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어두운 밤. 명회의 집 앞에 어슬렁거리는 선비가 있었다.

“이리 오너라.”

불러도 기척이 없어 권람이 재차 부르니 명회의 집에서 기척이 난다.

“뉘시오?”

아낙의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아니, 권 교리 나리 아니신가요.”

서방 앞에서는 툴툴대던 민씨가 웬일인지 예를 갖춰 맞이했다. 권람은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였다.

“자준의 소식이 궁금하여 찾았습니다.”

민씨의 인사를 받으며 명회를 찾아온 경위를 말한다. 그러자,

“우리 주인 양반이 계시지 않아 차마 들어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거 송구해서 어쩌죠?”

민씨의 말에 권람은

“아, 괜찮습니다. 여기서 인사드리고 돌아가야죠.”

권람은 어두운 곳을 바라보며,

“염 서방!”

하고 부르니 종과 짐꾼들이 집 대문 앞까지 다가갔다. 민씨가 보니 소 달구지에 실린 짐들이었다. 거기에는 쌀 스무 섬에 백포(白布) 스무 필, 그리고 비단 스무 필이 있었다. 민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웬 짐들이죠?”

휘둥그레지며 묻는 민씨를 정경(正卿, 권람의 자)은 흐뭇해하며,

“약소하게나마 준비해온 것들입니다. 집에 용처(用處)로나마 쓰시라고 마련해둔 것이니, 그저 너그러이 받아주십시오.”

하였다. 그러고나서 아랫것들에게 명회 집안에다 짐들을 두고 집으로 돌아오게 한 뒤,

“그럼.”

하고 민씨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제 집으로 돌아간다. 권람은 그나마 조정에서 녹봉을 받아먹고 있는 처지인데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기에 살림이 풍족했다. 그래서 작게나마 명회의 소식을 구실삼아 친구의 살림을 챙겨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권람이 돌아간 그 시각. 명회는 경덕궁 대청마루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틈에 웬 누추한 차림의 남정네가 대청으로 오는 게 아닌가.

‘히히, 명회가 아직도 자고 있나?’

개구쟁이같이 천진난만한 웃음기를 띠고 약을 올릴 궁리를 하는 그 남정네의 양손에 술병이 들려 있었고, 명회는 여태까지 잠자고 있었다. 이때 남정네가 대청에 걸터앉으며 술병들을 놓더니,

“이보게, 자준이.”

하며 잠자는 명회를 깨운다.

“으이구, 자준이. 여태 자구 있는 건가?”

하고 술병 하나를 들더니 마개를 열어 술냄새를 풍겨댔다. 그때.

“이 썩어 문드러진 냄새는 이현로(李賢老)의 냄새가 분명하고 향긋하고 감미로운 냄새는 분명 술냄새렷다.”

눈 감은 채 웅얼거리고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현로가 가져온 술병을 냅다 낚아채어서는 벌컥 술을 마셔댄다. 그 곁을 보던 현로도 덩달아서 다른 술병을 집어들고서 마개를 뜯고는 같이 마셔댄다. 두 사람은 함께 낄낄대며 웃어대었다.

두 사람은 모두 태어나기를 험하게 났지만, 세상을 꿰뚫어 보는 재주를 가졌다. 현로와는 어릴 적부터 동네 친구로서 막역하게 지낸 사이였다.

현로가 송도에 오게 된 목적은 단순히 친한 동무를 만나려는 것일테지만 검은 속내를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처지다.

반가운 동무 명회와 현로는 어두운 밤길을 거닐다 어느 기방에 다다랐다.

“이보게, 자준이. 밤도 어두운데 날 데리고, 어디로 훨훨 날아가는 게야.”

현로의 말은 뒷전이고 명회는 그저 특유의 웃음소리로 껄껄대며 앞서 걸어간다. 평평한 길을 따라가다 보니 개울이 보이고, 그 건너편까지 이어지는 돌다리를 건너며 둘은 걷는다. 이윽고 기방에 당도하더니,

“이리 오너라.”

명회가 기세 좋게 기척낸다.

“여기가 어딘고?”

“보면 모르시겠나?”

그러자마자 안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는 걸 느낀 현로가

“예가 기방이 아닌가?”

묻는데는 아랑곳 않고

“이리 오너라.”

소리치는 명회다. 그러고서 하는 말이,

“밤눈 어둡다더니 두 눈이 번쩍 뜨이셨구먼.”

했다. 그러자 현로는 난처해한다. 현로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기방의 여자를 직접 가까이 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뉘시오?”

하고 머슴이 기웃거린다.

“네 이놈, 초선(草仙)이는 안보이고 어째서 네만 내미느냐? 냉큼 초선이年 대령하렸다.”

“아이고, 초선이 걔 서방님이 한둘이라야죠. 어느 서방이라고 부르셔야 고할 텐데.”

“이런 쳐죽일 이 있나. 초선이 서방이 나 말고 있다더냐.”

며 기세좋게 맷집으로 머슴놈의 어깨를 밀치며 들어간다. 현로도 그 뒤를 따른다. 명회가 앞서며 초선이를 마당 한가운데까지 찾으면서도 잊지 않은 듯 현로에게 손짓으로 불러대고 해댄다. 현로는 머뭇거린다. 그러나 명회는 한사코 그의 도포 자락을 부여잡고 안으로 들인다. 그러면서

“우리 고주망태 되도록 신나게 놀아보세. 기왕 먼 길 찾아왔으니.”

이때 초선이가

“내 왔소.”

하며 맞이한다. 초선이는 이제 막 스물을 넘은 듯.

“뉘 댁 서방님이 이 年 저 年 하시오?”

아양 떠는 초선의 물음에 명회가 함박웃음이다. 일곱 달만에 태어난 성치 않은 몸이지만, 자연의 섭리라서 그런지 여자 보는 눈이 있기는 매 한 가지다.

“한 보름만에 새 서방 얻지 않았으렷다?”

“내 난봉쟁이가 외상 술을 여러 번 얻어먹는 건 처음이오.”

초선이가 내심 섭섭했나보다.

“네 年이 살다 살다, 몇 년을 살았다고 그러느냐. 천하의 한명회가 그래 술값 떼어먹고 야반도주할 성싶더냐?”

명회가 초선의 볼을 살짝 꼬집는 시늉을 해댄다. 그새 초선이는 배시시 웃어대는 거다. 그때 현로는 아차! 하고 깨닫고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맨다. 아니나 다를까.

“이보게.”

하며 머슴을 부르는 초선.

“뒤채에 방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리로 안내하시게나.”

머슴이 알겠다며 굽신거리고는 앞서간다.

“초선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상 들이고, 물정 모르는 동기(童妓) 몇을 데리고 오렷다.”

그러자 웃음으로 초선이 대답을 대신한다. 두 선비는 머슴의 뒤를 묵묵히 따른다. 두 사람이 가는 모습을 보던 초선이

“꼴에 벼슬아치라구.”

하며 코웃음친다.

이때,

“이보게.”

하는 기척이 나 초선이 보니 뜻밖에 현로다.

“날 부르셨소?”

현로가 제 품에서 별안간 동전 서너 닢을 초선이 손에 쥐여주고는

“잘 부탁하네.”

한다. 그제야 초선이 입이 함박웃음으로 피어난다. 명회보다 경우가 바른 현로의 마음 씀씀이에 반한 것 같다. 들어가면서 현로와 명회는 한양과 송도 인심을 비교하고, 한양보다 송도의 살림이 더 어렵고, 송도 인심이 고약하다며 넋두리를 늘인다.

“아, 술상들이라지 않느냐?”

명회의 재촉에 맞춰 주안상이 들어왔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채.

“송도 인심이 고약해도 초선이 인심은 푸짐하구먼.”

명회가 껄껄 웃는다. 뒤이어 어린 기생 서넛이 들어온다. 이윽고 술판이 벌어진다.

“자, 자. 멀리서 오셨으니 잔을 받게.”

둘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해대며 마셔대기를 십수번 되었다.

“자네 안평대군(安平大君)한테 안 가시려나.”

현로 쪽에서 물었다.

“안평대군?”

명회가 되묻는다.

“세상이 발칵 뒤집힐 걸세.”

현로는 지기나 다름 없는 명회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풍악을 울리렷다!”

하며 호령해댄다. 그러자 악공들이며 기녀들이 구성지게 풍악을 울려대는게 아닌가. 두 사람은 첫닭이 울도록 놀다 잠시 고꾸라지고, 다음날 아침에야 서로 헤어졌다. 현로는 그길로 자하문(紫霞門) 밖 안평대군의 집에 가고 있었다.

현로가 안평대군의 집에 이른 것은 대낮이 되어서다.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삼남(三男)이다. 현로는 바로 안평대군의 책사(策士)였다. 현로가 안평대군에게 절하고 그러자

“누구를 만나셨는고?”

대군이 물었다.

“차츰 말씀 드리리다.”

“이 사람.”

점잖게 대군이 타이르나

“그나저나 영상 대감을 만나셨나이까?”

현로가 얼른 화제를 돌린다.

“만났으이.”

“영상(領相)께서 뭐라 하십디까?”

영상이란 황보인(皇甫仁)을 두고 한 말이다. 황보인은 영상, 곧 영의정에 있던 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재위 때부터 고위직에 있던 사람이었다. 성품이 워낙 우유부단(優柔不斷)하다보니 뭇 조정 대신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때문에 실질적인 힘이 약한 사람이다. 안평대군이 그를 떠올리며 허허 웃어대고는

“세상이 영상 대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그 영감탱이 낯색이 변하였네.”

현로에게 대답했다. 주거니받거니 하던 차에

“황보인이 김종서(金宗瑞)의 적수가 되겠는가?”

하며 대군이 묻자,

“힘들겠죠. 허나 소인의 생각이 따로 있사옵니다.”

하며 대군에게 제안을 던진다. 바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만나라는 제안이었다. 양녕대군이 누구던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장남으로서, 양위(讓位) 파동을 두 차례 겪고 변덕스런 부왕(父王)을 따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쓸 뿐만 아니라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여 온갖 비행을 일삼기로 유명한 사람이며 자신의 셋째 아우를 보위에 옹립하는데 일조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은 종실을 대표하는 웃어른이지만 그 역시 실질적 힘은 없었다. 진정한 실세라면 단연 김종서였다. 김종서는 세종 치세 하에 최윤덕(崔潤德)과 더불어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개척해 조선의 북방영토를 지켰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 좌의정에 앉음으로써 실권을 움켜쥐고 있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현로의 정세를 바라보는 통찰력에 안평대군은 놀라워하고 감탄했으며, 그 혜안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현로의 말인즉슨 종실의 대표로서 양녕대군의 지지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 어른의 지지 없이는 종실을 대표할 수 없죠.”

“그도 그러네만.”

“사람들은 소인이 모으겠습니다. 영상 대감을 제 수중에 넣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양녕대군만큼은 소인의 힘으로 어림도 없습죠.”

그제야 매듭이 잡힌 것을 안 듯 대군이

“생각해보겠네.”

하며 대답한다.

