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조선왕조

ㆍ작성자	정병욱
ㆍ작성일	개국634(2025)년 12월 17일 (수) 03:43 [인시(寅時):오경(五更)]
ㆍ문서분류	문학
ㆍ설명	진정한 폭군
ㆍ저작	국민일간사

ㆍ추천: 0 ㆍ열람: 30

보덕소설집(寶德小說輯) 권7

진정(眞正)한 폭군(暴君)

안인대왕이 옥좌(玉座)에 오른 지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선덕왕후로 봉해진 제씨(제인의 딸)에게 소생을 남겨놓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내관은 물론, 궁녀들도 이를 모르는데 세간에서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에 이조판서 옥양봉이 이를 문제 삼았으나 왕은 극구 입을 다물었다. 옥양봉은 참고로 옥사홍의 장남이었다. 옥사홍은 한직(閑職)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조정에 나서지 않았다. 문혜태후에게 찾아가 이를 물어보았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하다 못해 야심한 밤에 이조참판에 있는 옥길의 집에 찾아갔다. 태상왕이 이미 하세하였다지만 옥씨의 세도는 여전했다. 조정의 인사권은 모두 옥씨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옥길은 옥사홍의 차남이면서 옥양봉의 동생이며 문혜태후의 아우다. 옥양봉과 옥길은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간이었다. 아버지의 음덕을 받고 조정에 나왔다. 그런 그들은 선왕이 일구어놓은 왕손들이 언제 어떻게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을 하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예의주시를 하고 있었다. 선덕왕후의 친정은 자신들처럼 권세를 부릴만한 일가붙이도 없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이를 염두에 두고 지금의 왕후를 간택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금에 와서도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있으니 왕실은 물론이고 조정에서도 큰 우환거리가 되어 있었다.

선진과 후진의 당쟁은 후진의 승리로 가다듬어지고 선진의 원로들은 없어지고 말았다. 부원군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봉부가 선진의 우두머리로 남았으나, 그 세력은 유명무실하였다. 태후인 누이를 둔 이들 옥씨 형제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당(黨)을 만들었다. 이들이 당을 만듦으로써 이들에게 아부를 떠는 이들이 속속 찾아들어 그 당에 들었다.

재위 11년 태황태후인 인수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실권은 문혜태후의 손으로 넘어왔다. 재위 12년 문혜태후가 왕에게 직접 후궁을 둘 것을 주청하였으나 왕이 한사코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재위 14년에 왕후로부터 황자를 얻었다. 그러나 황자를 얻은 지 이태가 되어서 왕은 세상을 떠났다. 왕의 붕어 소식을 들은 태후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여 자진(自盡)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켜보던 궁녀 하나가 이를 말리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왕은 하세하였으나 후사를 이을 황자를 태자로 옹립하지도 못하고 말았으니. 더구나 태황태후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드러누웠으니 어느 누구와 의논을 해야 할지 대신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다. 이를 보다 못한 이조참의 신구가 차후 후사를 누구로 할지 의논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하루 빨리 왕을 옹립해야 하는데 누구로 세울까요.”

“황자가 있기는 있으나 나이는 어리고.”

저마다 신하들은 의견이 오고갔으나 자기네 의견만 오고갈 뿐. 왕좌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이조정랑 신봉, 역시 이조정랑 신약은 서둘러 태후전에 갔으나 태후는 병들어 누운 상태였고 옥씨 형제들이 병상을 지킬 뿐이었다.

“경들이 오셨구려.”

신음에 찌든 태후의 음성이 들렸다. 두 사람을 맞이한 태후는 말을 이어갔다.

“경들은 조정에 가서 전하시오. 나는 보다시피 병이 들어 정무를 돌볼 여력이 없으니 이조판서와 이조참판과 의논하여 정무를 일임하도록 하라고 전하시오.”

그러자

“마마!”

옥씨 형제들의 눈이 흔들렸다. 부복(俯伏)하여 듣던 신씨 형제들도 어이된 연유인지 모른 채 당황하였다.

“태, 태후마마!”

옥씨 형제들은 이윽고 태후의 의중을 헤아린 뒤 통곡하고 말았다. 태자가 되어보지 못한 황자는 후견인으로 하여금 돌보도록 했는데 신구로 후견인을 삼았다. 이는 태후의 내지(內旨)였다. 이렇게 옥양봉과 옥길 두 형제는 아버지 옥사홍의 뒤를 이어 다시금 권력의 정점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뒤이어 태후는 병환을 딛고 일어나 후덕궁주의 아들이며 선왕의 이복아우인 위경대군으로 하여금 대통(大統)을 잇게 하여 왕위에 올리니 바로 위경제였다. 선왕인 안인대왕은 시호를 문조효안대왕(文祖孝安大王)이라 하였다. 위경제가 왕위에 올라감에 따라 문혜왕후에게 태황태후의 칭호를 올리고 그 위차(位次)에 따라 후덕궁주를 왕후의 예로 하여 후덕황태후에 봉하였다. 선왕의 왕후인 선덕왕후는 태후에 봉하였다.

그러나 재위 2년에 접어들어 갑작스레 왕이 병에 걸려 몸져눕자, 태황태후의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왕후의 간택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경황이 없기도 했다. 그 와중에 후사를 다시 정해야 했다. 옥씨 형제들은 다급한 나머지 신구 신봉 신약 세 형제로 하여금 명하였다.

“당장 후사가 급하니 누구로 하여금 왕위에 옹립할 것인지 조정의 대신들과 의논하시도록 하오.”

연이은 왕실의 우환으로 세 명의 태후들은 왕의 건강을 빌기 위해 인근 절에 찾아가 불공을 드렸으나 하늘도 무심한지 일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이은 왕들의 죽음. 이들 죽음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크게 동요하고 말았다. 왕의 시호를 장종(莊宗)이라 하였다. 신하들은 슬플 애(哀) 자와 마루 종(宗)을 합하여 ‘애종’으로 하고자 했으나 보다 엄숙하게 조용히 지내고자 하는 태황태후의 내지에 의해 시호를 장종으로 삼은 것이다.

안인대왕과 위경제의 연이은 하세 뒤에 다음 후사를 어떻게 이어야 할지 태황태후는 속을 태워야만 했다. 태후는 생각 끝에 연덕왕후를 불러들였다. 연덕왕후는 태황태후의 부르심을 받들어 모습을 드러냈다. 태황태후의 눈빛은 예전과는 달랐다. 지위는 모두 왕후였지만 가장 먼저 태후의 자리에 올랐기에 위차는 자신이 위였지만 왕들을 연이어 잃은 슬픔을 털을 새도 없이 보위를, 아니 종사를 보존해야하겠기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나마 살아있는 왕손들 가운데 유일하게 원세대군이 왕재(王才)라는 소문이 있었기에 이를 눈여겨둔 태황태후는 연덕왕후에게 원세대군을 왕위에 옹립해야 함을 피력했다. 그러자 연덕왕후는 놀라 극구 사양했지만 태황태후의 완강한 고집에 못 이겨 받아들였다. 하여 위경제의 뒤를 이어 원세대군은 보위에 올랐다. 이 왕이 바로 원세대왕이시다. 왕위에 오른 뒤 원세대왕은 태황태후에 있는 문혜태후가 직접 섭정(攝政)하였다. 문혜태후가 섭정을 맡는 데에 있어 옥씨 형제들은 한몫을 하였다.

즉위년 11월에 초포다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완화왕후라 봉하였다. 이후 장종의 생모 후덕궁주를 후덕태후라 하고, 왕의 생모 연덕왕후를 보덕태후라 봉하여 위차를 문혜태후와 동등하게 태황태후로 봉하였다. 그리고 선왕이 왕비와 자식을 두지 않았으니 안인대왕의 비를 황태후라 부르도록 했다.

재위 1년 고조선의 제4대왕이 승하하였다. 이에 태자 주우양이 왕위에 오르자 왕은 옥길을 수반으로 한 사절(使節)을 왕경(王京)에 보내며 왕이 즉위한 것을 경축하였다.

재위 2년 인사가 단행되었다. 권봉달의 아들인 권선(權善)을 이조정랑에 임명하고 유월야의 아들 유구신이 이조좌랑에, 양광웅의 아들인 양송평(梁頌平)을 이조좌랑에, 임희량의 아들 임고양(任古陽)을 이조좌랑에 임명하였다. 이조의 인사들이 다수 임명된 이유는 옥씨의 권세가 그만큼 막강함을 의미하며 이조를 기반으로 태황태후가 정치 전면에 나서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재위 3년 호조(戶曹)라는 기구를 신설하게 했다. 그 수장인 호조판서(戶曹判書)를 남궁병의 아들 남궁의(南宮義)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조연의 아들 조고형(趙固馨)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옥양봉의 아들 옥송호에게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임명했다. 일부 대신들이 반발하여 옥씨의 세도에 힘입어 벼슬을 요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로 물의를 빚었다. 태황태후의 서슬 퍼런 세도가 기세등등하니만큼 입이 있어도 바른 소리를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었다. 호조를 설치함으로써 왕실과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기능을 일임하게 되었다. 그동안에 중추부에서 관리하였기에 업무를 편안히 하였다.

재위 4년 병조(兵曹)라는 기구를 신설하게 했다. 그 수장인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구령의 아들 구덕수(具德壽)에게 맡겼다. 병조를 설치함으로써 그 동안에 해이해진 군대의 기강(紀綱)을 바로 잡고자 한 왕의 의지가 돋보였다. 이 역시 중추부에서 관리하였기에 업무를 편안히 하고자 하였다. 안백호의 아들 안임(安任)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초포다의 아들 초도연(楚道然)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장윤의 아들 장문(張文)을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임명하였다.

재위 5년 왕의 군대인 오위(五衛)를 오위도총부의 통솔 하에 다스리게 하고 오위도총부를 병조에서 관리하도록 일임했다. 뒤이어 오위의 군대를 오군(五軍)으로 나누어 개편하니 오군의 수장으로 임명된 이들은 다음과 같다. 의흥위장(義興衛將)에 고남노의 아들인 고만술(高萬述)을, 용양위장(龍衛將)에 온제의 아들인 온시후(溫時厚)를, 호분위장(虎賁衛將)에 이만덕의 아들인 이유를, 충좌위장(忠佐衛將)에 이영덕의 아들인 이각을, 충무위장(忠武衛將)에 이각의 아들인 이만원이 임명되었다. 그동안 역대 왕들이 저마다 군율이 해이함을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항상 나라 안팎의 우환이 끊이지 않았음을 근심하였는데 이를 내놓는 신하들이 없었다. 하여 왕이 신하들에게 이를 질타하니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하여 왕은 기존에 있던 오위장(五衛將)을 군대 기강의 해이(解弛)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명하였다.

재위 6년 여주부원군 민봉부가 병을 이유로 벼슬에 가지 못한다고 하자 왕은 허락하였다. 이에 더 이상 조정에 나와 일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게 되었다. 이윽고 강원도 정선(旌善)에 정착하여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길렀다.

재위 7년 동방섭을 영의정에, 동방존을 좌의정에, 동방자를 우의정에, 궁호를 좌찬성에, 강찬을 우찬성에, 향길을 좌참찬에, 천무를 우참찬에 명하였다.

재위 10년 주현우를 의정부 검상, 노조성을 의정부사인, 설정을 의정부사록, 김동탁을 영중추부사, 정석을 판중추부사, 제인을 지중추부사, 홍가를 동지중추부사, 염건식을 첨지중추부사, 현사를 중추부경력, 여범을 중추부도사, 최민을 오위도총부 도총관, 서상범을 오위도총부 부총관, 송찬수, 백무현, 대현, 하정을 오위도총부 경력에 명하였다. 궁상규 궁영규 형제, 궁태화, 향랑이 오위도총부 도사에 임명됐다.

재위 11년 안일을 의정부 사인, 도상진을 의정부사록, 방수호를 판중추부사, 오세안, 궁보사, 백덕을, 봉길조, 초말을 모두 지중추부사에 명했다. 그리고 초반, 황보진, 초자, 초비, 초재, 초마에게 모두 동지중추부사에. 초하에게 지중추부사에, 초조에게 판중추부사에 명했다.

재위 12년 초방에게 동지중추부사를, 궁안을 첨지중추부사, 궁배와 박영, 궁만호, 옥사홍, 호선을 첨지중추부사에 명했다. 이 모두가 원세대왕의 친정(親政)을 돕고자 하는 형수 선덕황태후의 도움이 컸다. 한때 옥씨가 세도를 부렸던 것이 있었으나 백성의 재산을 탐하여 마치 제 재산처럼 썼고 이를 보다 못해 여주부원군 민봉부가 직언을 하였다. 그러나 문혜태후의 권세에 안주하여 옥씨 일가에서는 왕에게 겁박하다시피 받아들이지 않게 했다. 때문에 민봉부가 이에 환멸을 느끼어 병을 빙자해 사직했다.

옥씨네들이 제 누이의 권세를 탐닉하며 보냈다.

재위 13년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곧 다음날에서야 정체가 밝혀졌다. 그 사건을 주도한 것은 놀랍게도 궁태화였고, 살인을 당했던 사람은 상호군이었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자 궁태화는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에서 머물기도 했으나 조정에서 옥씨의 입김에 의해 쓰인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상소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아직도 궁씨 일가가 횡포를 부려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게 하지 않게 해놓고 일부러 방해공작을 벌이며 오위도총부 군사들을 이간질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당사자인 궁태화가 옥씨네를 등에 업은 채 상전인 자신을 존대하지 않은 상호군의 행동에 대해 분노를 느낀지라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상호군을 죽인 것이다. 이에 왕은 노발대발하였다. 물론 궁태화의 행동에 대한 안타까움도 묻어나왔다.

“옥씨네 세도가 그토록 드높은 줄 몰랐소.”

하더니 옥씨 형제의 부친 옥사홍에게 질책하듯 삿대질하며,

“그대가 과연 궁 정승의 후예에 못지않구려. 과연!”

비아냥거렸다. 결국 사홍은 자식들의 허물로 인해 있는 모욕, 없는 모욕을 당하고야 말았다.

재위 14년 정석의 아들 정위사를 천거하여 오위장(五衛將)에 명했다. 유월야의 아들 유구신에게 상호군(上護軍)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초야에 있는 민봉부의 아들 민번주에게 대호군(大護軍)을, 천무의 아들 천위사(千爲思)를 호군(護軍)에, 노조성의 아들 노주앙을 부호군(副護軍)에, 설정의 아들 설국의를 사직(司直)에 명하였다.

조정에 새로운 신하들을 등용하자 나라는 어느덧 다시 부강해졌다. 이에 문혜태황태후는 한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섭정에서 물러나 왕에게 친정하도록 권했으나 일부 신하들이 반대했다. 하지만 태황태후의 결단이 있음을 알고 왕의 친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듬해, 재위 15년 정월에 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왕이 제씨 집안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옥씨 일가가 왕비 집안임을 빙자함을 들어 옥씨와 그 세력의 재산들을 모두 회수하고 이에 새로이 세력을 구축해나갔다. 빌붙거나 아부를 부린 오위의 관리들을 모두 파직시키고 재산을 몰수하여 근신하도록 명했다. 이렇게 옥씨의 세도는 막을 내렸다. 이월에 후덕태후가 태황태후에 봉해졌다. 오월에 호덕대군의 양자인 기선대군이 배필을 맞이하였는데, 배필은 초야에 있는 민봉부의 딸이다. 이에 황태후가 자신의 소생을 기선대군의 양자로 내주기를 청하여 왕이 흔쾌히 받아들이고 기선대군 내외의 승낙을 받아놓고 황태후의 소생을 선명대군(宣明大君)으로 봉하여 양자로 보냈다.

재위 16년 여주부원군 민봉부가 세상을 떠났다. 장사를 후히 치르고 효문공(孝文公)에 봉해졌다.

재위 17년 황자가 왕비의 몸에서 태어났다. 이에 왕비가 새로 후궁을 간택하기를 권했으나 왕이 거절했다.

재위 18년 유월에 설정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했다. 왕은 그녀에게 수비(粹妃)로 봉하였다.

같은 해 구월. 옥사홍이 조정에 나오지 않은 날이 잦았다. 이때 옥사홍의 얼굴은 근래에 들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어졌다. 왕이 병으로 조정에 나오지 않은 것을 근심하여 어의를 거느리고 그의 집에 찾아가 거둥하였다. 그러나 어의는 원인을 알지 못하는 병이라고 하여 치료하기를 주저하니 왕의 근심이 날로 더해갔다. 한때나마 옥길과 양봉 형제가 아버지의 권세를 가지고 이용하기를 즐기니 이에 낙심을 한 탓이라고 수군대지 않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이에 옥사홍이 왕에게 말했다.

“우리 두 아들의 과오(過誤)를 뉘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

왕은 묵묵히 들을 뿐이다.

“신이 엎드려 빌건대, 마마, 부디 제 아들들이 잘잘못을 뉘우쳐 나라의 동량이 될 수 있도록 힘써 주시옵소서. 소인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이 드옵니다.”

옥사홍의 육신도 늙을 대로 늙었기도 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권세를 금상의 손으로 거두어야 함을 피력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왕은 그제야 사홍의 병이 든 원인을 알게 되었다. 왕은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대궐로 돌아온 뒤 이튿날, 옥사홍이 자식들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고 난 다음날 죽음을 맞이했다. 만 백성들이 일제히 조문하고자 그의 집을 수시로 찾아들었다. 옥사홍이 죽은 뒤 왕이 친히 빈소에 거둥하였다. 왕의 엄명으로 근신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옥양봉 옥길 두 형제에게 상주로서 대신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러자 두 형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더욱 근신할 것을 약속하며 오열하였다.

