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궐 안의 내관을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전 안에 들어선 양녕대군이 꾸중한다. 내관이 이를 자초지종 설명하였다.

“듣기 싫다 이놈! 네놈부터 능지처참(陵遲處斬)해야 할 것이다.”

양녕대군은 공연히 혜빈이 수양대군과 금상의 사이에 이간질하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였다. 정란이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혜빈이 멀쩡히 살아있음을 매우 괘씸하던 것이다. 줏대 없는 어린 상감. 대군의 아우님이신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적장이 승계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대로 따랐건만. 좌찬성 한확이 두고 볼 수 없어

“오늘은 그만 물러나십시오. 이 일은 의정부 안에서 의논하겠습니다.”

양녕대군을 타일렀다.

“어디 두고 봅시다!”

양녕대군은 벌떡 일어나 임금에게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일주일 뒤. 대궐 안팎에 혜빈이 수양대군에게 오만방자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를 듣다 못 해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알현하니

“혜빈의 태도가 너무 방자하지 않습니까?”

명회의 물음에 수양대군은

“그냥 덮어두세.”

하고 더 이상의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묵인하고자 했다.

“혜빈은 전하의 유모인데 대군께서 보시는 앞에서 전하를 꾸짖으시다니 이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일은 차차 잡아가기로 하세.”

“뒤로 미룰 일은 아닙니다. 혜빈이 전하를 업신여기는 만큼 왕실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제2의, 제3의 안평대군이 들고 일어납니다.”

“내게 복안(腹案)이 되어 있으이. 너무 서두르지 마시게.”

“대군께선 단숨에 해나가셔야 합니다. 발본색원(拔本塞源)하셔야 합니다. 근본부터 바꿔나가셔야 합니다. 우선 대궐 안부터 하십시오.”

“그게 무슨 말인가.”

“양녕대군께서 이미 어린 금상께 말씀하셨습니다.”

명회의 대답을 듣고 수양대군이

“양녕대군께서 노망이 드셨으이! 내가 안평을 죽였거늘 또 다시 내 손에 피를 보아야만 한단 말이냐!”

버럭 소리친다.

“그것이 순리(順理)이옵니다.”

수양대군이,

“순리!”

재차 소리를 쳤다.

“그만두시게. 또 한 번 불충한 소리를 한다면 내 능히 자네를 죽일 것이네.”

나직이 수양대군은 명회에게 경고하였다. 수양대군을 알현한 날 밤. 권람과 같이 술상을 마주하였다.

“이 사람 자준, 옛말에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네. 이번 정란에 죽고 다친 사람들이 많으니 민심부터 추스르게. 대군께서 실덕하실까 저어되네.”

권람이 우려한다.

“대궐 안팎에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잔당들이 널려 있네. 그 뿌리가 깊고도 깊겠지. 설령 정란이 성공되었어도 언제 어떻게 이들에게 역전될 빌미가 생길 뿐만 아니라, 대군에게 때때로 시비가 따를 것일세.”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방죽이 무너지는 건 눈곱만한 개미구멍에서부터 시작되네. 대군께서 변을 당하시는 건 시간문제일세.”

“그렇다고 그들을 다 죽일 수만은 없네.”

명회가 권람의 말을 듣고 웃는다.

“왜 웃으시는가.”

“모르시는가.”

“그들을 죽이지 않고도 이룰 수 있는데 그게 대자대비한 길일세.”

“무엇인가.”

“대군께서는 보위에 오르셔야 하네.”

권람이 놀란다.

“대군께서 보위에 오르셔야 무고한 살상을 막을 수 있네.”

장담하듯 명회의 확신이 차 있었다. 한편, 수양대군의 며느리 한씨는 안채에서 시어머니와 같이, 바느질하고 있었다. 정란공신들의 처자들을 거두어 돌보도록 직언을 올리는 한씨의 어린 눈에서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그 이튿날. 일부 조정 대신들이 혜빈을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내도록 청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소문의 중심에 수양대군이라는 말이 오르내렸다.

‘이제는 수양대군이 내명부의 일을 간섭하려고 들어. 어디 누가 이기는지 두고 보자.’

혜빈은 제품에서 수양대군에 대한 칼날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궐 안에서는 혜빈이 정업원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삭발하겠다고 앙탈을 부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그거 잘됐구나. 삭발하고 여승이 되겠다니. 이제야 빚을 갚은 셈이네그려.”

숙빈이 만족의 빛을 띠며 웃는 것이다.

정란이 평정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징옥(李澄玉)이 난을 일으켰다는 전보가 전해졌다. 이징옥이 자신의 상관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함길도(咸吉道)에 뜻있는 동지들과 규합, 박호문(朴好問)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은 수양대군에게 전해지고 금상에게 이를 보고하니 금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몸소 친정을 선포하기 이틀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10월 26일. 왕명으로 인사가 이루어졌다. 수양대군을 중외병마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로 삼고, 박팽년(朴彭年)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박원형(朴元亨)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변상복(邊尙服)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계손(李繼孫)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삼았다. 이 당시의 기록을 실록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징옥이 여러 조(朝)를 섬긴 장수가 되어 함길도에 있었으니, 야인(野人)들이 또한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에 반역하니, 조정에서 의논하고, 수양대군에게 중외 도통사를 더하여 여러 종족의 추장(酋長)에게 치서(致書)하여 군사를 거느려 적을 토벌하라는 뜻을 유시하니, 수양대군이 두 번 도통사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징옥의 난이 터지고 나자 수양대군은 내심 고민이 깊었다. 하지만 부인 윤씨와 며느리 한씨가 있는 자리에서 고민을 털어놓자

“아버님께서 반란을 평정하셔야 합니다. 이는 곧 아버님께 전화위복이 되지 않을는지요.”

며느리 한씨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시아버지의 심기를 굳건히 하였다. 이윽고 며느리의 뜻에 따라 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난세에 영웅호걸이 난다고 했다. 이징옥의 난은 수양대군에게 또 다른 진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세종조부터 수양대군은 문무를 두루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서를 편찬하는데, 많은 공헌을 남겼기에 가능했다. 중외병마도통사는 전군의 병권을 하나로 통합하여 지휘 감독하는 직책이다. 임금의 자리를 제외한 권력이 수양대군에게 집중된 셈이다.

이징옥이 일으킨 난리로 나라가 한동안 시끄러워질 즈음. 도원군 부인 한씨의 거처에 묘령(妙齡)의 여인이 찾아들었다. 조금은 나이가 든 아낙이 그 여인의 곁을 따르니 아마도 어느 기생집의 여인인 듯싶다. 노란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차려입고 머리를 땋아 내린 그 끝에 금박댕기를 맸다. 도원군부인을 찾은 이 여인은 그 언니 계양군부인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뉘 집 여식이신고.”

한씨의 물음에 여인은

“몰락한 사대부의 집안을 밝혀 무엇하리까. 군부인 마님.”

“양친은?”

“모두 돌아가시고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나 묘령의 이 여인은 말이 없다.

“올해 나이가”

“열아홉입니다.”

“과년한 여식을 어찌 출가를 못하셨누.”

“이것저것 물으시나 사대부의 여식이 첩살이를 자청하는 것이, 어찌 사연이 깊지 않겠습니까만.”

“그래 됐네, 됐어. 네 모양이 아주 영특하고 영롱하구나. 여자인 내 눈에도 색(色)이 넘쳐흐르니. 하하하…….”

“네가 만약 상전이 죽으라고 하면 따라서 죽겠느냐.”

한씨의 물음에 여인은

“그것에 누가 승복을 하리까.”

이를 듣고 파안대소하는 도원군 부인 한씨의 웃음을 향이(香伊)는 함빡 눈웃음으로 화답한다. 몰락한 반가의 여인 향이를 만난 뒤 아랫것을 시켜다 한명회를 불러들일 것을 내비쳤다. 이내 명회를 대령한 한씨는

“나리께서 절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하며 첫마디를 던졌다. 명회는 놀라며

“어찌 도우시라는 건지.”

한씨의 의중을 물으니

“중국의 고사를 보셔요. 제왕을 도와 천하를 도모한 이들이 종당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것이 또한 권력의 속성이 아닙니까. 시아버님께서는 정란을 도모하여 권력의 중심에 서셨으나, 지금은 그 위용에 눌려 모두 고개를 숙이겠지만 시아버님은 일인자가 아니셔서 전하께서 장성하실수록 시아버님을 권좌에서 몰아내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쓰실 겁니다.”

한씨가 시냇물 흐르듯 대답을 시원히 해낸다.

“군부인께서 그걸 알고 계십니까.”

“시아버님께서 몰락하시면 살아남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도와주시겠는지요?”

“얼마 전에 전하께서 친정을 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천운이 도와 이징옥의 난이 일어난지라 대군께서 권력의 중심에 다시 서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대군께서는 교훈을 얻으셨을 겁니다.”

한씨는 명회에게

“그러니 나리께서 우선 우리 아버님을 잘 도와주시고 받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그것이 제 청의 이유입니다.”

맑은 눈망울로 당부하는 것이다. 명회는 집을 나서며

‘대군 대감의 며느님께서는 참으로 무서운 양반이시군.’

백령백리한 수양대군의 며느리 한씨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이징옥의 난을 평정하기에 앞서 갑옷을 차려입은 채 양녕대군에게 문안을 드렸다.

“조카님께서 몸소 출정(出征)하시려고 그러나?”

양녕대군의 물음에 수양이

“네, 백부님.”

대답했다.

“변방에서 일어난 난을 가지고 그 먼 길을 가시려는가?”

“이징옥을 하루빨리 도모하지 않으면 정란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백부님,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전하를 몸소 찾아뵈어 양위하시라는 망언에 대해 사과를 하십시오.

“나는 그리 못 하이.”

“백부님!”

양녕대군이 수양대군의 엄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부님이 진정으로 상감께 사죄하신다면 종사(宗社)가 편안합니다.”

양녕대군은 놀란 표정으로 한낱 하룻강아지인 줄 알았던 수양대군을 띄엄띄엄하게 쳐다본 것을 후회하였다. 수양대군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양녕대군은 제 서안 위를 탁! 하고 쳤다. 수양대군의 출정을 계기로 수양대군 부인 윤씨가 어린 금상에게 편히 문안드리게 되었다.

이렇듯 수양대군의 기세는 더욱 등등했다. 이징옥은 함길도 일대의 토호(土豪)들과 여진으로 일컬어지는 야인(野人)들, 그중 조선과 교류하고 있는 야인들과 규합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막상 수양대군의 출정 소식이 전해지자, 함길도 백성들의 여론이 점차 수양대군의 편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민심 또한 동요하기 시작했다.

단종이 하사한 병마 도통사의 깃발을 앞세운 채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잔당들을 비롯해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했다.

어전회의에서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오로지 이징옥 한 사람에게 있겠습니까.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잔당들이 공모하였으니 진정으로 정란의 기치가 흐리고도 남으니 내가 직접 단죄하기 위해 이징옥과 그 잔당들을 찾아내어 뿌리를 뽑아내고자 합니다. 그래야만 국가의 기강이 바로 될 것입니다. 황공하게도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어 의정부의 수장으로서 대임을 맡았습니다. 국가의 초석을 다지고 사직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바, 머지않아 전하께서 친정을 행하시고자 하니 그 전에 전하의 성은에 보답하고자 하니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이 한 줌의 의심이 없게 해야 할 겁니다.”

수양대군이 조정 대신들에게 포부를 밝혔다.

“무엄하게도 이징옥이 스스로 임금으로 칭하나 세력은 미비합니다. 야인들의 뒤에 대국(大國)인 명나라가 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 성봉조(成奉祖)에게 서로 반목하여 합하지 않도록 계책을 일러두었으니 이징옥이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자멸하지만 이에 여의치 않으면 신이 직접 이징옥을 도모할 것입니다.”

수양대군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이징옥이 스스로 대금(大金)의 황제로 칭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직접 사람을 시켜 야인들의 추장들과 연락하여 반란에 동조하여 합세할 뜻을 전했지만, 야인들이 이미 명나라를 의식하여 주저하는 자세를 체했다. 그것도 모른 채 이징옥은 수하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소식이 곧장 수양대군에게 전해졌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 수양대군의 집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징옥의 수급은 도성에까지 전해져 저잣거리에 내걸려 있었다.

이윽고 수양대군의 세상이 되자, 한명회는 정란공신 1등에 책록된 것을 디딤돌로 삼아, 사복시(司僕寺)의 소윤(少尹)을 맡게 되었다. 사복시 소윤은 궁중 안에서 길러지는 말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명회의 주위에서는 그를 두고 벼슬이 약소하다고 수군댔다. 그러나 칠삭둥이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허울뿐인 경덕궁직이라는 벼슬의 몸으로 자신의 꾀를 수양대군에게 펼쳐 보이고, 마침내는 정란공신에 책록되니 이보다 더한 광영(光榮)이 어디 있을까. 그나마 조정의 녹봉을 먹을 수 있음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한편 향이에게 반가와 궁중의 법도를 가르치고 있던 도원군 부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빠지지 않고 인사하는 것에서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법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치의 어그러짐이 보이기만 하면,

“치마 끝에 버선이 보이지 않느냐. 네가 반갓집 규수인 줄 알았더니, 정녕 상것의 여식이 아니더냐!”

도원군 부인 한씨가 으름장을 놓았다. 향이가 멈칫하며 버선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큰절을 하는 것이다.

“네가 모실 어른은 예사 어른이 아니시니라.”

이렇듯 도원군 부인 한씨는 자못 엄했다.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몸종이나 머슴을 가리지 않고 엄히 대하였다.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의 소실로 보내려는 속셈이다. 향이는 금년 열아홉. 부모는 어려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자연 기적(妓籍)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한씨 부인을 만난 것은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어린 동생들의 밥걱정을 덜어내고자 한 소박한 마음에서였다.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이 이징옥을 도모하고 돌아오자 당신의 사랑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나도 조카님 못지않게 어린 금상이 불쌍하네. 가엾고도 측은한 심정이야 일러 말해 무엇하랴. 하나 종묘사직을 생각하면.”

양녕대군의 말을 듣고 수양대군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지 않습니까. 주상께서 장차 장성하시어 친정을 하신다면.”

핀잔을 주었다.

“그 이후에는 어쩌실 텐가. 주상께서 조카님을 살려두실 작정이신가. 조카님께서 권력을 놓으시면 조카님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칠걸세.”