나흘이 지난 뒤 양녕대군의 집으로 웬 쌀가마와 온갖 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이를 보고,

“이것들이 어디서 온 것들이냐?”

하고 물으니까 짐꾼 하나가

“안평대군 마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대답했다. 이에 양녕대군이

“누구 마음대로 남의 재물을 내 곳간에 넣으려고 하는 게야?”

하며 펄쩍 뛴다. 어서 썩 가져가라며 호통친다.

양녕대군은 안평대군의 이번 태도에 진절머리가 난 모양인지 그 형이 되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사저로 향했다. 안평대군의 작은 형인 수양대군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했던 조카였기 때문이다. 안평과는 다르게 수양대군은 문무(文武)를 두루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향력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세에 능히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눈여겨 두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태종대왕은 왕위계승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형제는 물론이고, 제 처가와 사돈의 팔촌을 몰락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양녕대군은 이를 수도 없이 지켜보았기에 자신이 보위에 오르면 그 업보(業報)를 짊어져야 하는 것 때문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셋쩨 아우에게 보위를 넘긴 것이다.

‘내가 오죽 기인 행세를 했겠는가. 그런데 나이 어린 임금이 보위에 옹립되다니.’

양녕대군의 예상은 적중했다. 오 년도 못 채운 채 문종대왕이 하세하자, 세종대왕의 소생들이 장성한 데다가 모두들 보위를 탐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보니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곧장 망하게 될 성싶어 불안해하던 차였다. 안평대군의 태도가 양녕의 눈으로서는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제깟 놈이 유세를 부려서 좋을 게 뭐하누.’

혀를 끌끌 차대며 아랫것에게 시켜 평교자를 탄 채 수양대군의 집에 도착한 양녕은 곧바로 기척을 내었다.

“이리 오너라.”

수양대군의 처 윤씨(尹氏)가 서둘러 마중나온다.

“오셨습니까.”

윤씨의 인사에 양녕은

“수양은 안에 있나.”

“네, 백부(伯父)님.”

윤씨의 대답에 서둘러 수양이 기거하는 사랑으로 향한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수양대군이 양녕의 헛기침 소리에 직접 마중을 나왔다.

“양녕 백부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양녕은 들입다 수양의 사랑채에 들어간다.

“앉으시게.”

다급한 듯 양녕이 수양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오늘 대낮에 안평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서는 냅다 내 집 창고에 내던지듯 놓았네.”

“그래요?”

의외의 반응을 보인 수양대군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더러운 재물을 내가 무슨 수로 받누.”

하며 넋두리를 놓는데 수양대군은 묵묵히 듣고 있는다. 그러잖아도 종친부(宗親府)에서는 말썽이 많았다. 안평대군은 난초는 물론, 산수화에도 두루 능했다. 그러기에 모자람 없이 왕족으로서 살아온 처지였는데, 양녕의 눈으로서는 그게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기에 종친부의 수장으로서 양녕대군은 그런 안평대군의 태도를 예의주시했을 뿐만 아니라, 왕재(王才)로서의 자질을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양녕은 양녕대로, 수양은 수양대로 그런 태도를 눈감아오던 처지였지만 앞서 이현로가 저지른 과오 때문에, 형제간의 의리를 저버리는 행각임을 생각할 때 괘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양녕이 물러간 자리에 윤씨는 자리에 앉았다. 윤씨는 윤번(尹)의 딸로서 열두 살의 나이에 수양대군에게 시집을 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둔 덕분으로 세종대왕 내외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시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생전에 처복(妻福)이 없는 장남 대신 차남 내외를 따뜻하게 대했다. 그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까닭인지 윤씨를 볼 때마다 마치 소헌왕후의 생전 모습을 닮았다고들 하는 처지였다. 그만큼 수양대군과의 금슬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수양대군의 부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각별한지도 모른다.

“양녕 백부님께서 어인 일로 오셨나요?”

윤씨의 물음에 수양대군이 대답한다.

“안평 아우가 낭비벽(浪費癖)이 도진 모양입니다그려.”

그러고는 수양대군이 너털웃음을 친다.

송도 경덕궁 지기 자리를 때려치우고 한양에 돌아온 건 대략 초가을 즈음. 그것도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야심한 시각에서였다. 가뜩이나 혼례를 치르고 처가살이하는 처지요, 잔소리꾼인 장모에게 눈칫밥 얻어먹고 사는 신세이고보니 한양에 당도하는 것도 신세이다 보니 한양에 당도하는 것도 변변하게 못하였다. 그래서 생각난 게 월담하는 것이었다. 칠삭둥이 한명회. 그는 기세 좋게 담을 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착지가 불안정하여, 장독대에 하필 내려버렸다. 그런 탓인지 죄없는 장독 두어 항아리만 깨진 것이다.

“아이구, 아야.”

발을 헛디딘 바람에 명회는 발목 편에 살짝 삐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앓는 소리에 민씨가 잠옷 바람에 놀라는 게 아닌가.

“뉘시오.”

도둑이 들었는지 싶어 조심스럽게 기척을 낸다. 이 와중에 명회는 계속 앓는다. 염좌(捻挫) 증세가 있는 모양인 듯. 민씨는 어둠을 비집고 장독대에 가서 보고서는,

“에그머니, 이게 누구요. 영감 아니슈?”

하며 묻고는 안심한다. 명회도 그제야 깔깔 웃는다.

“영감, 집에 들어오셨음 응당(應當) 대문으로 들어오시지 왜 담을 넘어 오시우. 예가 남의 집도 아닌데.”

“이내 몸이 처가 덕으로 살고 있는 까닭에.”

명회 말에

“알기는 잘도 아십니다그려.”

민씨가 코웃음친다.

“그나저나 송도는 어쩌시고, 예까지 왜 왔소.”

부인의 물음을 듣던 명회는 그제야 이실직고한다.

“송도 경덕궁 지기 그만두었소이다.”

그제야 민씨는 어처구니 없어 한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명회는 기세등등하게 콧노래를 신바람 나게 흥얼거리며 오랜만에 보금자리를 찾은 기쁨을 만끽했다. 명회가 경덕궁 지기를 다른 사람한테 넘기다시피 때려치우고 찾아온 연유가 안평대군의 책사로 있던 이현로의 연락을 받은 탓이다. 인편을 통해 현로가 서찰을 써서 서울로 당도하기를 고대하는 맘을 전달했다. 명회는 오랜 지기인 현로의 연락을 받고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던 까닭에 이렇게 사단이 난 것이다. 이현로는 본래 세종대왕이 신임하던 집현전 학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 탄핵받고, 좌천되었던 까닭에 변변한 벼슬을 해보지 못하다가 안평대군의 도움과 문종대왕의 사면에 힘입어 죄에서 풀려났다. 이후에 안평대군의 밑에서 조력(助力)하게 된 것이다. 한번은 세종대왕의 차남이자 안평대군의 작은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문종대왕의 산릉(山陵) 문제로 현로와 마찰을 빚었는데, 자신을 업수이 여겼다는 이유로, 현로에게 안평대군의 마졸(馬卒)이라는 폭언을 하며 매질했다. 이 사건 때문에 조정 안팎에서 한동안 회자(膾炙)되었다. 그런 이현로가 명회의 출사를 터볼 요량으로, 안평대군의 제휴를 꾀한 것이다.

다음날 대낮에 명회는 바깥을 나설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곁에서 민씨가

“대군 댁에 가신다면서 그런 행색으로 가실 작정이시오?”

하며 혀를 차는데 땟국물이 짜르르 흐른 백립(白笠)에, 백의였다. 때마침 선왕의 상중인 관계인 까닭인데 그 행색으로 찾아가지 않다는 말인즉슨 다름 아닌 안평대군에게 찾아가는 것이다.

“내 행색이 어때서?”

고지식한 명회의 대답을 민씨는 아랑곳 않는다.

“옷고름이라도 단정히 매 가셔야죠, 대군 댁에서는 까다롭다 그지없답니다. 은근히 사람을 가린다는 소문입니다.”

민씨의 염려 섞인 말에 명회는 등을 쓰다듬듯

“염려 마시오, 부인.”

하면서 밖을 나선다. 나서면서

“천하없이 까다로운 사람도 내 세 치 혀를 서너 번만 놀리고 나면 봄눈 녹듯이 녹고 맙니다. 다녀오리다. 부인.”

애타듯 민씨는 나서는 지아비에게 넋두리하듯 타이른다.

“제발 부탁입니다. 대군께서 섭섭히 대하신다고 해도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마시오.”

그러자 명회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 사람이 이거, 대사(大事)를 앞둔 대장부에게 마당까지 따라 나와 잔소리하다니.”

민씨는

“친정집 눈치가 보기 싫어서죠.”

하며 연신 애타한다.

“장인이 싫은 소릴 합디까.”

“아무 소리 안 하시니 더욱 바늘방석이죠”

“아들 하나에 내리 딸 셋을 낳았으니까.”

“한마디 했더니 그새 토라지셨누?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 어떨라구. 내 다녀오리다. 부인.”

첫아들 한보(韓堡)를 낳고 내리 딸 셋을 낳았다. 처갓집 신세를 지면서도 그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려고 하는 게 한명회의 소일이었다. 안평대군의 사저를 다다르니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문지방이 닳도록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고 간다. 지나가는 몸종에게

“이보게”

“뉘댁에서 오셨소?”

명회의 부름에 몸종이 능청스레 되묻는다.

“능참봉 나리를 뵈러 왔네.”

능참봉이란 말에 몸종은 코웃음친다.

“능지기 양반을 왜 찾으슈?”

능청거린다기보다 비아냥거리는 말투랄까.

“대군 마님과 만나기로 이미 약조를 했네만.”

애써 점잖게 명회가 대답하지만 몸종은

“능지기 양반을 만날 요량이면 산릉으로 가보시기나 하슈.”

하며 제 볼일을 보러 간다. 그러자

“네 이놈! 이미 안평대군과 만나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썩 고하라!”

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뉘시라 전하리까.”

그제서야 몸종이 뒤돌아보고 물어본다.

“송도에서 올라온 한명회라고 하면 아실 게다.”

“흐음, 여쭙긴 하겠으나.”

몸종은 어정쩡하게 대답해대고는 제 갈길을 간다. 이에 명회가 기가 차서 혀를 끌끌 차댄다. 이에 실망을 느끼고는 냅다 장인 민 대감의 집에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민 대감 내외에게 안부를 드리기가 무섭게 술상을 냅다 들인다.

“아니 이 사람아, 그렇다고 그 자리서 나오셨나?”

장모 허씨가 잔소리하기 시작한다.

“정승 집 개만도 못한다는 팔자라더니 하인 의 눈초리 땜에 나왔습니다.”

그제야 민대생 대감은 사위의 능청에 낄낄 웃어댄다. 허씨는 사위의 모습을 한심스러워하며

“자네 행색이 딱 그러허이.”

“장모 눈에도 그렇게 보이십니까?”

술잔을 집어들고 장모에게 능청을 떤다.