재위 20년 오월 한덕궁이 살기가 비좁다는 태황태후의 뜻에 따라 민가 오십여 채를 사들여 헐어버린 뒤 규모를 넓히도록 명했다. 유월에 동방봉우의 아들 동완의 딸을 후궁으로 삼았다. 이에 일부 신하들은 동방씨가 삼정승을 두루 재임하고 있음을 알고 만에 하나 외척의 발호가 일어날까 우려하자 후덕태후가 신하들에게 염려하지 말 것을 내지로 표했다. 구월 호덕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이를 애도하였다. 시월 수비에게서 공주를 얻었다.

재위 21년 삼월 영의정 동방섭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애도를 표하며 장사를 후히 치를 것을 당부했다. 오월에는 혜비가 왕자를 낳았다. 보덕태황태후가 왕비와 더불어 두 비에게 수고로움을 치하하며 왕실의 홍복(洪福)이 있음을 치하하며 금은보화를 약소하게나마 왕명으로 하사하도록 했다. 왕후의 소생인 왕자에게 추양(秋陽)이라는 이름을, 수비의 소생인 공주에게 하명(河明)이라는 이름을, 혜비의 소생인 왕자에게 육온(毓溫)이라는 이름을 각각 하사했다. 그러나 태황태후가 이름이 범상하지 않다며 새로이 이름을 짓도록 했으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이름을 다시 고쳐 독수(禿樹)라 하였다. 구월에는 왕족인 선명대군에게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임명했다. 이는 호덕대군 집의 형편이 어려웠던 데다 왕실의 재정이 왕족에게 재산을 줄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지난날 옥씨가 왕실의 외척으로 공공연하게 전횡을 일삼은 까닭도 한몫을 했다. 십일월에는 경기도 출신의 배국(裵國)이라는 이가 급제하였다. 그는 평민 출신으로 제인, 방수호 등과 더불어 왕의 대들보로서 일할 수 있는 영광을 안았다. 이에 왕은 그를 겸사복장(兼司僕將)에 임명하여 내금위장과 더불어 왕과 왕실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유력 가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과거에 급제한 전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평민 출신들은 왕권 강화가 이루어진 대로 급제하였고, 구세력과 견줄 수 있는 대응세력으로 이용하고자 하였을 뿐. 과거가 열린다 해서 모든 백성에게 벼슬을 주지는 않았다. 십일월에 충청도에 감영이 설치되었다. 경상도 전례에 따라 도사를 파견하여 도정을 살피게 했다.

재위 22년 정월 좌의정 동방존이, 사월에 우의정 동방자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삼의정이 공석인 것을 알고 왕이 세 사람을 임명했다. 모두 초씨 집안사람들이었다. 초반을 영의정에, 초자를 좌의정에, 초비를 우의정에 임명했다. 이들이 되자 일부 신하들이 외척으로서 다시 발호할까 염려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왕이 이에 대노하여 이번 인사에 대해 운운하는 일이 있는 즉시 죄준다고 했다. 이에 신하들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구월에 인사를 단행했다. 송찬수를 한성부판윤에, 백무현을 한성부좌윤에, 대현을 한성부우윤에, 하정을 한성부서윤에, 궁상규를 한성부판관에, 궁영규를 한성부주부에, 그리고 궁태화를 한성부참군에 명했다.

십일월에도 다시 인사를 단행해 안일을 개성부유수에, 도상진을 개성부경력에, 방수호를 개성부도사에, 오세안을 개성부교사에 명했다. 십이월에 초반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를, 초자에게 보국숭록대부를, 그리고 초비에게 숭록대부(崇祿大夫)에 봉하였다.

재위 23년 정월. 왕후가 왕자를 낳았다. 이름을 승강(承康)이라 하였다. 신하들이 왕에게 태자를 옹립할 것을 청하였으나 아이들이 나이가 어림을 이유로 논하지 말 것을 명했다. 오월에 치른 과거에서 두 명의 급제자가 나타났는데 하나는 황국(黃國)이라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은 편선(片禪)이라는 이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평민 출신으로서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하고자 하는 왕의 의지에 따라 뽑힌 사람들이다. 이들 중 황국은 보통의 관리들과는 다르게 본래부터 문무의 서적을 탐독하여 지식이 깊고 사리에 밝아 일함에 있어 두루 능하기로 소문난 이였다. 더욱이 그는 죽은 민봉부의 제자이기도 했다. 팔월에 수비가 공주를 낳았다. 공주의 이름을 천학(天鶴)이라 하였다.

구월에 궁보사와 백덕을로 하여금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들은 세 달 동안 사신으로 가면서 체험한 조선의 문물과 더불어 서이의 문물을 두루 받아들였다. 세 달 뒤에 귀국한 이후 백덕을은 벼슬을 사임하여 잠시 낙향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백덕을은 낙향한 뒤 경기도 적성에 정착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 그의 학문은 드높기 그지없었다. 백덕을은 그동안 사신단이 되어 조선으로부터 손수 가지고 온 서적들은 그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만큼 제자들에게 새로운 물결을 북돋아줌으로써 나라에 큰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재위 24년 정월에 왕이 백덕을에게 적성군수에 명하자 백덕을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백덕을이 동방봉우에게 이를 맡기도록 추천하며 말하길

“동방봉우는 혜비 마마의 부친이 되기는 하나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학식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한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 어려움이 있겠나이까.”

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동방봉우로 하여금 적성군수에 명하였다.

유월에 조선상(朝鮮相)이 주우양의 칙사로 찾아와서는,

“황해 바다를 거쳐 서천(舒川)에 주둔하고자 하는데 그 땅을 잠시 빌릴 수 있는가.”

하고 왕에게 의중을 물었다. 서천 일대는 그러잖아도 주나라의 침입이 잦았고, 게다가 주나라는 주나라대로 이웃나라인 은국(殷國)과의 갈등으로 인해 나라가 피폐해져 있었다. 이를 기화로 삼아 일부 주나라 백성들이 지금의 전라도(全羅道) 땅을 기점으로 서천 일대를 노략질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궁보사를 대표로 한 사신단을 통해 주우양으로 하여금 서천 일대의 도적들을 직접 치도록 할 것을 부탁하니 조선왕(朝鮮王) 주우양이 흔쾌히 받아들여 조선상에게 이를 물었던 것이다. 왕은

“조선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황해(黃海) 바닷길을 빌려드릴 것이니 그리 하시옵소서.”

하였다. 우의정이 이에 대해 반발을 하였으나 왕은 우의정에게 내치가 우선임을 피력하였고, 뒤이어 조선왕이 군사를 일부 빌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군대가 강하지 않음을 들며 정중히 거절하였다. 할 수 없이 조선상이 돌아가 이를 조선왕에게 고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십만 군사들을 이끌고 서천에 직접 주둔하여 노략질하는 주나라 군사들을 토벌하였다. 이에 주나라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지금의 옥구(沃溝)로 달아났다.

칠월에 궁보사를 부사직(副司直)에 명하고 이를 수반으로 한 군사 10만을 대동하여 왕이 함께 친정(親征)에 나섰다. 그러자 주우양이 기뻐하며 연합해 싸우니 옥구를 정벌하여 태수인 희(禧)를 죽였다. 옥구 싸움에서 패한 포로들을 모두 조선의 노비로 삼았다.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고 연합군은 임피(臨陂), 함열(咸悅), 전주(全州), 임실(任實) 일대를 모두 토벌하고 네 고을의 태수들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 모두 주 무왕(周武王)에게 전하니 주무왕이 대노하여 두 나라를 침략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왕이 하세하니 뒤이어 호왕이 즉위하였다.

호왕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주우양과 임금은 구월에 이르러 지금의 서천홍성(洪城)대전(大田)청주(淸州)공주(公州) 일대를 충청도 감영이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지금의 충청도 땅을 선사국에서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왕이 공공연히 침략을 선언한 만큼 조선과 선사 두 나라는 예의주시하며 행한 것이었다. 십일월에 호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목으로 지금의 순창(淳昌)에서 궐기(蹶起)하여 친히 나서서 오십만의 군사들을 거느리며 선사국의 변방을 치려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왕과 선사국왕이 연합한 군사들 팔십만으로 맞받아치며 싸웠다. 그러자 오십만의 군사였던 주나라의 군사가 결사적으로 저항하며 싸웠으나, 십만으로 줄어들고 수장급인 호왕이 사로잡혀 왔다. 이에 조선왕이 대노하여 선사국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호왕을 향해 꾸짖고는 참수형(斬首刑)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자 호왕이 부하 장수 다섯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월산(月山)에 나를 묻어주오.

그곳은 나의 유일한 피신처였소.

그동안 나를 보잘 것 없는,

나를 지켜주느라 고생이 많았소.”

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뒤이어 다섯 장수 중 한 사람은 조선왕의 명에 따라 목숨을 건져 주나라 땅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왕의 뒤를 따라 참수형에 처해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수는 주나라에 돌아가 왕의 죽음을 알리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이이가 성왕(成王)이다.

주나라의 항복을 받아 얻은 땅을 조선왕 주우양으로부터 받은 왕은 그 보답으로 쌀 십만 섬과 강원도에서 나는 귀한 산삼(山蔘) 열두 뿌리를 바쳤다. 이에 주우양이 매우 기뻐하며 조선에서 나는 황마(黃馬)를 암수 열 마리 씩을 사신을 통해 보내었다. 이후 나라에서는 직접 적성 근처에 목장(牧場)을 마련하여 황마 스무 마리를 키우도록 했다. 그러나 적성의 백성들이 목장에서 나는 소음으로 인한 항의가 빗발친다는 적성군수의 의견에 따라 한성부 밖 동쪽으로 조용한 곳을 찾아내 그곳에 다시 목장을 만들어 스무 마리를 다시 키우게 했다.

재위 25년 정월에 적성군수 동방봉우가 적성군 지역이 워낙에 넓어 다스리기 어려움을 토로하자 왕이 이를 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 한계에 통감(痛感)하며 적성군의 지역 일부를 잘라내어 별도로 감영을 만들어내고 지금의 고양(高陽)에 군수(郡守)를 두도록 했다. 이곳 고양의 군수를 봉길조가 맡도록 명했다. 유월에 백덕을을 사과(司果)에 명하였다. 칠월에 평민인 문길구(文吉具)가 수석으로 급제했다. 왕은 그에게 부사과(副司果)에 명했다. 문길구는 공교롭게도 백덕을의 문하생(門下生)으로써 스승으로부터 학덕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왕의 무한한 신임을 얻었다. 하여 곁에 있는 내관들은 대궐에서 청소를 하는 일에 한정하여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구월에 혜비에게서 왕자를 얻었다. 이름을 방정(芳定)이라 했다.

재위 26년 정월에 인사가 단행되었다. 먼저 황보진을 부장(部將)에 임명하고, 초재를 사정(司正), 초하에게 부사정(副司正), 초마에게 사맹(司猛), 초방에게 부사맹(副司猛), 초말을 사용(司勇), 초조에게 부사용(副司勇)에 명했다. 초봄에 보덕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초여름에 후덕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왕실의 웃어른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왕실은 큰 비통에 잠겼다.

오월 왕후가 왕자를 보았다. 왕후는 자신의 소생에 대한 안 좋은 꿈을 꾸었다면서 왕에게 일렀다. 자신의 자손이 왕후를 폐한다는 것이며 심하게는 왕후를 죽인다는 어느 도사가 와서 일러주더라는 것이다. 왕은 이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칠월 영의정 초반이 세상을 떠났다. 초반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산수고토로 나는 가노라

초반은 아마도 권력의 무상함을 새삼 느꼈던 모양이다. 왕후의 외척으로서 영의정에 올랐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을 느끼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구월 사정 초재를 영의정에 봉하였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외척이라며 배척하기도 했으나 마땅한 인사가 없음을 들며 이를 진정시켰다. 역량도 역량이지만 연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정에 황국을 임명하였다.

이후의 정국은 안정되어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왕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왕후와 후궁들의 몸에서 왕자들을 내리 낳았건만 태자를 옹립하라는 신하들의 주청이 연이어 벌어졌음에도 왕은 극구 거부해왔다. 그래서 왕은 태자를 옹립하기 위해 왕후와 후궁들에게 명하여 왕자들을 불러볼 것을 명했다. 왕명이 내려진 이튿날 왕자들을 불러다본 왕은 왕자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참고로 공주들은 왕실의 전례에 따라 혼기를 채운 채 모두 민가로 시집을 보내었다. 왕자들은 모두 막상막하로 실력들이 출중하였고 왕재를 내세워도 손색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태자를 세우는 중대한 자리. 막중한 나라의 임금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요 한 나라의 어버이로 받들어질 자리에 오르는 귀하고 귀한 자리다. 만약 자신이 수틀리어 그 자리가 이어진다면 장차에 나라는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뻔한 이치다. 그 전례가 여러 차례 있음을 모르지 않는 왕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왕은 왕자들을 바라보았다. 찬찬히 바라본다. 그러더니 왕이 자신이 묻는 말에 하나의 의혹이 없이 답할 것을 왕자들에게 명했다.

그리고 왕후와 후궁들에게도 명하기를,

“태자를 옹립하는 것은 곧 한 나라의 왕으로서 다스려야하는 막중한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니 이를 두고 가타부타 말을 할 시에 곧 직첩을 거두어 폐서인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태자가 옹립되면 이를 두고 뒷공론을 일삼지 말 것을 당부했다.

왕의 묻는 것에 왕자들은 거침없이 대답해야 했다. 그러기를 다섯 시각이 되었다. 이윽고 왕자들을 모두 보내었다. 왕자의 태반은 그 힘든 시간들을 견디느라고 무척 기진맥진한 모양이다. 궁녀들이 일제히 왕자들을 부축하느라고 난리를 피웠다. 그러나 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왕자는 의기양양하게 나오니 궁녀는 물론하고 내관들도 의아해하였다. 하기는 막내 왕자가 보통의 나이와는 다르게 총명하기로 이름이 난 까닭이 있기에 대수로이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기도 했다지만 이렇듯 나오는 모양이 필시 무슨 일이 터질 게 뻔한 것이 궁내의 사정이었다.

다음날 오전까지도 왕은 머뭇머뭇 거리는 것이었다.

“상선(尙膳)은 있는가.”

상선이 왕에게 나오니

“자네도 왕자들을 보았겠지.”

물어본다.

“그러하옵니다.”

“어떻게 보았는가.”

“왕자분들 중 유독 막내 왕자님의 말에 득의(得意)가 차 있음을 느꼈나이다.”

왕은 끄덕였다. 상선은 손씨의 집안에서 나온 이였다. 한때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이 당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자손들은 나라의 은덕에 힘입어 내관의 요직들을 꿰차고 있었다.

“한데 막내를 태자로 세울 수 있을까. 다른 왕자들은 모두 나이를 찼고 했는데.”

“나이가 찼다고 해서 연륜을 아는 것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미소를 머금으며 상선이 말하기가 무섭게 왕은 놀람을 금치 못한다.

“그래?”

“이 나라가 어디 자그마한 나라이겠나이까. 작은 나라라고 속단(速斷)하여 쉽게 다스릴 일이 아님을 어찌 모르십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니 왕자들이 나라를 돌볼 수 있는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지요.”

왕은 곧장 판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왕후를 불러들여야겠구나.’

상선의 말을 받아들인 왕은 그를 물러가게 한 김에 왕후를 은밀히 부르도록 명했다. 초씨가 권세를 움켜쥐었다손 치더라도 왕후가 집안 단속을 해온 까닭에 청백리로 이름이 날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왕은 왕후의 신임을 돈독히 해온 것이다.

“마마, 신첩이 상궁을 시켜 은밀히 알아보았습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한다는데 왕은 왕후의 의지와 같이 걸어가는 형편이었다.

“그래, 뭐라고 그럽디까.”

“마마께서 왕자들을 불러내어 묻는 뒤에 나오는 태도를 놓고 말들이 많습디다. 해서 상궁에게 은밀히 알아보고 오도록 했더니 유독 막내 왕자만은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평정(平靜)을 찾았다고 하더이다.”

“오, 그래요?”

“네, 전하.”

왕은 끄덕였다. 그리하여 왕후의 의견과 상선의 의견에 따라 막내왕자를 태자로 삼을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나이는 많거나 적거나 연륜을 거스를 수 없다하더라도 저마다 그릇들이 제각기 다름을 알기 때문이고, 보통의 왕자들과는 다르게 도량이 넓은 까닭도 한몫은 하였다. 그렇기에 나흘 뒤. 왕은 막내왕자의 이름을 성정(聖情)이라 하고 곧바로 황태자에 옹립하였다.

재위 41년 유월에 영의정에 있던 초재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편선을 부사정에 명하였다. 구월 초자를 영의정에 명하고 백덕을을 좌의정에, 초비를 우의정에 명했다. 권선을 사과에 명하며 태자의 후계구도를 같이하던 추양대군과 독수대군을 각각 이조정랑과 이조좌랑에 임명했다. 십일월에 관직에 제수(除授)한 추양대군을 백덕을의 딸과 혼인하였고, 십이월에는 독수대군에게 초도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백덕을이 같은 피붙이인 백무현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재위 42년 정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왕에게 시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원세대왕이 그동안 나라의 국방을 튼튼히 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군사는 한층 강화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외교에 있어서도 다른 나라와의 교린(交隣)을 분명하게 하였기에 나라 밖에 근심을 덜게 했다. 황태후는 태황태후에 오르고, 선왕의 왕후인 완화왕후에게 보연태후(寶淵太后)에 봉하였다.