세종대왕 생전에 당신의 둘째 아드님께 백이와 숙제의 수양산 고사를 빗대어 수양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신 저의대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수양대군이었다. 이를 모를 바 아니지만 양녕대군이 조카의 앞날이 염려되어 노파심에 뱉은 말이기도 했다.

“나는 문종대왕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아드님을 지키기로요.”

“문종 대왕께서는 그것을 믿지 않으셨네. 아니 믿으려 하지 않으셨지.”

수양대군이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들여 회맹(會盟)을 하였다. 수양대군이 금상이 앉아 있는 옥좌에 탐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보이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 일각에서는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을 죽인 것을 계기로 종친들을 염탐한다는 소문이 종친부 안팎에서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회맹을 치른 다음 날. 수양대군의 맏며느리이자 도원군 부인인 한씨가 임신했다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명례궁 근방에서 의원을 불러들여 진맥하였다. 한씨는 수양대군 내외분의 축하를 받았다.

‘장차 아드님이 태어나신다면, 내 기필코 아드님을 보위에 올릴 것이다.’

한씨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야심(野心)이라는 싹수가 트이고 있었다.

야심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하고 어린 조카만을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도 하는 수양대군의 양면성을 반영하듯, 정란공신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의 사사에 동조하거나 방임한 이들 사이에서도 혼란의 조짐이 꿈틀거렸다. 문종대왕의 상중에 금상의 가례(嘉禮)를 치러야 한다는 공론이 그것이다. 그 시초가 바로 수양대군의 부인인 낙랑부부인 윤씨였다.

“그거, 참 해괴망측하구나. 왕실의 어른으로 자처하다니.”

윤씨가 대궐에 들어가 혜빈 양씨가 으르렁거렸다.

자신이 엄연히 왕실의 웃어른이랍시고 금상의 배필을 직접 뽑아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차였건만 윤씨가 먼저 선수를 치니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술 더 떠 금성대군(錦城大君)과 공모하여 선머슴 같은 여자아이를 하나 구해다 삼간택에 추천하였는데, 보기 좋게 떨어지고 대신 풍저창수(儲倉守)로 있는 송현수(宋玹壽)의 여식을 정궁(正宮)으로 삼았다. 김사우(金師禹)의 여식과 권완(權完)의 여식을 모두 잉첩(妾)으로 삼았다. 이는 윤씨의 내조에 대한 수양대군의 관대한 처분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때가 단종 2년 정월하고도 열흘이 되는 날이었다. 이때 상황을 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 영응대군 이염, 화의군(和義君) 이영, 계양군 이증, 한남군(漢南君) 이어와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 이조판서 정창손(鄭昌孫), 병조판서 이계전, 예조판서 김조(金), 좌승지 신숙주, 우승지 박팽년(朴彭年) 등이 빈청에 모여서 의논하여 송현수의 딸을 비(妃)로 하고 김사우와 권완의 딸을 잉()으로 할 것을 아뢰었다.”

한낱 보잘 것 없던 풍저창수가 왕비의 아버지로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동지돈령부사에 제수되었다. 송현수의 여식은 국모의 자리에 앉았다. 세종대왕의 왕비이신 소헌왕후가 하세한 이후로 내명부의 수장이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다. 중궁의 자리에 막상 앉고 나니 송씨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 조심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수양대군의 꼭두각시인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였다.

첫날 영상인 수양대군의 접견을 받은 중전은 할머니뻘이 되는 혜빈과 역시 어머니뻘이 되는 숙빈에게 문후를 드렸다. 어린 나이에 중궁으로 올랐던 까닭도 있었지만, 중궁으로서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대궐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입방아를 찧는데 여념이 없었다. 수양대군의 귀에 들어갔는데, 자신은 정사를 돌보느라고 소문의 진원지를 찾을 겨를조차 없었다.

수양대군에게 겹경사가 이어졌다. 자신의 맏며느리 한씨가 옥동자(玉童子)를 낳았다. 이름을 정()이라고 지었다.

사복시의 소윤에서 주부(主簿)에 명해진 명회가 이제는 꽃봉오리처럼 어여쁜 향이를 소실로 맞이했다. 향이의 성씨는 정씨(鄭氏)라고 했다. 향이를 첩실로 맞이한 명회를 두고 민씨는 처음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이리라. 참다못해 민씨는 친정 나들이를 핑계 삼아 어머니 허씨에게 하소연을 했다. 보기가 하도 딱한 나머지 간신히 막내딸을 제집으로 보낸 뒤 민대생 영감에게

“아니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오? 사사로이 첩을 들이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가뜩이나 내 막내딸 집안 형편이 이제 막 피어나려는 참인데.”

해대는 허씨의 푸념에

“어허, 부인. 한 서방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시오. 어련히 알아서 할까.”

민대생 영감이 애써 모른 척했다. 막냇사위가 공신에 봉해지고 한술 더 떠 벼슬길에 들어갔다는 것에 큰 위안으로 삼았다.

‘죽은 태재 선생이 하늘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겠구먼.’

사복시에 벼슬자리를 맡자마자 갑작스럽게 첩실을 들였다는 소문을 들은 수양대군 부인 윤씨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일개 정란공신이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지다니.”

수양대군의 야심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윤씨이고 보면, 평소 청빈하면서도 근엄함으로써 내외명부(內外命婦)의 모범으로서 지아비에게 행여 누가 될까 내심 염려하는 것이었다.

[5]

혜빈과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계유정난의 정당성을 확립시키고자 수양대군 내외가 솔선수범하여 뽑았던 중궁이건만, 두 내외의 뜻과는 다르게 오히려 어린 임금을 감싸고 돌았으며, 내외명부를 통솔하고자 했다. 그런 중궁의 모습에 수양대군은 께름칙하게 느꼈다. 어느 순간에.

‘내가 한낱 호랑이 ㅅㄲ를 끌어들였단 말인가. 하룻강아지처럼 보이던 풍저창 관리의 여식이.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마음으로 경장(更張)하고자 하던 내 포부가 중궁의 손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자칫 자신의 앞날이 중궁 송씨에게 넘어가는 날이면, 자신은 물론 일가족이 몰살될지도 모른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이었다. 혈육과 충신을 죽인 권력의 화신 그 자체였다. 인재(人災)였다.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중궁의 행태에 따라 금성대군과 혜빈이 공공연하게 대궐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처지이고 보면, 양날의 칼에 지나지 않은 자신의 앞길이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아 섬뜩할 지경이다.

―향이를 명회의 소실로 보낸 도원군 부인은 음(陰)으로 양(陽)으로 명회의 가솔을 도와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마를 한 채 주어 내명부의 일원으로서 민씨를 융숭하게 깍듯이 대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향이를 지아비의 소실로 보낸 것이 도원군의 부인이라는 것은 뒤늦게나마 알았다. 집현전 학자들이 국상 중에 혼례를 치르지 않는 것이 옳다는 상소를 무시하고 강행한 중궁의 책봉. 그것이 오히려 수양대군에게 역효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수양대군의 부인 윤씨는 정란공신의 부인들―한명회의 부인인 민씨와 권람의 부인인 이씨(李氏)까지―을 불러다 다과(茶菓)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리라.

그뿐인가. 중궁의 아버지 송현수의 집에 금은보화와 비단들을 비롯해 쌀과 곡식들을 보내었으니 창고에 가득 찼다.

단종 가례 직후에 수양대군이 인사발령을 내리니 최항(崔恒)을 이조참판에, 신숙주를 도승지에, 권람을 우부승지에, 정란공신 가운데 홍달손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양정을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올렸다. 홍달손과 양정은 모두 당상관(堂上官)에 올랐으나, 명회만큼은 당하관(堂下官)인 정사품(正四品)에 버려졌다. 이번 인사의 내막은 수양대군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자준은 천한 신분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한 내 아버님의 중신들을 비롯해서, 내 핏줄을 모두 죽였어. 그런 자준에게 사복시 소윤을 준 것만도 과분하지.’

인사발령을 내린, 그날 밤. 수양대군은 명회를 찾았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명회에게 전갈했다. 이윽고 명회가 오는 것을 보고 수양대군은

“못난 사람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듯 했다. 그러더니 명회를 같이 데리고 후원에 가서 노닐고는 집사 임 서방 더러 술상을 보라고 이른 뒤

“자네 서운한가.”

숙인 머리를 들어 명회의 생각을 묻는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를 사복시 소윤으로 삼았는데 웬 불평인가? 만나는 사람마다 마구간 지기가 천직(天職)이라고 했다면서?”

“사복시에서 관리하는 말은 임금께서 몸소 타는 말입니다. 미련한 소인의 생각에 머지않아 대군께서 사복시의 말을 타시고 사냥길에 오르시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시생(侍生)의 가슴에는 천하가 들어 있습니다. 이 나이에 접어들어 온갖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한 점의 부끄럼이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대군을 만나, 시생의 가슴을 갈라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천하를 바쳤습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려 했다면 진작 안평대군을 섬겼을 겁니다. 시생이 당상관이면 어떻고, 당하관이면 어떻습니까? 사복시의 말들을 기르며 평생을 살더라도 대군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천하를 경영하시는 모습을 뵐 수 있다면 시생이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능수능란하면서도 진실함이 뚝뚝 묻어난 명회의 달변에 수양대군은 한층 숙연해짐을 느낀다.

“자네 가슴 속에 천하가 들어 있다더라도 나는 다르이.”

안평대군 때처럼 수양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깊은 속을 간파하는 묘한 재주의 소유자 한명회가 수양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시생은 일찍이 대군 마님의 천하를 보았습니다. 일전에 시생에게 당신께서 직접 천하를 펼쳐 보이셨던 적이 있습니다. 태조께서 개국하시고, 태종께서는 다지셨으며 세종께서는 꽃을 피우시어 천년의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후세의 임금이 그 열매를 거두는 사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천년만년 이어가는 첩경(捷徑)이 아니옵나이까. 하오나 문종께서 병약하시어 그 뒤를 이을 수 없음이 분명한데, 세종께서는 적장 승계의 원칙으로서 그 맥을 끊으셨습니다. 양녕대군께서 간파하시고 염려하신 대로 그 자리는 대군 대감의 자리였나이다. 대군께서 그 자리를 이어받아 열매를 거두셔야 함이 분명하옵니다. 호랑이는 제 ㅅㄲ를 낳으면 높은 산 위에 올라가 벼랑 아래로 내던진다고 하옵니다. 그중에 살아있는 ㅅㄲ는 키우고 남은 ㅅㄲ는 버린다고 합니다. 만일 임금께서 여러 왕자들 가운데 강인하고 강건한 왕자 대신 한낱 장자에게만 옥좌를 넘긴다면, 장차 이 나라의 명맥이 얼마나 오래 이어지리까? 하물며 세 살 난 아이나,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단지 장자라는 이유로 보위에 오르지 말라는 법이 있으리까? 황공하게도 세종대왕께서는 골육(骨肉)의 상잔(相殘)만 보시고 적장 승계의 폐해(弊害)를 보시지 못하였으니, 이를 어찌 자식의 사랑에 물을 일입니까? 전하께서 가례를 치르시어 일가를 이루시고, 머지않아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전하께서는 탄핵(彈劾)의 화살을 대군께 향할 것입니다. 하늘의 해가 하나이듯이 임금의 자리도 하나뿐이니 대군 대감의 장래는 불을 보듯 환한 일입니다.”

명회의 목소리에는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진심 어린 눈에서는 눈물이 머금어져 있다.

“시생이 원통한 것은 대군 대감의 몰락이 아니라, 대장부의 포부(抱負)를 안고 태어났다가 그것을 펴지도 않고 거두신 것이니 그것이 원통하고 분이 나서 피눈물이 앞을 가리나이다.”

“이 사람, 자준.”

일취월장인 명회의 언변을 듣던 수양대군은 그새 감동이 서렸다.

“내가 자네에게 홀대한 게 마음에 걸려서 술잔을 기울이려 했더니 오히려 혹만 더 붙였구먼.”

그렇게 수양대군과 명회는 술을 기울였다. 주군의 바른길을 이끌지 못한 명회는 읍소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두 사람의 회포는 밤이 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상감의 진위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야심을 떠보기 위한 처사인지 생각하고 생각해보았다. 열 길 물속은 알지언정 한 사람의 마음속을 모른다고 하던가. 수양대군은 필시 자신이 내세운 중궁을, 어리숙하게 보이는 중궁을 가지고 혜빈이 충동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걸 눈치채기라도 하듯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혜빈을 출궁하여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내라는 상소를 매일같이 올리고는 했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어진 혜빈이 금성대군과 함께 상감에게 나아가 자신을 살려달라고 눈물이 마르고 닳도록 애원하는 것이었다. 어린 금상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걸해도 시원치 않은데 자신을 대신하여 조정 대신들이 혜빈을 대궐 밖으로 내쫓으라고 청하고 있음에 수양대군은 십년감수했다.

그렇게 어린 왕과 조정 대신들 사이에 팽팽하게 대립하기를 보름 넘게 지났다. 유약한 왕은 수양대군을 등에 업은 조정 대신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혜빈을 출궁시켜 정업원에 살게 하도록 하라는 어명이었다.

“주상, 이 할미가 가엾지도 않으시오!”

정업원으로 나가는 그 순간까지 혜빈은 앙탈을 부렸다. 그렇게 수양대군은 금상의 왼팔을 잘랐다.

경태 5년, 단종 2년 8월 5일에 한명회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수양대군의 힘이었기에 가능했다. 한명회를 처음 접견하는 어린 금상은 내심 명회에게 관심을 표했다.

“동부승지가 수양대군의 장자방이라고 하는 사람이오?”

“그러하옵니다.”

나어린 금상에게서 주목을 받게 된 명회는 머쓱하였다.

“내 동부승지에게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명회는 금상의 명을 들을 준비를 갖춘다.

“내가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하려 합니다.”

“네?”

명회는 갑작스러운 어명에 어안이 벙벙했다.

“선위라니요? 아니 되옵니다.”

수양대군이 금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도리임은 알고 있지만, 자신의 깊은 내면을 꿰뚫은 것 같아 명회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도승지 신숙주를 불러주세요. 내가 수양대군에게 기어이 선위할 겁니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무를 거의 떠넘기다시피 한 금상이다. 그런 금상의 처사가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매우 괘씸했다. 안평대군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어 죽였다. 그뿐인가, 김종서와 황보인, 조극관, 이현로 등 수많은 대신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제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한데 어린 금상 홍위의 깊은 고뇌는 깊은 밤이 되어서도 사그라 들지 않는다.

궁리하고 한 끝에 금상은 몸소 어두운 밤길을 뚫고 명례궁으로 행차하였다. 수양대군과 금상은 그렇게 마주했다.