“도대체 어찌 사시려고 그러누? 나이 사십이 다되어야 겨우 얻은 벼슬자리를 헌신짝 버리듯 내던지고. 대체 뭘 먹고 사시려고 그러누?”

애타하는 장모다.

“설마 처자식을 굶어죽이기야 하겠수? 장모.”

“큰소리 친다고 땅에서 나오누 하늘에서 치솟누?”

저 뱃속에 무슨 꾀가 있기에 저렇듯 득의양양하게 그러누. 허씨는 사위의 말에 진위를 의심하는 것이다.

“어허 그만 하세요, 부인, 한 서방 말이 틀림이 없소이다.”

한때나마 태재 선생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픈 일말의 희망이 민대생 영감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공연히 장모 허씨는 부창부수(夫唱婦隨)로 믿으려고 하지만 도무지 막내 사위의 행태가 오히려 의심이 들 판이다.

“영감은 무조건 사위를 편드시오? 그렇게 사위가 이쁘면 기생 첩을 얻어주시구랴.”

“못할 것도 없지요. 내 살림만 넉넉하면 그것보다 더한 것도 얻겠수.”

명회가 대신 대답하였다. 그러자 허씨는 헛웃음을 치고 이를 맞장구 치듯 대감과 사위는 깔깔 웃어대는 것이다.

주안상이 차려진 방 밖에는 명회네 식구가 굶지 않을 만큼의 양식들을 가득 실어다 종들에게 날라다놓는 것이다. 이윽고 집앞을 다다르고 보니 현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게 자준, 그냥 가시면 어떡하나?”

현로는 명회를 보자마자 기척을 내자 명회는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담쪽으로 데려놓곤

“초선이 年 이름은 입에 뻥긋하지도 말게.”

하자, 어안이 벙벙해진 이현로다.

“들어가세, 자네는 먹을 복이 있으이.”

이렇게 두 사람은 막걸리에 갓 삶아놓은 닭을 안주로 삼아 술을 주고 받는다.

“이 사람. 그만 마시고 나랑 같이 가세나. 대군께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시네. 일어나세, 자네가 그냥 가셨단 말에 대군께서 섭섭해하셨다네. 아, 이 사람 오해 풀라고 하지 않나.”

현로는 명회의 토라진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그 댁엔 사람이 넘쳐 흐르니.”

이에

“사람만 넘치면 뭐하나? 유비는 공명을 얻기 위해서 삼고초려(三顧草廬)하셨다는데, 그거에 맞먹는 짓 하지 않는가.”

간신히 설득하고 난 현로는 어둑어둑해진 틈을 타 명회를 다시 안평대군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이윽고 그 집에 당도하고

“이리 오너라.”

현로가 기척을 내자마자 곧 문이 열리니 대낮의 그 종이

“아니 또 오셨수?”

명회를 다그친다. 이때 현로가

“네 이 . 사람을 바로 볼 줄 알아야지. 눈두덩을 달고 다니면 응당 알아볼 줄 알아야지. 어디다 쓰고 다니느냐.”

해대며 오른뺨을 때리고, 명회도 덩달아서 왼뺨을 찰싹 때린다. 몸종은 양손으로 두 뺨을 부여잡고는 문을 간신히 닫는다. 두 사람의 소심한 복수다. 두 사람은 안평대군의 사랑채에 다다른다.

“대군 마님, 소인 이현로올시다.”

“들어오시게.”

밝은 불이 켜진 방안에서 기척이 난다. 이윽고 현로가 들어오는 모습을 기다린 듯 안평대군이 응시하고 있었다.

“대군 마님, 천하의 기인(奇人)을 한 분 모시고 왔나이다.”

그러자 현로는 밝은 불 아래에 비친 명회를 가만히 바라본다. 묵묵히 바라본다. 과연 기인의 모습이었다.

“이 사람 자준.”

현로가 명회에게 절하라고 재촉한다.

“소인, 눈이 부셔 바로 대군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나이다. 소인 한명회, 인사드립니다.”

차츰 정계(政界)에 발을 들인 순간이다. 이 얼마나 큰 광영이던가. 안평대군을 바로 면전에서 대하니, 감격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눈이 부시다니. 그게 무슨 소린고?”

“소인을 살펴보시는 대군 대감의 안광(眼光)이 마치 호랑이의 눈빛과 같습니다.”

그러나 명회가 바라본 안평의 눈은 먹이를 찾지 못해 굶주린 호랑이의 눈빛이란 걸 짐짓 알고 있었다.

“내눈에 살기(殺氣)가 있단 말씀이신가.”

대군의 물음에

“살기라니요?”

되묻는다.

“한번 인육을 먹는 호랑이 눈에서는 살기가 비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명회는 태연하게 답한다.

“소인의 말씀을 그리 들었다고 하시면 백배 사죄를 드립니다.”

안평대군이 명회의 능청에 껄껄 웃어댄다.

“염려 마시게. 자네의 언행이 기이하기에 내 한번 해본 소릴세. 마음 놓고 편히 앉으시게.”

명회가 자리에 편히 앉는 모습을 보고 안평은 묻는다.

“내가 천하를 얻고자 하는데 어찌하면 되겠누.”

명회가 즉시 대답하길,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잃으시니 먼저 마음을 비우시는 편이 낫사옵니다.”

왕손이라면 응당 왕손답게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함을 직언하는 것이다. 안평대군은 너무 서두르는 것도 있거니와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성미가 급한 게 흠이란 걸 명회는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태재 선생이 생전에 난세에 능히 쓰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 명회의 이 면모를 보고하는 말인 것이다.

“마음을 비우면 천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잠룡(潛龍)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두고 한 안평대군의 물음이다.

“천하를 얻는 자는 하늘이 점지(點指)하는 것이옵니다.”

“허면 어찌하면 하늘의 점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명회는 그 물음에 서슴없이 되묻는다.

“대군께서는 정녕 천하를 얻으시려 하십니까?”

그러자 안평대군의 눈에서는 먹이를 찾는 호랑이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던 현로는 낌새를 낚아채기 시작한다. 이윽고 안평대군이 파안대소(破顔大笑)하더니

“농(弄)이네, 농일세. 자네가 기인이라 하기에 시험삼아 농을 한 걸세. 잊어버리시게.”

거듭 안평은 명회에게 안심시키려고 한다. 이에

“군자(君子)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대군께서는 소인을 놀라게 하시고 이제는 농이라 하셨사옵니다.”

명회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한 마디하자, 안평은

“그러면 말씀을 해보시게. 어찌하면 하늘의 점지를 받을 수 있을지.”

“그것을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뭐라 하셨는가?”

“대군도 모르시고, 소인도 모르옵니다만.”

아쉬운 듯 안평은 보료 위 자리를 드러눕는다. 생각이 복잡한 듯 눈을 감은 채 고뇌하기 시작한다.

“술상을 올릴깝쇼?”

현로는 우왕좌왕하는데 명회는 곧바로 사랑방을 나선다. 그러고는 곧장 어두운 길을 뚫고 집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명회가 물러가자

“네가 사람을 아무리 가리지 않는다기로서니 그런 자를 데리고 어디다 써 먹으려고 그러누. 얼굴만 봐도 구역질나는구먼.”

안평대군이 평소 그림에 능한 까닭인지는 몰라도 겉으로만 판단하려는 것이다. 그러자 현로는

“대군 마님. 오늘밤 대군마님께선 사람을 잘 못 보셨습니다.”

현로는 겉다르고 속다르다는 식의 대답을 해댄다.

“그게 어디 사람 얼굴인가.”

안평의 눈으로서는 기괴한 명회의 몰골에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려는 맹수의 모습을 본 까닭이다. 자신의 살기보다 더욱 살벌한 눈빛이었다.

“대군께선 어찌하여 한명회의 못난 얼굴만 보시고 그 머릿속에 숨어 있는 천하는 보지 못하시는지요?”

안평은 대수롭지 않게 헛기침을 해댄다. 그러자

“대군마님. 장자방(張子房)이 없었으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얻었겠습니까.”

현로가 이를 나무랐지만, 이 일은 없었던 일로 덮어버리려는 것이다.

한편 명회는 안평대군에게서 돌아오고 나서 고주망태가 된 채, 안방에서 방바닥을 구를 기세로 깔깔 웃어댄다. 민씨는 그런 지아비의 퇴짜맞는 꼴을 보고는 혀를 차대는 것이다.

“오늘밤에 퇴짜를 맞으셨다는데 어째 기분이 좋으시우?”

민씨의 물음에도 명회는 웃어댄다. 그러더니

“부인, 오늘 내가 큰일날 뻔했소. 주인을 잘못 만나 신세 망칠 뻔해서 겨우 빠져 나왔소. 하마터면 우리 일가족이 생죽음을 당할 뻔했으니 부인, 내 덕에 산 줄 아시오.”

하고 저렇듯 배가 빠지도록 웃어대는 명회를 민씨는 의아해한다.

[4]

단종 즉위년 9월 1일과 13일에 각각 문종대왕의 발인과 졸곡제(卒哭祭)를 지냈다. 이를 마친 어린 임금 노산군(魯山君)은 정침(正寢)을 수강궁(壽康宮)에서 지냈다. 수강궁이란 태종대왕께서 거처하시던 곳이다. 햇살은 참으로 청아하다. 가을 햇살은 풍년을 재촉이라도 하듯 유난히 뜨겁다. 노산군은 의정부 대신들을 수강궁으로 불러들여 육선(肉膳)을 들도록 하였다. 그곳에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나란히 예를 갖추고, 금상 노산군 곁에는 평소 금상을 갓난아기 때부터 보살핀 혜빈양씨(惠嬪楊氏)가 앉아 있었다. 혜빈은 세종대왕의 후궁이었는데, 선왕의 다른 후궁들처럼 정업원(淨業院)에 들어가는 관례를 깨고 대궐에 남아 있었다. 본래 소헌왕후가 대비의 몸으로 있어야 할 상황이었으나, 소헌왕후가 하세한 관계로 혜빈이 왕대비 구실을 하였다.

“두 대감께서는 안으로 들어와 앉으시어 한 점씩들 드세요.”

웃음띤 얼굴로 혜빈이 말을 잇는다.

“전하께서 아직 육선을 드시지 않았는데, 어찌 신들이 입을 대오리까.”

망극해 하는 황보인의 말에

“주상께서 친히 두 분의 노고를 먼저 치하하신 겁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혜빈이 답례하고 금상에게 허할 것을 권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 육선을 먼저 드시옵지 않으면 신들이 먹을 수 없사옵니다.”