선덕태황태후의 주청에 의해 왕이 성년임을 내세워 하루빨리 배필을 삼을 것을 독촉하니 가례청(嘉禮廳)을 열어 온 나라에 간택령을 내렸다. 가례청은 왕이나 왕족의 혼사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임시관청을 일컫는다. 이 가례청에 수장으로 영의정이 맡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영의정이

“소신이 워낙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성품을 지닌 탓에 직접 감당하기는 매우 어렵사옵니다만 이를 맡을 적임자로 좌의정이 있사옵니다. 부디 양찰(諒察)하옵소서.”

좌의정에게 권한을 넘기도록 하자 황태후가 독단적으로 영의정이 권한을 남용한 것을 구실로 삼아 파직하도록 왕에게 주청하였다. 그러나 왕이 황태후의 질책을 묵살하고 영의정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후 황태후는 사사건건 영의정의 태도를 문제 삼아서 공공연히 미움을 표출했다. 하루아침에 왕실의 웃어른을 맡은 책임이 매우 막중함이 아닐런가.

왕위에 오른 지가 이틀이 되던 때 폭우가 내리고 홍수를 이루었다. 이후 석 달이 지나 여름이 되었을 때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자 백성들은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왕은 가례청을 거두도록 명하였고, 백성들에게 구휼(救恤)하도록 명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십시일반으로 창고에 쌓인 쌀 포대들을 꺼내고 백성들의 굶주림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기선대군의 모친인 송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기선대군 일가에 승강대군을 양자로 입적하였다. 십일월에 인사개편이 이루어졌다. 김동탁을 대광보국숭록대부, 정석을 영중추부사, 제인을 판중추부사, 홍가를 지중추부사, 염건식을 동지중추부사, 현사를 첨지중추부사, 여범과 온시후의 아들인 온국(溫國)도 중추부경력에 명하였다. 궁태화의 장남 궁운(宮雲)을 병조정랑에, 궁태화의 차남 궁오마를 병조좌랑에, 궁태화의 삼남인 궁안(宮安)에게 보국숭록대부에 명하였다.

재위 1년 정월에 다시 가례청이 설치되었으며 여기에 간택된 처녀들 중 옥양봉의 딸을 골라내어 왕후로 책봉하였다. 뒤이어 옥길의 딸을 승강대군의 배필로 삼았다.

이월에 같이 간택된 처녀들을 모두 후궁으로 삼았다. 온시후의 딸을 만비에, 궁태화의 딸을 보비에 봉하였다. 삼월에 인사가 단행됐다. 호조정랑(戶曹正)에 백무현의 장남 백공(白公)을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호조좌랑(戶曹佐)에 장문의 장남 장훈(張勳), 호조산학교수(戶曹算學敎授)에 장문의 차남 장제(張濟), 호조별제(戶曹別提)에 봉길조의 아들인 봉학인(奉學仁), 호조산사(戶曹算士)에 초도연의 장남 초정술(楚政術), 호조계사(戶曹計士)에 초도연의 차남 초금(楚琴), 호조산학훈도(戶曹算學訓導)에 초도연의 삼남 초보(楚保), 호조회사(戶曹會士)에 백무현의 차남 백덕(白德)을 명하였다.

사월에 좌의정이 호산궁주와 경덕궁주의 호칭이 같다는 것을 건의하여 왕이 이를 받아들이니, 만비를 선비(善妃)로, 보비를 효비(孝妃)로 바꾸어 봉하였다. 선왕의 후궁인 수비와 혜비에게 궐 밖에 살 것을 명하였다. 이는 인종대왕의 전례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후덕궁과 도선궁에 각각 살게 되었다. 그런데 영돈령부사가 이들이 각각 기거하고 있는 후덕궁과 도선궁이 매우 낙후함을 알고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즉각 보수(補修)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보수가 마무리되자 두 사람에게 각각 후덕궁주와 도선궁주라 봉하였다. 오월에 왕후를 천추왕후(千秋王后)에 봉하였다.

유월에 승강대군의 배필로 옥길의 딸을 삼았다. 이때 선명대군은 민가(民家)의 딸을 불러다 배필로 삼은 상태였다. 왕이 측실(側室)로 신하의 딸들을 맞이할 것을 권하였으나 대군은 이를 마다했다.

구월에 후덕궁주의 아들인 추양대군의 배필로 백덕을의 딸을 삼았다. 이들의 거처를 호산궁으로 정하여 살게 했다. 그리고 왕은 지금까지 살던 한덕궁을 벗어나 다른 대궐에서 살 것을 밝히며 새로 대궐을 지을 것을 제안하자 신하들이 일제히 반발하였다. 국고를 낭비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들며 반대하자 왕이 대노하였다. 그러나 왕이 이를 강행하자 선덕태황태후가 이를 받아들일 것을 직언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태황태후의 뜻을 받들었다. 대신 낙후된 박재궁의 중수를 명하고 그 주변의 이십여 채의 민가들을 헐어내어 대궐의 규모를 늘리도록 했다. 중수하는 데는 자그마치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재위 2년 구월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태평하였다. 이에 왕이 거처를 박재궁으로 옮겨갔다. 박재궁은 궁왕이 집권하기 이전 왕실에서 살았던 곳으로서 곳곳에 낡은 흔적이 묻어나 중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대궐의 규모를 더욱 키웠으며 이때에 이르러 왕실이 기거하게 된 것이다.

시월에 도선궁주의 아들 독수대군의 배필로 초포다의 차녀(次女)를 배필로 삼고자 했으나 민가에 시집을 갔음을 알고 왕이 실의(失意)하자 이를 간파하여 초포다가 자신의 손녀이며, 초도연의 딸을 배필로 삼아줄 것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받아들여 배필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 부처(夫妻)를 낙선궁에 살게 했다.

십일월에 영의정 초자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애도를 표하였다. 그리고 백덕을을 후임으로 삼았고, 초비를 좌의정에 임명하고 초재를 우의정에 명하였다. 그리고 사정에는 편선을 임명했다.

재위 3년 정월에 조선왕 주우양이 세상을 떠나 뒤이어 태자 석제임이 왕위에 올라 고조선 제5대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왕이 영의정을 수반으로 한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황마 이십 필, 과실을 가득 싣고 길을 떠났다. 석제임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우의(友誼)를 돈독히 할 것을 약속했다. 이월에 호선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해 안비(安妃)에 봉하였다. 삼월에 초야에 묻혀 살던 길석이 천수(天壽)를 누리게 됨을 알고 신하들이 그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일 것을 청했다. 그러나 왕은 이에 조금 더 기다리라는 답을 내렸을 뿐이다. 삼월에 고양군수의 보고가 전해졌는데 군정(郡政)을 다스리기에 막심(莫甚)할 정도로 힘듦을 밝히며 마침 길석이 양주(楊州)에 기거하고 있음을 들며 그 지역에 관아를 세우도록 주청(奏請)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사월에 양주 고을에 관아를 설치했다. 이곳에 군청(郡廳)을 설치하여 길석을 양주군수(楊州郡守)에 명하였다.

유월에 양주군수 길석의 아들인 길용호를 의흥위상호군(義興衛上護軍)에 명하였다. 그리고 호선의 아들이며 안비의 오빠인 호포(好浦)를 의흥위대호군(義興衛大護軍)에 명하였다. 칠월에 선비가 왕자를 낳았으나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구월에 선덕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왕이 장례를 후히 치러 선왕의 왕릉 옆자리에 안장하였다.

십이월에 승강대군에게 용양위상호군(龍衛上護軍)에 명하였다.

재위 4년 정월에 기선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장례를 후히 치렀다. 부인 민씨가 이를 슬퍼하다가 자진(自盡)하고자 했으나 실패하자 태후와 왕후가 직접 찾아가 위로하였다. 이월에 길석의 손자이자 길용호의 아들인 길돈(吉敦)을 용양위대호군(龍衛大護軍)에 명하였다. 삼월에 길용호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여 영비(英妃)에 봉하였다.

오월에는, 지난날부터 충청도에 도사(道使)가 다스리게 했는데 도사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접하여 그를 파직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 가운데 총명하면서 지역의 사정에 밝은이를 찾아내어 그곳에 도사로 일하게 했다.

유월에 왕이 직접 조정대신들을 대동해 충청도에 당도했다. 충청도 일대를 찬찬히 살피던 왕은 이곳의 사정이 매우 열악함을 절감하여 돌아온 뒤 충청도 도사의 직책을 거두고 직무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시켰으며, 이곳에다 새로 감영을 설치하였다.

칠월에 궁태화의 삼남이 자신과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어른이 있으므로 새로이 이름을 쓰기를 청하자 왕이 이를 받아들여 바꾸어 부르도록 했다. 이름을 궁덕(宮德)이라 했다. 팔월에 인사를 단행했다. 박영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명하였으며 궁안을 경기도 도사(道使)에, 호선을 경기도 검률(檢律)에, 궁배를 경기도 심약(審藥)에 명하였다.

구월에 승강대군이 부인 옥씨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왕이 이에 대군의 아들에게 군(君)이라는 칭호를 내려 인승군(仁承君)으로 봉하였다. 이후에 대군의 아들을 군으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부인 옥씨로 하여금 노량부부인(鷺梁府夫人)에 봉하였다. 그 시어머니가 되는 선명대군의 부인이 양가, 곧 민가(民家) 출신인 규수였고 형제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음을 들며 주저하였다. 그러나 예우는 대군의 부인과 같이 하였다. 노량부부인이 봉작된 이후부터 승인군의 전례에 따라 그 부인도 부부인에 봉하도록 명하였다.

재위 5년 정월 초하룻날에 선명대군의 모친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왕이 직접 조문했으며 선명대군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다. 삼월 왕후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아들이 얼마 못가 뜻밖으로 단명(短命)하여 왕실에서 이를 슬퍼하였다. 뒤이어 선덕태황태후가 박재궁 정연당(靖然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성정대왕의 모친인 보연태후가 왕실의 웃어른으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유월에 선비로부터 황자를 얻었다. 왕이 이를 매우 기뻐하며 이름을 지윤(祉潤)이라 했다. 뒤이어 칠월에 효비의 몸에서 공주를 얻었다. 이름을 오림(吾林)이라 했다. 구월에 안비의 몸에서 공주를 얻었다. 이름을 신지(神志)라 했다. 연이어 세 명의 자녀를 생산하자 왕은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보연태후가 말하길,

“우리 왕실이야말로 연이은 홍복(洪福)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줄로 압니다.”

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중궁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왕자를 얻은 것도 잠시. 참척을 겪는 고통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를 모를 까닭이 없는 옥양봉이 왕후의 마음을 눈치 채고 직접 왕후전에 찾아가 이를 표하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왕비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궁궐이 떠나가라고 통곡하는 것이다. 이 소식은 온 왕실에 퍼졌고 태후는 물론, 왕도 불편한 심정에 놓여 있었다. 보다 못한 태후가 중궁을 불러다 훈계하길,

“일개 국모(國母)가 궁궐 안에서 대성통곡하는 연유는 무엇인고. 왕실의 홍복이 깃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건만. 왕후의 체통이 말이 아닙니다그려.”

나무라는 것이다. 이후 왕후는 마음 가득히 찼던 투기심을 벗어던지고자 당분간 도성 근처에 있는 사찰에 들어가 마음의 도를 닦았다. 이는 옥양봉의 각별한 당부에 의해서다. 그러나 훗날 그녀는 태후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투기심으로 인해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겨 닦달하다 정쟁(政爭)의 소용돌이에 몰아 죽인 비정한 시어머니가 되는 빌미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재위 6년 연초에 영의정 백덕을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이에 당시 좌의정에 있었을 때 보연태후에게 직언을 하는데 한몫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한 것을 높이 사 진국공(震國公)이라 봉했다. 뒤이어 초비를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그에 겸해 영돈령부사에 봉하였다. 그리고 초마를 좌의정에, 초포다를 우의정에 명했다.

유월에 중궁에게 쌍둥이가 태어났다. 모두 왕자로서 왕이 각각 승식(承植), 양정(襄靖)이라 하였다. 칠월에 효비에게 왕자를 낳았다. 왕이 이름을 장일(長日)이라 지었다.

십일월에는 영비의 몸에서 두 공주가 태어났다. 왕이 각각 심유(深柳), 문열(文烈)이라 지었다. 십이월에 선비의 몸에서 공주가 태어났다. 왕이 우슬(雨瑟)이라 하였다.

재위 7년 정월에 왕후의 몸에서 왕자가 태어나자 왕이 우을(雨乙)이라고 이름 지었다. 왕이 신하들에게 법전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임시관청을 세웠으며 영의정을 우두머리로 삼아 편찬에 박차를 가했다. 사월에 이전(吏典)을 완성했다. 오월에 옥양봉을 영돈령부사에 명했다. 전임 영돈령부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재위 8년 정월에 법전이 완성되었다. 이에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니 나라의 기틀이 바로잡혀지는 순간이었다. 이후의 치세는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재위 15년 정월에 초비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초마를 영의정에 봉하였다. 초포다를 좌의정에, 옥양봉을 우의정에 봉하였다. 후임 영돈령부사에 전 좌찬성인 궁호가 맡았다. 유월에 보연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명했다. 구월에 한덕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왕이 서둘러 진화(鎭火)할 것을 명했으나 전각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이에 왕은 중건을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신하들이 일제히 왕실의 재정이 궁핍함을 들어 불가하다고 아뢰었다. 하여 한덕궁 터는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고 그곳에는 다시 민가가 들어섰고 텃밭도 들어섰다.

재위 16년 정월에 왕은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서 후사를 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에 두루 살펴보니 자나 깨나 왕후의 소생보다는 후궁들의 소생으로 태자를 삼기로 마음을 굳혔을 때였다. 대전(大殿) 밖에서 웬 여인네의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왕이 상선으로 하여금 이를 살펴보게 했다. 그러자 상선이 이를 보고 곧바로 아뢰길,

“중궁께서 통곡을 하고 계시옵니다.”

시어머니인 태후마마의 등쌀에 못 이겨 맺힌 한을 통곡하는 것으로 수습하려는 것을 알아챈 왕이 조금은 찜찜했으나 중궁을 데리고 와서 어찌된 연유인지 왕이 물어보자 왕후가 말하길,

“제 막내인 우을을 태자로 옹립(擁立)해주옵소서.”

하는 것이다. 그러자 왕은 중궁의 당돌한 말에 놀라 황급히 왕자와 공주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후궁들은 일제히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왕이 본래 왕후와는 금슬이 매우 좋기도 했겠지만 왕후의 타고난 성정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에 왕은 마지못해 중궁의 뜻에 따라 우을을 태자로 옹립했다.

오월에 인사가 개편되었다. 정위사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유구신에게 보국숭록대부에, 민번주를 숭록대부에, 천위사를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천위사를 정헌대부(正憲大夫)에, 노주앙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설국의를 가정대부(嘉靖大夫)에 봉하였다.

유월에 초마가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에 초포다를 임명했다. 초포다는 한때는 외척이었으며 지금은 병든 몸임을 들어 정중히 거절하였으나 왕의 굳은 의지에 못 이겨 마지못해 영의정에 앉았고 좌의정에 옥양봉을 임명하고 우의정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정위사를 앉혔다.

재위 17년 정월에 왕이 병을 얻어 몸 져 눕자 왕후가 태자의 나이 어림을 들어 대신 정사를 다스렸다. 세간에서는 왕의 병은 원인도 알 수 없고 그 병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때 영의정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자리를 버리고자 하니 왕후가 이를 극구 만류했다. 왕이 몸 져 누운 지 두 달 뒤인 삼월에 갑작스레 붕어하였다.

그러자 태자가 새로 왕위에 옹립하였다. 태후가 스스로 새 왕이 나이가 어림을 이유로 수렴청정을 행할 것을 천명했다.

그로부터 보름 뒤에 영의정인 초포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옥양봉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좌의정에 정위사를, 우의정에 유구신을 앉혔다. 이로써 초씨들이 정치 일선에서 떠난 계기가 되었고 옥양봉은 태후의 아버지로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세간에서는 옥양봉의 권세를 두고 왕실의 권력에 버금갈 정도라고도 했으니 태후의 권력을 향한 집착은 그처럼 강했다.

태후의 강한 집념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두말 하면 무엇 할까. 즉위년 유월에 선왕의 시호를 ‘선종(宣宗)’이라 하고 ‘성정’이라는 호에 더 보태어 ‘태렴(泰廉)’이라 했다.

선왕의 후궁들은 황태후의 명으로 대궐에서 계속 살도록 했다.

재위 1년 정월에 신하들의 주청에 따라 황태후에게 연화태후(延和太后)라는 칭호를 내렸다. 오월에 치른 과거에서 옥양봉의 장남인 희공(僖公)이 급제하자 황태후가 이를 기념하여 왕궁 안에서 잔치를 베풀게 하니, 이에 일부 신하들은 저마다 시기와 질투로서 옥씨 일가를 비판하였고 태후가 대노하여 삭탈관직하거나 유배(流配) 보내도록 했다. 이후 옥희공을 상호군에 명하였다.

팔월에 석제임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구을리가 즉위하였다. 구을리는 왕에게 직접 친서를 보내어 형식상으로 우의를 돈독히 하자고 이야기를 하니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구을리가 뜻밖으로 단명하여 그의 아우 지위리가 새로 왕위에 올랐으나, 조선왕이 스스로를 단인이라 칭하며 지난날 선사국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재상(宰相) 격인 조선상(朝鮮相)을 태정대신으로 고쳐놓고 보처(寶處)를 수반으로 삼아 선사국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그러자 연화태후가 대노하여 조선을 정벌하도록 독려하여 자신이 직접 친정(親征)에 나섰다. 그러자 신하들이 일제히 태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직언하자 즉시 태후는 그것을 구실로 삼아 파직시켰다.