“수양숙부께선 어째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시무룩한 채 묻는 금상을 수양은 낯부끄러워했다.

“신이 오늘은 예를 갖추지 못한 채 전하를 맞이했습니다. 군신 간의 예의는 이와 같을 수 없습니다. 불충(不忠)입니다. 날이 갈수록 전하를 대하기 힘듭니다. 군신 간의 예를 대하려면 힘들 것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신은 앞으로 그리할 겁니다. 하오나 신은 한번도 전하를 군신 간으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 깊숙이는 전하를 친자식으로 여긴 적이 있습니다.”

“수양 숙부, 노여움을 거두시오. 내가 옹졸했습니다.”

울먹이며 금상이 숙부에게 잘못을 빈다.

“신이 미련하였습니다. 사사로운 인정과 군신의 관계를 혼동했습니다. 품 안의 자식도 장성하여 집을 떠나면 남남이라고 하거늘, 지엄하신 전하를 부자의 정으로 대하려 했으니. 신이 교만하고 어리석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쓴웃음을 띤다.

“앞으로는 수양 숙부를 아버님처럼 모실 겁니다.”

금상은 애원한다.

“난 아버님인 문종대왕보다 수양대군을 좋아했소. 숙부가 하루라도 안 오는 날이면 난 하루종일 숙부를 기다렸어요. 천둥번개를 치는 날이면 더욱 애타게 수양 숙부를 기다렸지요. 그러니 노여움을 푸세요, 수양 숙부!”

자신의 아버지처럼 아끼는 금상은 속죄의 마음으로 수양대군에게 스스로 절을 올린다. 난처한 상황에 수양대군은 몸 둘 바를 모른다.

“상감마마!”

“자식으로서 절을 올립니다. 임금이고 뭐고 다 싫습니다. 이 사람이 얘기하고 저 사람이 저렇게 얘기하니 그 자리에 앉기 매우 힘들고 버겁습니다. 나 정말 편히 살고 싶어요.”

수양은 그런 금상을 품에 안은 채 안타까워한다. 간만에 수양 숙부에게 안겨 울분을 한껏 토하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고, 쇠약한 할머니 소헌왕후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으며 병약하고 마른 체격의 아버지를 가까이하지 못하는 기구한 운명의 어린 임금. 그런 아버지 대신 수양 숙부가 내 아버지였으면 하는 소박하면서 병적으로 순박한 마음을 가진 어린 금상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야속하게도 몰라주니 어린 금상의 마음은 초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수양대군이기에 어린 금상의 어리광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수양대군의 마음은 한없이 여릴 수밖에 없었다. 혈육의 정이 이처럼 진한가 보다. 바깥을 지켜보던 윤씨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 소식을 들은 숙빈 홍씨는

“주상께서 수양대군과 화해하신 모양인가 보이.”

하며 안심하였다. 대전 내관이 와서, 상감이 명례궁에 하룻밤을 청하고 온다고 전해졌다. 이 말을 전해들은 중궁은 순간 자신의 자리가 가시방석임을 느끼고 있었다. 명색이 중궁이기는 하나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않은 허울뿐인 자리인 것은 왕실은 물론이고 종친부까지도 아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한없이 수양대군에게 겸손히 대하라는 숙빈의 당부를 듣는 것이었다. 다음날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그리고 수양대군을 맞이하여 대전에서 다과를 즐겼다.

다과상을 마친 그 이튿날 금상을 알현한 수양대군의 음성에서

“주상 중전께서 주상을 가리켜 더는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사실이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냉담한 어조가 나온다.

“그, 그건”

금상은 순간 좌불안석이 된 듯 불안에 떨었다.

“신은 일찍이 궁중의 아녀자인 중궁이 정사에 관여하였다는 말을 들은 바 없습니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주상.”

“네, 수양 숙부.”

호랑이처럼 자신을 노려보는 숙부가 낯설었다. 나어린 중궁이 자신을 업신여긴 것에 대한 수양대군 나름의 경고였다. 소문에 소문이 이어져 폐빈 양씨의 귀에도 들렸다.

“수양대군에게 손발이 닳도록 비시다니,”

중얼거리듯 하더니

“주상께서 비시다니!”

소리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가슴에 통증을 느낀 채

“네 이놈! 이놈, 세종대왕과 문종대왕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고도, 감히 어린 조카의 보위를 탐한단 말이냐!”

각혈(血)을 하였다. 이때 혜빈이 은밀히 금성대군과 내통하고 있는 처지였다. 명회의 애첩 향이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원군 부인의 수족 노릇을 공공연히 하기 시작했다. 시정(市井)의 사정을 빤히 꿰뚫는 향이인지라 수소문하여 폐빈의 내인을 통해 폐빈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게 되었다. 이를 듣던 향이는 곧장 도원군 부인을 찾아가 고하였다. 도원군 부인은 홍윤성을 은밀히 불러놓고 자신의 몸종인 용녀(龍女)를 첩으로 보내었다. 이때 홍윤성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있었다. 용녀는 향이 못지않게 자색이 뛰어난 만큼 몸종으로 부리기에는 아까운 까닭이었다. 이렇듯 한씨는 시아버님의 뒤를 도와주고 있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은 행보였다.

그날 밤. 권람이 은밀히 수양의 사랑에 찾아와서는

“대군 대감. 진정 보위를 원하시옵니까.”

물어보며 대군의 본심을 떠보는 것이다.

“이 사람 정경,”

“대군께서 태도를 분명히 하시옵소서. 그래야 필요 없는 희생을 줄일 수 있사옵니다. 대군께서 의정부를 비롯하여 육조의 실권을 모두 움켜쥐셨는데 망설이실 까닭이 있사옵니까. 민심은 어떠하옵니까? 어리고 유약한 군주보다는 강력한 통치를 갖춘 군주를 원할 것입니다. 군주가 힘없으면 권신이 발호하고, 권력의 충돌이 생기면 무엇보다 백성들이 고달픈 법임을 대군께서는 모르십니까? 대군께서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으시기에 금성대군의 역모가 일어나는 게 아닙니까. 대군 대감.”

권람의 말대로 금성대군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도성 안팎에 널리 퍼졌다.

“자네는 쉽게도 말씀을 하네그려.”

수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래서 내가 정경을 좋아하지. 간단하고 손쉬운 일도 한명회의 머리를 통해 나오면 복잡하고 미묘한 것으로 둔갑하지 않는가. 마치 정체불명의 괴물처럼 말일세. 하나 실타래처럼 복잡한 일도 정경의 손을 거치면 단순하기 그지없게 탈바꿈하니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하는 걸세.”

내심 자신의 본심을 들키지 않고자 수양은 난데없이 궤변(詭辯)을 늘인다.

“말씀을 피하지는 마십시오.”

“자네 말은 틀렸네.”

수양대군은 손가락으로 곱셈표를 그었다.

“어린 금상을 폐하시는 게 괴로우십니까?”

권람의 물음에 수양은 한숨을 쉬었다.

“천하를 경영하는 일입니다. 인정에 얽매이시면 얽매이실수록 천하를 경영하실 자격이 없으십니다. 대군께서 정녕 보위를 원하지 않으시다면 말씀으로 좀 더 확실히 밝히시고 전하를 잘 받들으셔야 합니다.”

곁에서 권람은 승정원에 몸을 담그면서 금상과 수양의 중간 역할을 하는 처지였다.

“아무리 겸양(謙讓)의 미덕(美德)을 표하셔도 그 안에 감춰진 칼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나를 모욕하지 마시게.”

“아무리 그리하셔도 대군께서는 위선을 보이시는 거나 진배없습니다. 소인은 대군마님께 목숨을 걸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나 보고, 어찌하라고 하시는가.”

자신의 심사를 뒤흔드는 권람의 태도에 야속함을 느끼는 것이다. 권람이 물러가자 자신의 본심을 꿰뚫는 권람이 매우 영악하기까지 함을 알고 수양대군이 파안대소하는 게 아닌가. 수양대군은 제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는 중궁을 가만히 볼 상대가 아님을 새삼 느끼는 것이다. 수양대군은 좌의정 정인지와 사돈을 맺었다. 곧 수양대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를 정인지의 큰며느리로 보낸 것이다. 이들의 인맥도 수양대군의 권력을 탄탄대로로 나아가게 하는 촉매제(觸媒劑) 구실을 하는 건 두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나름 영리하다던, 중궁으로 있던 송씨가 명나라에 책봉 조서를 받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중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결국 수양대군의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 한, 아무리 명색이 중궁이라고 해도 명나라의 동의를 얻지 않고는 내외명부의 수장으로 인정받지 않겠다는 수양대군의 잔꾀였다. 그러잖아도 부부인 윤씨가 이를 가지고 수양대군에게 따지다가 되레 호통만 듣고 말았다. 대궐 안의 소문은 졸지에 바깥에 새어 나갔는지, 수양대군의 인망은 하루아침에 땅바닥을 내리치고 있었다. 소문이 소문을 낳는 법. 수양대군의 책사 노릇하는 한명회와 홍윤성의 집에 난데없이 돌팔매가 날아오고 항아리들이 모두 박살 났으며, 심지어는 수양대군의 편에 선, 양녕대군을 대표로 하는 종친들의 행차에다 대놓고 돌을 내던지기까지 하니 수양대군이 장차에는 어린 금상의 보위를 탐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도는 지경에 이를 조짐이었다.

대궐 밖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연 나어린 금상 내외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 이 소식을 전해주는 궁인들이 모두 하룻강아지로 여겼던 중궁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중궁의 면모를 바라본 금상은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든 듯 중전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하여 두 내외는 모 아니면 도라는 말처럼 수양대군을 맞서기로 마음을 굳혀가고 있었다. 갈 때까지 갔다. 인사권도 주고, 군사력도 주었다. 오직 옥좌만은 주지 않았다. 그 이상 줄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금상 내외의 변명 아닌 변명이랄까. 한명회는 권람과 신숙주와 함께 승정원의 승지로 있는 동안, 잘 못 하다가 금상이 장성한 날이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함을 느낀다. 자신은 물론, 자신이 주군으로 모셨던 수양대군 또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명나라에서 사신들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궁의 책봉례(冊封禮)를 치르기 위해 파견된 사신들이었다. 순간 명회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들자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어찌 보면 궁여지책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물론 수양대군의 목숨도 보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리라.

―신숙주의 장남 신주와 한명회의 큰딸이 혼례를 치렀다. 이로써 한명회와 신숙주는 사돈이 되었다.

수양대군과 금상 내외는 모두 대립관계로 돌아선 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이를 부채질하듯 금상이 야밤을 틈타 폐빈(廢嬪)이 묵고 있는 정업원(淨業院)으로 찾아갔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졌다.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양대군이 아니었다. 수양은 의정부 대신 몇몇을 데려다가, 대전 내관에게 책임을 물었다.

명나라 사신 대표 고보와 내사 정통이 일행 열다섯을 데리고 의주에 도착한 것은 경태 6년 4월 무인일이었다. 그로부터 보름도 더 지난 정유일에 모화관(慕華館)에서 맞이했다. 그 칙서(勅書)에 이르길,

“황제는 조선국왕 모에게 칙유한다. 이제 고명을 반강하여 너의 처 송씨를 봉해 왕비로 삼고, 아울러 관복과 채패를 하사하여, 내관 고보와 내사 정통을 보내어 이를 가지고 가서 주게 하니, 이르거든 영수할지어다. 그러므로 칙유하는 바이다.”

이어 고명을 내리길,

“조정에서 작을 내려 주는 것은 은혜를 이루어 줌에 근본함이니, 비필은 왕을 도와 순정함을 귀히 하고, 나라의 정전을 베풀어 시행함에 그르치지 말지어다. 그대 송씨는 조선국왕 모의 아내로서 유순하기를 일컬음이니, 서로 도와 이루어서 욕됨이 없도록 하라.”

이렇게 엎질러진 물처럼 어린 중전의 책봉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던 수양대군은 명례궁 사랑채에서 낮은 소리로 허허 웃는다.

중궁이 책봉된 것을 기화로 금상은 기세 좋게 수양대군의 수족으로 가득찬 대신들과 맞섰다. 금상과 대립을 이룬 대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양씨와 금성대군을 죽이라는 연명을 해대었다. 어떤 관리는 한술 더 떠 금상의 매형인 영양위(寧陽尉)를 죄주라고 상소를 올렸다. 소문에는 영양위가 금성대군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소문만 가지고 과연 죄가 되는가? 적장승계니 무어니 하며 왕실의 법통에 문제가 있음을 공공연히 발언하는 양녕대군은 종친부의 대표로서 여러 종친들을 협박으로다가 앞세워서 새 임금을 옹립해야 함을 피력했다.

이때 계양군은 서출이라는 설움 때문에, 섣불리 나서기를 꺼려했다. 이에 계양군부인이 보다 못해 양녕대군의 편에 나서라고 닦달했다. 계양군은 세종의 후궁들 중 하나인 신빈김씨(愼嬪金氏)의 아들이다. 명나라 사신들이 모화관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이다.

온 세상이 암흑천지로 변한 그 시각에 어린 금상은 내관을 시켜 좌의정과 우의정을 불렀다. 좌의정 정인지와 우의정 한확이 있는 앞에서 부복한 채 왕명을 듣는다.

금상의 옥음이며 얼굴에는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 듯 촛불 앞에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금성대군과 양씨를 살려주는 대신 내가 보위를 물러나면 되겠는지요?”

두 정승은 이 말을 듣고 놀라 펄쩍 뛰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됩니다!”

두 정승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금상은 결심에 찬 채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내가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하고 보위를 물러나겠소.”

이때 대전 안팎에서는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제 더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습성에 진저리가 난 금상이었다. 사람을 여러 명을 죽여야 하는 권력의 습성. 유약한 금상이 감당하기에는 매우 버거웠다.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자책으로 하룻밤을 편히 자보지도 못한 금상이었다. 이 소식은 단번에 한명회에게 전해져 종친부와 의정부에까지 이르렀다. 한사코 선위를 반대하던 대전 내관 엄자치가 대궐 밖으로 쫓겨나 변방으로 유배되었으나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이튿날, 새 아침이 밝았다. 새로운 광명(光明)이 빛을 힘껏 내뿜는 새 아침이 밝았다. 금상은 대보(大寶)를 들어다 도승지 신숙주에게 넘기고자 했으나 수양대군이 두 번 사양한다. 이윽고 동부승지 성삼문(成三問)으로 하여금 대보를 수양대군에게 넘기게 했다.