“세종대왕께서 태종대왕의 국상을 마칠 때 대신들에게 먼저 육선을 들도록 했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혜빈은 금상을 대신해 고기 들기를 권한다. 이에 마지못해 황보인은 먼저 육선을 입에 댄다. 그러고서 황보인이 감읍하며

“전하의 간청에 못 이겨 육선을 입에 대니 신이 금수만도 못한 거 같아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끊임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산군은 말없이 만족해한다. 노산군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조부모인 세종대왕 내외분의 애정 어린 사랑과 유모 노릇을 자처하는 혜빈의 보살핌을 받은 채 자랐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 어긋남이었는지 소헌왕후와 세종대왕, 그리고 아버지 문종대왕을 두세 해 간격으로 여의었다. 이후에 노산군은 보위에 오르면서, 궁중에 웃어른을 두지 못한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 금상에게 있어 혜빈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그런 혜빈에게 약점이 있었다. 바로 내관들에게 의지한다는 한계였다. 일개 궁인의 몸으로 대궐 안에 들어온 뒤 소헌왕후의 지밀을 담당하고, 세종대왕의 승은을 받고 빈(嬪)의 몸이 되고 보니 나랏일을 알 리 없었다. 해서 나랏일에 나름 능통하다고 여긴 내관에게 세상일을 듣는 처지였다. 그러니 어린 임금의 즉위는 자연히 나라의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세상의 흐름을 한명회는 꿰뚫어보았다. 안평대군에게 퇴짜를 맞은 명회는 보름이 되어서도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그런 사정을 알아본 권람이 친구의 사정이 하도 딱해 한밤중에 명회를 찾았다. 친구와 마주한 명회는 너무나 반가워서, 안사람에게 술상을 내오게 하였다.

“나 봉변을 당했네.”

그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웃음으로 한명회가 말을 텄다.

“봉변이라니? 무슨 봉변인가?”

술 한잔을 시원히 들이키고는

“자네가 이 밤중에 날 찾아온 걸 보면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네.”

명회가 권람의 의중을 떠본다.

“자네 사정이 어떤지 궁금해서 와봤네.”

권람의 능청에 맞장구치듯,

“히히, 여태까지 안평대군의 집을 마르고 닳도록 드나드나 알아보려구?”

명회의 물음에 정곡이 찔린 듯 권람은 쓴웃음을 띤다.

“말씀해보시게.”

“일전에 이현로의 일 때문에 수양대군의 처지가 매우 곤란해서 그러는 거 아닌가?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기우(杞憂)일세.”

명회는 확신에 차 말한다. 그러고는

“수양대군은 어떤 분이신가. 야심이 가득한 분이 아니신가.”

물어본다. 그러나

“그건 자네가 잘못 본 걸세. 수양대군께선”

친구의 말을 막듯

“수양대군께서는 세종대왕 때부터 오랫동안 다음 보위에 오를 분이셨네. 그 자리가 어떤 자린가. 왕족으로서는 바늘방석이지. 지나치게 똑똑하면 죽어 나가고, 너무 어리숙하면 사람대접도 제대로 못 받지. 그런데 수양대군께선 장장 삼십 년 동안 계셨지 않았나.”

“그렇다고 이현로 일 땜에 수양대군께서 곤혹(困惑)을 치르셔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이현로를 매질함으로써 수양대군 당신이 살아있음을 과시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일로 조정의 공론이 둘로 나누어 편을 가르고자 한 뜻이 있으셨을 걸세. 김종서가 그저께 수양대군을 찾아가서 화해를 청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네. 수양대군께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명분이 없으시겠지. 그래서 얻은 건 대행 전하의 산릉이나 보살피지 않았나? 지금 세상이 수양대군 일로 떠들썩하네, 좋든 나쁘든 수양대군께서 살아나셨으니 이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지 않겠나?”

권람은 묵묵히 경청하였다. 그러고는

“그런 뜻이셨던가? 대군께서 이현로를 매질하신 것이.”

그러고는 비로소 권람은 자신의 목마름을 느끼며 술을 벌컥 마신다. 명회는 수양대군이 평소 불도(佛徒)를 자처하므로 매번 낙랑부부인(樂浪府夫人)과 함께 산사(山寺)로 드나드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렇듯 수차례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사람의 깊은 속을, 그 특출한 재주로 바라볼 줄 아는 명회를 정경은 무한히 신뢰하였다.

“수양대군께 안평대군의 반이라도 닮아 보시라고 진언(進言)을 드리시게나.”

이현로의 만큼은 아닐지라도 수양대군의 책사 구실을 해오던 자신의 그릇보다 더 큰 포부를 가진 친구를 잘 사귀었음에 정경은 비로소 안심하였다. 이윽고 다음날이 되어서 권람은 수양대군에게 직접 찾아갔다. 이때 수양대군은 뒤뜰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이에 권람이 그에게 명회를 직접 대면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는 동안 명회의 인적을 상세히 고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묵묵히 화살을 매기어 쏘기만 할 뿐이다. 보다 못한 권람이

“한 번 만나보시렵니까.”

물어보지만 활을 쏘아댈 뿐. 대답이 없다. 마음이 조급해진 권람은

“대군께서는 혼자서 이 일을 다 하실 생각이십니까. 한명회가 대군 대감의 마음 속을 다 꿰뚫는 것은 아니올시다.”

재촉하였다. 문무에 두루 능통한 수양대군이었던 만큼 자신의 마음을 꿰뚫는 것에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것도 일면식이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못내 겁이 나지만 내색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대쪽같은 성품이었다. 수양대군은 속는 셈 치고 도성 밖 청량사(淸寺)에 명회더러 오라는 뜻을 전하자 권람은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갔다.

이튿날 수양대군은 평복(平服)으로 차려입은 채 청량사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아버지 세종대왕의 영향을 받은 까닭에 평소 불가와 인연을 맺은 그는 아버지의 어명에 따라 몸소 불경을 직접 언해(諺解)로 편찬하기도 하고, 감수(監修)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발간할 때 조력하였을 만큼 불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수양대군은 종자(從者)도 대동하지 않고, 법당(法堂) 안에서 승려의 목탁 치는 소리를 들으며 홀로 묵묵히 불상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명회는 그런 수양을 지켜보고, 덩달아 그 옆에 자리 잡아 절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그때였다.

“내가 권람에게 묻기를 ‘내가 어찌하면 좋으냐.’ 했더니 권람이 내게 답하기를, ‘몸을 더욱 낮추라.’ 하였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인기척을 느낀 수양이 허공에 물어보듯 하였다. 그러자 명회가

“대군께서 정녕 법당 안에서 살생(殺生)을 논하십니까.”

하였다. 정경의 말대로 자신의 폐부를 꿰뚫는 명회를 수양대군은 뒤돌아보았다.

수양대군과 한명회. 이 두 사람은 이렇듯 산사(山寺)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살생!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말이었다. 생전의 세종대왕께서는 당신의 둘째 아드님의 천성을 익히 알아온 처지였다. 그러기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은거하여 망국(亡國)에 대한 지조(志操)를 지키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마음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 친히 ‘진양(晉陽)’에서 ‘수양’으로 진봉(進封)한 것이다. 곧 ‘법당에서 살생을 논하느냐?’는 명회의 물음이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정곡을 찌른 셈이 되었다. 부처 앞에서만큼은 진심을 숨길 길이 없던 수양이 나지막이

“나무관세음보살.”

하며 뇐다. 이때,

“권력은 힘 있는 자의 것입니다. 힘 없는 자가 권력을 쥐면 오히려 많은 사람이 다치는 법이올시다. 반드시 힘 있는 자가 권력을 쥐어야 살생을 피하는 법이옵니다.”

묵상에 잠긴 수양은 명회의 청산유수같은 말을 듣는다.

“김종서는 솔직하고 담백해 한 번 신의를 다지면 목숨처럼 여기고, 한 번 믿음을 굽히면 저버리지 않으며 한 번 갈 길을 정하면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탓에 일찍이 세종대왕께서는 김종서를 동량으로 삼아 대행대왕의 후사를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어떤 모습입니까? 신의보다는 배반에 쫓고, 믿음보다는 이익을 따라 굽히며 길이 막히면 돌아가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김종서는 결코 난세의 인물이 아닙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오히려 그 이름을 후세에서나마 충신의 반열에 오르겠으나, 감히 김종서가 역모를 꾀하지는 않을 겁니다. 안평대군을 논합니다. 세간에서는 안평대군을 가리켜 당대 제일의 풍류객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풍류란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고 불쑥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터득하는 정신의 세계입니다. 멋으로 풍류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글줄이나 읽고 쓰고 먹물을 묻힌다 한들 풍류라고 할 수 있사오리까? 하물며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좋아하는 자가 풍류객이어야 한답니까? 음식의 맛을 알고 무명삼베의 거친 것보다 비단의 매끄럽고 보드라운 촉감을 탐하며, 괴로운 일은 피하고 즐거운 일은 쫓는 자가 어찌 난세의 인물이라 하리까?”

명회는 침이 마려운 듯 입술에 혀를 내두르고 말을 잇는다.

“수양대군을 논합니다. 대군께서는 들어가고 나가는 이치를 아시니, 길이 없어도 가실 것이옵니다. 대군께서는 서두르시지 않으니 길이 막히시면 쉬었다 가실 것입니다. 대군께서는 참는 방법을 익히 아시니 때가 아니면 나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칼의 날을 즐겨 잡으실 것입니다. 허나 김종서는 칼의 손잡이를 잡기 보다는 칼날을 오히려 잡을 것입니다.”

순간 수양대군이 눈을 뜬다. 명회에게 묻기를

“권람이 말하길, 천하를 얻으려면 두 가지를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명분이 하나요, 천시(天時)를 얻는 것이 둘이라 했다. 내가 그 두 가지를 얻을 수 있겠느냐?”

이렇듯 돌부처 같은 수양대군의 성미에 과연 명회가 성에 찰지.

“명분은 만들 수 있겠으나, 천시를 얻는데 어찌 인력으로 되겠습니까? 하오나 소인이 그것을 알고 살아왔기에, 만들 수 있기에 이리 뵈온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네가 내 장자방(張子房)이 될 수 있겠느냐?”

돌부처마냥 과묵한 수양대군의 마음을 비로소 사로잡은 모양이다.

“초 패왕(楚 王)은 진나라를 멸하고, 수십 만의 군사를 생매장해 죽였으나 반면 한고조(漢高祖)는 개국공신(開國功臣)들만을 죽이니 인명으로 따진다면 한고조가 초 패왕에 비하여 약소할 것입니다. 허나 진나라의 이름 없는 군사가 어찌 한나라의 개국공신들의 몫에 비하리까. 대군께서는 한고조의 고사(故事)를 따르리까?”

수양은 다짐에 찬 소리로

“역모를 꾸미든가, 역모를 꾸미는 자를 돕지 않는 한 자네와 생사를 같이할 걸세.”

대답하고는 부처에게 절을 올린다. 명회는 옆에서 기쁜 눈물을 흘렸다.

‘대군께서는 천하를 얻으셨소이다.’

비로소 난세에 웅비(雄飛)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 기쁜 마음을 담뿍 안고 제집으로 걸어간다. 그날따라 명회의 발걸음도 가볍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수양대군은 청량사를 나섰다. 명례궁(明禮宮), 자신의 거처에 당도하자마자 권람을 불러다가 사랑에 데려놓고 수양대군이 한다는 게

“말재주가 비상하이.”

명회를 칭찬하였다. 권람이

“말만 앞세울 사람은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뉘 댁 자손인고?”