하여 지금의 황해도 해주(海州)까지 쳐들어가 조선 병사들을 모두 격퇴시켜 적장의 수급을 베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구을리는 대노하여 즉각 공격을 명하였으나, 사촌동생인 거발환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이윽고 거발환은 왕에게 직접 강화(講和)를 제의하므로 해주 땅에서 폐주(廢主) 구을리를 볼모로 보내도록 합의함으로써 다시 우의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폐주 구을리는 볼모로 잡혀 와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이것은 연화태후의 정치적 수완(手腕)이 발휘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월에 구을리의 왕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태후는 구을리의 향후 거취를 알아보도록 명하였다. 영의정이 직접 구을리왕을 알현하여 물어보니 자신은 후처를 따로 둘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하지만 태후는 구을리의 배필을 새로 맞이하도록 강권을 하므로 마지못해 구을리는 새로이 배필을 맞이하게 되었다. 구을리의 배필로는 천학공주의 소생으로 삼았으며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을 하였다. 하여 천학공주의 옛 거처에서 신접살이를 하도록 재정을 대도록 했다.

재위 3년 정월에 영의정 옥양봉이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태후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고양군수 봉길조를 지돈령부사에 임명하고 선왕의 소생인 지윤대군에게 고양군수로 갈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숭록대부 민번주를 영의정에 임명했다. 뒤이어 옥양봉은 고향으로 돌아가 잠시 동안 정양을 하였다.

오월에 황태후의 존호(尊號)를 다시 올려 연화대향태후(延和大香太后)라 불리도록 했다. 뒤이어 왕비를 간택할 것을 주청하는 신하들의 말에 태후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왕후를 맞이하도록 하니 첨지중추부사 현사의 딸이다.

그러나 칠월 어느 날, 왕후 현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태후는 물론, 온 왕실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하여 태후는 왕에게 시호를 백운황비(白雲皇妃)라는 시호를 내리도록 하였으며 재위 4년 정월에 백운왕후로 추숭할 때까지 다시는 왕후를 간택하지 않았다.

재위 4년 삼월에 후덕궁주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직접 조문을 하였다. 이는 대향태후의 명이기도 했다. 유월에는 양주군수 길석의 후임으로 추양대군의 아들인 천가군(天嘉君)을 삼아서 부임하도록 했다. 뒤에 길석을 영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칠월에 태후의 명으로 예조(禮曹)라는 관청을 설치했다. 그 수장인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전임 영중추부사인 김동탁을 임명하였다.

팔월에 해주태수(海州太守)인 인진(珍)이 가솔들을 이끌고 왕경에 다다랐다. 이에 왕을 직접 알현할 것을 청하니 태후가 이를 받아들여 맞아들였다. 그러자 인진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위협을 느끼게 되어 귀순(歸順)함을 알리니 태후가 흔쾌히 받아들여 성(姓)을 계(桂)라 하고 이름을 운관(雲觀)이라 하였다.

계운관은 이후에 자신이 태수로 있는 해주 땅을 왕에게 직접 하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자 태후가 이를 받아들이니 해주는 이제 선사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정대신 보처가 대노하여 왕에게 직접 선사국을 정벌하도록 주청하였지만 거발환이 오히려 태정대신 보처의 처신을 문제 삼아 파직하고 심지어는 보처의 목을 베어 왕에게 그 수급을 직접 전달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하도록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이를 받아들여 계운관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하였다.

재위 5년 정월에 전 조선왕 구을리가 세상을 떠났다. 구을리는 자신을 조국인 조선 땅에 묻히게 하지 말고 화장하여 유해를 강물에 뿌리라는 유언에 따랐다.

삼월에 거발환은 태정대신이라는 직제를 혁파하고 다시 조선상이라는 직제를 복구하였다. 하지만 거발환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을 구실로 해주 주변의 지역에서는 속속 선사국에 귀순하는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생긴 것이다. 하여 거발환을 죽이고, 그 자리에 구을리의 직계(直系)인 불리를 새로 옹립하였으니 조선과의 국교가 단절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조성되었다. 해주는 지리적으로 바다와 가까워 선사국과의 교역을 하는데 용이하였고, 또 왕경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민심의 동요가 이루어진 것은 당연했다. 하여 불리가 다시 태정대신이라는 직제를 복구하였다.

오월에 천가군의 배필로 죽은 왕비 현씨의 동생을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지난날 왕후와의 옛정을 못 잊어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태후가 마음이 약해서야 쓰겠느냐며 혀를 차며 잔소리를 늘여놓았지만, 그 부친 되는 현사는 왕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며 다시 왕실의 일원이 된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며 덩달아 같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천가군의 부인 현씨를 성산부부인(星山府夫人)에 봉하였다. 이는 노량부부인이라는 봉호(封號)를 내린 전례와 같다. 덩달아 시어머니인 백씨부인에게도 부부인의 칭호를 내릴 것을 신하들이 청하였으나 태후는 만약 이를 행하면 형평성에 어긋남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유월에 치른 과거에서 현사의 아들 현태(玄泰)가 장원급제하여 왕을 알현했다. 그러자 왕은 그를 칭찬하여 용양위호군(龍衛護軍)에 임명했다.

칠월에 조선과의 갈등을 이용해 주왕(周王) 문왕(文王)이 손을 내밀었다. 이에 영의정이 직접 사절(使節)로서 주나라의 왕경으로 갔다. 주나라의 문왕은 전라도 땅에서 죽은 호왕의 아들이다. 그런데 제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이렇듯 호의를 베푼 것에 대해 감사함을 전하며 용서를 빌었다. 이는 태후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태후가 다시금 수완을 쓴 것이다.

구월에 해주 땅에 대한 관리문제로 조정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자 태후가 보다 못해 해주 땅을 다스릴 수 있는 감영을 세운 다음, 자신의 아버지인 옥사홍으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파견하도록 하였다. 하여 태후는 옥사홍에게 해주도사(海州道使)에 명하였다.

재위 6년 정월에 대향태후에게 또 존호를 올리고자 하니, 존호를 인수(仁粹)라 칭하였다. 그러나 일부 신하들이 이를 두고 인수태후의 존호와 비슷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으나 왕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세간에서는 대향태후를 두고 ‘작은’ 인수태후라 칭하기도 했다.

하여 후대에 이르러서 불리는 ‘인수태후(仁粹太后)’를 지칭할 때 이 태후 옥씨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월에 대향태후의 명으로 왕비를 간택하도록 했다. 하여 왕후를 맞이하는데 자그마치 다섯 명의 왕후를 맞이하게 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우려하며 차라리 후궁을 맞이하도록 명하였지만 이를 무시했다. 그리하여 다섯 명의 왕비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먼저 양송평의 딸을 덕향왕후(德香王后)에, 권선의 딸을 선향왕후(善香王后)에, 옥희공의 딸을 덕선왕후(德善王后)에, 임고양의 딸을 창녕왕후(昌寧王后)에, 남궁의의 딸을 창원왕후(昌原王后)에 봉하였다.

뒤이어 왕후들의 아버지에게 모두 오위의 상호군(上護軍)에 임명하였고, 그들에게 부원군에 봉하니 양송평에게는 한수부원군(漢水府院君), 권선에게 안인부원군(安仁府院君), 옥희공에게 덕주부원군(德周府院君), 임고양에게 풍천부원군(川府院君), 남궁의에게 한덕부원군(漢德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들 집안은 모두 한미하다는 집안의 여식들이며 권력이 특정한 곳에 쏠림을 방지하고자 한 인수태후(대향태후)의 의지가 깔려 있었다.

오월에 조선왕이 갑작스레 하세하자 태자 거불리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새 왕이 나이가 어리자 태후가 정사를 알음하였다.

칠월에 덕향왕후에게서 홍라황자(紅羅皇子)가 태어났다. 다음해에 허정황자(許正皇子)가, 다다음해에는 편구황자(編九皇子)가 태어났다.

재위 10년 정월에 선향왕후에게서 전언황자(典言皇子)와 차동황자(次童皇子) 두 아들을 낳았다. 구월에는 덕선왕후로부터 하성공주(河星公主)를 낳았다. 연이어 생산하자 왕은 은근히 색(色)을 즐기고자 하는 욕망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수태후가

“색을 즐기라고 왕후들을 책봉한 것이 아닙니다. 왕실에 자손을 많이 번성해야 나라가 태평한 법입니다. 그러하니 자제력(自制力)을 가지셔야 합니다.”

재위 11년 삼월에 덕향왕후에게 윤인공주(倫仁公主)가 태어나고 재위 12년 오월에는 신성황자(神聖皇子)가, 재위 13년 유월에는 우가공주(優伽公主)가 태어났다. 이후에 왕은 덕향왕후를 더욱 귀히 여겨 두터운 금실을 자아냈는데 주위의 내관과 상궁들이 이를 지켜보며 더없는 왕실의 홍복을 만끽하였다. 태후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는 했으나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재위 13년 팔월 말에 해주 땅 주변으로 끊임없이 조선의 주민들이 무시로 침략을 일삼으므로 왕이 직접 친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오위의 군사들을 몸소 거느리어 해주 땅으로 찾아가 동태를 파악한 뒤 서둘러 주변의 땅들을 모조리 차지하니 해주 땅으로부터 오천 리의 땅을 차지함으로써 그 위용을 과시했다. 그 뒤에 조선의 우가(牛加)인 소태(蘇泰)가 협상을 요청했으나 왕이 이를 거절하며 다시는 해주 땅 근방을 정벌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했다.

재위 14년 정월에 태후 옥씨가 수렴청정을 거두고자 하니,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이 통곡하며 만류하였다. 이에 태후가 왕실을 다스리는데 주력하기만 하고 그 이상의 정치에 대해서 관여를 안 할 것을 약속했다.

유월에 왕이 백경대왕의 시호를 정하도록 명하니, 영의정 이하의 신하들이 보배로운 행적을 행함을 들며 보왕(寶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에 왕이 흔쾌히 받아들여 시호를 ‘보종(寶宗)’이라 하였다. 이후 인사를 개편하였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장문을 임명하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독수대군의 아들인 구학군(丘壑君), 예조정랑(禮曹正)에 황국, 예조좌랑(禮曹佐)에 옥양봉의 차남인 옥구(玉具)를 임명했다.

칠월에 형조(刑曹)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옥길의 아들 옥창(玉昌)을, 형조참판(刑曹參判)에는 금년에 과거에 급제한 성우지(成宇知),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손철은(孫鐵恩), 형조정랑(刑曹正)에 황국의 아들인 황선교(黃宣敎), 형조좌랑(刑曹佐)에 권선, 율학교수(律學敎授)에 유구신, 별제(別提)에 양송평, 명률(明律)에 신구, 심률(審律)에 신봉, 율학훈도(律學訓導)에 신약, 형조검률(刑曹檢律)에 임고양을 임명했다.

이 중 손철은의 집안이 대대로 내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왕의 측근으로서 충성을 다하였다. 이에 왕이 지난날의 과오를 깨끗이 잊는다며 손철은에게 조정에 출사하여 봉공(奉公)을 다할 것을 독려하며 벼슬에 나갈 것을 허(許)했다. 결국 내관의 지위에 있는 부친과 분가(分家)하여 살도록 하니 왕의 성덕에 손철은이 읍(泣)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팔월에 공조(工曹)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옥희공, 공조참판(工曹參判)에 남궁의,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안임, 공조정랑(工曹正)에 조고형, 공조좌랑(工曹佐)에 옥송호, 공조(工造)에 구덕수, 공작(工作)에 초도연을 명했다.

구월에 양주목사의 상소가 올라왔으므로 왕이 이를 알아보니 양주목을 관할하는 범위가 워낙에 넓으므로 다스리기가 매우 어려움을 한탄해하였다. 이에 왕이 한강(漢江) 남쪽의 땅을 다스리는 감영을 새로 설치하게 하니 이곳에 과천현(果川縣)을 설치하였다. 하여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온시후를 명하여 그곳을 다스리도록 명했다.

재위 15년 태후의 명으로 후궁을 간택하였는데, 궁상규의 딸과 황국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여 궁상규의 딸을 부용귀비(芙蓉貴妃)라 봉하고, 황국의 딸을 원비(媛妃)라 봉하였다. 그 중 황국의 딸은 훗날 인수태후의 농간에 의해 폐비되어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그에게서 태어난 이는 곧 왕위에 올라 인수태후에게 패륜을 일삼고 심지어는 왕의 잉첩(妾)들과 왕손들을 죽이고, 이에 더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비굴하게 매국(賣國)을 일삼는 죽서왕(竹書王)이 바로 그이다. 먼 훗날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燕山君)과 같은 길을 걷는 인물이기도 하다.

재위 16년 정월 강찬을 좌찬성에, 향길을 우찬성에, 천무를 좌참찬에, 궁태화를 우참찬에 명했다. 이월에 황해도 해주 근방의 여섯 고을을 선사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이에 왕이 이곳 지역을 황해도(黃海道)라 칭하고 해주 땅에 감영을 세워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를 파견했다. 삼월에는 민번주를 영의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를 받아들여 판돈령부사에 명했다. 그리고 영의정으로 다시 옥양봉을 임명하니 다시금 태후의 세도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월에 실록청(實錄廳)을 세워 역대 열성조(列聖朝)의 기록들을 간추려 실록으로 편찬하니 열성조의 기록은 자그마치 8대에 이르렀다. 이는 궁 정승을 태조로 삼아놓은 까닭이었다. 그 중 백경태자라는 호칭이 눈에 띄었는데 이 호칭은 장담황제가 쓰고 있었다. 하여 백경태자는 장담황제와 같은 사람임을 정정해서 수정하도록 했다.

오월에 영의정 옥양봉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태후가 매우 슬퍼하니 왕이 직접 조문하여 유족들을 위로했다.

유월에 독수대군의 생모인 도선궁주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태후를 대신하여 유족들을 위로해주었다.

칠월에 덕향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여섯 남매(4남 2녀)를 두고 떠났는데 산후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병을 얻었으므로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던 것이다. 왕은 그토록 금슬이 좋았던 까닭에 매일 죽은 왕후의 생각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는 일이 잦았다. 부원군 양광웅을 불러 위로를 해주었다. 덕향왕후의 소생들은 인수황태후의 명에 의해 하성공주를 생산한 바 있는 선향왕후에게 훈육하도록 했다.

영의정에 다시 민번주를 임명하고자 했으나, 번주가 이를 거절하므로 우참찬인 궁태화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후임 우참찬으로 전 개성부교사인 오세안을 임명했다. 후임 개성부교사를 인종영효대왕의 장자이자 도종대왕의 양자인 장우대군에게 맡도록 했다. 특히 장우대군이 비록 나이가 많다고 하지만 왕실의 웃어른이자 무엇보다 정세에 능통한 사람을 찾아보아도 그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갓 영의정이 된 궁태화가 한밤중에 장우대군의 집을 찾은 건 당연한 수순이리라.

“대군마마. 소인 궁태화입니다.”

대군 집 사랑에는 불이 켜져 있을 뿐. 별다른 인기척이 없다. 밖에는 밤새가 우짖을 뿐.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들어오시오.”

이윽고 안에서 기척이 들리자 들어온다.

“이 무능한 늙은이 밖에서 마중할 수 없어 이렇게나마 앉아서 맞소이다.”

“아이구, 별 말씀을.”

궁태화와 대군은 서로 손을 마주잡았다.

“그나저나 영상(領相)이 되셨다고 하니 감축 드리오.”

대군이 웃으면서 축하인사를 하자 궁태화가 몸 둘 바를 모른 채 겸손함을 아끼지 않는다. 태화는 평소 우직(愚直)한 까닭에 젊은 시절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골칫거리로 남았고 지난날 사람을 해한 과오(過誤)가 있었기에 집안이 한때는 풍비박산이 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그런 궁태화가 나이가 차츰 들더니 지난날의 과오를 크게 뉘우치며 조정 일에 최선을 다해서 돌보았다. 그래서 주위의 대신들이 그런 열심(熱心)을 알기에 영의정에 내정 된 민번주가 망설임 없이 궁태화를 추천한 것이다. 그런 궁태화가 대군을 찾은 건 어떤 까닭일까.

“어인 일로 이내 몸을 찾으셨소.”

대군의 물음에 궁태화가 망설이더니,

“대군께서 개성부교수로 부임하셨단 이야길 듣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

“대군께서도 아시다시피 그곳 개성부는 험지(險地)입니다. 더구나 부근에 조선의 세력이 맹렬(猛烈)을 떨치고 있고 무엇보다 그곳이 군사적 요충지인 만큼 다스리는 데도 꽤 많은 인내가 필요로 합니다. 그런 곳에 대군께서는 정녕 가시렵니까?”

이에 대군은 껄껄 웃으면서

“하하하하, 내 일개 왕족으로서 살육을 피하면서 이렇듯 정정(亭亭)하게 살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오. 걱정도 팔자시오. 허허허허.”

태화의 걱정을 작게나마 덜어주는 것이다.

‘허허 이 사람이. 한때나마 나라를 어수선하게 만들던 기개는 다 어디로 가고 이렇듯 나라의 충정(忠情)을 깊이 생각하니 장족(長足)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군은 태화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인품의 깊이를 간추려보았다. 하여 궁태화가 과연 나라의 재상이 될 만 한 자질을 가지고 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장우대군은 가솔을 거느리고 개성부로 떠났다.

팔월에 선명대군의 군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성씨(姓氏)와 이름은 밝힌 바가 없으나 야사에서는 반(潘) 씨 성이라고 했다. 군부인의 부고를 전해들은 왕이 직접 조문을 가고자 했으나 태후의 반대를 받아들여 장례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태후는 왕실의 재정도 궁핍하기도 했지만, 왕실의 권위와 더불어 대신들의 집안에서 간택되어야 한다는 권위의식에 비롯되었다. 이후 선명대군에게 후취를 얻을 것을 청하자 선명대군이 정중히 거절하므로 후취를 두는 일은 없었던 일로 하였다.