그리고 의정부에서 열린 조회에서 수양대군은 대보를 받들었다. 정창손(鄭昌孫)이 천세(千歲)―를 외치자 모든 조정 대신들이 안팎으로 천세―천세―천천세(千千歲)― 외치는 소리가 줄기차게 들린다.

실록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수양대군이 우의정 한확, 좌찬성 이사철, 우찬성 이계린(李季), 좌참찬 강맹경 등과 더불어 의정부로부터 대궐로 나아가 병판 이계전, 이판 정창손, 호판 이인손(李仁孫), 형판 이변(李邊), 병조참판 홍달손, 참의 양정, 승지 등과 같이 빈청에 모여 의논하길

“혜빈양씨, 상궁(尙宮) 박씨(朴氏), 금성대군 이유, 한남군(漢南君) 이어, 영풍군 이전, 동지중추원사 조유례(趙由禮), 호군(護軍) 성문치(成文治) 등이 난역(亂逆)을 도모하여 이에 참여한 일당이 이미 많았으니 가볍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합사하여 계청(啓請)하길,

“금성재군이 전의 일을 스스로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무사들과 은밀히 결탁해 그 일당에게 후히 정을 베풀면서 혜빈, 상궁 등과 서로 결탁하여 그의 양모 의빈으로 하여금 혜삔궁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고 그 유모 총명 등을 시켜 은밀히 왕래하였고, 유도 또한 왕래했으며 상궁에게 여종을 주고는 서로 통하여 안부를 전하여 왔다. 이 밖에도 한남군 영풍군 및 정종(鄭悰-영양위) 등과 결탁해 문종조 때부터 궁내에서 마구 권세를 부려왔다. 대신들과 종실들의 의논을 기다리지 않은 채 독단하여 의빈의 친척인 박문규의 딸과 유의 처족(妻族)인 최도일의 딸을 왕비로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궁이 자기가 세운 바가 아니라며 온갖 계교로 이간하여 왔다. 신 등이 계달하려 하는 것이 이미 오래인데, 그 기세가 날로 심한즉 종사의 대계를 생각하여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써 공공의 일을 폐하도록 하겠는가? 청컨대 조속히 죄를 밝히고 바로 잡으라.”

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라 의금부에 명하여 혜빈을 청풍(淸風)으로, 상궁박씨를 청양(靑陽)으로, 금성대군을 삭녕(朔寧)으로, 한남군을 금산(錦山)으로, 영풍군을 예안(禮安)으로, 정종을 영월(寧越)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뒤이어 수양대군이 선위하게 하고, 이어 좌승지 박원형(朴元亨)에게 명하여 태평관에 머물고 있던 사신에게 가서 이르게 하였는데,

“내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계유년에 안평대군이 반란을 꾀하여 숙부 수양대군이 이 사실을 나에게 고하고 평정하였다. 그러나 남은 잔당들이 존재하여 다시 궤도(軌道)에 벗어나는 일을 꾀하니, 이 어찌 유치한 내가 능히 진정할 바이던가? 수양대군은 종실의 수장으로서 사직에 공로가 있으니 중임(重任)을 부탁할 만하다. 그로 하여금 국사를 서리토록 하고 장차 이를 주문하겠다.”

하니 명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이는 곧 국가의 대사인데 이제 그 유서를 받으니 기쁩니다.”

하였다.

그날 밤, 잠저로 돌아온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 영의정에 학역재(學易齋) 정인지를 맡겼다. 이어 한명회가 찾아와서

“전하, 지금 밀어붙이셔야 하옵니다. 집현전은 어차피 한 번 넘어야 할 산이옵니다. 지금은 저만큼 솟아오른 산에 불과하오나 전하께서 가까이 가시면 가실수록 험준한 산이옵니다.”

명나라에서도 어린 임금의 무능력함을 눈치챌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은 컸다. 칠삭둥이 한명회의 혜안을 누가 따를 수 있을까. 만약, 한명회가 명나라 사신의 답서를 받드는 날을 알아채지 않았더라면, 수양대군은 영락없이 불귀의 객이 되고도 남을 일일지도 모른다. 수양대군의 갑작스러운 즉위 소식을 듣고 부인 윤씨가

“신첩(臣妾)은 대궐에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고 말하자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오, 부인.”

수양이 버럭 으름장을 놓는다.

“신첩은 전하께서 강건하심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런 신첩이 무슨 낯으로 부처님을 대하리까. 대군 대감.”

돌연 자리에 앉으며 애원하는 부인을

“아무런 말씀하지 마셔요. 나는 좋아서 곤룡포(龍袍)와 익선관(翼善冠)을 쓰는 줄 아시오. 내가 조카의 보위를 물려받은 줄 알았소.”

괴로운 내색을 보이던 수양대군은

“비시지요, 나를 위해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부처님께 비시구려.”

울음을 억누른 채 나직이 대답하였다. 내외는 날이 밝아오기까지 선위의 일을 두고 다투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왕족의 체통을 생각한 까닭이다.

이틀이 지나고 새 임금 수양대군이 선왕은 공의온문태상왕(恭懿溫文太上王)에 봉하고, 중궁을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봉하였다. 두 사람의 거처는 지금의 창덕궁 부근에 있는 수강궁(壽康宮)으로 정해졌다. 수강궁으로 옮긴 그날 밤. 왕대비가 손수 따뜻한 물을 떠다 어린 금상의 양발을 씻겼다. 어느 여염(閭閻)의 내외처럼 말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 그러니까 수양대군이 경복궁에 기거하게 된 뒤에 처음으로 인사가 단행되었다. 영의정에 정인지, 좌의정에 한확, 우의정에 이사철, 우찬성에 정창손, 판돈령부사에 송현수, 이조판서에 박중손, 이조참판에 권람, 예조참의에 하위지, 좌부승지에 한명회, 우부승지에 성삼문, 예조참의에 홍윤성을 명하였다. 이번 인사는 집현전 학사들을 포용하겠다는 수양대군의 굳은 결심의 표시였다. 아니, 수강궁에 기거하고 있는 상왕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였으리라. 이번 인사를 두고 한명회는 마음 한편에 서늘함을 느꼈다.

수양대군의 즉위와 함께 부부인 윤씨는 중궁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윤씨는 그 중궁의 자리를 한사코 마다하였다. 책봉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군이 되시는 수양대군의 대업을 묵묵히 지지해온 그녀였지만 어린 조카가 정사를 다스리지 못하여 명예롭지 못한 채 상왕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가슴 한편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반면, 덩달아 세자의 자리에 앉은 도원군의 부인은 세자빈이 되는 것에 매우 기뻐하였다. 왕은 그녀에게 정빈(貞嬪)으로 책봉하였다. 정빈은 사가에서처럼 시아버지를 옆에서 보필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세자궁(世子宮)에 들어선 정빈이 한명회와 공공연히 협조하고 자문하였다. 시부모 내외가 말다툼을 했다는 말을 한명회에게 전해 들은 정빈은

“한 승지께서는 전하와 함께 생사를 나누셨으면서도 그렇게도 속마음을 모르십니까? 전하께서는 체면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 남이 어찌 생각하는지 먼저 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하오면”

“생각이 있으셔도 당신 손으로 못하십니다. 그렇다고 남의 말을 잘 듣는 분도 아니시구요. 당신의 생각을 깊이 감추시고 남의 생각을 엿보시다 결정을 혼자 하시는 분이 전하십니다.”

“소인이 어찌 그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만.”

“지금쯤 수만 가지 생각이 오고 가실 겁니다.”

정빈의 눈빛에서는 광채가 반짝였다. 조정을 퇴청한 뒤 명회는 소실인 향이의 집으로 향한다. 향이가 차려준 술상을 받은 명회의 생각은 깊이를 더해간다.

“요즘은 허구한 날 술로 세월을 보내십니다.”

술잔에 술을 따르는 향이의 말에

“무서운 양반이 아니냐.”

“상감마마 말씀입니까.”

“그분은 무섭지 않다. 몇 번이고 나를 버리셨으나 결국 나를 찾는 양반이 아니시냐?”

“무서운 양반이 누가 있나요?”

“흠.”

세자빈의 참모습을 본 명회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번 인사를 두고 불만을 품은 명회였는데 세자빈을 막상 대하고 보니 금상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여걸임을 싹수부터 알지 못했다. 이래저래 명회에게는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한편, 금상의 첫인사를 두고 영의정 정인지가 부복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금상은 우부승지 성삼문을 불러들여 자신의 심중을 토로했다.

“우부승지는 어찌 생각하시나? 내가 앞으로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 인사를 단행하고자 하네.”

“하시면 육조직계제(六曹直制)로 행하시렵니까? 그러시려면 먼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하셔야 합니다.”

젊은 선비의 혈기로서 성삼문이 대답했다.

“시끄럽겠지. 말 많은 의정부의 늙은이들이 입을 다물지 않겠지. 내가 집현전의 선비들을 중히 쓰고자 하는데, 의정부서사제로는 반대가 심할 것이고.”

집현전의 대표자 격인 성삼문을 불러들인 의도가 따로 있었다. 언제까지나 상왕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자리가 쉽지 않구먼. 내가 의정부에 있을 때는 무엇 하나 내 뜻대로 하지 않은 게 없었는데.”

금상은 입맛을 다셨다.

“태종께서 육조직계제를 행하신 것은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 무엇보다 강력한 왕권강화가 절실한 탓이었습니다. 세종께서 의정부서사제를 행사하신 것은 태평성대에는 지나친 왕권의 행사가 오히려 언로를 막고 전제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나이다.”

그제야 성삼문이 입을 떼었다.

“말씀을 마저 하시게.”

“신은 이 시국이 난세인지 태평성대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태평성대겠는가. 내가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으나, 내 생전에 그런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그만한 복도 없을 것이다. 내가 이래서 집현전의 선비들을 좋아하네. 학문의 세계만큼 자유스러운 게 없는 법이거든.”

“전하, 태평성대를 만드는 것도, 난세를 만드는 것도 모두 군주가 하기에 달려있는 법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부디 태평성대를 이루시길 축수(祝手)하나이다.”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는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육조직계제는 왕이 직접 승정원의 육승지(六承旨)를 통해 직접 육조의 일을 관장하는 반면, 의정부서사제는 의정부 대신들이 육조를 관장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금상이 육조직계제를 행한다는 것은, 금상이 왕권을 확립하기 위함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조카가 보위에서 물러나는 처참한 광경을 보고 느낀 것이리라.

그날 밤. 금상은 중궁전으로 찾아왔다. 중궁에서 기척이 없자

“부인, 내가 왔소이다. 방문을 좀 열어주시구려!”

이윽고 방문이 열리자 중궁이 서 있었다.

“보고만 계시겠소이까!”

마지못해 부부인은 무표정하게 금상을 부축했다. 선온(宣)이 과한 까닭이리라.

“부인,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소.”

사가에서만큼은 금슬이 돈독했던 내외였지만 이번만큼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새색시처럼 서 계실 작정이시오?”

금상이 껄껄 웃어댔다.

“요즘도 비십니까? 부처님께 내 죄를 빌고 있느냐 물었소이다. 어린 조카의 폐위했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일부러 수강궁으로 보냈어요.”

“대군 대감.”

부인의 냉랭한 말씨에

“내가 임금이에요!”

버럭 역정을 내는 금상이다.

“내가 조카에게 태상왕으로 봉하였으니 속이 후련하시겠소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금상은 대전으로 되돌아왔다. 한편 한명회는 금상이 조카를 상왕으로 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금상을 찾아가서는,

“불가하나이다, 전하! 후환을 남기지 마십시오. 나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두시는 것이, 어찌 순리이오리까. 전하께서는 지금까지 피 흘리신 대업을 하루아침에 허물고 계십니다.”

하고 반대하였으나, 왕실의 안정을 누구보다 바라는 부인을 생각하여 내린 결단이기도 하였다. 부인에게

“만족하시오? 소원성취하셨잖소.”

하고 의중을 물었다.

“망극하옵니다.”

목에 잠긴 듯 대답하는 부인을

“부인께서 나를 의심하고 있으니, 얼마나 서운해했는지 아시오? 보위를 막상 받았으나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기왕지사 내가 보위를 받았으니 뒷일을 깨끗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더이다.”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잘하셨습니다. 신첩의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부인. 오늘 이후로는 더는 부인이라고 부르지 못하겠지요. 왕실의 법도가 그러하니 서로 대전에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서 더러는 가깝게 더러는 적보다도 못하는 사이로 변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아온 부부가 아닙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마마.”

이날 밤 내외는 간만에 금침(衾枕)을 같이 쓰게 되었다. 이튿날에 간만에 조카를 태상왕으로 봉한 것을 기념하여 조촐하게나마 연회를 베풀었다.

경태 6년 7월 20일에 부부인 윤씨를 중궁으로 삼았다.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교서는 이러하다.

“아! 그대 윤씨는 명문의 숙덕으로 성인이 되어 배우자로 삼은 지 이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데 조금도 허물이 없었다. 이제 내가 외람되게 한 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니 그 명위를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어 비로소 왕비로 책봉하니 공경하라.”

이날 왕비 책봉례(冊封禮)에 세자빈 한씨와 계양군부인 한씨를 필두로 한 종친의 부인들이 예를 갖춰 인사드렸다. 세자인 도원군도 수강궁의 상왕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왕과 금상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봉합된 셈이다.

[6]

권람이 한밤중에 명회를 찾아왔다. 금상이 육조직계제를 채택한다는 소문이 퍼진 탓도 있지만, 일부 조정 신료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경이 명회의 작은집. 곧 소실인 향이 집으로 왔다. 향이가 기거하는 집은 예전에 명회가 살았던 초가집이었다. 승지로 임명된 뒤 명회는 가솔들을 이끌고 안국방(安國坊)에 있는 기와집을 한 채 장만하였다. 그래서 자연스레 향이의 살림집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자준, 말씀 좀 해보시게.”

애타듯 자준에게 현 시국을 자문받을 셈으로 물었다. 권람 자신은 이조참판으로서 이조에 있기에 임금의 한마디를 직접 듣지도 못한 채 상명하복해야하는 입장에 있다보니 자신이 언제 어떻게 파리목숨이 될까 싶어서다. 게다가 명회가 임금의 지근에 있는 승정원의 승지가 된 까닭에 행여라도 임금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있을까 싶어 기를 써서 조르는 것이다.

“이 사람아, 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고, 그런 일로 단잠을 깨우시나?”

피곤하듯 오만상을 찡그린 명회.