“태조대왕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한상질의 손자입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조부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일곱 달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몸이 완전치 않아 온 집안이 근심에 싸였는데 웬 늙은 여종이 솜털 속에 싸서 보살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서 덤으로 산다고 합니다.”

권람이나 수양 두 사람은 명회의 지난 날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의 역경을 들어보면 볼수록 온 나라에 크게 쓰일 인재임에는 틀림이 없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모두 웃었다.

“대군께서는 인재를 얻으셨습니다.”

생전 태재 선생의 혜안이 적중한 순간이다.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서서(徐徐)로부터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천거받듯이, 비록 권람 자신이 수양대군의 책사 노릇을 하고 있는 처지지만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대로 수양대군에게 천거한 보람을 느끼며 정경은 뿌듯했다. 수양의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 찼다.

간만에 명회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자신과 같이 거렁뱅이 노릇하며 지낸 벗들과 함께.

“싸움판에선 양정(楊汀)이 제격이요, 술판에서는 홍윤성(洪允成)이가 제격이지.”

명회가 너스레를 떨자 남정네들 모두 웃어댔다. 홍달손(洪達孫)과 유수(柳洙) 두 사람은 안주를 집어들고 먹는다.

“형님, 막내한테 술잔을 부어주시우.”

양정이 막내 격인 홍윤성이가 내미는 술잔을 보고는

“이 사람아, 아주 술독째 마시지 그래.”

하고 술잔에 술을 붓는다. 네 남정네는 서울 장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모두 반가(班家)의 후예들이었지만, 명회처럼 쇠락한 형편인 탓에 서로의 아픔을 쓰다듬는 의리가 깊은 이들이다. 홍윤성이 장비(張飛)처럼 막 대하더라도 너그러이 받을 줄 아는 아량 깊은 사람들이다.

“술을 안 마시면 당최 힘을 쓰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이오?”

윤성의 적반하장에 가까운 재롱을 듣던 명회가 술맛이 난다면서 좋아했다. 그 특유의 천진무구한 웃음을 하며.

“그나저나 이거 과용(過用)했습니다그려. 오늘 무슨 날이우?”

윤성이 명회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따나 명회의 집 형편을 헤아려보면 과용해도 너무 한 것이기에 우려스럽던 터다.

“내가 큼지막한 봉황(鳳凰) 한 마리 잡았네.”

윤성의 물음을 듣고 대답하는 명회는 회심의 미소가 만연하다. 술자리가 파한 뒤 명회는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본다. 명회의 눈빛에는 광채가 번득인다.

보름 뒤에 수양대군은 고명 사은사(誥命 謝恩使)로 가기를 자청했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사람은 한확(韓確)이다. 한확은 명나라의 공녀(貢女)로 두 누이를 앞세워 보내고, 광록시 소경(光祿寺 少卿)이라는 벼슬을 명나라로부터 받은 사람이다. 자신의 둘째 딸과 막내딸을 각각 세종대왕의 서자 계양군(桂陽君)과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桃源君)에게 배필로 보냄으로써, 왕실과 겹사돈을 맺었다. 그런 한확이 사은사로 자청한 수양대군이 염려되어 찾은 것이다.

“원칙상 영상께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한확의 물음에 황보인의 연로함을 들어 거부했다. 좌의정 정분(鄭)이 병듦을 들고는 자청해 가기를 한사코 주장한다. 수양대군의 고집에도 좀처럼 우려스러웠던 한확이

“연경(燕京)까지는 멀고 먼 거립니다. 서너 달은 걸릴 뿐만 아니라, 오가는 길 또한 편치 않습니다.”

수양대군이 오히려 득의에 찬 목소리로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우상께서 사람을 보내어 고명 사은사 문제로 제게 묻더이다.”

우의정 김종서가 사은사 문제로 자신과 의논했다는 한확의 말에

“오, 우상께서 그리 말씀 하셨습니까?”

“넌지시 사돈 대감을 지목하더이다.”

수양이

“그거 잘 되었잖습니까?”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한확이 신신당부했다. 명나라 황실과도 사돈을 맺은 한확은 비록 제 가족을 팔아넘겼다는 오명과 비난을 얻었지만, 세인의 비난을 감수하여 희생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때문에 변덕스러운 명나라의 사정을 헤아리게 되고 보니 자연 정보통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은 그런 한확을 그 누구보다도 신뢰했다. 수양대군에게 있어 고명 사은사는 자신의 역량을 펼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고명 사은사는 자신의 조카인 금상을 자식 이상으로 사랑하였기에 자처하여 나선 측면이 없지 않았다. 고명 사은사는 한확의 우려대로 길도 험한 것도 험한 거지만 조선의 국왕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절차이니만큼 조선 조정으로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절차이다. 그러기에 조정 대신들을 제치고 종실의 일원인 수양대군이 직접 나서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엄습한 까닭이 한확의 뇌리에서 떠날 줄 몰랐다.

수양대군의 고명 사은사 건으로 온 조정에서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의정부 대신들은 물론이고, 종친들이며 문무 대신들까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본래 종친의 신분으로 사은사를 가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다시피 한 까닭에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수양이 사은사로 가기를 마다한 이는 다름 아닌 금상이었다. 대행대왕으로부터 얻을 사랑을 숙부 수양에게서 얻었고 친아버지처럼 극진히 대하기를 마다하지 않던 금상이었다. 그랬기에 수양대군이 고명 사은사로 간다는 말을 듣고 수양대군에게 눈물로서 극구 만류했다. 그럴 때마다 수양대군은

“머나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직 주상이 강건한 군주가 되시는 일이라면 열 길 불 속인들 마다하리까? 염려는 붙들어 매십시오.”

유약한 어린 금상을 달래는 것이다. 이때 우의정 김종서가 상서(上書)로서 사직을 청하였다. 때는 단종 즉위년, 곧 서력으로 1452년 9월 3일의 일이다. 김종서의 사직소(辭職疏)의 내용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러하다.

“신이 금년에 칠십을 헤아리니 날이 갈수록 쇠약함이 더할 뿐만 아니라, 시위(施爲)하는 데에 우둔하고 조섭(調攝)이 효과 없어 가을장마의 재앙을 이루었으니 실로 신에게 허물이 있음이옵니다. 또 고명을 이어받는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우두머리 대신을 보내어 사은함이 도리이겠으나 신의 쇠약한 몸으로 어찌 능히 먼 길을 갈 수 있으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신을 대신하여 어질고 능한 이로 대신하게 하면 국가에 있어 심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받은 임금은 사직소를 집현전부수찬(集賢殿 副修撰) 한계희(韓繼禧)에게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결과적으로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나가는 것으로 귀결(歸結)된 셈이었다. 김종서의 사직소를 되돌린 임금은 몸소 김종서의 집을 찾아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소문에 의하면, 대행대왕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품계를 할머니뻘인 혜빈과 동격으로 올릴 것을 당부했다. 이에 김종서가 직접 왕에게 숙빈(淑嬪)으로 첩지를 올릴 것을 아뢰었다.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사은사 박중림(朴仲林)이 북경으로부터 칙서를 받든 채 돌아온 게 단종 즉위년 9월 25일이었다. 이때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의식을 갖추어 받들었다. 명나라 경태황제(景泰皇帝)로부터 내려진 칙서의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실록을 보면,

“너의 주본(奏本)을 받았다. 짐은 너희 조선국이 대대로 예의를 지키고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능히 각별한 충정(忠貞)한 마음으로 중국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였기로 특별히 칙서를 내려 아름다움을 표창하니 너는 공손히 짐의 명을 받아 소홀히 하지 마라.”

였다.

종친의 신분으로서 모화관으로부터 돌아온 수양대군이 야심한 밤을 틈타 독대(獨對)를 청하였다. 수양대군이 임금을 알현하여 말하길

“전하께오서 보시는 바와 같이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황제는 조선국왕을 일컬어 신하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이 수치심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시옵소서. 그래야 언젠가는 사해에 위엄을 떨칠 수 있는 강건한 군주가 되실 것이옵니다.”

“예, 수양 숙부.”

“신이 떠나는 것이 아직도 서운합니까?”

“계양군이나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떠나보내면 안 되나요? 수양대군이 아니더라도 갈 사람은 많습니다.”

애절한 눈빛으로 수양대군을 쳐다보는 금상이다.

“전하, 명나라 황실은 까다롭기 그지 없습니다. 사소한 트집거리를 잡아 일 년을 넘게 조선의 사신을 보내지 않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가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금상의 마음은 싱숭생숭이다.

“신은 왕숙이니 저들이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신의 사돈이 명나라의 황실과 인척간이니 더욱 그럴 겁니다.”

“영상께서는 칠순이 넘었으니 할 수 없지만, 우상은 아직 젊지 않습니까. 우상이 왜 사은사를 자처하지 않는지요?”

수양이 나직이 웃으며

“우상께서 가시면, 전하께서 따로 사람을 보내시어 그를 잡아 두라고 하실 겁니까?”

되묻는다. 금상은 해맑은 웃음으로

“그러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하자 수양대군이 맞장구치듯 웃어댄다. 내전 상궁을 시켜 수양대군에게 다과(茶菓)를 대접하라고 이른다. 수양대군과 금상의 애틋함은 이렇듯 밤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쉬이 그칠 줄 모른다. 수양대군의 사저에서도 울음바다였다. 사은사로 떠나기 전에 준비할 관복을 손수 챙기던 부부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흐른다. 이때 며느리가 행여 눈치챌까 보아 눈물을 거둔다. 아들 도원군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한씨(韓氏)가 모른체 하며

“친정아버지가 연경에 사람을 보내 아버님께서 가시면 불편함이 없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머님, 너무 염려하지 마시어요.”

시어머님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사돈께서 애를 많이 쓰셨구나.”

“아버님께선 황제를 알현하시고 명나라 대신들과도 교분을 나누실 겁니다.”

“관모는 따로 싸서 상자에 넣고, 속옷은 넉넉히 넣어야 한다. 여러 달 걸리는 길이니라. 하필이면 궂은 날씨를 택해 가시는 건지.”

“어머님, 집안에 경사가 아니옵니까. 어머님께서 그러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백령백리(百怜百)한 눈빛으로 시어머니를 위로하는 한씨였다. 며느리가 물러간 안채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한씨는 열다섯의 나이에 시집을 온 처지였으나 보통 나이보다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더욱 깊었을 뿐만 아니라, 사서오경을 능히 깨우친 규수였다. 부부인 윤씨는 그런 며느리를 매우 우려했다. 너무나 똑똑한 게 흠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한씨를 수양대군은 며느리로서가 아닌 딸자식으로서 귀여워했기에 고된 시집살이를 묵묵히 해내는 건지도 모른다. 한씨는 야심한 밤공기를 마시며 작은 사랑에 다다랐다.

“전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자꾸 우시는 까닭을 모르겠어요.”

“아니 무슨 말씀요? 어머니께서 우시다니?”

한 살 아래인 부군 도원군이 되묻자

“아버님께서 명나라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오시면 아버님의 위엄이 세상을 떨치고도 남지 않습니까?”

“어머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건 그 때문이 아니오.”

