 일취월장인 명회의 언변을 듣던 수양대군은 그새 감동이 서렸다. “내가 자네에게 홀대한 게 마음에 걸려서 술잔을 기울이려 했더니 오히려 혹만 더 붙였구먼.” 그렇게 수양대군과 명회는 술을 기울였다. 주군의 바른길을 이끌지 못한 명회는 읍소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두 사람의 회포는 밤이 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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