“그런 일이라니?”

“전하께서 직접 정사를 챙기시겠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즉위하신 지 한 달도 안되셨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시겠다니.”

“의정부서사제든 육조직계제든 전하께서 하시기에 마련아닌가?”

“그렇지 않네.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셨으나 아직도 보위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네. 전하께서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신다면, 사방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텐데, 그 뒷일은 어찌 감당하시려고.”

“생각이 있으시겠지.”

근래에 접어들어 자신의 직언을 마다하는, 그러니까 어린 상왕과 그 세력을 축출하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금상의 면전에서 구박 아닌 구박을 듣고 심란해진 마음을 추스르는데, 권람이 와서 설치는 바람에 쓴맛을 다신다.

“남의 말처럼 들을 계제가 아닐세. 신진사류들과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이 반대하고도 남을 텐데.”

벌컥 역정내는 친구의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명회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한없는 괴로움이 밀려옴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새로운 세상을 펼친답시고, 수양대군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수양대군에게 실권을 움켜쥐게 했건만, 어느 순간 자신의 대의명분보다는 남에게 좋은 일만 시켰으니 명회의 허탈감은 깊어만 가는 것이다.

“이 사람, 정경. 자네는 나서지 마시게. 나서면 이번에 다치네.”

단념하라는 명회의 말을 듣고도,

“범옹(泛翁-신숙주의 자)하고도 얘기했네.”

못 알아듣고 있자,

“글쎄 그만하시래도.”

명회가 별안간 역정을 낸다. 그러고서

“의정부서사제가 무엇인가. 육조의 모든 임무를 의정부를 통해 행하는 것이 아닌가?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는 임금의 뜻대로 하지 못하네. 전하의 성격을 봐서는 탐탁하지 않을 것일세. 그러니 이 일은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그날부터 예견된 것일세.”

“결국은 전하께서 직접 육조를 총괄하시겠다는 뜻이 아닌가. 이는 우리가 정난을 도모하고 전하를 보위에 세운 뜻이 아닐세.”

“아니, 이 사람이.”

갈수록 과격한 태도로 나서는 권람을 어쩌지 못해 애탄 나머지 다시 역정을 낸다.

“이 사람, 정경. 내가 자네를 피한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일세. 전하께서 육조직계제를 행한다면, 정난공신의 입장이 매우 난처할 것일세. 전하의 뜻을 따르자니 절대적 왕권을 지지한 셈이 될 것이고, 등을 돌리자니 누구보다 더욱 전하의 노여움을 살 것이기 때문이네.”

아무리 세상을 꿰뚫듯 바라보는 자준이라지만 일개 사람인지라, 금상의 변덕스러운 성정을 알아가고 있기에 신중히 생각하자는 취지에서 뱉은 말이었다. 그러기에 권람에게도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임금은 육조직계제 문제를 두고 문지방이 닳도록 성삼문만을 은밀히 부르는 것이다. 세종대왕부터 이어진 집현전의 학자들은, 오직 학문에만 매진하게 하여,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다방면으로 연구하여 수많은 정책을 발굴해냈다. 이들은 젊고 패기가 넘친 소장(少壯) 학자들로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와 <농사직설(農事直說)><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편찬, 그리고 사군과 육진의 개척 등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정책을 세종대왕의 손에 의해 실시하게 만든 원동력이 된 집현전 학자들이니만큼 금상 또한 부왕의 유업(遺業)을 이어받고자 했다. 하여 집현전 학자의 수장격인 성삼문을 불러다가 자신의 새로운 정치에 함께 동참하자고 금상이 권유하는 것이다. 일종의 회유였다.

“이 사람, 근보(謹甫-성삼문의 자). 우부승지로 승차하시더니 변심하였는가.”

“선비는 말이 앞서는 것이 탈일세.”

같은 집현전 학자 이개(李塏)가 비아냥거리는 말에 갈피 잡을 수 없어 한숨 쉬듯 대답하니,

“이제는 수양대군의 주구(走狗)가 되시려는가.”

이개가 화를 낸다. 그제야 삼문이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하네. 나는 당분간 서책과 마주하지 않으려네. 글을 읽고 앉으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선비가 아닌가.”

뜻을 내비치자 이개는 귀가 솔깃했다.

“자네 뜻도 그러한가.”

이개도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우리 이제 힘을 아끼세나.”

이개는 목은 이색의 증손이자 이계전의 조카였다. 그는 집현전 학자로서 성삼문과 동문수학하였기에 우정이 또한 매우 깊었다. 이로써 모 아니면 도. 성삼문의 눈빛에서는 흑진주처럼 빛났다. 하지만 또 다른 집현전 학자인 하위지(河緯地)가 금상의 뜻을 거슬러, 고서(古書)의 예를 드니 금상이 대노하여 하위지의 관을 벗기고 의금부에 가두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는,

“하위지가 의정부 대신에게 아부하여 나를 어린아이에 비유했다. 상왕께서 보위에서 물러나 선위하신 까닭이 무엇인가. 의정부의 도움 없이는 국정을 행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상왕과 같을 수 없으니 하위지의 말이 나를 능멸하기에 충분하다. 하위지의 죄를 물어 추국하여, 그 죄를 가리고, 그 목을 베어 훗날에 경계로 삼겠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는 여러 차례 조정 대신들을 만나 설득하고 설득한 끝에 간신히 육조직계제를 관철하였다. 뒤이어 좌익공신(佐翼功臣)을 책록하니, 한명회계양군한확권람신숙주를 1등으로 삼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이라 하고, 정인지이사철이계전강맹경최항(崔恒)전균홍달손양정 등을 2등으로 삼아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이라 하였으며, 정창손박원형권자신(權自愼)성삼문황효원(黃孝源)조득림을 3등으로 삼아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이라 이름하여 각각 봉하였다. 특히 조득림은 아버지가 노비의 신분으로 있기에 세조가 그의 아버지를 노비에서 풀어주었다. 이후 면천(免賤)되어 양민이 되었다.

왕명에 따라, 폐빈 양씨가 배소에서 교살(絞殺)되었다. 양씨가 죽기 직전에

“내가 태상왕전하의 할미이며, 금상에게는 어미가 되느니라! 금상이 본래 잔인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몰인정하게 할 줄 몰랐다. 사사하는 온정(溫情)이 있어야 하거늘.”

하는 말을 남겼다.

이때가 세조 1년 11월 9일이었다. 왕이 뒤이어 명하길,

“정종은 고신(告身)을 거두도록 하라.”

하였다. 정종은 상왕의 매형이다.

―그날 밤에 성삼문의 집에 김질(金)과 유성원(柳誠源), 그리고 박팽년 등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금상 수양대군을 죽이기로 도모하였다. 이때

“수양이 모화관에서 명나라 사신들에게 고명을 받은 연후에 잔치를 베풀 것일세. 혜빈을 교살하여 우리에게 유화책(宥和策)을 쓸 걸세. 그러니 그때를 대비하여 차차로 의논하세나.”

성삼문이 여러 동지를 규합하여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얼마 뒤, 신숙주의 부인 윤씨(尹氏)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때가 병자년 정월, 곧 세조 2년 정월의 일이었다. 신숙주가 이미 주문사로서 명나라에 간 지 보름 뒤였다. 신숙주는 당시 대제학으로 있었다. 윤씨의 죽음을 두고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 소문 가운데 하나로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과 잦은 다툼을 한 것을 눈치채어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목을 매 죽었다는 것이다. 이 소문만으로도 온 백성들의 간담은 서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상왕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동정 어린 목소리가 날로 늘어난 것이다. 신숙주와 함께 주문사로 갔다온 이조참의 권람이 명회의 집을 찾았다.

“전하의 태도가 냉정함을 못 느끼셨는가.”

친구의 물음에 권람은

“무슨 말씀이신가.”

하며 되묻는다.

“범옹과 자네를 대할 때 찬바람이 돌지 않았느냐 그 말일세.”

“그런 분이 범옹의 상배를 그렇게 애통하게 여기셨는가. 게다가 범옹에게 병판을, 내게 이판을 제수하셨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명회가 곧바로 권람에게 집현전 학사들을 등용하려는 금상의 의중을 밝혔다.

“명나라의 고명을 받으시면 태도가 더욱 달라질 것이네. 그렇게 되면 두 갈래의 길이 생긴다네. 하나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움직이고 있고, 다른 하나는 송현수 권자신 등 외척을 중심으로 움직임이 있네. 근자에 저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 있네. 전하께서 명나라의 고명을 받으시면 정통성을 인정받을 것이니 상왕에게는 이 이상 기회가 없다는 말씀일세. 전하께 이를 말씀을 드렸으나,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시네.”

권람이 이 말을 듣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눈치채었다. 명회의 집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더없이 무거웠다.

명회는 명나라 사신들이 입경한 즉시 집현전 학사들과 상왕 외척들의 동태를 파악하고자 서너 명의 염탐꾼을 시켜다 조사하게 했다. 이때 왕이 운검(雲劍)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에게 추천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추천된 사람이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두 사람이었다.

백성들이 상왕에 대한 동정을 서슴없이 내뱉는 통에 집현전 학사들은 득의에 가득 차 있었다. 강제로 보위를 찬탈하였다고 의심되는 수양대군에 대한 불만도 내포되어있는 게 아닌가. 이때 명나라 사신이 온다면 이를 기회로 삼아 수양대군을 암살하여 상왕을 복위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이들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칼을 갈고 닦느라고 밤이 샐 줄도 몰랐소이다.”

유응부가 성승에게 칼을 꺼내 보이며 하는 말이었다.

세조 즉위 2년 유월 초하루 창덕궁 광연루(廣延樓)에서 수양대군의 고명을 받들어 찾아온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때를 거사(擧事)하고자 하여 성삼문과 이개 등의 집현전 학사 출신 관리와 성승과 유응부를 대표로 하는 무장들이 벼르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독 안에 든 쥐일세. 이제 내 손 안에 잡히겠구먼.”

칼을 밤새 마르고 닳도록 갈았던 유응부의 득의에 찬 말이었다. 이때 응부가 칼집에서 칼을 번쩍 꺼내 든다. 얼마나 많이 갈았던지 칼이 옷깃만 스쳐도 베일 법한 느낌이었다. 한편 광연루에서 열리는 연회를 준비하느라 대궐 안이 분주하였다. 한명회는 자신의 주군이 앉는 옥좌에 사람 없는 틈을 타 앉았다. 명회가 그 옥좌에 앉고 보니 정란 때 자신의 손바닥으로 천하를 움켜쥐었던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허허, 옥좌가 그렇게 탐이 나시오이까?”

이때 도승지 박원형의 기척에 명회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못 보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명회가 원형의 헛기침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운검을 누구누구로 세웠소이까?”

하며 묻자 원형이

“지중추원사 성승과 유응부, 박쟁(朴)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세우기로 했소이다.”

세 사람 이름을 듣던 명회의 등줄기에 순간 식은땀이 솟음을 느꼈다. 성승은 성삼문의 아버지, 유응부는 유성원의 아버지, 그리고 박쟁은 박팽년의 아버지니 모두 다 하나같이 자제들을 집현전 학사로 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성삼문의 집에 삼문과 그 아버지 성승, 그리고 유응부가 모여 모의하였다.

“단칼에 수양과 그 아들 을 죽이고, 상왕 전하를 복위시키면 그만일세.”

유응부의 확신에 찬 말에

“수양 부자를 죽인 다음, 또 누구누구를 죽이면 되는가.”

“영상과 우상, 그리고 신숙주와 한명회, 그 밖의 정난공신 몇 사람을 죽이면 될 성싶습니다.”

같은 시각. 죽은 문종의 왕비인 현덕왕후의 남동생이자 상왕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이 찾아왔다. 이때 상왕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보검(寶劍)을 보이며 자신에게 준 뒤 징표를 보이게 한 뒤 자신을 따르도록 다짐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께서 하사하신 이 보검으로 먼저 수양대군을 벨 것입니다. 오늘에야 전하의 치욕을 갚게 되니 신이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보검을 두 손으로 받든 권자신의 목소리에는 감읍하여 마지않았다.

우부승지 한명회가 병조판서 신숙주와 이조판서 권람을 빈청에 불러들였다. 불러들여서는 이렇게 주의 주었다.

“그저 운검을 세우지 마시라고 전하시게.”

“허나 운검을 세우지 말라는 건 어폐가 있지 않소?”

숙주의 물음에

“오늘 운검은 성승과 박쟁 두 사람 중 한 사람일세. 오늘 연회에 전내에 무장하는 사람은 운검 뿐이니 막을 재간이 없지 않겠소이까?”

“그리 하는 게 좋겠습니다. 운검을 세울 필요가 없을 거 같으니 뒷말이 없을 겁니다.”

확신에 찬 권람의 말에도

“전하께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숙주가 머뭇거렸다. 숙주는 명회의 맏딸을 맏며느리로 삼았던지라 사돈으로서 돈독한 사이가 된 처지였다.

“전 내가 비좁으니 운검을 세우기에는 번거롭지 않겠느냐고 말씀 전해주시게.”

다짐하듯 명회가 계략을 짰다. 이 시각에 성삼문과 김질(金)이 모처에서 의논을 나누었다. 두 사람 모두 집현전 학사로서 같이 일하면서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삼문의 입에서 정창손(鄭昌孫)을 영상으로 앉히고자 한다는 말을 뱉었다. 정창손이 당시 좌찬성에 있었다. 이를 듣던 김질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김질이 공교롭게도 정창손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내 장인을 영상으로 삼고, 상왕을 복위시킨다. 이건 역모가 아닌가.’

마른침을 삼키며 김질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한편 금상을 알현한 신숙주가 우부승지의 뜻을 전하며 명나라 사신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들먹였다. 그러자 금상이 이를 받아들여 연회에 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하였다.

이날 밤. 김질은 장인인 정창손에게 찾아왔다.

“저 장인어른.”

가뜩이나 식은땀을 뻘뻘 흘린 사위를 마땅치 않아 한다.

“에잉, 얼굴이 꾀죄죄해 가지구.”

창손이 혀를 끌끌 찬다. 정창손은 세종대왕 때 소위 언문을 창제하는 것을 극력(極力)으로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은 사람이었다. 사위를 제 사랑으로 들여놓고도 말을 하지 못하고 뜸 들이는 모습을 지키다 못한 창손이

“어허 말을 좀 해야 알아듣지 않는가.”

사위를 다그쳤다.

“제가 죄를 지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머뭇거리는 사위의 말에

“어허, 말을 해줘야, 아 살리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닌가.”

