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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_01 (제39화)
갑작스런 일에 병기는 깊은 밤인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람의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 이치라지만 이렇듯 자신이 조대비로부터 간담이 서늘한 경험을 처음 겪은 뒤로 줄곧 안동김씨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다 저렇게 자신 있는 어투로 저를 제압하는지 종내 알 길이 없으니 캄캄하기 이를 데 없다. 좌근의 교활한 재주는 어느덧 녹슬어버린 지 오래고,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방백수령들은 어느덧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백낙신이 이후로 진주의 민란이 발발하자 한낱 무지하기 그지없게 여겼던 백성들의 모양을 과소평가한 채 안일하게 살아온 조정 관리들에게 큰 타격을 가져왔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그러나 상감은 이를 만류하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좌근의 고집이 워낙 완고한지라 마지못해 승낙했다. 상감은 장인 김문근(金汶根)이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음을 아랫것에게 전해 들었다. 그동안 상감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갔다. 안동김씨의 손에 놀아나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도 서러운데 장악원에 기생들을 데려다가 향락에만 치중하니 왕비의 근심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 궁인들도 이를 근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이런 상감의 행태를 반겨하는 이도 있었다. 바로 이하응이었다. 이하응은 암암리에 대왕대비 조씨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는 평상(平常)에는 난을 치는 걸로 소일을 삼고 때때로 바깥바람을 쐬며 사대부집이라는 사대부집에 벌집 쑤시듯 찾아가 누더기 옷을 입은 채로 구걸을 하며 연명하고 살았다. 초반에 근심으로 한동안을 살았던 군부인 민씨는 덤덤하게 지아비를 마중 나가기도 했다. 세자도 없고 그렇다고 서출로 나올 법한 왕자도 있는 것도 아니니 상감의 처지가 매우 딱하다 못해 측은하기 이를 데 없다. 대왕대비의 진언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하응이다. “대감, 몸조심 하시어요.” 부인의 염려가 담긴 말로 전송하는 것을 하응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밤이면 밤마다 하응은 곤히 잠든 처자식들을 깨워서 구걸하여 얻어온 음식을 바가지에 담아가지고 와서 직접 먹이기도 하며 지냈다. 투정을 부릴 법한 어린 아들이 군소리 않고 목구멍을 넣어대며 먹으니 흐뭇하게 쳐다보는 하응의 얼굴에선 기쁨의 눈물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상감의 뒤를 이어 즉위할 아들을 보는 하응의 눈에선 이제 뜨거운 눈물이 내린다. 대망의 1864년이라는 해가 밝아왔다! 상감의 병세는 차츰 악화일로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의를 불러다가 진맥해보았으나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왕실과 조정의 근심이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대비는 달랐다. 자신에게는 명분이 필요했다. 상감의 직계는 죽은 명경대왕대비, 아니 순원왕후의 직계인데 반해, 자신에게는 아무런 핏줄이 없다. 지아비와 자식을 모두 잃은 청승스런 자신의 삶이 서럽건만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자식이 없음에 속상해한 조대비였다. 그런 것을 자신의 비위에 맞추고자 하는 이하응의 설득에 넘어가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을 바치고자 함을 알고 이를 승낙했다. 그런 것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설레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저주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상감, 상감은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권좌에서 벗어던지실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래요, 상감.’ 야심한 밤중에 대왕대비는 침전에 눕기도 전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선 서슬 퍼런 웃음이 파문을 일으키니 그 섬뜩함은 타의를 추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음날 오후 상감의 병상을 찾아간 대왕대비. 대왕대비는 상감의 병상 맞은편에 앉아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상감의 머리맡으로 기웃거리더니, 그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하였다. “상감, 상감은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짐을 훌훌 털어버리시고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놀아난 왕실의 업보를 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주상. 이제 그 죄업을 달게 받으셔야 합니다.” 저주가 담긴 말을 들었던 모양인지 상감의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그러더니, “마, 마마. 사,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대왕대비의 손을 부여잡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 않고 대비는 냉정히 그 손을 뿌리쳤다. 소리치는 상감을 모르는 척 하던 대비였다. 대비의 손에 뿌리쳐진 상감의 양손은 허공을 향하여 손사래를 하더니 이내 상감이 혼절하여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를 본 내관이 서둘러 어의를 불렀다. 어의가 찾아왔다. 그러나 손으로 진맥을 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마, 전하께서 소생하시기는 매우 어렵사옵니다.” “그게 참말이오?” 대왕대비의 호들갑스런 대답에 어의는 몸 둘 바를 모른다. “물러가시오.” 점잔을 빼는 대왕대비를 뒤로하고 나가는 어의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까딱하다가는 안동김씨의 손에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왕실의 안팎에 안동김씨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대왕대비는 김씨의 힘이 이렇듯 크고 막강하였단 말인가. 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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