구월에 승강대군을 용양위장에 임명했다. 용양위 상호군에 길돈을, 용양위 대호군에 현태를, 용양위 호군에 궁영규의 장남 궁숭(宮崇)을 임명했다. 이후에 왕이 용양위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강원도 안협 지역에 친히 거동했으며 그 이튿날에 조선의 군사들을 급습하여 수많은 적들을 격퇴하여 보름 만에 지금의 황해도 전 지역을 차지하였다. 왕이 이렇듯 친정을 하니 조선왕이 이에 놀라 화의를 청했으나 거절하였다.

시월에 조선의 태정대신이 사신으로 찾아왔다. 왕이 거절하였으나 영의정이 이를 받아들일 것을 왕에게 간(諫)하여 이를 수락하게 하니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조선왕의 명으로 사신을 자청해서 온 태정대신은 조선왕 불 리가 선사국과의 화의(和議)를 강력히 원함을 피력했다. 그러자 왕은 그대로 받아들여 화의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국서(國書)를 보내어 돌려보냈다.

뒤에 한때 조선의 영토였던 황해도 전역을 선사국의 영토임을 인정한다는 국서를 보냄으로써 다시금 조선과의 국교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충청도도사의 직(職)을 폐지하고 관찰사(觀察使)를 새로 두었다. 이에 왕은 관찰사를 안인대왕의 아우이신 심유대군을 임명하고 도사(都事)에 고만술, 검률(檢律)에 이유, 심약(審藥)에 이각을 명했다. 의흥위장에 궁영규의 차남 궁길(宮吉), 호분위장에 궁영규의 삼남인 궁소지(宮素地), 충좌위장에 궁영규의 사남인 궁소차(宮素次)를 임명했다.

재위 17년 정월에 열린 과거에서 궁영규의 막내아들인 궁길만(宮吉萬)이 수석으로 급제하자 왕이 이를 깊이 치하하며 병조판서에 명했다. 평소 궁길만이 병법(兵法)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능하기도 하여 한때 왕 앞에서 무술경합을 할 때 실력을 발휘하여 왕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아 직접 보검(寶劍)을 하사(下賜)하기도 했다.

이를 알기에 궁길만은 성은(聖恩)에 감읍(感泣)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삼월에 궁상규의 장남이자 부용귀비의 오라버니인 궁만희를 영서도찰방(迎曙道察訪)에 명하고, 역시 궁상규의 차남이자 부용귀비의 남동생인 궁령(宮寧)을 보안도찰방(保安道察訪)에 임명했다.

오월에 선향왕후가 공주를 생산했다. 왕은 공주의 이름을 해연(海燕)이라 지었다.

재위 18년 선향왕후에게 황자가 태어났다. 왕은 황자의 이름을 진재(眞宰)라 했다.

재위 19년 선향왕후에게 다시 황자가 태어났다. 왕은 황자의 이름을 감홍(甘紅)이라 했다.

재위 20년 정월에 장남 홍라대군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뜻밖으로 삼 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왕실은 큰 슬픔에 빠졌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태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하였다. 왕은 홍라대군에게 홍우태자(紅雨太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오월에 영의정 궁태화가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그가 천수를 누리었다고 한다지만 젊은 날에 나라에서 시정잡배(市井雜輩)와 같은 행각으로 죄를 저질러 세간으로 하여금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지만 늙어서 철이 들고부터는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의 마음을 다한 재상으로 사가(史家)에서는 전하고 있다.

왕은 그의 서거를 대하며 크게 오열하며 한 재상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역대 어느 제왕들도 하지 못한 일을 왕은 묵묵히 행하고 있는 것이다.

칠월에 덕선왕후가 공주를 낳았다. 공주의 이름은 인겸(仁謙)이다. 팔월에는 창녕왕후 사이에 기설공주(基雪公主)를, 구월에 창원왕후에게서 채린공주(彩隣公主)를, 시월에는 부용귀비에게서는 표강공주(表康公主)를, 십일월에는 한주부인에게서 마동황자(馬童皇子)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의 탄생이 태후의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하지만 왕의 비빈들 가운데 유일하게 불만을 품은 이가 있었다. 바로 부인으로 봉해진 황씨였다. 다른 비빈들은 왕후에 봉해지고 하여 왕의 신임이 두텁건만 정작 자신만은 부인에 봉해진 것이 오히려 형평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루빨리 왕손을 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터라 그의 내면에 깊은 투기심(投機心)을 감추며 살아왔던 거다.

그 집안의 내력을 모를 리 없건만 한주부인은 한시라도 빨리 다른 왕후들처럼 중궁전(中宮殿)으로 책봉되는 영광을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매우 절실했다. 그래서 왕에게 아양도 떨기도 했으며 제 가족들을 공공연히 제 처소로 불러들여 은밀히 자신의 왕후 책봉을 물색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자, 대놓고 왕후에 대한 투기를 일삼았다. 죽은 덕향왕후의 자제들이 인사를 하러 올 때 문전박대를 서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왕후들의 각 처소마다 죽은 쥐들을 지져놓은 것을 궁녀들을 시켜 주는가하면 죽은 사람의 뼈를 추려내어 처소 밑에 파묻어 숨기기까지 하였다. 이를 보던 왕후들이 겁에 질린 건 당연하였으며 왕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을 인수태후도 이에 대해 대노하니 왕은 부인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여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위 21년 정월에 태후의 명에 의해 한주부인을 구화궁에 유폐시키고 감금시키도록 명했다. 한주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인수태후는 명하였다. 그러나 한주부인의 반성하는 빛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태후의 뜻을 묻지 않고 무작정 구화궁에 찾아갔다. 이에 한주부인은 처소로 찾아온 왕의 뺨을 쳐 용안(龍顔)을 상하게 했다.

이에 대노한 태후가 삼월에 이르러 한주부인에게 명부(命婦)의 직책을 거두고 서인으로 강등해 궐 밖으로 내치게 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일제히 동요하였고, 이를 의식하지 않고 태후는 한주부인과 아들이 되는 마동황자와의 교류를 차단했다.

오월에 옥양봉의 아우인 옥길을 새로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중히 사양하자 왕이 하는 수없이 전 판중추부사인 정석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정석은 정위사의 부친으로 조정에서 잠시 물러나 칩거하고 있었다. 정석은 보통의 대신들보다 오랫동안 정무(政務)를 보았으며 경향(京鄕)의 백성들의 신망도 더욱 높았고 자신의 밑에 후학(後學)을 양성하는데 여생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장차 조정의 동량이 될 젊은 인재들을 뽑는단 소식을 듣고 왕은 즉시 그를 불러들여 나라의 큰일을 맡았다.

칠월 보름에 황태후전의 부르심을 받아 세 대신이 당도했다. 그 세 대신은 새로 영의정이 된 정석과 서인으로 강등된 한주부인의 부친인 황국, 그리고 우의정이었다. 태후의 권세는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의 힘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태후의 명이라고 하면 그 누구 하나 거스를 수 없었다. 만약 거스르는 날이면 죽임을 당하기 부지기수(不知其數)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하들의 몸가짐도 신중하기 이를 데 없다.

“태후마마, 어인 일로 소신들을 찾으셨나이까.”

신하들의 물음에 태후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마침 부원군께서 오셨습니다그려.”

입을 떼었다. 황국이 태후의 의중을 간파한다.

“네, 마마.”

“폐비(廢妃) 황씨는 아직도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습니까.”

황국은 머뭇거리듯 하며 입을 떼지 않았다. 폐비라고 칭하는 것은 한주부인도 어디까지나 왕후의 예우(禮遇)에 지나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

태후가 황국의 말없음을 답답해했다. 황국은 황국대로 폐비가 겸손(謙遜)함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왕을 비방하며, 무당을 불러들여다 굿판을 벌여 매일 저주를 퍼붓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걸 모를 까닭이 없는 태후였다.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

황국의 등에 식은땀이 났다. 그러자 태후는 짐짓 알았다는 듯 즉시 명을 내린다.

“하는 수없습니다. 폐비 황씨를 사사할까 합니다.”

황국은 불안에 찬 눈초리로 태후를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 두 대신들은 벌벌 떨었다.

“그 어인 분부시옵니까!”

영의정 정석이 부복(俯伏)하여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황자 마마의 모후를 사사로이 폐하심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하옵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불안함을 잠재우듯 태후는 대신들을 점잖게 달랬다.

“사사로이 사사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직(社稷)과 왕통(王統)을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대신들은 모두들 부복한 채 경청하고만 있었다.

“그러니 부원군.”

“네?”

태후의 부름에 황국이 고개를 들었다.

“부원군께서는 심려(心慮)를 거두시오. 비록 폐비를 죽이지만 그 가족을 멸문지화 시킬 일은 결단코 없을 거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시오.”

“……”

“나는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막중한 책임이 있지만 부원군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같이 나누어진다면 멸문의 화는 면할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마마, 토, 통촉하옵소서!”

결국 황국은 울음을 터뜨렸다.

태후는 그런 황국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라고 아픔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왕실의 위엄을 실추시킨 사람을 며느리로 삼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경(卿)이 허락해주시구려.”

그리하여 세 대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져 태후는 팔월에 폐비 황씨(한주부인)를 사약(賜藥)을 내려 보내어 죽게 하였다. 황씨의 죽음을 계기로 왕후들은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안도하였으나 황씨의 소생인 마동황자를 아무도 기르려하지 않았다. 이에 태후는 부용귀비로 하여금 마동황자를 기르도록 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재위 30년 유월. 왕이 갑작스럽게 병이 들었다. 이에 여러 황자들을 물색해보았으나 왕후의 소생들이 유달리 총명치 않음을 한탄했다. 그런데 유독 마동황자만큼은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 이에 왕이 서둘러 태자 책봉을 행하니, 마동황자가 마침내 태자로 봉해지고 그로부터 이십일이 되어 돌연 승하하였다. 왕을 여읜 태후는 막연히 불안함을 느꼈다. 빠르게 태자 책봉을 서둘러 막내 황자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한 것이 자신을 겨냥하여 내놓은 술책(術策)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직감이 그녀로 하여금 큰 족쇄로 남기는 신호탄(信號彈)으로 다가온 것이다.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훗날 죽서왕이라고 불리는 이가 옥좌(玉座)에 오른 것이다. 인수태후는 태황태후에 봉하여져 연화태황태후라는 칭호를 바쳤다. 죽서왕비의 화관(花冠)이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온 나라의 부강함을 말해주는 무언(無言)의 표시라고나 해야 할까. 어쨌든 그는 박재궁 매황당(梅晃堂)에서 즉위하였다. 만세― 황제폐하만세― 신하들의 만세소리가 온 대궐을 휘감듯 들려왔다. 그러나 태황태후는 손자의 즉위식에 참관하지 않았다. 죄인의 자식을 왕위에 오른 자신의 죄업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그렇기에 연화태황태후는 황제의 위에 오른 손자를 대하기가 매우 두려운지도 모른다.

왕이 나이가 어림을 내세워 태황태후 대신 대행왕의 왕비인 선향왕후가 수렴청정을 행했다. 이에 신하들이 그녀에게 만명태후(萬明太后)라 봉하였다. 그리고 대행왕의 시호를 ‘성종(成宗)’이라 하였다.

왕에게 태후의 명에 따라 배필을 맞이하도록 하였으나 왕이 심신이 미약함을 이유로 왕후를 맞이하지 못하였다. 이에 태후가 보다 못해 왕에게 거듭 청하였건만 왕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태황태후는 이것이 필시 반역의 피가 들어있음을 직감하고 매일 아침마다 드리는 왕의 문안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신하들은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왕실의 우환(憂患)이 다시 일어날까 저어한 까닭이리라.

보다 못한 선왕의 귀비(貴妃)인 궁씨가 왕을 직접 알현하여 태후의 청을 따라달라고 거듭 간청하였다. 하여 귀비의 뜻을 받아들여 왕은 신봉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이가 바로 죽서왕비이며 훗날 죽서궁주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재위 1년 정초에 조선왕이 하세하고 태자 우야고가 왕위에 올랐다. 우야고는 불리의 뜻을 계승하여 조선과 선사간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으나 태후의 섭정을 받은 입장에 처한지라 마지못해 선왕의 뜻을 받들어 거부하였다.

삼월에 영의정 정석이 하세하니 그 후임으로 판돈령부사 민번주를 임명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영의정에 임명된 것은 이 사람이 처음이다.

오월에 태황태후의 명에 의해 왕비를 춘연왕후(春燕王后)라 봉하였다. 유월에는 죽은 홍우태자의 배필(配匹)인 신구의 딸을 남해부부인(南海府夫人)으로 봉하였다.

재위 2년 정월에 왕후의 사이에 공주를 생산하였다. 왕은 공주의 이름을 고리(高利)라 하였다. 사월에 전라도 땅을 왕이 직접 정벌하고자 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주나라의 백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왕의 행태에 놀란 신하들이 이를 저지하고자 했으나 왕의 뜻이 워낙에 완고한지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들은 태황태후는 근심이 가득 찼으나 왕을 대신해 왕후가 직접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니 태후의 근심은 한결 가라앉은 듯 보였다. 왕은 지금의 전라도 군산(群山)과 진안(鎭安)에 이르는 땅을 모두 차지하고, 중간지점인 정읍(井邑) 지역에 감영을 세워두도록 명했다.

재위 3년 정월에 왕후의 사이에서 황자를 생산했다. 이름을 임지(臨地)라 했다. 왕은 유월부터 진안을 거점으로 삼아 서진(西進)하였으며 지금의 함평 땅까지 차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왕이 사신을 보내어 진위를 묻기도 했으나 왕의 돌발에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해명을 남기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외교 분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재위 4년 정월 태후의 명에 따라 섭정을 거두고 왕에게 친정(親政)하도록 했다. 이는 형식상의 절차일 뿐이었다. 하여 왕이 직접 정무(政務)를 맡게 되니 신하들의 간담은 매우 서늘했다. 폐비의 자식이기 때문이지만 태황태후의 권세가 막강한 까닭이다. 물론 금상(今上)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사월에 왕후와의 사이에 황자가 태어났다. 왕은 이름을 이중(泥中)이라 하였다. 이 이름을 세간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 이름이 아닌가 하며 염려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자신의 미래를 암시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유월에 왕은 함평을 거점으로 동진(東進)하여 정벌하니 지금의 곡성 지역까지 차지했다.

재위 5년 정월에 왕이 야심한 밤을 이용해 홍우태자의 비(妃)인 남해부부인을 범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이 일어나자 옥구가 나서서 태황태후에게 고하자 태황태후가 이에 놀라며 말하길,

“그것이 참말이라면 이는 상피(相避)가 난 것이니 왕실은 물론이고 온 나라에 큰 근심거리가 될 터인즉 남해부부인을 즉시 자진(自盡)하도록 명하시오.”

태황태후의 명에 의해 이튿날로 남해부부인은 자진하였다. 그 전에도 이미 왕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실임이 밝혀짐에 따라 왕비는 물론 후궁들까지도 투기를 부르게 한 빌미를 만들었으니 이는 왕실의 수치이기도 했다. 부부인이 자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은 비록 자신이 친정에 나섰다고는 하나 옥씨의 세도가 여전히 막강함을 몸소 느낀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할마마마, 속이 시원하시겠습니다! 이 불초 손자가 당신 며느리를 범했으니깐 말이외다. 하하하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곡성을 거점으로 해 다시 서진을 하여 지금의 목포, 완도, 진도 일대를 모두 정벌하니 선사국의 엄연한 영토가 되었다. 태황태후의 정책은 이 왕에 의해 흐지부지되어버렸고 옥씨의 세도에 빌붙어 녹봉을 먹은 신하들이 모두 파직되어 곳곳에 유배되었다. 주왕 문왕이 왕의 행각을 두고 근심하여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이가 바로 성왕(成王)이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주나라와의 왕래(往來)는 물론 교역(交易)까지 단절하도록 명했다. 낙양경(洛陽卿)을 사신으로 파견해 이를 항의했으나 조정은 유구무언이었다.

태황태후는 하는 수없이 금상의 침전에 들어섰다. 야심한 밤이었다.

“상감, 이 할미가 잘 못했습니다. 할미는 오직 나라를 위한 충정 때문에 하는 수없이 상감을 멀리하려고 했어요. 이 못난 할미를, 이 못난 할미를 용서해주시구려.”

태황태후는 왕 앞에 나아가서는 무릎을 꿇으면서 애원 아닌 애원을 하였다. 분함을 참으며 애써 빌었건만 왕은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오직 비웃을 뿐이었다.

‘이는 필시 천륜(天倫)을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

다음날 아침. 옥씨의 친족(親族)들이 일제히 정전(正殿)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었다. 이는 인수태황태후의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중에는 옥길도 있었다. 옥길은 정전 안에 들어갔으나 이를 말리는 내관들과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간신히 상감을 알현하였다. 하여 무릎을 꿇고 상감의 도포자락을 부여잡으며 울부짖어 자신들의 과오를 용서해줄 것을 청하자 왕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태황태후의 큰오빠 옥송호의 딸을 허정대군의 배필로 삼아줄 것을 제안하자 옥씨의 어른으로서 승낙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옥송호의 딸을 허정대군의 배필로 삼고, 옥씨에게 한양군부인(漢陽郡夫人)에 봉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황태후는 자신의 간담이 서늘함을 느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손자에게 제 집안이 박살날 것을 알았음이던가.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재위 6년 정월에 조선왕 우야고가 세상 떠나고, 뒤이어 태우의가 새로 왕위에 올랐다. 태우의가 왕위에 오름에 따라 영의정을 수반으로 한 사신단을 보내어 외교를 다시 이어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태우의가 이에 기뻐하며 승낙하니 다시 조선과의 교역을 재개했고 외교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근심거리였던 영토분쟁은 무마되기에 이르렀다.