장인은 다그친다.

“가령 역모가 있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순간

“뭐, 뭣이? 여, 역모?”

창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하를 시해하려는.”

“누, 누가 그런 엄청난 음모를 꾸민단 말인가.”

창손은 말문이 막혀옴을 느낀다.

“오늘 광연루에서 전하를 시해하려는 역모가 있었습니다.”

“허, 허면, 김 서방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장인어른도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관계?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일일세.”

창손이 발뺌한다.

“일이 성사되면 장인어른을 영상으로 모시기로 합의되어 있습니다.”

“어허, 큰일 날 소리.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역모에 가담한단 말인가. 내가 영상이 되는 건, 정승 자리에 오르는 건 떼놓은 당상처럼 쉬운 일인데.”

창손이 제 책상 위를 두드리며 학을 떼는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좌찬성인 장인과 서랑(壻郞) 두 사람이 야심한 시간을 틈타 대전으로 향한다. 대전 앞뜰에 사위를 내팽개치듯 하고 정창손이 서둘러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서 삼십 분이 지났을까.

“이런 죽일 놈들을 보았나!”

벽력(霹靂)같은 금상의 옥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가뜩이나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않고 대전 앞뜰에서 우왕좌왕하던 김질이 깜짝 놀라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김질은 이날 밤에 밀고자(密告者)가 되었다.

이렇게 정창손이 사위와 함께 집현전 출신의 관리들의 이름을 낱낱이 밝힘으로써 역모 사건의 서막이 올랐다.

성삼문을 대표로 한 절개 있는 젊은 관리들이 줄줄이 포승(捕繩)에 묶이어 굴비 엮듯이 끌려 나왔다. 그뿐인가. 상왕의 외숙인 권자신도 끌려 나왔다. 연이어 닥친 역모의 소용돌이 앞에서 금상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을 금수만도 못하다, 나리라고 호칭하느니 악다구니를 치듯 조롱하던 성삼문의 태도를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종대왕 못지않게 집현전 대신들을 그토록 친자식처럼 아꼈건만, 이제 와 은혜를 원수로 갚으니 금상 수양대군의 실망은 하늘을 뒤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금상의 엄명에 따라 수많은 집현전 출신의 대신들은 문초를 받았다. 대궐 안팎의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뒤이어 설상가상으로 금상의 맏아들인 세자가 병으로 그만 자리를 누웠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이 도성 안팎은 물론, 온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뜩이나 집현전 대신들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마음이 언짢았던 나머지, 명회가 트집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집현전 대신들의 부모와 그 형제들을 연좌하여 붙잡아 끌려와서는 고문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역모의 주모자를 내뱉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이었던가, 보름이었던가. 역모의 주모자를 끝끝내 밝히지 않은 채, 성삼문 등의 육신(六臣)과 그 아버지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하였다. 이들은 청사(靑史)에 그 이름들을 남기게 되니, 오늘날 사육신(死六臣)으로 불리게 되는 바로 그들이다. 사육신들의 거룩한 주검은 오늘날 한강대교 건너 노량진(鷺梁津)이라는 곳에, 사육신묘(死六臣墓)라는 이름의 묘역에 그렇게 잠이 들었다.

―명회는 성삼문 이개 박팽년 등과 같은 소장파 대신들의 반란을 제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승지에 올랐다. 이어 사육신의 밀고에 참여한 정창손을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한명회가 이윽고 금상의 측근이 되었다.

성삼문 등의 절개 높은 집현전 대신들을 죽인 뒤, 금상과 상왕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숙질(叔姪)의 정으로도 통하지 않고 군신으로의 정으로도 통하지 않는 것이 권력인가. 야심한 밤에 건춘문(建春門) 앞을 지키고 있던 갑사(甲士)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며, 세자 도원군의 빈인 정빈이 왕손을 잉태했는데, 왕대비 송씨가 은밀히 나인 하나를 시켜다 업둥이로 태어나도록 해코지하려 했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들이 대궐 안팎을 휩쌌다. 한술 더 떠 조정 안팎에서는 상왕을 폐위하도록 하는 중론이 일기 시작했다.

역모를 도모한 여섯 대신들을 처리한 금상은 우의정 이사철 이하의 대신들을 불러내어, 상왕의 장인인 송현수의 결백을 인정하고, 상왕이 여섯 대신과 내통하였음을 은연중에 밝혔다. 그리고 건춘문에 갑사를 내려친 사건을 자신의 부덕(不德)으로 돌려 흉흉한 소문에 공포를 떠는 대소신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동시에 충성을 다짐받음으로써 모반의 상처를 봉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가엾은 상왕 내외를 당상관들이 푸대접하니 그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를 듣던 자성왕비가 딱하게 여겨 자주 상왕 내외에게 찾아뵙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끔가다 의덕왕대비를 데리고 가 내불당(內佛堂)에 찾아가서 부처께 왕실의 안전함을 비는 일과 상왕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물레를 돌리는 것으로 소일하는 것이었다. 워낙 독실하기로 소문이 난 자성왕비인지라, 왕대비의 심란(心亂)한 마음을 자주 위로해주고는 했다.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라고는 외숙인 권자신 뿐이었건만 숙부라는 사람이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물어 죽이는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숙부의 가혹한 처사에 분노를 표출하고 중궁은 중궁대로 그런 상왕을 보필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지 않을 수 없기에 하루하루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가끔가다가 실을 뽑는답시고 물레를 돌리는 것으로 나날을 보내는 가엾은 내외를 상왕전의 상궁과 내인들은 하염없이 안타깝게 지켜보는 것이다.

그만큼 권력 앞에 무상함이 있는 법인가보다. 금상은 금상대로 자신의 사돈인 좌의정 한확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는 도중에 병환을 얻었다. 도성으로 돌아오지 않고 병세를 떨치지 못하여 서포(西浦)에서 그만 세상을 떠났다. 한확은 세자빈인 정빈의 아버지다. 왕이 한확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시호를 양절공(襄節公)이라 내렸다.

정빈이 사촌오빠이며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인 한치형(韓致亨)을 부르다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도록 하였다. 한씨의 설움은 깊이를 더해갔다. 동궁의 야심한 밤을 틈타 빈궁의 낮은 흐느낌이 전해져왔다. 금상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세자가 병으로 몸져누운 지 오래인데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객사하여 세상을 하직했다. 더구나 근래에 창덕궁으로 옮긴 상왕 내외가 버티고 보는 형국이고 보면 한씨 스스로 자신의 자리가 결코 안전한 자리가 아님을 느끼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조정에서 대로 대신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상왕을 폐위하라는 주청하니, 금상은 이제는 상왕을 내쳐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 다가왔음을 절감했다.

‘상왕을 폐위해야 한다니.’

금상으로부터 다시 신임을 받은 한명회의 집에 벼슬자리가 높고 낮은 것을 떠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내명부의 부인네들이 찾아와서 금은보화며 비단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 자신들의 일신을 위한 몸부림을 쳐대는 것이다. 명회가 자신들의 인사권까지 행사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돈 까닭이다. 세간에서는 명회의 집에 금은보화가 차고도 넘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갔다.

“이런, 이런, 도승지의 눈 밖에 나면 끝장이 나게 생겼네그려.”

문무관리들은 명회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으려고 온갖 아양을 떠는 것이다. 정난공신이었던 칠삭둥이 한명회가 이제는 한성부 전체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서 소문이 나게 되었다. 한때나마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황희 정승에 버금간다는 풍문이 나돌던 명회의 집안 살림은 고대광실(高臺廣室) 부럽지 않게 되었다. 민씨는 첩실을 잘 두었던 덕이라 한다지만, 명회가 수양대군과 그 며느리인 정빈이라는 동아줄을 꽉 움켜쥔 덕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보내고 세자의 병간호를 하는 정빈을 어두운 밤을 뚫고 조심스레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도승지 한명회였다.

“마마, 세자 저하의 병환은 어떠신지요.”

무엇보다 세자의 안위에 무슨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된 것이다. 세자빈의 얼굴은 초췌(憔悴)하였다. 밤새도록 병자를 돌보며 울음을 터뜨린 모양인지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울음을 억누른 채

“그냥저냥 하십니다.”

대답하였다.

명회가 보기에도 세자의 병색(病色)이 너무나 완연하였다.

‘세자가 단명할 운명인가 보이.’

세자빈이 정성으로 세자에게 몸에 좋다는 약을 직접 달여다 먹이고, 명나라에 좋은 약재며 먹을 것들을 수소문해 얻은 다음에 먹였음에도 세자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세자빈의 뇌리에서는 어떤 노승(老僧)의 말이 떠올랐다.

‘부귀영화를 누리실 만큼 누리시겠으나, 일찍이 청상(靑孀) 되실 상이시옵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이날에 와서야 보게 되다니. 한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빈궁은 남편의 병석을 뒤로하여 작은 왕손을 낳았다. 그 보람도 채 누리기도 전에 삼일 뒤에 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세자의 죽음을 누구보다 애통해하였다. 이에 왕은 의경세자(懿敬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경세자가 죽고 나서 상왕이 다시 옹립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나갔다. 세자가 죽고 난 뒤, 금상은 아들을 잃은 고통을 채 달래기도 전에 상왕을 폐위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생떼를 쓰다시피 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 이후의 참혹한 광경을 어짜 글발로 열거하랴. 일일이 말하기 차마 어렵다. 그렇게 폐위된 노산군은 도성 밖에 정업원에 부인을 둔 채, 강원도 영월(寧越) 땅에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다. 이때가 세조 재위 3년인 1457년 10월 21일. 그의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한명회의 손아귀를 빌려 왕위를 찬탈했다는 오명을 더해 상왕인 조카마저 죽인 패륜의 역사를 남긴 채, 수양대군은 깊은 밤 대전에 홀로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 다 갈 테면 가거라. 내 곁에 진실한 충신이 없단 말인가. 내가 어찌하여 보위를 얻었단 말인가.’

임금은 이내 낮게 울음을 터뜨렸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같은 날. 의경세자의 상여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탈상을 채 치르지 않은 까닭이다. 세자의 빈전(殯殿)에 홀로 앉은 빈궁은

‘두고 보세요. 신첩이 내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보위에 꼭 옹립시키고 말테니까요. 이 아이가 보위에 오를 그날까지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 참을 겁니다. 신첩은.’

의경세자의 신주 앞에서 굳게, 굳게 다짐을 하였다. 빈전에 불이 꺼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내려쳤다. 수빈의 눈에서는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광채가 번쩍였다.

이윽고 명회가 빈전에 조심스레 찾아왔다.

찾아와서는

‘마마, 세자께서 훙서하셨습니다. 장차의 일을 어찌하실 건지.’

하며 물으니

‘나는 아직 꿈이 있습니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꿈은 있으나, 갑작스레 지아비를 여읜 청상의 몸이 되고 보니 경황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 아들이 보위를 잇는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내 아들이 보위에 오른다고만 한다 싶으면, 험한 산에 올라가라면 험한 산을 오를 것이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가라면 불길로 갈 수 있습니다.’

명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지요.”

두 사람은 선문선답을 주고받은 모양인지 빈전은 이내 조용하였다. 한치형이 빈궁에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느냐고 물었다.

“할 말 못 할 말, 다했습니다.”

빈궁의 목소리에서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정빈은 금상 내외의 간청을 뿌리치고, 그렇게 빈궁의 몸으로 대궐에 있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고 잠저인 명례궁으로 향했다. 맏아들 월산(月山)과 고명딸인 명숙(明淑)의 고사리 같은 손을 양손에 잡고, 갓난아기인 자산(者山)은 유모의 품에 맡기고 대궐을 떠났다. 이후에 도성 사람들이 명례궁이라는 이름을 대신해서 정빈궁(貞嬪宮)이라 불렀다. 정빈의 거처라는 뜻이다.

한때 태상왕으로나마 받들었던 노산군의 죽음 이후에 그러니까 세조 4년 11월 1일. 수양대군은 활쏘기로 소일하고 있었다.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종친과 문무백관을 거느린 채 직접 관사(觀射)하였다.

관사하며 임금이 어제시(御製詩)를 남기니 그 시구를 실록에서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욕망은 작아야 채울 수 있고

일은 간략해야 이룰 수 있다.

하늘을 공경해야 그 하늘을 보전할 수 있고,

백성을 위하여 부지런해야 그 백성이 편안하게 된다.

자그마한 기예(技藝)에 마음을 쓰지 말고

큰 정사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권람이 이에 화답시(和答詩)를 올리니, 이 시 또한 실록에 적고 있다.

재목은 먹줄에 의해 바로잡히고

옥은 쪼아 내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는다.

두렵지 않은가? 썩은 새기로 말을 어거함이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하리라.

밤낮으로 근심하고 또 부지런하시니,

어리석은 이 신하도 정성을 다하리라.

금상 수양이 남긴 시는 자신의 죄책감과 회한에 서린 내면을 보여주는 듯. 이를 권람은 눈치채어 화답시를 남겼다.

11월 7일에 금상의 차남 해양대군(海陽大君)이 관례(冠禮)를 치르도록 형조에 전지한 뒤, 주문사(奏聞使)로 한명회와 구치관(具致寬)으로 삼았다.

11월 10일에 주문사 일행이 직접 명나라로 떠났다. 이때 금상 수양이 새로이 왕세자를 책봉한다는 주본(奏本)을 올렸다. 그 주본에 이르길,

“신(臣)의 세자 이장이 천순 원년 9월 초2일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황(晄)은 이장의 모제(母弟)로서 금년에 아홉이며 나라 사람들이 세자로 삼길 청하므로 신이 감히 독단하지 못하니 이를 위하여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해양대군을 새로이 세자로 세운다는 사실이 이미 공공연한 사실처럼 굳어졌다. 해양대군 또한 형님인 의경세자에 못지않게 총명하였다. 이극감(李克堪)과 한계희(韓繼禧) 등이 직접 <효경(孝經)>을 읽은 것을 보고 매우 감탄하기도 하였다.

의경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마친 뒤, 세조 3년 12월 15일에 해양대군을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세자로 옹립하였다. 그 책문에 이르길,

“내가 큰 기업(基業)을 받아 조석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길이 천지와 종사를 생각하여, 마땅히 국본으로 세워야 하므로 이제 너 이황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일찍이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할 것이며, 스승을 존중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원량(元良)의 덕(德)을 이루어 여망(輿望)을 저버리지 마라.”