“달리 까닭이 있단 말이에요?”

“어머님께선 아버님이 돌아오지 못하실까 하여 우시는 겁니다.”

“대감께선 저보다도 아버님을 모르십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게 아니란 걸 왜 모르시오?”

부인의 말에 도원군은 놀란다. 한씨의 말이 확신에 찼기 때문이다.

다음날 명례궁 수덕재(修德齋-수양대군의 사랑채)에 명회는 홍윤성을 데리고 찾아왔다. 홍윤성을 데리고 온 명회가 곧장 사랑채에 수양대군을 찾아갔다. 홍윤성을 소개하길,

“사람은 미련해도 글공부는 할 만큼 한 위인입니다. 조실부모한 탓에 숙부 집에서 자랐는데 고생깨나 했는지 욕심이 목구멍까지 차 있습니다.”

수양대군이

“힘은 좀 쓰는 위인인가?”

묻자

“항우장사에 미치지는 못할망정 황소 한 마리는 맨손으로 능히 때려잡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하하, 요긴하게 쓰겠구먼.”

“다루기에 따라선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 위인입니다.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지금은 무인 기질을 겸하고 있어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겸하고 있습니다. 대군 마님, 홍윤성을 데려가시죠. 여차하면 힘이 될 것이니/”

“나야 무슨 일이 있겠나. 내가 없는 동안에 집안 일이 걱정이지.”

한명회가 파안대소한다.

“대군께서 별일이 없을 터인데 집안에 무슨 우환이 있사오리까?”

“말씀이 그리 되시는가?”

수양대군이 그제야 안심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홍윤성이 수양의 마름인 조득림(趙得琳)과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명회와 윤성이 돌아간 뒤 권람이 수양의 사랑에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정작 대군께서 집에 계시지 않으니 염려가 되어 고명 사은사의 인사를 짜보았습니다.”

고명 사은사의 인사안을 보던 수양이

“이대로는 되지 않겠지?”

“그러하옵니다.”

“민신(閔伸)을 부사(副使)로 삼으라?”

“그는 병권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는 소릴세.”

“병판(兵判)이 부사로 가지 않는다면 대군께서도 가지 않겠다고 하셔야 합니다.”

“나보고 물고 늘어지라는 말씀인가?”

“대군께서는 사지를 떠나시온데 체면을 따지리까?”

“민신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러면 병판을 내놓으라고 하십시오.”

“김종서가 들어주겠나.”

“대군께서 죽을 자리로 가시는데 그걸 마다하리까. 대군께서 고명 사은사를 자처하신 까닭을 십분지일을 헤아리고 남사오나, 이는 옳게 내리신 게 아닙니다.”

민신은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김종서의 수족 중 하나였으며, 김종서의 세도를 발판으로 안평대군과 더불어 온갖 비리를 저지르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이보시게 정경, 내가 고명 사은사를 자청하는 건 안평대군이나 김종서를 무서워서가 아니네. 피하거나 죽으러 가기보다 살기 위해 가는 걸세. 내가 살고 왕실이 살고 전하께서도 사시는 길이네. 내가 죽으면 전하께서는 온전하지 못하시네. 어리신 주상께서는 무엇 하나 동아줄을 잡지 못하시네. 대궐 안은 혜빈의 손에 들어 있고, 내관들은 저들의 이익에 따라 혜빈을 따르고 김종서와도 따르며 안평을 따르고 나를 따른다네. 어느 누가 주상의 음식에 독을 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랴. 대궐 안에 탐욕에 찬 사람들이 넘쳐흐르니 나는 날마다 전하의 수라상과 잠자리를 걱정하여 숨소리 쉬이 쉬기 어렵네. 대궐 밖은 어떤가. 김종서와 황보인과 안평을 따르는 무리들로 가득하네. 저마다 권문세가의 대문을 드나들며 아부와 감언이설을 늘여놓는다네. 온통 반역의 무리로 가득하네. 아시겠나? 내가 믿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전하일 뿐일세. 전하께서는 또한 나를 믿으시니 기꺼이 떠나는 것일세. 내가 전하의 곁에 가까이 있기만 하면 모두 나를 의심하고 경계하나 내가 떠나면 저들의 잇속으로 전하의 환심을 사두려고 앞다툴 걸세. 그리되면 김종서든 황보인이든 하나의 힘으로 모아지진 않을 걸세.”

권람은 청산유수 같은 수양의 말을 묵묵히 듣는다.

“저들은 지금 힘을 모아 나를 경계하고 있으나 내가 도성을 비우면 저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고 제압하려고 들 것이 아닌가. 저들의 힘이 나누어지고 갈라지면 내가 돌아와 그들을.”

권람은 수양대군의 혜안에 감탄한다. 그러고서 권람은

“소인, 대군의 깊으신 혜안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나이다.”

하고 큰절을 올린다. 수양대군의 눈에서는 확신에 찼다.

이날 오후, 명회의 집에 웬 쌀가마니들이 드나든다. 일꾼들의 이 부산스러운 광경을 지켜보던 명회가 일꾼보고 어디서 온 쌀가마냐고 물으니,

“수양대군 댁 작은 마님께서 보내셨습니다요.”

일꾼이 대답했다. 그러자 민씨의 입에서는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아유, 굶어 죽지는 않을 모양이오.”

이윽고 민씨는 부리나케 자랑하러 친정집으로 찾아갔다. 친정집에 제 집 자랑을 해대자 민대생 대감이

“그러기에 내 뭐라 했소. 사위 구박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잖소.”

하고

“한 서방 형편이 피는 모양이우.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더니.”

덩달아 명회를 구박하기를 소일하던 허씨도, 더 이상 근심거리가 생기지 않아 매우 다행이라며 기뻐하는 것이다.

이날 밤. 야심한 시각에 대전으로 양녕대군이 들이닥쳤다. 들이닥쳐서는

“전하, 이 늙은이의 큰절부터 받으시오.”

하며 다짜고짜 큰절하자 어린 상감이 난색을 표한다.

“이러지 마세요, 조부님께서 이러시면.”

큰절하고서 양녕대군이 한다는 말이

“전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어찌하시려고 수양대군을 고명 사은사로서 대국에 보내시나이까. 아니 되옵니다, 전하. 막으셔야 하옵니다!”

뇌성벽력(雷聲霹靂) 같은 호통으로 직언하는 것이다. 이 소식은 곧 혜빈의 처소에까지 전해졌다. 혜빈이 누군가. 유모 노릇을 한 인연으로 대왕대비처럼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 아니던가. 승하한 선왕의 후궁이 정업원(淨業院)으로 출가하는 왕실의 관례를 깨고 단지 상감의 조모라는 이유만으로 대궐에서 지내는 사람이 아니던가.

“양녕대군께서 대전에 드시어 행패를 부리신단 말이냐?”

이에 혜빈은 곧장 어두운 밤길을 마다 않고 대전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양녕대군의 난데없는 독대에 내관과 상궁들은 모두들 전전긍긍한다. 대전에 들어서는 혜빈이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묵묵히 듣는다. 양녕대군이 할말을 다하는 와중에 상감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허, 기가 차며

“눈물은 왜 흘리십니까? 이렇게 주상께서 대가 없으시니, 김종서 무리가 주상을 업신여기는 겝니다.”

대전 내관 전균(田畇)이 이를 말리자

“난 너희 내관 나부랭이들을 믿을 수 없어!”

양녕대군은 윽박지르기 시작한다.

“대행대왕이 병석에 누워 계시는 동안에 너희들이 쉬쉬하여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느냐! 만약에 대행대왕이 위중하면 지체없이 종친부(宗親府)에 알려서라도 고명(顧命)을 받았어야 했어! 오늘날의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게야!”

전균이 상감의 두려움을 직접 전하자 양녕이

“주상, 이 할아비가 무섭습니까.”

“아, 아닙니다.”

금상의 두려워하는 목소리에 양녕이

“천둥소리가 들리면 이불을 뒤집어쓴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말씀이 지나치시.”

“늙은 내관이 웬 말이 그리 많으냐!”

전균의 말을 가로막듯 양녕이 버럭 소리지른다. 이렇듯 무기력한 어린 임금의 앞날이 캄캄하다. 양녕대군은 다그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하루빨리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양위를 하라고 회유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때

“무엄하시오.”

하며 혜빈이 들어섰다.

“양녕대군께서는 망발(妄發)을 거두십시오.”

양녕이 혜빈을 노려보며

“정녕 망발이라 했소이까?”

“한밤중에 대전으로 쳐들어와 주상을 윽박지르고 있으니 망발이라 할 수밖에요.”

“감히 뉘 앞에서 망발이라니, 이 요망한!”

“체통을 지키시오! 더이상 망령을 부리시면 내관 나부랭이들을 끌어다 대궐 밖으로 내칠 겁니다.”

혜빈의 맞받아치는 모습에 양녕대군은 할말을 잃는다. 양녕대군은 손으로 들어서는 내관들을 막은 뒤 몸소 직접 일어난다.

“오래 사는 게 욕이라더니,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

물러나며 양녕이 금상을 쳐다보는 것이다. 자신의 배를 빌어 세종대왕의 소생들을 내리 셋을 낳은 혜빈이었지만, 다른 자식들보다 금상을 더욱 키워왔기에 기세가 등등하였다. 마치 제품의 아기들이 위협에서 보호하려는 어미의 모성애(母性愛)라고 해야 할까.

다음날, 양녕대군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방문을 받아들이고서 어젯밤 대전의 상황을 넋두리 늘여놓는 것이다.

“내가 망령이 들었는지 옛날 병이 도지나 보네. 저녁밥을 잘 먹었는데도 가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라 꾹 참고 잠자려는데 태종대왕의 못마땅해 하시는 모습이 생각나네.”

“그래서 대궐 밖으로 뛰어나가셨습니까?”

“주상께서는 어리시고, 왕실의 위엄은 바닥에 떨어졌으니 언제 무슨 일이 있으니 마음놓고 지켜볼 수 없었다네.”

“설마하니 보위를 노리는 자가 있겠습니까.”

“보위를 누가 이어가느냐가 중요하지 않네, 이 사람.”

“오래지 않아 전하께서는 장성하실 테니 만기(萬機)를 친정(親政)하실 겁니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네. 그렇게 담력(膽力)이 없어서야 원.”

“수양 형님이 계시지 않으면 백부님께서 직접 상감을 돌보서야 합니다. 공연한 풍파를 만들지 마십시오.”

“내가 어제 주상께 선위하라고 말씀드렸네.”

영응대군이 놀란다. 이에 양녕대군이

“그게 순리야.”

하며 장담하는 것이 아닌가. 수양대군의 고명 사은사로 누가 따라가느냐를 두고 조정 일각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얼룩진 정세로 인해 오히려 불안에 떠는 사람이 병조판서 민신이었다. 민신은 견원지간(犬猿之間)처럼 수양대군을 내심 싫어했다. 물귀신마냥 자신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는 수양대군을 대하기가 거북해 등청(登廳)하지 않고 칭병(稱病)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의정부에서도 전해졌다. 영의정 황보인이 놀라듯

“그게 무슨 소린가? 어제까지 멀쩡한 사람이 병이 나다니.”