유월에 치른 과거에서 신구의 아들이자 죽은 남해부부인의 오빠인 신공신(申恭愼)이 급제하였다. 이에 왕이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하였다.

칠월에는 왕이 직접 시험관(試驗官)이 되어 과거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신봉의 아들이자 왕후의 오빠인 신원빈(申元彬)이 급제하였다. 이에 왕이 용양위 사직(司直)에 임명하였다.

구월에 선왕의 후비(后妃)인 부용귀비를 지보궁주(至寶宮主)라 봉하였다.

십일월에 안임의 딸을 왕후로 책봉하여 맞이했다. 그녀를 울진왕후(蔚珍王后)라 했다.

재위 7년 정월에 치른 과거에서 울진왕후의 오빠이자 안임의 아들인 안미생(安彌生)이 급제했다. 이에 왕은 용양위 부사직에 명했다.

이월에 정위사의 딸을 전언대군의 배필로 삼아 경인부부인(京仁府夫人)에 봉했으나 영돈령부사의 반대가 있자 왕은 진노하여 근신 처분을 내리고 자숙하도록 명했다. 이는 왕실, 그 중에 대군의 부인에 대한 칭호가 군부인과 부부인 중 단 하나의 호칭으로 확립되지 않았기에 이런 폐단이 계속 이어진 것인데 왕은 이를 고려하지 않고 단행한 것이다.

삼월에 강원도관찰사가 왕에게 소(疏)하기를, 지역이 워낙 광범위하여 도정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에 왕은 강원도관찰사의 소를 받아들여 지금의 강릉(江陵)에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함과 동시에 인사들을 파견했다. 이에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전 판중주부사인 제인을 임명하고, 전 중추부경력인 여범을 대도호부판관(大都護府判官)에, 전 한성부판윤 송찬수를 대도호부교수(大都護府敎授)에 임명했다.

오월에 선명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선왕들이 몸소 빈소를 찾는 관례를 깨고 상선(尙膳)을 대신 보내어 조문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황태후는 대노하여 왕에게 찾아가 말하길,

“황상, 이를 어이할 것이오. 역대 제왕들도 종실(宗室)을 예우하는 법도가 엄연하기에 종실에 상사(喪事)가 날 때 몸소 찾아가기도 하였소이다. 한데 작금(昨今)에 와서 보니 왕실은 물론하고 종실에 대한 예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 매우 우려스럽소이다.”

한밤중에 찾아 책망(責望)을 일삼은 태황태후를 왕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듣는 둥 마는 둥 제 서안(書案)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황상!”

그러나 이를 두고 물러 설 태황태후가 아니다.

“황상, 이 할미의 말을 듣고 있소이까?”

태황태후는 맞장으로 임금과 마주보고자 했다. 그러나 왕은 이에 아랑곳 않고 오직 책읽기에만 전념할 뿐이다.

“황상!”

태황태후의 높다란 외침에 왕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태황태후를 응시하며 대응하는데 마치 도전장(挑戰狀)을 내미는 듯 응수(應酬)하는 것이 아닌가. 태황태후는 그런 손자의 태도가 못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말없이 금상의 노려보는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나머지 헛기침을 하고 물러났다.

유월에 치른 과거에서 옥송호의 아들이자 한양군부인의 아우인 옥선(玉善)과 옥구의 세 아들인 옥수(玉水), 옥철시(玉哲時), 옥철서(玉哲瑞)가 급제하였다. 이는 왕의 특별한 명이었으니 이는 태황태후에 대한 마지막 예우나 다름이 없었다. 왕은 옥선에게 용양위 부사직을, 옥수에게 용양위 사과(司果)를, 옥철시에게 용양위 부사과(副司果)를, 옥철서에게 용양위 사정(司正)을 제수하였다.

칠월에 권선의 아들이자 선왕의 왕비인 선향왕후의 오빠인 권흥(權興)을 용양위 부장(部將)에 명했다. 이는 음보(蔭補)로 얻은 것이었다. 나이가 워낙에 많은 까닭이기도 했겠지만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이 한몫을 했다. 팔월에 역시 권선의 아들이며 선향왕후의 아우인 권식(權植)을 용양위 부사정에 명했다.

팔월 여름을 막 지나갈 무렵, 왕은 허정대군의 배필인 한양군부인을 자신의 침소에 불러들여 가까이하고자 불러들였다. 이에 왕이 그녀를 취하였다. 다음날 한양군부인이 부끄러움에 몸을 떨며 목을 매달려고 했으나 부군인 허정대군이 이를 발견하며 말리니 결국 임신을 하게 되어 딸아이를 낳자 왕은 매우 기뻐하며 옹주로 책봉하고자 했다. 그러나 옹주로 책봉해보기도 전에, 보름을 채우지도 못하고 일찍 죽고 말았다. 왕은 필시 누군가가 독살하였음을 의심하게 되니 그것이 빌미가 되어 한양군부인의 시어머니인 만명태후(선향왕후)가 시킨 일로 오해하여 폐위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반발한 태황태후가 나서서 말리고자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하여 만명태후를 폐위시키고 즉시 강제로 약을 먹여 죽이니, 이는 패륜에 지나지 않았다. 어미의 죽음을 들은 허정대군은 불안을 호소하며 밤이면 밤마다 잠자리에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광증(狂症)을 보였다. 이에 왕은 허정대군 내외에게 경상도 경주 땅으로 유배(流配)보내도록 했다.

유배된 허정대군 내외가 아들을 낳으니, 왕이 곧 이 아들에게 소인군(昭仁君)에 봉하였다. 뒤이어 자신의 패륜을 시인하며 다시는 번복하지 않음을 다짐하여 덕향왕후의 자손들에게 극진히 대하고자 했다.

구월에 치른 과거에서 조고형의 아들인 조보(趙步)가 급제하자 왕은 벽란도승(碧瀾渡丞)에 제수함과 동시에 덕향왕후의 공주인 우가공주를 배필로 보냈다. 이는 민가로 시집을 보내는 전례를 깨고 처음으로 관리의 자제와 혼인한 사례다.

십일월에 다시 과거를 치러 궁숭의 아들인 궁진(宮珍)이 급제하자 왕은 좌도수운판관에 명하였다. 뒤이어 비명(非命)에 죽은 만명태후의 소생인 하성공주를 배필로 보냈으나, 왕이 변심(變心)하여 다음날로 죽은 권씨의 소생임을 구실로 삼아 자진해서 죽을 것을 강요하니 공주는 아무런 말도 없이 스스로 자진해서 죽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상사를 치른 궁진은 이후에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아버지와의 천륜을 저버리고 스스로 달아나 주나라로 망명을 가고야 말았다. 이에 태황태후는 통한(痛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위 8년 정월(正月)에 황태후 권씨의 소생인 해연공주, 진재대군, 감홍대군이 모두 비명에 죽고 말았다. 권씨는 평소에도 태황태후의 눈과 귀 노릇을 하며 한주부인을 모함하는데 일조했다. 권씨와 그 소생들이 죽으니 태황태후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날 태황태후의 침소에서는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숙부인 옥길은 태황태후의 무기력함을 매우 가슴아파하였다. 그러잖아도 왕이 옥길을 후임으로 내정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다시 옥씨가 세도를 부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숙부님.”

“……”

숙부는 지켜보기만 한다.

“나는 십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천추의 한을 남겼어요.”

태후는 흐느낌을 억누르며

“그 어미를 폐하면서 그 자식을 왜 폐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그려.”

그러나 옥길은 아무런 힘이 없었음은 물론, 태황태후 자신도 힘이 없어졌다. 이제 금상의 힘이 매우 막강해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월(二月)에 치른 과거에서 영의정 민번주의 아들들인 민구종(閔求鐘)과 민옥숭(閔玉崇)이 급제하였다. 이에 왕은 이들에게 각각 용양위 사맹(司猛)과 용양위 부사맹에 임명하고, 그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거제왕후(巨濟王后)에 봉하였다.

삼월(三月)에 영의정 민번주가 세상을 떠나자 왕이 이를 애석히 여겨 직접 조문하였다. 이후 왕은 민번주의 후임 영의정으로 옥길을 임명했다. 그러나 임명이 된 것도 잠시, 옥길은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태황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오열하였다.

사월(四月)에 옥길의 후임으로 좌의정 정위사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리고 태황태후의 큰오빠인 옥송호를 영중추부사에 임명했다.

오월(五月)에 과천현감에 있는 온시후를 판중추부사에 명하고, 후임 과천현감으로 옥희공을 명하였다. 그리고 공조판서는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율학교수인 유구신을 좌의정에 임명하고 우의정에 길석을 앉혔다.

칠월(七月)에 궁진이 주나라로 달아난 것을 들은 조선왕이 사신을 보내 다시 귀환을 시키도록 힘쓰라고 강권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고 난색을 표하기만 할 뿐. 별다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황태후는 옥송호에게 이를 부탁해보기로 하고 은밀히 내전에 들이도록 명했다.

“오라버니, 궁진이 주나라로 도망친 것을 트집 잡아 조선왕이 금상에게 모욕을 한다고 하더이다. 우리가 그 틈을 이용해서 왕통을 새로 바꾸는 것이 어떻소이까?”

순간 옥송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역모(逆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지금의 금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지만 아직도 엄연히 왕실의 웃어른으로 있지 않는 이상은 언제든지 새로이 왕통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옥송호에게 슬며시 공모하자는 제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옥송호는 아무런 말이 없고 그저 머뭇거리는 태도만을 보이니 태황태후로서는 답답하기만 하다.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체통이 말이 아닌 것이 이 옥송호의 우매(愚昧)한 성격이 한몫을 한 것이다. 수동적(受動的)으로 상감의 의견을 듣기만 하고 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사실이 왕의 귀에까지 들렸다. 왕은 당연히 분노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선왕의 비빈들이 저지른 것이라 생각하고 덕선왕후를 비롯해 그 혈육인 인겸공주를 죽였다. 차마 참혹하기 이를 데 없어 필설(筆舌)로 표현하기 어려우나 덕선왕후의 수급을 베어 죽였는데 인겸공주에게 그 광경을 보인 뒤에, 역시 그 같은 방법으로 공주를 죽인 것이다. 뒤이어 죽은 덕선왕후의 부친인 옥희공이 과천현감에서 해임(解任)시켜 유배를 보낸 뒤에 사약(賜藥)을 내려 죽이니 둘째오빠 일가의 몰락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태황태후의 심정은 창자가 찢어지고도 남음이 있었다.

팔월(八月)에는 임고양의 딸인 창녕왕후와 그 소생인 기설공주를 죽이고야 말았다. 이에 임고양과 두 아들인 임영우(任泳雨)와 임경리(任慶利)가 곧장 주나라 땅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결국 이 소식을 들은 태황태후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울분을 부여잡고 왕을 찾아갔다.

“황상! 이 무엄한 짓이오! 선왕의 왕후를 폐하다 못해 죽이고 그 집안까지 도륙(屠戮)을 내다니 이 무슨 망발(妄發)이오!”

순간 왕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칼을 빼들어 태후의 목을 들이댔다. 순간 태후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하였다.

“태후께서야말로 이 무슨 망발이오. 내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잉첩(妾)들과 공모를 하시더니 이제는 내 보위(寶位)를 빼앗아 새로운 왕으로 갈아치우려는 역모를 공모하시다니 참으로 극악무도하십니다 그려. 허허허허…….”

그 순간 태황태후는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궁녀들이 달려 나와 쓰러진 태황태후를 부축하며 물러갔다. 이로부터 이튿날 태황태후는 자리보전을 하게 되었다. 그 곁에는 남궁의의 소생인 창원왕후와 궁상규의 소생인 지보궁주만이 있을 뿐이었다. 다른 왕비들과는 다르게 어질고 할뿐만이 아니라 인품이 고귀하며, 덕망(德望)이 높은 이들을 부모로 삼은 좋은 왕비였다. 그렇기에 왕은 이 두 왕비만큼은 후하게 대접을 하는 것이다. 외교의 문제로까지 빚어진 궁진의 도피를 의식한 왕이 조선왕에게 친서(親書)를 보내어 주나라에게 궁진의 귀환을 도와줄 것을 청하였다. 조선왕은 이에 수긍하면서 공연히 생트집을 잡았다.

조선상을 사신으로 보내어 전하길

“우리 임금께서 귀국(貴國)의 아리따운 처녀들을 뽑아 궁녀로 삼았으면 하십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 이하의 신하들은 다시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왕이 침략을 할 것을 압박하니 마지못해 십여 인의 여인들을 조선 땅에 보내었다.

이후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구월(九月)에 조정의 원로 격인 동방봉우의 두 여식을 취하여 왕비로 맞이했다. 이들은 자매로 각각 양희와 양랑이 있었다. 그 아우인 동방소(東方昭)를 전례에 따라 음보로 벼슬을 제수했다. 용양위 사용(司勇)이다. 이윽고 두 왕비를 맞이한 왕이 각각 영암왕후(靈岩王后)와 영동왕후(嶺東王后)에 봉하였다.

뒤이어 왕은 정무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매일 영암왕후와 영동왕후 두 왕후의 거처를 문지방에 닳도록 드나들고 이들에게 갖가지 사치품(奢侈品)을 사다가 바치기도 하니 백성들은 물론이고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재산을 착취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자연스럽게 영의정이 정사를 대신 돌보는 형국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십일월에 태황태후는 천추의 한을 한 아름 안고 세상을 떠났다. 창원왕후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병문안을 간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생모를 왕후로 추숭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자 태황태후가 분함을 느껴 이를 다그치고 왕의 멱살을 잡자 왕이 패대기를 치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러자 태황태후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튿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문무백관은 물론하고 백성들까지도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자, 조선에서는 패륜을 일삼는 것에 대해 매우 치를 떨었다. 조선도 물론 선사국에 못지않게 예의와 사리를 잘 따지는 나라였고 경우가 바른 나라였다. 그렇기에 패륜을 일삼은 군왕을 더는 있게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재위 9년 정월에 태황태후의 상(喪)을 치르게 되었으나, 이를 소홀히 하고 동방씨 두 여인의 치맛자락에 빠지어 등한시했다.

이월에 태황태후의 상여(喪輿)가 떠나자마자 창원왕후를 보경태후(寶敬太后)에 봉하여 황태후(皇太后)로 삼았다. 신하들은 상을 다 치른 뒤에 책봉을 할 것을 직언했으나 왕이 당신 손으로 칼을 들이대어 위협하니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제는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왕은 동방봉우의 두 딸을 무한히 신뢰하였다. 명색이 왕후였으나 천성은 매우 좋지 않았다. 왕의 낭비벽을 부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왕실의 내탕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장차 나라에 녹봉이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이로 인해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산천초목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내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국에 방문(榜文)을 붙여 여자들을 모두 공출해가니 백성들의 집집마다 통곡하는 소리로 넘쳐흘렀다. 정실왕후인 춘연왕후는 두 여인네의 치마폭에 놀아나는 광경을 보고 몸서리를 치다 못해 왕에게 그만 여자의 공출을 멈출 것을 간언하였으나 오히려

“중궁께서 투기를 부리십니까!”

하며 왕이 오히려 역정을 냈다. 이후에 정사를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백성들은 서둘러 국경을 넘어서니 이를 두고 조선왕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사신을 보내어 이를 문제 삼았으나 삼의정 이하의 신하들은 모두 유구무언, 말이 없는 형국이었다. 설령 직언을 한다손 치더라도 목이 달아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으니 결국 목숨을 담보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삼월에 왕의 폭정이 있음에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영의정이 직접 과거를 주재(主宰)했다. 이 과거에서 영의정 정위사의 아들인 정안성(鄭安盛)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자 일부 대신들이 이를 두고 형평성에 어긋남을 들어 과거를 파할 것을 권고했으나 왕의 재가를 받은 것을 이유로 이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안성에게 용양위부사용에 명하였다.

사월에 정위사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동방봉우를 영의정으로 내정하였지만, 동방봉우의 거부하자 왕이 고심하였다. 결국 황국을 영의정에 삼았다. 자신의 생모의 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인 까닭이기도 했지만 왕과 정무를 하고자 하는 이들이 극히 적었던 까닭도 있었다. 후임 예조정랑에 허정대군으로 삼았다. 허정대군은 이를 계기로 유배에서 풀려나와 일가를 거느리고 왕경에 이르렀다.

오월에 동방봉우를 공조판서에 임명했다.

유월에 영의정 황국이 세상을 떠났다. 임명받은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 황국이 왕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황상께 말씀을 드리옵니다. 황상께서 생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고 위로를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신의 마음은 기뻐 뛰어 놀겠사오나 백성들에게 학정(虐政)을 일삼으신다면 이는 나라에 망징패조(亡徵敗兆)가 될 뿐이옵니다. 바라옵건대 황상께서 부디 이 못난 사람의 말을 헤아리시어 보다 현명히 나라를 지키소서!”

이를 들은 내관이 즉시 보경태후에게 찾아가 아뢰자 보경태후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사람이 마냥 못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직 나라를 생각하는 충정이 살아있다니 나라에 큰 안심이오. 내 직접 한주부인의 사당을 차려 제사를 지내도록 해보아야겠구려.”

칠월에 보경태후는 직접 옛 한덕궁 인근에 왕의 생모인 한주부인의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내니 이 소식을 들은 왕이 이런 보경태후의 태도에 의심을 하여 태후전에 문후를 들지 않았다.