책문을 받든 뒤, 임금이 해양대군에게 왕세자로 삼는다는 교지(敎旨)를 내렸다. 뒤이어 교서(敎書)에 일러 대역과 모반, 그 밖에 삼강(三綱)의 우를 범한 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사면하게 했다.

세조 4년 2월 12일에 사정전(思政殿)에서 중삭연(仲朔宴)을 베풀었다. 왕세자와 종친들, 그리고 재추(宰樞)들과 공신들이 있었다. 이때 장악원(掌樂院) 관리가 연주하는 아악의 음률에 따라 모든 대신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기만 하던 정인지가 술을 빌려서 왕에게 실언(失言)하였다.

“성상께서는 주자소(鑄字所)에다 법화경(法華經) 수백 벌을 찍게 하였고, 대장경(大藏經) 오십 벌을 찍게 하였는데 이제는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찍게 하시니 정녕 옳은 일이오리까!”

이를 듣던 모든 사람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수양이 이를 듣고 대노하여 잔치를 파하게 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우르르 모여와 전임 영의정 정인지에게 사과하는 서문을 올리게 하고 더 나아가서 임금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다 바쳤다. 이때 권람과 한명회가 참여하였다. 이때 권람과 한명회가 지은 시는 실록에 적혀 있으니 그 내용은 이렇다.

먼저 권람의 시는 이렇다.

하늘이 참된 임금을 내어 형창하여 무휼하시니

어수(魚水)의 서로 즐거워함을 일당(一堂)에서 함께 하였습니다.

산하(山河)를 가리켜 맹세하니 은혜가 망극하고

상(賞)이 자손까지 미치니 경사는 끝이 없습니다.

신심은 강릉(岡陵)의 수를 다투어 드리고

성훈(聖訓)은 일월의 빛남과 다투옵니다.

다시 침면(沈綿)을 다하여 보답하기를 생각하니

벽곡()할 마음 없고 장량(張良)을 본받겠습니다.

한명회의 시 또한 이렇다.

용이 날아서 흥운(興運)을 만났으니

홀로 성덕(聖德)을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큰 꾀로 처음 건선하시니

신공(神功)은 지축(地軸)을 굴렸습니다.

삼한(三韓)은 종사를 정하였고

사역(四域)엔 상마(桑麻)마가 무성합니다.

밝은 때는 오백을 즈음하고

대업(大業)은 천억을 드리웠습니다.

접한 땅엔 풍운을 모우고

여천엔 일월을 밝히셨습니다.

차차히 신공(臣功)을 생각하니

절절히 계칙(戒勅)을 거듭하셨습니다.

우러러 성훈의 깊은 뜻을 생각하고

구부려 면력(綿力)이 엷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임금은 본시 요(堯)와 순(舜)임금인데

신하는 직(稷)과 설(契)이 아니옵고

임금은 성왕(成王) 강왕(康王)의 다스림을 지나치시는데

신하는 소하(蕭何) 조삼의 계책에 부족합니다.

종시(終始)로 신하에 서약하니

충의는 금석(金石)같이 보존하리.

마땅히 이 마음을 다하여서

영세토록 홍택(洪澤)을 입으리다.

정인지의 행태도 행태지만 금상 수양은 더 이상의 살생(殺生)을 막아내고자 하려는 굳은 의지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걸 먼저 간파한 것이 바로 정인지였다. 세조 4년 2월 13일 정인지를 잡아들여 친히 추국하였다. 왕이 인지에게 묻기를,

“내가 복세암(福世庵)을 세우고 경지를 만들어도 경은 대신으로서 한마디의 말이 없었거늘 어째서 취중에 나를 욕보였는가?”

인지는

“취중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어제의 말은 경이 취했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나 경이 지금은 취하지 않았으니 일일이 내게 고하는 것이 어떠한고?”

인지는 같은 대답을 했다.

“군왕이 묻는데 대답을 못 하시다니. 불경하지 않소이까.”

보다못해 도승지 조석문(曺錫文)이 인지에게 꾸짖는 것이다. 왕은 인지를 제집으로 돌아가게 한 뒤 의금부에 전지하여 말하길,

“정인지는 임금 앞에 무례하게 말하길, ‘하루도 보전할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길, ‘연일 항형(抗衡)하니 깊은 못에 떨어지려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친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물은 즉, 말귀마다 승설로서 대답하며 모만하여 위를 능멸하였고 한마디 대답도 없이 양녕대군에게 눈짓하며 내 말을 듣고도 조금도 귀에 남지 않아, 대군으로 하여금 조답하는데 이르렀으니 그를 추국하여 아뢰라.”

하고 고신(告身)을 거두었다. 이틀 동안 진행된 국문을 끝낸 뒤 정인지를 사면하였다. 노령임을 감안한 까닭이다. 그러나 의정부를 비롯해 대간들이 정인지를 처벌하도록 주청하였다. 이후 임금이 조정 대신들을 데려다가 주연을 베푸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정인지가 틈만 나면 폭언을 일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너는 말이지.”

하며 금상을 하대하였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졌다. 금상이

‘이 영감탱이가 또 실성하였는가.’

이 정인지의 주벽(酒癖)은 오늘날에 와서까지 회자(膾炙)될 정도이니 일러 말해 무엇하랴.

2월 18일에 정인지에게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하였다.

윤2월 19일에 한명회를 진휼사(賑恤使)로 보낸다는 전교를 내렸다. 이때 하삼도(下三道)의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있었다. 이때부터 큰집 작은집을 뒤로하여 지방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6월 19일에 진휼사 한명회가 부복하여 아뢰길

“신이 소형명(小形名)으로서 시험해보니 전라도의 여러 진(鎭)들은 포진하는 방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경상도에서는 진법을 조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좌작진퇴(坐作進退)의 절차를 알지 못하였으니 모름지기 장수를 보내어 교련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금상이 명회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음에 기쁨을 아끼지 않으며 몸소 술자리를 베풀게 하여 위로하였다. 이어 29일에 한명회를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책훈(策勳)하였다. 이렇듯 금상이 명회를 신임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만큼 지극했다.

12월 7일에 인사가 단행되었다. 영의정에 정창손을 명하고 강맹경을 좌의정으로, 신숙주를 우의정으로, 영중추원사 권람을 우찬성으로, 홍달손을 판중추원사로 명하였으며, 오랫동안 이판에 있던 한명회를 병조판서로 명하였다. 병조란 무엇이던가. 팔도의 군대들을 통솔하는 막중한 관청이다. 그것도 병조의 수장으로 앉은 명회는 팔도의 군사들을 거느리는 것은 물론, 북방과 남방의 국경을 지키는데 만전을 기하였다.

세조 6년 3월 28일에 한명회의 여식을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정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왕세자빈이 녹사(錄事) 안기의 집에서 하세하였다. 세자빈이 아들 인성대군(仁城大君) 분(糞)을 낳은 뒤에, 산후병(産後病)으로 세상을 뜨신 것이다. 임금이 한씨에게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2년 뒤에 인성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자빈을 여읜 수양 내외는 소훈(昭訓)을 새로이 맞아들였다. 엄연한 세자궁의 측실이었다. 군기판관(軍器判官) 최도일의 여식과 사옹원별좌(司饔院別座) 한백륜의 여식이 바로 이들이다.

세조 11년 7월 27일, 의경세자의 빈궁인 한씨를 수빈(粹嬪)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이후 한씨의 거처 또한 자연스레 수빈궁이라 바뀌었다.

세조 12년 2월 13일, 소훈 한씨가 왕손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훗날 제안대군(齊安大君)으로 불리는 아기씨다.

금상은 의경세자에 이어 작은며느리와 손자까지 잃는 슬픔을 견뎌야 했다. 그 아픔이 더해갔는지 창진(瘡疹)이 생기기도 했다. 혹자들은 금상이 꿈속에 형수이자 노산군의 생모인 현덕왕후가 나타나서 자신을 저주하며 자신의 살점에다 침을 뱉었는데, 그 침 뱉은 자국에서 부스럼이 생겼다는 얘기를 빌미로 문둥병에 걸린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창진을 치료하고자 산수가 좋다는 곳에 찾아가기도 하였으나 말로 형언하기 힘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는 금상은 자식과 며느리, 하다못해 손자까지 모두 잃은 고통을 업보로 여기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상원사(上院寺)와 같은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다니며 불공(佛供)드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왕은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와 같은 불경을 언해로 풀이하여 백성들이 불심에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심지어 불경을 언문으로 번역할라치면, 수빈을 불러놓고 불경 번역에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같이 작업하는 등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수빈 또한 불심이 매우 독실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범어(梵語)에도 통달할 만큼 여느 부인네들보다는 학식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만큼 금상 수양이 여느 딸처럼 극진히 대하는 것이었다. 금상이 불가와 연을 이어가니 금상의 중부(仲父)인 효령대군이 대궐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효령대군 자신이 막내아우님이신 충녕대군을 왕위에 세우게 하고자 몸소 불자(佛子)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은 오늘날까지 널리 전해져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그래서 임금과 함께 도성 안에다 원각사(圓覺寺)라는 절을 짓게 하여 불사(佛事)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니 왕실이 불가(佛家)와 연을 맺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효령대군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금상 내외를 찾아가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그 덕에 금상이 효령대군을 말벗으로 삼아 넋두리를 늘여놓았다.

“정인지는 노망난 영감탱이라고 한다지만, 정창손이 영상이랍시고 거들먹거려서는 공공연하게 세자에게 선위(禪位)하라고 윽박지르더이다.”

금상이 이렇게 고자질할라치면

“허허허, 저런. 취중에 한 말 치고는 꽤 고약한 소리군요.”

하며 효령대군이 곧잘 받아주는 것이었다.

한편, 수빈궁에 때아닌 부인네들이 찾아들었다. 그곳에는 다과상들이 놓여 있었는데, 명회의 처 민씨와 홍윤성의 부인, 그리고 수빈의 둘째 언니인 계양군 부인 등 내외명부 부인들이 문안을 드리러 모여왔다.

“과부 설움은 과부가 알아준다고 마마의 설움은 신첩이 제일 잘 헤아리지 않겠습니까. 정말 장하십니다. 두 분 아드님을 의젓하게 키우셨으니”

계양군 부인의 말에

“그러게 말씀입니다. 오늘 월산군을 뵈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더이다.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민씨가 맞장구를 쳤다.

“모두들 덕담해주시니 고맙네.”

수빈이 이를 담담히 받아주었다. 이곳에 모인 부인네들이 낮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수빈은 애써 웃어 보이며

“내가 월산군보다 자산군을 더 엄하게 키웠습니다. 행여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욕을 먹지나 않을까 보아 더욱 모질게 매를 들었지요. 그 덕에 어디 내놓아도 흉은 되지 않을 만큼 월산군과 자산군을 키웠습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두 아들을 어엿하게 자라게 한 것에,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때 부인네들이 모여온 건 다름 아닌 월산군의 혼례를 감축드리러 인사차 온 것이었다. 월산군의 배필로 점지한 것은 병조참판(兵曹參判) 박중선(朴仲善)의 딸이었다.

같은 시간에 큰사랑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한치형이 월산군과 자산군에게 안부를 묻고 나서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산군께서 사서삼경을 모두 통달하셨습니까?”

“형님께서 도와주신 덕택에 사서삼경 언저리는 겨우 익히고 있습니다.”

한치형이 이를 기특하게 생각하며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전 사서삼경은 고사하고 소학만 펼쳐봐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자산군이 하도 졸라대기에 도와준 것뿐입니다.”

수빈궁 큰사랑채 밖이 어두워지도록 세 사람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부인네들이 물러간 안채에 수빈은 얌전히 정좌해 있었다. 그 맞은편에 한치형이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자산군의 명석함이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습니다.”

치형이 칭찬하는데 수빈은 한숨을 쉰다.

“웬 한숨이십니까, 마마.”

“곁가지가 총명해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때로는 나무줄기가 상하면 곁가지를 꺾어다 새로이 나무를 심지 않습니까.”

“말씀을 삼가세요.”

수빈은 사촌오빠의 말을 막는 것이다.

“마마께서는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세종대왕께서는 적장 승계를 삼으셨습니다. 세손이신 자산군이나 월산군이 보위를 물려받는 것이 흠이 아니지요.”

“그런 시아버님께서 장자이셨습니까? 그런 시아버님이 적장 승계라니요?”

“오늘날 전하께서 당하신 곤욕, 다 그 때문입니다.”

“오라버니.”

“대궐의 끊이지 않는 우환. 노산군을 교살한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민심이 그리 돌아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적장승계를 세우는 것이.”

“나는 다 버렸습니다. 지아비를 묻고 어린 세손의 손을 잡고 대궐문을 나서면서 온갖 한을 다 내 가슴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잠저로 돌아오시면서 마마께서 하신 말씀을 잊으셨나이까. 마마께서는 반드시 대궐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셨나이다.”

“그랬지요.”

“신의 가슴 속엔 마마의 그 말씀. 아직도 생생히 맺히어 있나이다.”

“그때는 그랬지요. 너무나 분하고 원통해서 대궐을 나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지요. 가슴에 맺힌 한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루라도 눈을 감고 잠든 날이 없었습니다. 잠든 세손의 얼굴을 볼 때마다 눈에서 피눈물이 솟구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 잊었습니다. 대궐로 돌아가다니요. 그게 꿈이나 꿀 일입니까.”

“마마.”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과욕입니다.”

치형이 물러간 뒤 수빈은 낮게 탄식하며 울었다.

다음날, 수빈은 시어머니인 자성왕비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 고부간에 서로 안부를 물었다. 온천행을 떠날 준비하며, 임금이 지난달에 친히 활을 쏜 것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마, 신첩의 장남이 다음 달에 혼사를 치르나이다.”

왕비가 아차하며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임 상궁.”

서온돌의 임 상궁에게 월산군에게 보낼 예물을 가지고 오도록 했다.

“내가 따로 예물을 놓아두었다.”

“마마.”

수빈이 황송해하였다.

“섭섭했다면 거두거라. 내가 잊지 않고 있었거늘.”

“신첩은 마마를 잊고 계신 줄 알았나이다. 신첩의 옹졸함을 용서하소서.”

수빈은 그동안의 설움이 복받친 듯 눈물을 흘렸다.

때아니게 정창손이 주연에서 선위하라고 윽박지른 것을 이유로, 4년 전에 영의정에서 파직당한 뒤, 신숙주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 곁에 권람이 좌의정으로, 한명회를 우의정으로 명하였는데 권람이 병환을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명회는 한직(閑職)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랬는데 신숙주가 금상으로부터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강권하다시피 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신숙주는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그 후임을 구치관이 맡았다. 이를 보다 못한 홍윤성이 명회의 작은집에 찾아와서는 그 소문을 꺼냈다.