“허리에 난 종기가 갑자기 도지는 바람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계십니다. 당분간 문 밖에 출입이 어렵다고 합니다.”

의정부 관리가 보고하는 걸 듣고 나서는, 곁에 앉은 김종서를 보고

“이 사람이 꾀병을 앓고 있는 모양일세그려.”

하는 것이다.

한편 수양대군은 집현전에 몸소 찾아가 신숙주(申叔舟)에게 같이 사은사로 가기를 청했다.

“사은사 서장관의 자리를 자네에게 부탁하네. 놀라셨는가?”

“그러십니까?”

“반년은 족히 넘게 걸리는 길일세. 그동안 말벗 없이 다닐 수야 없지 않나?”

“실은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이 반색하였다.

“북경 구경도 한 번 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번잡한 도성에서 벗어나 한가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데.”

“부탁은 자네가 할 일이었네.”

두 사람은 만면에 웃음을 터뜨렸다. 수양대군의 성격이 빈틈이 없고 사람을 가리므로,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항상 몸가짐을 항상 바로 하고 만사에 조심했는데 이는 보위를 논할 때 항상 수양대군의 이름이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신숙주라는 인재를 얻게 되었다. 신숙주는 세종대왕 때 수양대군과 함께 집현전의 일을 맡은 게 인연이 되었다. 그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말미암아, 왜구(倭寇) 침략 문제를 가지고 왜국(倭國)에 사신으로서 현명하게 대처하여 변방의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수양대군은 사랑채에 한명회와 권람을 맞아들였다.

“민신은 칭병하고 꾀병으로 앓아누웠을 겁니다.”

수양대군이 쓴웃음을 띠며

“그럴테지.”

하고 받아들였다.

“항간에서는 대군을 가리켜 저승사자라고 하더이다.”

명회의 말에

“저승사자?”

“조정 대신들 모두 사은사의 부사관으로 지목될까봐 전전긍긍하더이다.”

“그 자리가 죽으러 가는 자리인 건 잘도 아는구먼.”

수양대군이 낄낄거리며 웃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야심한 밤이 되어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그날 밤으로 김종서의 장남인 김승규(金承珪)가 서장관으로 삼을 뜻을 수양대군이 내비치자 김종서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시 집에 돌아온 수양대군은 부인 윤씨가 흐느끼는데 이를 다독이는 것이다.

단종 즉위년 10월에 수양대군이 표문을 받들어 사은사로서 명나라로 떠났다. 강맹경(姜孟卿)이 수양대군의 전별을 맡았다. 임금이 직접 전별하는 법도가 없다는 조정 중신(衆臣)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상이 아침 문안을 드린다는 이유로 선왕의 후궁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본래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있으면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였으나 왕실에 웃어른이 계시지 않기에 혜빈과 숙빈의 문안을 드려야 했다. 혜빈은 세종의 후궁이고, 숙빈은 문종의 후궁이다. 그러잖아도 수양대군이 대국으로 나간 뒤에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건만 대전 상궁들이 하나같이 육선(肉膳)에 입을 대신 탓이라고 하였다.

“원, 저런. 할미 곁으로 오세요.”

하고 금상의 체증(滯症)을 다스리듯 등을 토닥거리던 혜빈이

“수양대군이 보고 싶으십니까? 할미가 주상의 마음을 압니다. 이 할미도 후회하고 있어요. 공연히 수양대군을 고명 사은사로 보낸 것을요. 수양대군께서 안 계시니 대궐 안이 허전합니다.”

하며 등을 두들긴다. 그때 밖에서 숙빈이 아침 문안 드린다는 소리가 나자 안으로 뫼시라고 했다. 이에 숙빈이 들어서더니 멈칫하는 게 아닌가.

“시원하시죠?”

같은 후궁의 몸으로써 금상을 사이에 둔 혜빈과 숙빈. 혜빈은 혜빈대로 유모로서 금상을 키운 정 때문에, 숙빈은 숙빈대로 죽은 현덕왕후(문종의 비)로부터 어린 원손(元孫)인 홍위(弘暐-금상)의 뒤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 명목상의 어머니로서 대하고 있다. 그러나 혜빈이 궁중의 안팎을 꿰뚫는 처지이고 보니 자연 금상을 끼고 도는 처지였다. 그런 혜빈의 태도가 숙빈의 눈에는 가시 같기도 하고 위세부리는 모습만 보면 아니꼽기도 해 심기가 편치 않다.

‘여우 같은 것.’

제 처소에 들어선 숙빈이 씩씩 거린다.

“나를 제 처소에 부른 게 다 주상이 문안을 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

곁에 내관 엄자치(嚴自治)가 공손히 손모으며

“참으시옵소서, 마마.”

대답하니

“나는 소생도 없는 홀몸인지라, 주상을 동궁 시절부터 친어미처럼 보살폈건만 혜빈 그것이 어쩌자고 대궐의 웃어른 행세하려고 드누?”

숙빈의 혼잣말이 이어진다.

“마치 병아리를 품는 어미 닭처럼 주상을 끼고 돌지 않느냐?”

“마마, 참으시옵소서. 지금 마마께서 나설 수 없사옵니다. 그저 참고 참으시옵소서.”

엄자치의 당부에 아랑곳없이

“도대체 어미가 가깝소, 할미가 가깝소.”

숙빈이 고래고래 여보란 듯 소리친다.

“언성을 낮추시는 것이.”

“대답해 보시게, 누가 더 가깝나.”

서안을 탕탕치며 숙빈이 언성을 높이니 엄자치는 좌불안석이다.

“혜빈의 위세가 오래가지 못하옵니다.”

엄자치의 말에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모두 혜빈의 편이지 않으냐? 내 생전에 혜빈이 죽는 꼴은 영영 못 보겠네그려.”

숙빈이 한숨 쉰다. 엄자치는 수양대군이 숙빈 당신의 편임을 들며, 김종서와 밀담(密談)을 나눌 때 수양대군이 첩지를 받는데, 일조했음을 밝혔다. 그러자 숙빈의 얼굴에서는 득의가 양양했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안평대군이 문안 인사를 명목 삼아 금상을 뵙고 대전을 나왔다. 나오면서 대전 내관 김연(金衍)을 은밀히 부른다. 불러서는 수양대군의 동태를 살피도록 당부했다. 이에 의정부에 직접 찾아가서 안평이 우찬성 허후(許)에게 양녕대군의 행패를 가지고 얘기를 주고 받는데

“안평대군의 말씀이 시원시원합니다.”

영상이 웃었다.

“사람이 사는 일이 아닙니까. 제가 종친을 대표하는 동안 의정부에서 하는 일을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안평대군의 너스레에 두 사람이 웃었다. 우찬성이 가고 난 뒤

“정인지(鄭麟趾)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침에 이명민(李命敏)이 내게 찾아와서 병판(兵判)이 이것저것 간섭한다고 하면서요.”

안평이 하는 말에 영상이 혀를 끌끌 찼다. 신임 병조판서로 온 정인지의 처신을 갖고 옥신각신할 때 황보인이 직접 병판을 만나 타이르겠다며 신신당부했다. 섭육십(攝六十) 문제가 그것이다. 이명민이 본래 음흉하고 간사하여 섭육십의 군사를 이용해 정부의 공사를 모두 맡아 하면서 자신의 사복(私腹)을 채웠다. 그뿐이랴. 여러 왕자의 사저와 조정 대신들의 집과 별채를 지어 공공연히 아부를 일삼았다. 이에 기고만장한 이명민은 급기야 금군의 병력을 인부로 증발해 쓰는 것이다. 이에 정인지가 문제삼고 나서자 의정부에서 쉬쉬했던 것이다. 정인지는 태종대왕 때 과거를 치러 장원급제한 뒤 이날까지 세 명의 대왕을 섬기고 금상 재위 시까지 오직 학자로서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집현전의 직제학으로서 세종대왕의 언문 창제를 반포하는 데에 직접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와 역사 등 다방면의 분야에서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그런 정인지가 세종대왕의 병이 쇠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실직(實職)에 몸을 담그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늙어가는 육신을 감당하기 힘든데 수양대군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 못해 조정에 일을 떠맡다시피 하나 실질적인 일은 모두 안평대군과 죽이 맞는다고 여겨지는 영상과 민신 일당들이 정인지를 의식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권력을 요리하려고 들었다.

‘으이구, 저런 고얀 것들.’

한번 섭육십의 문제로 인해 이명민과 옥신각신 다툰 적이 있었다. 그때 이명민이 안평대군의 하수인으로서 안평의 권세를 빙자하여 공공연히 병사들을 제 종들처럼 부리는 것이었다. 이를 정인지가 묵과할 수 없어 의정부에 직접 찾아가 항의를 했다.

정인지가 의정부에 쳐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치며

“흥, 그러던가 말던가 내 알 바 아니다. 병판이 아니라 그 할아비가 올 테면 와보라고 해라.”

배를 째는 게 아닌가. 정인지가 이명민의 사람됨을 알고 상종 못 할 위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의정부에 찾아간 정인지가 황보인과 민신이 보는 앞에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너무나 미온하게 대처하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거 병판 대감께서 과민한 까닭이 있으신 게 아닌지요. 그러잖아도 대궐의 전각들이 오래되다 보니 보수공사(補修工事)도 해야 하는 처지이고 보니…….”

민신이 우물쭈물 해대며 둘러서 말하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오?”

정인지가 화들짝 놀라며

“그러잖아도 나라의 재정이 궁핍한 데다, 군사들을 사사로이 쓰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라고 보십니까? 만약 대궐의 수비를 잘 못 하다가 큰 변이 일어나면 그때 어쩌실 테요?”

하며 따지자

“그거는……”

민신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정인지의 말을 막으려고 드는 게 아닌가. 어물쩍거리는 이조판서 민신과 그 상사(上司)인 영상이 한통속이 되는 모양을 보며 정인지가 순간 울화가 치밀어서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민신을 대놓고 삿대질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못하시겠다니 좋소이다! 내 병판으로 있는 동안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하리다! 능구렁이 같은 사람. 어디 두고 보시구랴!”

“어허, 저, 저런 영감탱이가. 글줄깨나 안다고 덤비더니, 이제는 삿대질까지.”

민신은 씩씩거리며 나서는 정인지의 뒷모습을 기막혀하며 지켜보는 것이다. 이렇듯 어린 임금은 아버지의 죄업으로 인해 든든한 조력자 없이 외롭게 옥좌를 지켜야만 했다. 사방에 이리 떼들로 우글거리는 판국인 것이다.

수양대군이 몸소 고명사은사를 자청하여 간 지 보름이 된 날. 한확은 무거운 마음을 가진 채 안사돈을 위로하고자 명례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잖아도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을 시댁에 살게 한 착잡한 심정이 일기도 했다. 여느 딸자식과는 다르게 유독 영리한 까닭이 있어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인자하게 키웠다고 자부한 사람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부족한 점이 없지 않기에 명례궁에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안사돈 낙랑부부인을 찾아간 그는 사위 도원군 이장(李暲)을 덩달아 만날 수 있었다. 찻상이 들어오기에 찻잔을 들던 한확이

“대군께서 자주 소식을 전하시던가?”