팔월에 진실로 꾸준히 보경태후가 제 생모의 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곳을 자애궁(慈愛宮)이라 하였으며 한주부인을 자애궁주(慈愛宮主)로 추숭(追崇)하였다.

구월에 길석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우의정에는 궁보사를 임명하였다.

조선왕이 선사국의 실정을 보다 못해 주나라 왕에게 친서를 보내었다. 한때나마 단교되었던 외교를 회복하고 선사국에 대한 정책을 같이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주나라 왕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십일월에 조선왕이 처녀들을 보내지 말 것을 청하자 영의정이 직접 이를 수락하였다. 왕은 어김없이 정무를 소홀히 하였다.

십이월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있던 최민을 영중추부사에 명하고 옥송호를 과천현감에 임명하였다. 도총관 자리에 서상범을, 부총관 자리에 백무현을, 경력에 향랑을, 그리고 안일을 도사에 임명했다.

재위 10년 정월 조선왕의 청에 따라 주나라 임금이 궁진과 그 일가를 조선 땅으로 보내었다. 이에 조선왕이 선사국의 국왕과의 동격(同格)에 해당하는 제후(諸侯)에 봉하고 선사군왕(善士郡王)이라 봉하였다. 이는 태조 궁왕이 있음을 의식한 까닭이 있어 새로이 왕통을 이을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결국 무능력한 왕을 대신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는 셈이었다. 암암리(暗暗裡)에 보경태후의 따님인 채린공주를 새로이 배필로 맞이하도록 하여 선사군왕의 왕비(王妃)에 봉하였다.

삼월에 선사군왕은 대행왕의 시호를 성종편동대왕(成宗編董大王)라 하였다. 이후 선사군왕과 더불어 선사국을 다시 침입하였다.

사월에 인사가 개편되었다. 개성부유수에 도상진, 개성부경력에 방수호, 개성부도사에 오세안, 개성부교사에 음보로 고만술의 아들 고대인(高大仁)을 임명하였다. 이렇듯 인사가 개편되자 개성부 및 황해도 주변의 치안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조선의 침입을 막는데 매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하여 왕의 무한한 신임을 얻었다.

오월에 조선왕이 하세하자 뒤이어 태자 모사라가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선사국에 대한 정책을 같이 했다.

유월, 선사국에 백성의 동요가 극심해지자 조선왕 모사라가 선사군왕 궁진을 앞세워 선사국의 영토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왕이 깜짝 놀라며 군사들을 동원해 공격하고자 했으나 이를 따르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칠월에 왕이 조선왕의 침입이 재차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불안과 공포로 허우적거리어 내전에서 두문불출하였다.

팔월에 영의정이 직접 공격을 막아보기도 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적성군수로 인승군을 임명하였다.

구월에 전국의 기생(妓生)들을 불러들여 왕이 큰 잔치를 벌였다. 신하들이 감히 낭비를 하지 말라는 직언을 올리기 어려워하였다.

시월에 조선왕이 선사군왕 궁진을 거느리어 3차 침입을 하였다. 황해도 해주 땅을 점거한 뒤 반항하는 양민들을 모두 죽이니, 죽은 이가 십만을 헤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화들짝 놀라며 제 일신의 보전을 위하여 도성을 버리고 몽진(蒙塵)하고자 하였으나 영의정 이하 신하들이 일제히 말리므로 무산되었다.

십일월 초에 황해도 감영 관리들이 항복하였고, 중순에 개성부 관리들이 항복하였다.

십이월에 도성 가까이 다가갔으나 영의정이 비밀리에 선사군왕과 회담을 요청하자 선사군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영의정 이하 모든 대신들이 직접 선사군왕에게 알현(謁見)하니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조선왕과의 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회담에서 영의정 이하 모든 관리들은 조선왕의 청을 받아들여 반정(反正)을 도모하고자 결의하였다.

재위 11년 정월이다. 대궐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 떠오르자 웬 정체불명의 사병(私兵)들이 들고 일어났다.

“꺅―”

궁녀들의 비명소리가 온 궁궐을 가득 채우고 병사들과 사병들과의 싸움이 계속 되고 있었다. 서로 칼을 휘두르고 죽이는 일이 부지기수. 온 대궐은 그야말로 피가 낭자(狼藉)하였다. 폭군이나 진배없는 왕은 밖이 어수선한 것도 모르고 동방씨의 두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그때였다.

“폐주 마동은 어명을 받아라!”

마동은 보위에 오르기 전에 불리운 이름이다. 왕의 침전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사내의 소리에 두 여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왕도 덩달아 깨어났다. 게슴츠레 눈을 뜬 왕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고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한 두 여자는 알 수 없는 군사들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폭군 마동은 어딨는가!”

그러자 영암왕후가

“네 이놈! 폭군이라니!”

맞대응하였다.

“이곳엔 지엄하신 분이 계시건대 폭군이라니!”

영암왕후의 말에 군졸들은 키득키득 웃고만 있다. 이때 높은 분이 행차한 듯 예의를 바로 갖춘다.

영암왕후와 영동왕후는 왕을 호위(護衛)하였다. 간신히 잠에서 깨어난 왕은 비로소 현실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지나갔다. 선사군왕 궁진이 다다랐기 때문이다. 왕 앞에 다가간 궁진은 한심한 듯 쳐다보았다.

“무엄하구나! 감히 예가 어데라고 찾아온 게냐!”

적반하장으로 덤벼드는 폐주를 궁진은 모른 체 했다.

궁진의 곁에 수하 한 명이 옆에 다가가더니 제 품에서 칙서(勅書)를 꺼내어 이를 읽어냈다.

폐주 마동을 죽서왕으로 격하(格下)하고, 조선의 왕경인 아사달(阿斯達)로 압송할 것을 명한다. - 조선왕

그러자

“뭣이? 폐위라니, 폐위라니!”

으르렁거리는 왕을 궁진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무엄한, 네 이×―!”

왕이 재차 소리쳤다. 아니 폐주가 소리쳤다. 그러자 두 왕비는 통곡을 하였다.

“폐하, 폐하―”

결국 왕은 조선왕에 의해 폐위되었다. 병졸들에게 포승(捕繩)을 받은 치욕을 안고 대궐을 나섰다. 그러자 곁에 있던 동방씨 두 여인은 왕을 떼어내려고 어지간히 애를 썼으나 별무 소용이 없었다. 폐위된 그날은 온 나라가 슬픔보다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동안에 쌓인 한을 푼 셈이었다. 왕은 그 즉시로 유배를 떠나고, 중궁 춘연왕후는 죽서왕비(竹書王妃) 또는 죽서궁주(竹書宮主)라 강등(降等)하였으며, 안씨를 서덕부인(瑞德夫人)으로, 민씨를 현가부인(絃歌夫人)으로 강등하였다. 뒤이어 동방봉우의 두 딸도 그렇게 하고자 하였으나 별무소용이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선사군왕의 명을 받아 왕과 마찬가지로 동방씨 두 여자도 왕과 덩달아서 포승을 받은 채 끌려가야만 했다.

폐주는 조선왕의 명에 따라 서둘러 조선의 왕경으로 끌려가고, 선사군왕은 동방씨의 두 여자는 각기 본래의 이름 그대로 양희부인과 양랑부인으로 부르도록 하여 후덕궁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한밤중에 당시 실권자나 진배없는 동방봉우를 선사군왕은 은밀히 불러들였다.

“군왕전하!”

이제부터 군왕전하로 불리는 궁진을 대하기가 거북하기만 하려만 매사에 항상 순종적으로 살아오는데 이골이 난 동방봉우인지라 납죽 엎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하! 소인은 미련도 후회도 없사오니 죽이시거든 죽이십시오. 제 두 과람한 딸들도 모두 죽이시지요.”

그러자 곁에 있던 동방소가 읍소(泣訴)하며

“누이들은 죄가 없사옵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하며 용서를 청하자

선사군왕이 난색(難色)을 보였다.

“아니다! 너는 장차 동방씨의 집을 다스려야할 몸이다!”

점잖게 꾸짖는 봉우의 말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좋소, 두 부인을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게 하겠소.”

동방씨 부자는 그저 묵묵히 망극하다고 할 뿐이었다. 이제 궁진은 선사국왕의 지위에 맞먹는 권세를 얻었다. 제 치마폭으로 왕을 폐주로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병조 감영 앞에서 두 여인은 효수되었다. 아녀자(兒女子)의 몸으로 정사를 독단(獨斷)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뒤 동방봉우와 동방소 부자는 살아남았다. 각기 딸들과 누이들의 명줄을 팔아넘긴 대가였다.

이에 조선왕은 흔쾌히 선사국의 군주로 새로이 옹립하니, 이이가 곧 순강왕(順康王)이다. 이는 정승 출신의 태조 궁왕이 즉위한 이래, 다시 궁씨가 왕위에 오른 사례인 것이다.

순강왕은 조선왕이 선사군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을 근거로 삼아 새로 내린 왕호(王號)이다. 영의정 길석 이하의 신하들이 정연당 앞에서 모여 새로운 왕의 추대를 반겼다. 황태후는 새 왕에게 후사를 부탁하노라고 일렀다. 이는 폐주 죽서왕의 자식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를 모를 까닭이 없는 순강왕은 태후를 위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더불어 순강왕의 즉위와 함께 순강왕의 부인(채린공주)을 순강왕비로 이름 했다. 처음에 황태후는 고씨 집안에 후사를 삼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선사군왕에 봉한 궁진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던 거다. 내심 기대가 컸던 만큼 황태후의 마음도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순강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은 조선의 수도 아사달에도 전해졌다. 폐주 죽서왕은 매일 아침이면 조선왕에게 문후를 여쭙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말의 복위(復位)를 희망한 적도 없었다. 그는 정인들을 모두 반란의 수괴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동방씨 두 여인을 꿈속에서나마 만나곤 한다. 그러나 그것도 허망한 꿈. 왕은 그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병을 앓기 시작했다.

고국엔 왕후가, 아니 폐주의 부인이 궐 밖으로 쫓겨난 채 죽서궁에 유폐되어 있다. 그걸 모를 까닭이 없는 폐주다. 그런 폐주를 딱하게 여긴 조선왕의 왕비가 왕에게 애걸복걸하며 고국으로 귀환시킬 것을 주청하였지만 왕은 끝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왕경의 구석진 곳에서 외로운 말년을 보내었다.

순강왕이 즉위한 지 2년이 된 정월에 누구에게 임종도 받아보지 못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폐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순강왕이 직접 조선의 왕경에 찾아가 그 시신을 수습하니, 시신은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국에 들어온 것을 본 죽서왕비, 아니 죽서궁주는 시신을 부여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한(恨)을 짊어졌을까. 그 곁을 지켜보던 죽서왕의 자식들도 바닥에 엎드리어 통곡하는데 여념이 없다. 왕은 손수 죽서왕의 시신을 왕릉(王陵)에 묻히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반대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조정에서만큼은 어느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때나마 모셔왔던 주군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궁께서 투기를 부리십니까!”

오월에 동방봉우를 공조판서에 임명했다.

유월에 영의정 황국이 세상을 떠났다. 임명받은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 황국이 왕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를 들은 내관이 즉시 보경태후에게 찾아가 아뢰자 보경태후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구월에 길석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우의정에는 궁보사를 임명하였다.

십일월에 조선왕이 처녀들을 보내지 말 것을 청하자 영의정이 직접 이를 수락하였다. 왕은 어김없이 정무를 소홀히 하였다.

삼월에 선사군왕은 대행왕의 시호를 성종편동대왕(成宗編董大王)라 하였다. 이후 선사군왕과 더불어 선사국을 다시 침입하였다.

오월에 조선왕이 하세하자 뒤이어 태자 모사라가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선사국에 대한 정책을 같이 했다.

칠월에 왕이 조선왕의 침입이 재차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불안과 공포로 허우적거리어 내전에서 두문불출하였다.

팔월에 영의정이 직접 공격을 막아보기도 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적성군수로 인승군을 임명하였다.

구월에 전국의 기생(妓生)들을 불러들여 왕이 큰 잔치를 벌였다. 신하들이 감히 낭비를 하지 말라는 직언을 올리기 어려워하였다.

십일월 초에 황해도 감영 관리들이 항복하였고, 중순에 개성부 관리들이 항복하였다.

재위 11년 정월이다. 대궐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 떠오르자 웬 정체불명의 사병(私兵)들이 들고 일어났다.

“꺅―”

“폐주 마동은 어명을 받아라!”

“폭군 마동은 어딨는가!”

그러자 영암왕후가

“네 이놈! 폭군이라니!”

맞대응하였다.

“이곳엔 지엄하신 분이 계시건대 폭군이라니!”

영암왕후의 말에 군졸들은 키득키득 웃고만 있다. 이때 높은 분이 행차한 듯 예의를 바로 갖춘다.

“무엄하구나! 감히 예가 어데라고 찾아온 게냐!”

적반하장으로 덤벼드는 폐주를 궁진은 모른 체 했다.

궁진의 곁에 수하 한 명이 옆에 다가가더니 제 품에서 칙서(勅書)를 꺼내어 이를 읽어냈다.

폐주 마동을 죽서왕으로 격하(格下)하고, 조선의 왕경인 아사달(阿斯達)로 압송할 것을 명한다. - 조선왕

그러자

“뭣이? 폐위라니, 폐위라니!”

으르렁거리는 왕을 궁진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무엄한, 네 이×―!”

왕이 재차 소리쳤다. 아니 폐주가 소리쳤다. 그러자 두 왕비는 통곡을 하였다.

“폐하, 폐하―”

“군왕전하!”

“전하! 소인은 미련도 후회도 없사오니 죽이시거든 죽이십시오. 제 두 과람한 딸들도 모두 죽이시지요.”

그러자 곁에 있던 동방소가 읍소(泣訴)하며

“누이들은 죄가 없사옵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하며 용서를 청하자

선사군왕이 난색(難色)을 보였다.

“아니다! 너는 장차 동방씨의 집을 다스려야할 몸이다!”

점잖게 꾸짖는 봉우의 말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좋소, 두 부인을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게 하겠소.”

그 뒤 동방봉우와 동방소 부자는 살아남았다. 각기 딸들과 누이들의 명줄을 팔아넘긴 대가였다.

순강왕이 즉위한 직후 나라는 안정을 되찾았다. 황태후는 자연스럽게 태황태후에 오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전왕(前王)이 폐위되었던 까닭에 황태후의 지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재위 2년 정월에 폐주 죽서왕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죽서왕의 왕비인 죽서궁주와 그 일가가 나서서 시신을 맞이하니 모두들 통곡하는 데 여념 없었다. 왕은 영의정을 불러다 시신을 도성 동편에 터를 잡아 왕릉을 짓게 하였으며, 묘를 죽서왕릉이라 하였다. 궁주를 은밀히 불러들여 왕이 부군의 곁에 묻어둘 것을 약속하였다.

삼월에 신성대군에게 유구신의 딸을 배필로 삼게 하고 그 부인을 삼전군부인이라 하였다.

사월에 길석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순강왕이 직접 빈소(殯所)에 찾아가 유족들에게 위로하였다. 이에 왕이 의정부의 인사를 새로 단행하였다. 영의정에 유구신을 임명하고, 좌의정에 궁보사, 우의정에 강찬, 좌찬성에 향길, 우찬성에 천무, 좌참찬에 오세안, 우참찬에 안일, 의정부사인에 주현우, 의정부검상에 도상진, 의정부사록에 제인을 임명하였다.

오월에 이조의 인사를 단행함과 동시에 상서원이라는 관청을 세웠다. 상서원은 한 나라의 도장인 옥새(玉璽)를 관리하는 관청으로서 왕이 직접 명을 내려 관청을 따로 설치한 것이다. 이것은 곧 훗날의 왕들에게 있어 왕권강화를 굳건히 하도록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조판서에 인수태후의 오빠인 옥송호를 임명하고, 이조참판에 권선, 이조참의에 민번주, 이조정랑에 한주궁주의 오라버니인 황선교, 이조좌랑에 정안성, 상서원정에 신구, 상서원판관에 천위사, 상서원직장에 노주앙, 상서원부직장에 설국의를 임명했다.

유월에 양화도승에 백무현을, 임진도승에 염건식을, 한강도승(漢江渡丞)에 서상범을, 기린도역승(麒麟道驛丞)에 김동탁을, 금교도찰방에 최민을, 청단도찰방에 홍가를 임명하여 외방에 관리들을 파견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도록 했다.

칠월에 왕명으로 치른 과거에서 영의정 유구신의 아들인 유동민(柳東敏)과 의정부사록 제인의 아들인 제길(諸吉)이 급제하였다. 왕은 이에 유동민을 종사랑에, 제길을 장사랑에 각각 봉하였다.

팔월에 한 달 동안을 폐조(廢朝)를 명하였다. 이는 백성들이 여름나는 것이 어려움을 고려하여 내린 조치였으니 왕의 넓으신 아량을 입은 것에 힘입은 백성들이 스스로 자치(自治)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는 이미 스스로 자발적으로 학문의 도가 높았기도 하지만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시기였던 만큼 스스로 자치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어쩌면 먼 훗날 백성들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을 예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구월에 표강공주가 혼기가 넘침을 근심한 황태후가 왕에게 직접 부탁하니, 흔쾌히 받아들여 혼처(婚處)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하여 공조참의 안임의 아들인 안미생에게 배필을 삼도록 명하였다. 안임은 왕명에 흔쾌히 받아들이며 감사함을 잊지 못한다며 왕실에 경기도 고양 땅 이천 결을 바쳤다.