“사임이라니, 범옹이 그 자리서 물러났단 말인가?”

진위가 의심된 듯 명회가 묻는 것이다.

“사임이 아니라 해임을 당했답니다. 형님.”

윤성이 대답하니,

“해임?”

“전하께서 범옹 형님을 대전에 불러다 놓고는 그만큼 해먹었으면은 염치를 알아야 한다면서.”

“저런, 저런.”

숙주의 처사를 딱하게 여기는 명회였다.

“형님, 전하께서 공신도 아닌 구치관을 영상에 앉힌 것이 더는 공신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윤성의 말에 납득한 듯 끄덕이는 명회.

“아 형님, 이대로 두고만 보시겠소이까?”

“그럴수야 없지.”

이때 곁에 앉은 향이가

“대감, 어찌하시려구요?”

물었다.

“따져야지.”

향이가 명회를

“공연한 화를 부릅니다.”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질 건 따지고서 죽어야지.”

관복을 차려입고 나서 명회가 대전에 찾아 들어갔다.

“신이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여한이 없나이다.”

부복하여 아뢰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금상이 서안을 탕탕 쳐댔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여한이 없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여한이 없으니 할 말을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명회가 대답하려 치니,

“듣기 싫습니다. 범옹의 사직을 받아들여 직첩을 받아들이고 구치관을 새로 영상에 앉힌 걸 두고 따지러 오신 겁니까. 그래서요, 나보고 어찌하라는 겁니까.”

“신숙주가 조정 안에 정란공신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요.”

금상이 코웃음을 친다.

“의정부에 구치관과 황수신(黃守身)이 공신이라고 할 수 없나이다. 좌찬성 윤사분(尹士昐), 우찬성 박원형, 좌참찬 최항 등이 전하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이라 할 수 있겠나이까.”

황수신이 좌의정에 있었다. 황수신은 오늘날 청백리로 일컬어지는 황희 정승의 셋째아들이며, 윤사분은 다름 아닌 자성왕비의 작은 오라버니다.

“일등이면 어떻고, 이등이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모두 공신록(功臣錄)에 이름이 오른 충신들이 아닙니까.”

자신을 비롯한 정란공신들이 근래에 들어, 푸대접을 한 것에 대해 섭섭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외직이든 한직이든 공신들만큼 배불리 먹고 마시고도 남아서 온갖 재물을 곳간에 가득 쌓아둔 적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았습니다.”

“전하, 더러는 부패가 있을 것이옵니다. 축재(蓄財)한 공신들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들이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나이까.”

“그 대가는 이미 충분히 치르고도 남았는데, 그만큼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되었지, 무얼 또 바라시는 겁니까?”

“전하.”

순간 명회는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공신, 공신 이제 공신 얘기 듣기만 해도 지겹습니다. 홍윤성이는 간통하다 죽게 생겼기에 살려주었어요. 홍달손인들 다릅니까?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에요. 죽은 사람을 들먹이기 뭣하지만 권람은 어땠소이까. 장사치를 비용이 없을 것 같기에 내관 하나를 시켜다 용처(用處)를 전달하려고 했더니 곳간마다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합디다.”

이제는 궁지에 몰렸다.

“그만큼 해 먹었으면 물러들 가세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열두 해째가 아닙니까. 염치들이 있어야지요!”

명회에게 삿대질을 하며 금상의 옥음이 격앙되었다.

명회가 표현하던 ‘공신들’은 곧 정란공신을 일컬음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옹립된 금상에게 무한한 충성을 다하였는데 또다시 성삼문의 옥사와 같은 사건이 재현되기를 극구 꺼린 까닭이다. 그러는데 금상이, 개나 소나 공신으로 봉하고 보는 판국이니 명회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디 기가 찰 뿐인가.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지 모르는 지경이었다. 그만큼 한명회를 수장으로 한 정란공신들이 수양으로서는 눈엣가시처럼 느꼈을 것이다.

명회가 물러간, 그날 밤. 신숙주와 구치관을 불러들여 술상을 차렸다. 전이며 신선로며 나물 종류들이 두루 놓여 있었다.

“이보시오, 신정승.”

하며 수양이 부를라 치는데

“예, 전하.”

하며 신숙주가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하하, 이번에 틀렸소이다. 내가 신정승이라고 한 건 이번에 영상이 되신 능성군(綾城君)을 부른 것인데, 전임 영상이신 고령군(高靈君)이 잘 못 듣고 대답하였으니 틀리셨소이다.”

금상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농지거리를 즐기는 수양의 독특하고 유별난 술버릇 때문에, 의정부 삼정승은 물론, 육조 당상(六曹 堂上)과 하급 관리들이 곤욕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정인지와 정창손과도 일화를 남겼는지도 모를 일일 것이다. 세 사람은 그렇게 밤이 새도록 술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 날이 밝은 대로, 왕이 조정의 대신들을 거느린 채 중궁과 함께 표훈사(表訓寺)와 장안사(長安寺)를 두루 둘러보았다. 그리고 장안사에 머무르며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도록 간경도감에 명하였다. 이때가 세조 12년 3월 21일의 일이다.

유관불심(儒冠佛心)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엄연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를 모를 수 없는 임금이 불상에다 놓고 절을 하는 진풍경(珍風景)이 벌어졌다. 물론 태조대왕을 비롯해 태종대왕, 하다못해 세종대왕까지 불교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인 왕실의 내력이 있건만, 임금이 불상에다 대놓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모든 대신이 들고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다못해 불심이 깊다기로 소문이 난 김수온(金守溫)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임명하여 중궁의 측근으로 삼기도 했다. 그만큼 수양 자신의 얼룩진 과거사를 회개하고자 하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명회가 수양에게 대놓고 정난공신에게 홀대(忽待)함을 섭섭하게 느낌을 내색한 뒤부터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양정이 오랫동안 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를 수비하고 또 오랑캐들을 다스리는 막중한 임무를 내팽개치고 직접 도성에 발길을 옮긴 것이다. 평안도절제사(平安道節制使)로 나간 양정을 임금은 융숭히 대접할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 한밤중에 대신들을 불러들여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양정이 대놓고

“네놈들이 도성 안에 편히 앉아서 호의호식하는 동안에 나는 단 하루도 갑옷을 입고 편안히 쉰 적이 없거늘.”

하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십여 년간을 오랑캐들을 몰아내느라고 좋은 시절을 다 보낸 사람이오. 전하께서는 내 얼굴에 미운털이 박혔는지 나를 함경도로 평안도로 팽이 돌리듯 돌리셨소이다. 그래도 나는 참았소이다. 하나, 요즘 조정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울화가 치밀어 더는 참을 수 없소이다.”

양정은 이내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술상을 대놓고 탕탕 친다.

“저 양반이 일을 기어이 내시겠군.”

“방금 뭐라 했소이까.”

맞은편에 앉은 박원형이 중얼거리는 말을 가지고 양정이 꼬투리를 잡는다.

“어, 아니오이다.”

“일을 내겠다.”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못 낼 건 또 뭐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나.”

옆자리에 앉은 홍윤성이 옳다구나 하고 맞장구를 친다.

“옳거니,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안 그렇소,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형님.”

윤성의 옆자리에 앉은 홍달손이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한다. 간만 열린 술잔치가 거의 경직(硬直)되었다. 이를 보다 못해 숙주가

“자준.”

명회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청원군께서는 말씀하시되 가려서 말씀하시어야 하네.”

“왜 겁이 나시오이까. 상당군 대감.”

“할 말은 하시라 그 말씀이네.”

“하고 말고요.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외다.”

이윽고 상감이 좌정(坐定)하였다. 일제히 신하들이 일어났는데 양정이 대뜸 예를 갖추지 않는 게 아닌가.

“청원군께서는 일어나시어 전하를 맞이하셔야 합니다.”

금상 수양이 양정의 행태를 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마지못해 양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냥 앉아 계시게, 먼 길을 달려오셨으니.”

금상의 다정스러운 옥음을 듣고도, 양정이 이번에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신가. 할 말이 있으시면 먼저 할 말을 먼저 하시고 앉으시게.”

양정이

“전하. 전하께옵서는 신이 먼 길을 달려왔으니 앉아서 전하를 맞이하라고 하셨나이다.”

“그랬지, 그랬는데.”

돌발하는 양정의 의중을 모르는 상감이다.

“먼 길을 달려온 것은, 신이 아니라 전하이십니다. 쉬시어야 할 분은 신이 아니라 전하가 아니시옵나이까!”

“나보고 쉬라고 했소이까.”

갑작스러운 양정의 행패에 수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사옵니다.”

“경은 무슨 뜻으로 쉬라고 하시는가.”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오래이시니 오로지 한가로이 편안히 쉬시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내가 평소부터 왕위에서 물러나 편히 쉬려고 했으나 감히 그러지 못하였다. 경은 서방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서방의 백성들의 말 또한 이와 같은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지켜보다 못 한 숙주가

“전하, 청원군은.”

이를 만류해보았지만,

“내가 죽고 또한 신숙주와 한명회가 죽고 경이 또한 죽어서 임금과 신하가 모두 죽는다면 그러면 누가 있어 이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차차로 잊게 될 것입니다. 세자저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울화가 치미는 것을 임금은 한숨을 깊게 쉬는 것이다.

“청원군은 취하셨는가. 술을 마시고 대전으로 오셨는가.”

명회가 양정에게 버럭 역정을 내는 것이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소.”

“어허.”

별안간 양정이 부복하며

“전하, 전하께옵서는 십여 년간을 보위에 앉으셨습니다. 그동안에 과로로 전하께옵서는 병을 얻으셨으니 신이 안타까운 것이 바로 이것이옵니다. 부디 세자저하께 대업을 물려주시고.”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어디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 도승지는 즉시 상서원(尙瑞院)에 가서 대보(大寶)를 가져오너라.”

도승지 신면(申)에게 대보를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상서원은 임금의 도장과 인장을 보관하는 관청이며, 신면은 신숙주의 차남이다. 신숙주를 영의정에 있는 동안에 무한히 신뢰하였는데 신면 또한 임금을 잘 보필하므로 이를 기쁘게 여긴 처지였던 만큼 임금과 신하 사이로서 매우 돈독하기 그지없었다. 도승지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청원군의 망언이 이와 같으니 먼저 의정부 대신들과 청원군을 죽이시어 신들의 불충을 엄히 다스리시옵소서.”

영의정 구치관 이하 조정 대신들이 모두 어명을 거두라고 주청하였지만, 임금의 의지는 확고했다. 양정의 돌변에 임금은 한명회의 농간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명회가 자신의 선위를 충동질을 시켰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한명회의 권세가 그만큼 막강했다. 금상의 어명을 듣던 세자는 강녕전 앞에 앉아, 선위의 명을 거두라고 석고대죄를 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선위 파동을 듣고 일제히 신하들이 세자를 옹위(擁衛)하듯 석고대죄를 드리는 것이었다.

“대보를 강녕전에 두고 물러가라. 오늘 밤은 늦었으니 밝은 날 아침에 선위할 것이다.”

어명을 듣고 나자 정난공신들은 양정의 말에 동조하였다가 주춤하는 것이었다.

“선위를 내일 아침에 하시겠다니!”

일제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외면을 하였다. 양정이 민심을 잃었다는 말로 구슬리기도 하였음에도.

“예끼, 쓸개 빠진 놈들! 말이 피곤하여 달리지 못하면 싱싱한 말로 갈아타는 것이 순리거늘, 무어가 무서워서 슬슬 피하는 게야!”

양정의 역정은 온 대궐을 울리고도 남았다.

월산군의 혼례식이 다가올 즈음에 수빈은 아들 월산과 자산을 데리고 대궐로 들어갔다. 시아버지 수양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다. 이날 맞춰 한치형이 한명회의 집으로 향했다. 명회가 부인 민씨로부터 찻상을 대접하도록 권하였다. 두 사람은 찻상을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그러다가 민씨가 물러가는 틈을 타

“상당군 대감, 대감께서는 이제 영상으로 올라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치형이 대뜸 한마디를 내놓는다. 이는 수빈의 의중이기도 했다. 치형은 이때부터 수빈의 수족 노릇을 자처하는 처지였을 뿐만 아니라, 명회와는 한 집안의 먼 친척이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내뱉은 물음이기도 했다. 그러자

“영상?”

밑밥을 던지듯 물어보는 명회가 머뭇거렸다.

“그게 순리지요.”

확신에 찬 한치형의 대답을 듣고 기막혀 웃는다. 웃더니

“하고는 싶으나 전하께서 시켜주시겠소이까.”

“누구보다도 수빈 마마께서 간절히 원하신 바입니다.”

“수빈께서?”

의외로 수빈이 자신을 영상에 앉히고자 발 벗고 나섰다는 말을 듣던 명회가 멈칫하였다.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행여 먹다가 죽거나 탈이 나지 않을까 멈칫하고 보는 명회였다.

“수빈께서는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으시옵니다.”

“그거야 중궁이 못되신 것이 한이 아니겠소이까.”

명회는 모사꾼답게 수빈의 의중을 파악하였다.

“유난히도 야망이 크신 분이셨으니.”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그를 치형은 놓치지 않는다.

“수빈께서 한 가지 소원이 더 있다고 하십니다.”

수빈의 소원이 무엇인지

“말씀하시게.”

명회는 내심 궁금해한다.

“중전은 못되셨으나 대비는 되고 싶다고 하십니다.”

치형이 멋쩍어 웃음을 터뜨린다. 그제서야

“이 사람이. 그게 웃을 일인가. 중전이 못됐으니 대비(大妃)라니.”

수빈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명회가 안절부절하였다. 치형이 수빈의 의중을 덤덤하게 말하자

“답답한 사람. 지금 양정의 일로 전하께서 대노하고 계시는데 나를 영상에 앉히시겠소이까?”

“한 가지, 상당군 대감께서 하실 일이 있으십니다.”

“뭔가.”

“양정을 살리는 일에 나서지 마시라는 수빈 마마의 분부십니다.”

“그리할 수 없네. 날 믿고 하는 일인데 설령 전하께서 나까지 죽이신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네. 내가 양정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고 무슨 염치로 나를 따르는 사람을 대하겠는가.”

“양정을 죽여 대업을 이룰 수만 있다면.”

“물러가시게. 나는 목숨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네. 나를 정녕 의리를 저버리게 할 속셈이신가.”

사랑 밖까지 쩌렁쩌렁 명회의 화난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