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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13편
개들이 짖어대는 어두운 밤. 가로등의 불빛을 등에 맞고 원조, 아니 경빈이 집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연심의 어머니인 수동댁이다. 뜻밖의 손님이 왔던지라 경빈 모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경빈 어머니는 안방으로 그를 들인 뒤에 어인 일로 찾아왔느냐고 물으니 수동댁은 무릎을 꿇더니, “저를 식모(食母)로 써주십사 찾아왔습니다.” 몸뻬 바지에 허름한 싸구려 옷을 차려입은 수동댁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곳 초량동 언덕에 자리한 판잣집들 가운데서 경빈이네 집에서만큼 형편이 좋은 곳도 없었다. 그런 터에 수동댁이 손수 집에 식모로 써달라고 조르는 판국이니 경빈네로서는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신히 판잣집 한 채를 얻었는데 이 집 주인인 희진의 간섭이 여간 심하지 않은 지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눈칫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거기다 한술 더 떠 남편과 근래에 와서 마찰이 심하니 수동댁으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던 거다. 이에 참다못해 항의를 할라치면 네까짓 게 뭔데 눈을 치뜨며 덤비려 드느냐며 삿대질을 해대는 판국이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수동댁은 문전박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이다. “하기야 수동댁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전쟁 통에 남의 눈치를 살펴가며 식모를 섣불리 쓸라치면 너도나도 나설까 그게 염려스럽구먼.” 하지만 수동댁으로서는 궁여지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현실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흐느끼는 수동댁을 애써 위로해주던 경빈 어머니는 “그나저나 연심이 나이가 올해로 몇이오?” 물었다. “네?” “연심이 나이가.” “내년이면 열아홉입지요.” “열아홉이오?” “네.” “그렇구먼.” 수동댁의 대답을 듣고 나서 경빈 어머니는 끄덕이며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연심의 혼처를 따로 마련해볼까?’ 궁리에 궁리를 더 하는 것이다. 연심은 지금 부둣가에서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으나 몇몇 단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미국 군인들과도 상대하기도 하여 미국에 호의적이기는 했다. 그 점을 알았던지 희진이가 언니 옥선을 꼬드겨 하루 빨리 내쫓아내야겠다는 궁리를 하여 앙갚음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인심이 고약해도 이리 고약할 수가 있느냐며 경빈 어머니는 안타까움에 혀를 끌끌 차댔다. “그래도 연심이 부둣가에 있는 가게서 일하고 있다니 효성이 갸륵하고 또 연심 어머니의 처지도 알기는 압니다만 그렇다고 무턱대어 수동댁 말마따나 식모로 쓰기는 무엇하고 하니 좀 더 시일을 두고 기다려보세요. 내 영감에게 잘 말 할 테니. 기회를 주시오.” 흐느끼는 수동댁을 간신히 진정시킨 다음 배웅한 뒤에 안방으로 돌아온 경빈 어머니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동댁이 물러가고 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채 중절모자를 눌러쓴 채 외출하던 이석형이 집으로 들어섰다. 경빈 어머니 임씨가 영감의 귀가에 마중 나오며 조심스레 물었다. “영감 방금 전에 수동댁이 다녀갔어요.” “누구?” 의외라는 듯 이석형이 부인을 돌아보았다. “수동댁이요.” “아니 그이가 왜 찾아왔소?” “저, 그게.” 부인이 머뭇거리는 태도에 석형은 “그이 성미로 봐서는 결코 무슨 허튼소리를 했을 리는 없을 텐데.” 하며 안심하라는 듯 대답을 재촉하였다. “수동댁이 우리 집에 식모로 살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합디다.” 그제야 수동댁의 의중을 파악한 이석형이 “일단 잘 알았소.”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내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영감의 생각에 따르겠어요.” 부인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석형이 “안심하고 쉬시구려.” 하며 다정스레 웃어 보이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연심의 출근길을 마중나간 수동댁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가희진이 그녀의 거동을 일일이 염탐하는 형사처럼 째려보는 것이었다. 그런 가희진의 태도도 태도지만 괘씸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이윽고 제 거처방에 꼬리 감추듯 수동댁이 들어가자 희진은 제 품에서 미군으로부터 받은 껌을 꺼내어 씹어대었다. 입안에서는 과일향이 물씬 풍겨와 심산한 마음을 향긋하게 달래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회색빛 제복을 차려입은 우체부가 갑자기 집주인을 찾는 것이 아닌가. “가옥선 씨 댁 맞나요?” “네, 제 언닌데 어쩐 일이시죠?” 껌을 씹으며 우체부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우체부의 표정이 어두웠다. “이 집 주소로 전사통지서가.” 전사통지서라는 말에 희진은 얼떨떨하였다. 자신의 집에 군인이라도 있었냐는 듯 새삼스레 모르는 체 했다. “전사통지서라니요? 대체 누가?” “설덕수라는 사람이.” 실명(實名)이 밝혀지고 나자 희진의 얼굴에서는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 그렇다면.” “○○강 전투에서 그만 전사하셨다는 내용이오.” 엄숙하게 대답하는 우체부가 그녀의 손에 전사통지서를 움켜쥐어 주고 황급히 사라지고 말았다. 희진은 그 편지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알알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희진은 황급히 밖을 뛰쳐나간다. 뛰쳐나간 그녀의 발길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언니 옥선이 운영하는 다방이었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이 희진을 반갑게 인사함에도 아랑곳 않고 언니에게 직접 찾아간다. 언니 옥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설거지를 한 그릇들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때 “언니!” 하며 부르는 희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고 “여긴 어쩐 일이니?” 묻자 희진이 울먹이며 “아버지께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어쩐 일로.” 하며 옥선이 물어보자 “아버지가 전사하셨다고 편지가.” 희진이 대답하자 옥선은 움켜쥔 그릇을 그만 깨뜨리고 말았다. 갑작스레 들은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듣자 그만 그릇을 깨뜨렸다. 이들 자매에게는 침묵만이 흘러내렸다. 전축기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간간이 들려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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