시월에 문길구를 부사과에서 사과로 승급하고, 황보진에게 부장에서 부사과로 승급했다.

십일월에 중추부인사가 단행됐다. 영중추부사에 백무현, 판중추부사에 염건식, 지중추부사에 서상범, 동지중추부사에 김동탁, 첨지중추부사에 최민, 중추부경력에 홍가, 중추부도사에 봉길조를 임명하였다.

십이월에 영돈령부사인 궁호의 간청에 의해 돈령부의 인사를 임명했다. 판돈령부사에 문길구를, 지돈령부사에 황보진을, 동지돈령부사에 설국의를, 돈령부도정에 궁배, 돈령부정에 송찬수를, 돈령부부정에 대현을, 돈령부첨정에 하정을, 돈령부판관에 방정대군을, 돈령부주부에 돈령부직장에 궁안을, 돈령부봉사에 궁상규, 돈령부참봉에 고만술을 임명했다.

재위 삼년 정월에 오위의 군사들은 모두 왕명에 의해 민가의 백성들을 간추려 임명되었다. 이후 나라의 국방이 탄탄함을 대내외에 떨칠 수 있게 되었다.

이월에 순강왕이 대신들을 이끌고 인왕산(仁王山)에 거둥하였다. 인왕산에 거둥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대궐을 짓기 위함이다. 이곳을 대궐로 짓겠다는 왕의 의지에 대해 신하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살고 있는 대궐이 이미 핏빛으로 찌들었음을 들며 새로이 궁궐을 지어 이어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덕궁은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중건을 하게 된다면 그 터에 마련한 폐비의 사당이 말썽이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 인왕산 자락에 터를 잡아 대궐을 짓고자 한 것이다. 황태후에게 뜻을 전하자 처음엔 백성들의 노고를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왕의 간곡한 청에 마지못하여 인왕산 자락에 대궐을 짓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원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단하였지만 하는 수 없는 공사였다. 전국에 백성들이 모여들어 인왕산 자락에 대궐을 짓는 데에 동원되고 하다 보니 농사일은 뒷전이었다. 이 대궐은 이듬해인 순강 4년 정월에 완공하니 왕은 이 궁궐의 이름을 소덕궁(昭德宮)이라 지었다. 이에 왕실은 새 대궐인 소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이월에 중추부의 인사를 단행하였다. 영중추부사에 백무현, 판중추부사에 염건식, 지중추부사에 서상범, 동지중추부사에 김동탁, 첨지중추부사에 최민, 중추부경력에 홍가, 중추부도사에 봉길조가 임명되었다.

삼월에 임고양이 주나라 왕의 미움을 사 조선 땅으로 망명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왕이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영의정을 사신으로 삼아 조선에 파견하여 알아보게 하니, 조선의 왕경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조선왕의 도움을 얻어 귀국을 시키도록 하니 임고양은 조선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뒤, 순강왕에게 손수 사죄의 글을 올리니 순강왕이 이 글을 읽고는 깊이 감동을 받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봉하는 교지를 내렸다.

사월에 보국숭록대부 임고양에게 고양 땅 오십 결을 하사하고, 도성 안에 집을 하사하였다. 이후에 왕이 임씨 일가가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오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오월에 조선왕이 주나라 왕에게 임고양의 아들들인 임영우와 임경리를 본국으로 귀국시킬 것을 요청하자, 주나라의 왕이 이를 받아들여 두 사람을 본국에 귀국시켰다. 순강왕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각각 선교랑과 선무랑에 봉하였다.

유월에 영비를 후덕궁주에 봉하였다. 후덕궁에 우환이 많음을 우려한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였으나 왕은 이를 거절하고 한사코 기거하도록 명했다. 이는 선왕의 후비에 대한 각별한 예우였다.

칠월에 안비를 흥덕궁주(興德宮主)에 봉하였다. 그리고 안비가 기거하는 곳을 그대로 흥덕궁이라 이름했다. 이는 선왕의 후비에 대한 각별한 예우였다.

팔월에 선비를 인덕궁주(仁德宮主)에 봉하였다. 그리고 선비가 기거하는 곳을 인덕궁이라 이름했다. 이는 선왕의 후비에 대한 각별한 예우였다.

구월에 효비를 수선궁주(修善宮主)에 봉하였다. 그리고 효비가 기거하는 곳을 수선궁이라 이름했다. 이는 선왕의 후비에 대한 각별한 예우였다.

십일월에 왕은 황태후에게 후사를 눈여겨봄을 말했다. 그러자 황태후가 놀라며

“그 후사가 누구요?”

하며 물으니

“천가군의 아들인 대야군(大野君)입니다. 대야군은 듣자하니 금년에 팔세(八世)로 보통 어린 나이치고는 총명하기 한량없으며 웃어른들을 깍듯이 모실 줄 알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일찍이 통달하였다고 하더이다.”

왕이 답했다.

그러자 태후는

“대야군이라면 천가군의 아들임은 말할 것도 없고 추양대군의 손자가 되는구려. 그럼 정히 그렇게 맘을 먹었다면 받아들이겠소. 허나 장성할 때까지는 상감께서 곁에서 보필해주시구려. 부탁드리오.”

왕의 굳은 의지를 받아들여 대야군을 후사로 맞이한다는 소식을 듣자 추양대군과 천가군이 나서며 이를 마다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태후가 이들 부자를 불러들여 나라의 국법이 지엄함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순강왕은 왕비인 채린공주 사이에 궁방(宮芳), 궁희종(宮熙鍾), 궁열(宮烈) 삼 형제를 두었으나, 이들을 후사로 삼지 않았다. 이는 왕실의 내홍(內訌)을 우려함이었다. 때문에 대야군을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야군은 부모에게 작별을 고하고 대궐에 들어와 태자로서 살게 되었다.

순강 5년 정월에 홍우태자를 용종태정대왕(龍宗泰政大王)이라 추존하고 그 부인되는 남해부부인 신씨를 남도왕후(南都王后)라 추존하였다. 그리고 그 봉사손(奉祀孫)으로 태자인 대야군을 삼았다. 이는 왕실의 적통을 계승하기 위함이었으니 황태후의 마음은 매우 흡족하기 한량없었다.

이월에 의흥위의 인사를 임명했다. 의흥위장에 궁길을, 의흥위상호군에 호포를, 의흥위대호군에 임영우를, 의흥위호군에 임경리를, 의흥위부호군에 독수대군을, 의흥위사직에 허정대군을 임명했다.

삼월에 영의정 유구신이 세상을 떠나고 궁보사를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뒤이어 의정부 인사를 임명했다. 좌의정에 강찬, 우의정에 향길, 좌찬성에 천무, 우찬성에 오세안, 좌참찬에 안일, 우참찬에 주현우, 의정부사인에 도상진, 의정부검상에 제인, 의정부사록에 신구를 임명했다.

사월에 추양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추양대군의 친손자인 태자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오월에 영의정 궁보사가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자손이 없음을 알게 되어 왕이 자신의 차남인 궁희종에게 대신 장례를 치르게 했다.

칠월에 궁소지의 아들 궁손(宮孫)이 급제하였다. 이에 의흥위부사직에 임명했다.

팔월에 온 나라에 장마가 쏟아져 물에 잠기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구월에 가뭄이 들자 왕이 직접 옛 한덕궁 터에 있는 사당에 찾아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그러자 왕의 간청에 못 이겨 비가 내렸다.

십일월에 의정부 인사가 단행됐다. 영의정에 강찬을 임명하고, 좌의정에 향길, 우의정에 천무, 좌찬성에 오세안, 우찬성에 안일, 좌참찬에 주현우, 우참찬에 도상진, 의정부사인에 제인, 의정부검상에 신구, 의정부사록에 봉길조를 임명했다.

십이월에 순강왕이 병이 들어 몸져누웠다.

순강 6년 정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후인 채린공주의 지위는 왕후에서 궁주로 바뀌어 순강궁주라 이름 했다. 그러자 보경태후는 태자를 왕위로 옹립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하니, 영의정 이하의 신하들이 모두 태황태후로 봉하자 황태후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월에 보경태황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왕이 장성할 때까지 섭정을 맡기로 하고 정무를 맡았다.

삼월에 왕후를 간택하도록 태후가 명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향길의 손녀이자 향랑의 딸을 추천하자 이를 받아들여 왕후로 맞이하고, 개녕왕후라 봉하였다.

사월에 후궁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문길구의 딸로 낙점되어 천연귀비(天然貴妃)라 봉하였다.

오월에 후궁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황보진의 딸로 낙점되어 신호원비(信湖院妃)라 봉하였다.

칠월에 승강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노량부부인과 인승군에게 위로를 표하고 후히 상을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팔월에 강찬이 영의정을 사임하였다. 이에 태황태후가 백무현을 영의정을 삼았다.

구월에 강찬의 두 아들인 강덕상(姜德相)과 강창훈(姜昌勳)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에 태황태후가 왕을 대행하여 각각 의흥위사과, 의흥위부장에 각각 봉했다.

십일월에 궁진의 세 아들인 궁방, 궁희종, 궁열이 과거에 급제했다. 궁방을 의흥위부사과에, 궁희종을 의흥위사정에, 궁열이 의흥위부사정에 각각 봉했다.

십이월에 장훈의 두 아들인 장벽(張碧)과 장모(張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자 태황태후는 전례에 따라 각각 의흥위사맹과 의흥위부사맹에 명했다.

재위 1년 정월에(이때를 기준으로 ‘재위 1년’으로 삼았다.) 백공과 백덕을 각각 의흥위사용과 의흥위부사용에 명했다.

이월에 백무현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태황태후가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하였다. 왕에게 명하여 시호를 내리게 하니 시호를 승덕공(承德公)이라 하였다. 평생 덕을 받드는 데에 일조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그는 여느 대신들과는 다르게 역대 왕들을 받들어 모시면서 단 한 번도 권세욕을 보이지 않은 것을 높이 산 것이다.

삼월에 강찬을 다시 영의정으로 삼았다. 좌의정에 향길을, 우의정에 천무를, 좌찬성에 오세안을, 우찬성에 안일을, 좌참찬에 주현우를, 우참찬에 도상진을, 의정부사인에 제인을, 의정부검상에 신구를, 의정부사록에 박영이 맡았다.

유월에 강찬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에 향길을 내정하여 맡도록 했다. 그러나 향길이 이를 한사코 마다하니 한때 권세를 누린 바 있는 옥송호를 영의정에 명했다.

칠월에 추양대군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왕은 대군 부인의 예로서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했다.

팔월에 이조의 인사를 단행했다. 이조판서에 승강대군을, 이조참판에 길돈을, 이조참의에 현태를, 이조정랑에 궁숭을, 이조좌랑에 신공신을 임명했다.

구월에 편구대군을 영중추부사에 명하고, 부인인 봉학인의 딸을 태황태후의 명에 따라 가평군부인에 봉하였다. 슬하에 황슬군(黃瑟君), 국윤군(國倫君), 어음공주(於吟公主), 송성군(松晟君), 편람군(片藍君), 천아군(天阿君), 정경공주(貞慶公主), 기광공주(基廣公主), 민찬공주(民贊公主)를 두었다. 전언대군을 판중추부사에 명하였다. 그 배필이 되는 경인부부인을 경인군부인으로 봉하였다. 슬하에 천호공주(天湖公主), 나적공주(羅積公主), 방린공주(芳麟公主), 심찬공주(審贊公主), 송슬공주(松瑟公主), 승성군(承成君), 위정군(衛定君), 구렬군(龜烈君)을 두었다. 뒤이어 신성대군을 지중추부사에 명하였다. 그 배필이 되는 삼전군부인과의 사이에 보령공주(寶寧公主), 보낭공주(寶朗公主), 보성대군(寶性大君)을 두었다.

그리고 허정대군을 동지중추부사에 명하였다. 그리고 의흥위사직에 이각을 명하였다.

십일월에 첨지중추부사에 옥구를 명하였다.

십이월에 중추부경력에 임고양을 명하였다.

재위 2년 정월. 중추부도사에 민번주를 명하였다. 이렇듯 종친(宗親)들에게 중추부를 맡기는 것은 보경태황태후의 집안이 매우 한미한 까닭이기도 하지만, 은밀히 종친들과의 교류를 돈독히 한 까닭이기도 하다.

이월에 죽은 승강대군의 부인인 노량부부인을 노량군부인에 봉하였다. 이는 ‘군부인’과 ‘부부인’을 구분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리고 태황태후의 명에 의해, ‘부부인’이라는 호칭을 왕후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삼월에 향길의 손자들이자 향랑의 아들들인 향부(香芙), 향일(香日), 향국(香國), 향호(香壺)가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잖아도 외척들의 발호와, 대신들의 자제들에 대해 편파적(偏頗的)으로 조정에 진출한 것에 대해 일부 관료들이 우려를 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이에 태황태후가 대노하여 이를 문제 삼은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켜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니 태황태후의 권세가 실로 막강하였다. 그러나 향랑의 아들들 모두가 공교롭게도 중궁의 오빠들이니 태황태후는 일부 신하들의 형평성까지 고려하여 근신 처분을 내렸다.

사월에 향부를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하고, 향일을 여주목사(麗州牧使)에, 향국을 양주목사(陽州牧使)에, 향호를 파주목사(坡州牧使)에 임명하였다.

오월에 모사라가 사신을 보냈다.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이 모두 사신을 맞이하니 융숭히 대접하였다.

유월에 주나라 성왕이 세상을 떠났다. 뒤이어 태자가 왕위에 올라 강왕(康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왕이 영의정을 수반으로 하여, 즉위를 축하하는 특사(特使)를 보냈다.

칠월에 장문의 손자이자 장제의 아들이며 양화군부인의 동생인 장국(張國)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에 그를 금천현감(衿川縣監)에 명하였다.

팔월에 연이어 과거를 치렀는데 봉길조의 손자이자 봉학인의 아들인 봉열(奉悅)이 이때 과거에 급제했다. 그를 좌도수운판관(左道水運判官)에 임명했다.

구월에 초정술을 좌도수군판관(右道水運判官)에, 초금을 해운판관(海運判官)에, 초보를 영서도찰방(迎曙道察訪)에 명했다.

십이월에 순강왕이 하세한 뒤. 태황태후는 상감과 중궁을 한밤중에 불러다 놓고서 죽서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왕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굳었으며 어린 나이답지 않게 혜안이 매우 깊었다.

“죽은 폐주가 생각이 나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황상, 나는 황상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지난날 죽서왕이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자못 불안해하며 살아왔습니다. 조부님이 왕후들을 연이어 두신 까닭에 왕후들 간의 투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걸 빌미로 삼아 죽서왕은 여러 왕후들을 죽이기 시작했지요. 그랬기에 가슴이 조마조마 하더이다. 해서 어떻게 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온갖 궁리를 다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폐주의 그 원한은 어느 누가 막을 수 없었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허송세월(虛送歲月)만 보냈습니다.”

격세감(隔世感)이 든 회한에 태황태후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나마 내가 그 아픈 마음을 가진 폐주를 손수 어루만지며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론하고 내 소생의 왕자와 공주들이 살아남게 되었던 겁니다. 하지만 내 주위의 왕후들은 모두 폐주의 손에 박살이 나고 그에 놀아날까 저어되어 그 외척들이 나를 찾아와서는 목숨을 구걸하고는 했지요. 그래서 나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헤아리어 상감에게 삼세번으로 구명하도록 간청했습니다. 해서 이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요.”

왕 내외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

“그런데 오늘의 조정을 보고 있노라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양상이 보입디다. 제 잇속을 챙겨 제 자식들에게 과거를 급제하게 하지를 않나, 벼슬을 청탁하지를 않나, 음서를 이용하지를 않나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더랍니다.”

적막함이 감돌았다.

“그래서 나는 남궁씨 집안의 여식으로서 이 왕실의 웃어른으로 있기까지 웬만하면 우리 일가가 조정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살아왔습니다.”

“……”

“어떻게 보면 폭군으로 불리는 죽서왕의 심정은 헤아릴 만 합니다.”

“……”

“이 할미는 살만큼 살아온 사람입니다.”

“……”

“상감, 이 할미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시렵니까.”

“그럼요, 할마마마.”

금상이 용종대왕의 양자로 입적하였으므로 태황태후는 엄연한 할머니뻘이다. 해서 이리 호칭하는 것이다.

“죽서왕을 추숭(追崇)해야 할까 하는데 어떠할까요.”

순간 금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추숭이라니요? 만약 신하들이 알기라도 하면.”

눈물을 그치고 태황태후는 만면에 웃으며

“하하하하, 온 상감도. 이 할미가 신하들과 담판을 지어서라도 그리 할 겁니다. 상감은 그냥 지켜보시기만 하세요.”

하며 왕으로부터 마지막 소원을 받아들여졌다.

다음날 태황태후는 종실의 대군들을 대동하고 죽서왕에 대한 추숭의 문제를 의논하였다. 당연히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태황태후는 결단을 내렸다. 종실의 일은 종실의 일이며 신하들의 일은 신하들의 일이라며 일축한 뒤 관철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에 죽서왕의 새로운 시호를 내리니, 양종순산응덕대왕(兩宗舜山應德大王)이라 했다.

이후 죽서궁주의 예우에 대해 의논이 있었으나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재위 10년이 되어서야 죽서궁주를 본래의 이름을 살려 춘연왕후라는 칭호를 돌려받았다. 뒤이어 태황태후의 명에 따라 춘연왕후를 대궐로 불러들여 살게 하며 황태후에 봉하였으니, 그녀를 인선태후(仁善太后)에 봉하였다. 그러나 다른 왕후들은 물론, 동방씨의 두 왕후들에 대한 예우는 모두 그대로 부인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고 이후에 논의는 없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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