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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3편
[3] 허씨의 핀잔에는 무덤덤하게 넘어간 대생이 명회를 막내 사위로 맞아 처가에서 살기를 권했다. 명회가 처가살이를 한 지 보름쯤 접어들었을 때, 대생의 집 사랑(舍廊)에 빈객(賓客)이 한밤중에 들어왔다. 빈객을 맞이하는 대생의 몸가짐이 예사 사람으로 대하기는커녕 정중히 모시는 게 아닌가. “차(茶)를 드시겠습니까.” “날씨가 워낙 쌀쌀해서 그런지 차가 은근히 생각납니다그려.” 당주의 대접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손님의 간청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이윽고 당주의 명으로 하녀 하나가 차를 대접한다. “대국(大國)에서 아는 친구 하나가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그때 사들인 차입니다.” 손님은 당주의 말을 듣고서야 찻잔을 든다. 찻잔을 들고 내음을 맡아본다. 조선에서 나는 찻잎이랑 다른 점이 있다면 독특한 차 향기였다. 씁쓸하면서도 톡 쏘는 듯 풍기는 내음을 맡고 그제야 대국에서 난 차임을 알아본다. 따뜻한 차 내음을 맡고 마시니 입안이 청아(淸雅)하다 못해 입안 전체가 얼음처럼 시원하다. “태재(泰齋) 선생.” 존칭을 쓰며 대생이 손님에게 의중을 물어본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당주를 응시한다. “다름이 아니라 보름 전에 제 막내 사위를 얻었는데, 문하생이랍시고 집에 들여 요모조모 문답(問答)을 주고 받았습니다. 한데 답하는 모습이 하도 시원 한데다가 청산유수(靑山流水)로 답변을 어쩜 잘하던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더이다.” 그러자 태재 선생은 무슨 소리로 궤변(詭辯)을 늘여놓는지 안다는 모양으로 그저 듣고만 있다 찻잔을 들며 마신다. ‘허허허, 하다 하다 이제는 막내 사위를 내 밑에서 가르치게 하려고?’ 태재 선생이라 불리는 유방선(柳方善)은 쓴웃음을 지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댁의 서랑(壻郞)께서 학덕(學德)이 얼마나 높으시기에 불초(不肖) 소인을 글선생으로 부리려고 하신답니까.” 당주는 이 말을 듣고 입안이 텁텁함을 느낀 까닭인지 찻물을 머금은 뒤 마신다. 찻잔은 어느덧 식어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아선 누추하고 머저리 같아 보이지만 여러 날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눈은 혜안(慧安)이 대해(大海)처럼 깊고, 총명하며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더이다. 그리고 사서삼경을 두루 통달하였더이다.” “그래요?” 의외라는 듯 태재 선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통 또래들과는 다르게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것에 놀라는 시늉을 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하는 심보로. 그런데 당주 민대생의 밑에서 공부하고서도 특출(特出)하다는 것이 내심 선생으로 하여금 일말의 호기심을 북돋게 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토록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한단 말인가.’ 태재 선생, 아니 유방선이 누구던가. 여말(麗末)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보아온 사람이었다. 성년이 된 이후에 태종대왕(太宗大王)의 근신(近臣)인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학문을 갈고 닦았으며 나라의 유신(儒臣)으로서 온 나라에 유풍(儒風)을 널리 퍼뜨리는데 일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성은에 힘입어 조정에 출사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지우(知友)로 삼은 민대생에게 큰 보람이라면 보람이랄까. ‘흠, 민 대감이 예사로 말한 건 아니니 속은 셈 치고 만나보지 뭐.’ 한 번 속은 셈 치고 깊은 밤이고 하여, 마지못해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며 민대생의 청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구두(口頭)로 약속한 걸 받아들인 모양인지 태재 선생은 대낮에 민의 집에 찾아들었다. 대관절 어떤 사람이기에 민대생의 재주를 넘는단 말인가 하며 걱정 반 설렘 반으로 기척을 내본다. “이리 오너라―” 민의 하인놈이 굽신거리며 문을 열고 맞이한다. “대감께서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마당 앞까지 안내하던 하인 놈은 이윽고 당주에게 달려가 이르러 갔다. 그랬는데 당주가 버선발로 뛰어오듯 하는 게 아닌가. 얼마나 고대(苦待)했으면. “아이고, 대감께서 납셨구려. 허허허……” 너털웃음으로 민이 맞이하더니 옷매무새를 고치고 나서 태재 선생을 정중하게 모신다. 이윽고 태재 선생을 명회의 거처방 앞에까지 모시더니 “한 서방.” 헛기침하며 기척을 낸다. “자네 스승님을 모셔왔네.” 하더니 갑자기 벌컥 문을 여는 게 아닌가. 그러고서 손으로 사위의 방을 가리키며 “어서 드시지요.” 하였다. 민의 체면을 헤아리며 엉거주춤 머뭇거리지 않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놀라는 게 아닌가. 보아하니 왜소하기는 하나 꼽추인 듯 난쟁이인 듯 같기도 하고, 얼굴은 마치 제 나이보다 더 먹은 거 같은 인상을 풍기는데 눈은 마치 흑진주처럼 빛났으며 옷매무새는 장인의 각별한 배려에 한몫을 낸 덕분인지 깨끗한 무명옷으로 정중하게 맞이하는 게 아닌가. 갑작스러운 듯 어안이 벙벙함을 느낀다. ‘허허, 저런 행색으로 어떻게 사서삼경을 통달하였을꼬.’ 이에 민대생은 “자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제 몸 피하듯 자리를 비켜준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명회는 몸가짐을 바로 하더니 제 보료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그 옆자리에 선 채 새로 오신 스승을 맞는데 보통 예의범절이 아님을 느꼈다. ‘아니 어느 명문가의 자손이기에 이렇듯 생겼단 말인가.’ 마지 못해 태재 선생이 명회의 권유에 따라, 보료 위에 앉는다. 앉으면서도 명회를 한참동안이나 쳐다본다. 이를 본 명회도 같이 자리에 앉는다. 서안(書案)을 가운데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본다. 명회는 새 스승을 바로 보지 않고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렇게 침묵을 일관하다 적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한 태재 선생이 명회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자네 양친(兩親)께서는 살아 계시는가.” 그러자 명회는 주저함 없이 “조실부모(早失父母)하였습니다.” 했다. “그러면?” “작은 할아버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형제는.” “제 밑으로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 장인께 말씀을 듣자니까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고 들었네. 그러한가?” “네.” “그렇다면 누구한테 글을 배웠는지 알 수 있는가?” “작은 할아버님께 글을 배웠습죠.” “작은 할아버님이라면 함자(銜字)가.” “상(尙) 자, 덕(德) 자 어르신입죠.” “그렇다면 자네 할아버님의 함자는.” “상(尙) 자, 질(質) 자입니다.” 명회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이 휘둥그레 떠지고 입이 벌어지며 기함(氣陷)하듯 놀라워하는 게 아닌가. 한상질은 새 나라의 국호를 대국으로부터 받아오는 중임을 맡은 대신이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은 까닭인지 임금님으로부터 문열공(文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분의 손자가 자신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니. 게다가 몸이 허약하다 못해 왜소해 보이는 저 선비가 문열공의 손자라니. 놀라움을 넘어 경이(驚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명회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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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