안부 삼아 사위에게 물어보니

“의주에 당도하신 뒤에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며 사위가 대답했다. 한확은,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연경에 따로 사람을 보내 대군께서 불편하지 않도록 돌보라고 했습니다. 황실에 큰 누이가 돌아가셨으나 연경 관리들이 제 부탁에 소홀히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사돈에게 정중히 위로해주었다. 전조인 고려에서 시작된 공녀(貢女) 제도는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가 득세하며 사그러진 듯 했지만 명나라의 영락제가 조선 여인을 유난히 눈독들여 다시 공녀로 뽑았는데, 한확이 자신의 첫째 누이와 둘째 누이를 각각 영락제와 선덕제의 후궁으로 보냈다. 그렇게 누이의 목숨값을 담보로 집안을 일으켰다. 그 대가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겹사돈으로서 세도를 누리고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누이인 원나라 황후의 권세를 등에 업어 전횡을 일삼던 기철(奇轍)과는 다르게 한확은 공평한 사람으로서 사람됨이 항상 조심스럽고도 느긋하였다. 지금은 첫째 누이가 영락제의 하세로 말미암아 순장된 채 세상을 뜨고, 작은 누이는 황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있는 처지라지만 행여 바깥사돈의 신변에 문제가 될까 우려해 둘째 누이로 하여금 수양대군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도록 당부한 것이다. 안심이 된 한확의 얼굴에는 만족한 빛이 보였다. 사위의 말에 내심 한시름을 덜은 셈이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부부인은 바깥 사돈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제가 앞으로는 영상과 우상을 만날 겁니다.”

그러면서 세 사람이 서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 바로 이 시각. 영상 황보인이 자하문(紫霞門) 밖 안평대군의 별저(別邸)에 찾아갔다. 이때 이현로가 마중나와 있었다.

“아이구, 영상 대감. 행여나 영상 대감께서 못오실까봐 우리 대군께서 안절부절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이 좋은 자릴 어찌 못올까.”

영상이 너털웃음을 짓자, 현로가 고맙다는 뜻을 전한다.

“산 좋고 물 좋고 와 보니 과연 명당일세그려.”

안평대군의 별저인 무계정사(武溪精舍)로 알려진 이 터는 임금이 나고도 남는 자리라고 세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안평대군을 두고 금상을 조력하는 세력의 하나로서 승승장구한 것이다. 영상이 가보니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때마침 일부 종친과 조정 신료들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술자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금성대군과 임영대군(臨瀛大君), 그리고 이조판서(吏曹判書) 민신이 보였다. 황보인이 상석에 앉으니 모두들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유독 김종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상 대감께서는?”

“우상께 참석하라고 사람을 보냈는데, 몸이 불편해서 못온다고 하십니다.”

안평이 황보인의 물음에 대답했다. 임영대군이 세종의 넷째아들이요, 금성대군이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니 모두 모후인 소헌왕후에게서 난 왕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수양대군의 동생들이면서도 모두가 혈기왕성(血氣旺盛)했다. 이렇듯 안평대군이 사람들을 모아 야합(野合)을 즐기니 역모(逆謀)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자연히 안평대군의 세력이 일어나 안평대군의 별저 자리에 왕기(王氣)가 흐른다고 소문을 공공연하게 나불대기 시작했다. 뿐인가. 또한, 별저에는 따로 공터에 연병장(練兵場)을 두고서 힘깨나 쓰는 장사패들을 불러다 놓아 먹고 마시고 무예를 연마하니 일러말해 무엇하랴. 안평대군은 술자리에서 대놓고 정계에 나설 뜻을 보였다. 그러자 술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는 빛을 띠었다.

“내가 나서서 이 혼란한 국정을 바로 잡겠다 그 말씀입니다.”

안평대군은 기고만장한 듯 코웃음을 친다.

“그러니 영상 대감께서도 도와주시고, 이판께서도 도와주시오.”

안평의 당부를 민신이 넙죽 받고는

“저는 죽는 순간까지 대군을 따르리다.”

동의했다. 이에 영상이 난색을 표하며

“저야 뭐, 만사가 편하잖습니까.”

시선을 회피했다. 그때였다.

“수양대군께서 돌아오시면,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 것입니다.”

이현로가 와서는 영상에게 다짐받을 뜻을 내비쳤다.

“수양대군께서 고명 사은사로 자청하신 듯이 무엇이겠습니까? 명 황실의 사돈인 한확을 뒷배로 삼았으니 두말할 나위 없지요.”

“그러면?”

황보인의 물음에 이현로는

“주상전하의 나이 어림을 이용하려 들 것입니다.”

대답했다.

“수양대군이 어떤 분이십니까? 한 번 마음에 들면 끝까지 버리지 않는 한, 눈밖에 한 번 나기만 하면 용서하지 않는 분입니다.”

황보인이 당황해한다.

“죽이기야 할라구.”

“다 죽습니다. 눈 밖에 난 사람을 살리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현로가 확신에 찬 채 말을 마쳤다. 주연이 파하여 밖을 나서는 영상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못해 흔들렸다. 아차! 하고 덫에 걸린 것이다.

‘이런 낭패(狼狽)가 있담. 이런 낭패가.’

황보인의 등 뒤에선 식은 땀이 났다. 한확은 우상인 김종서에게 안부차 찾아갔다. 우연히 찾아갔던 한확은 김종서로부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다툼으로 금상의 안위가 우려된다는 말에 한확이

“수양대군께서는.”

“안평대군에게 더 이상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너도나도 종실의 어른들이 전하의 안위를 이유로 나서면 어찌 되겠습니까.”

말을 가로막고 김종서가 말을 이었다. 한확이 끄덕였다. 김종서의 뜻을 알았다.

“안평대군의 경거망동(輕擧妄動)은 내가 단속할 것입니다. 수양대군께서도 그리하셔야 합니다.”

김종서의 말인즉슨, 종실과 조정 대신들이 어린 금상에게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상께 찾아뵙길 잘했습니다.”

한확이 김종서의 진심을 헤아린 듯 안심해하며 기뻐하였다. 진정 충신의 모습이 보임에 내심 한시름을 덜었다.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발로(發露)인 것이다. 돌아가는 한확은 하염없이 김종서를 떠올리는 것이다. 김종서, 세종대왕의 태평성세를 있게 한 사람이다. 육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북방을 탄탄히 하여 군사개혁을 주도한 사람이다. 김종서의 딴에는 일관되게 세종대왕을 대하듯 금상을 보필하고 있다고 자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일전의 섭육십 사건에서 보듯이 수하들의 비리를 눈감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의 기고만장함을 힘써 막지 않은 채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행태에서 보듯,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정무를 감당할 정도인지 매우 의문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 새로운 인재가 들어오는 것이 인지상정이겠건만 아무리 눈을 씻어보아도 마땅한 인재가 보이지 않는다. 울창(鬱蒼)한 숲처럼 집현전 학사들이 있다고 하지만, 집현전 학사들은 학사들대로 불만이 목구멍에까지 찼다. 집현전 학사를 대표하는 정인지가 학사들에게 정사에 개입하지 않도록 하는데 권람과 같은 젊은 학사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학문이 어디 있느냐며 반격하는 등 한동안 내홍이 계속되었다. 이런 작금의 현상을 한확은 생각하였다.

‘절재(節齋-김종서의 호) 대감을 보고 있노라니 안타깝구나. 저렇듯 고지식한 사람이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볼 것인가.’

한의 깊은 한숨이 터지듯 나온다.

야음(夜陰)을 틈타 권람과 양정, 유수, 홍달손이와 함께 술판을 벌였다. 이들은 향후에 수양대군이 명나라에서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대책을 의논하였다. 밖에서는 아들 보가 엿듣고 있었다. 손님들이 들이닥치자 글공부에 여념이 없던 차이기도 해 정신이 없기도 했다. 다만, 그 자리에 유독 홍윤성만이 보이지 않았다. 명회가 무궁무진한 꾀 보따리를 풀어 윤성이한테 당분간 안평대군의 수하 행세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게 했기 때문이다. 명회는 만에 하나 수양대군이 돌아오기도 전에 선수를 칠까 하여 불안하던 차였다.

“아직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소.”

홍달손이 장담하듯 말했다. 달손이 동지중추원사에 있기에 병권의 흐름을 알기 때문이다.

“대궐 안팎의 정국을 안평대군이 움켜쥐고 있지만, 김종서의 태도가 석연치 않으니.”

“김종서의 수족들이 모두 안평대군의 수하로 들어오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소이까? 저 같으면 김종서를 죽이겠소.”

양정이 자신에 차게 말하자, 명회가 의문에 차며

“안평대군이 그만한 배짱이 있을까? 정경이 보기에 어떠신가?”

권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능히 그러고도 남네.”

권람의 대답에 양정이 맞장구치고 홍달손은

“병권의 태반은 아직 우상 대감의 손안에 있소.”

말하니 유수도 덩달아

“그렇습니다. 북방에 이징옥(李澄玉)이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니.”

대답하고, 양정이

“이징옥이가 도성의 변괴(變怪)를 무슨 수로 막는지?”

되물으니, 명회가

“문제는 안평대군의 배짱일세. 내가 믿는 것은 그것 하나 뿐일세.”

답하였다. 이들은 정국의 흐름을 단번에 알고 있었다. 양정과 유수는 모두 김종서의 부장(副將)인 최숙손(崔淑孫)의 수하로 있었기에 정국의 흐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안평대군은 이현로라는 책사를 두어 정국의 흐름을 좌우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수양대군의 목숨이 끊어지는 건 자명한 셈이었다. 그러기에 명회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명회는 뜻 있고 힘 있는 동지들을 규합했던 것이다. 권람이

“대군께서 그렇게 이르고 떠나셨는가? 아무 대책 없이 떠난 줄 알았건만.”

묻자 명회가 웃으며

“섭섭하신가. 대군께서 자네한테 아무 말씀 없이 떠나신 것이.”

되물었다. 이에 권람이 만족해 했다.

“이 사람 정경, 수양대군의 처지가 매우 외로우신 건 잘 알지 않은가? 대군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줌도 되지 않으니 대군께서 좋은 뜻이 있다 한들 무엇으로 그것을 이루겠나?”

“그러니 더욱 떠나지 마셨어야지.”

명회의 물음에 권람이 쓴 맛을 다셨다.

“수양대군께선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서 계셨네. 대군께서 원하든 원치 않든 수양대군을 제쳐두고 앞날을 내다 보겠나? 그래서 고명 사은사로 가시겠다 나서신 걸세. 수양대군의 빈자리에 안평대군이 차지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안평대군이 그 일을 해내지 못하시는 걸로 보시는가?”

“나는 못한다고 보네.”

“어째서?”

“그러기 위해선 여러 사람이 피를 흘려야 하네. 피를 보기에는 안평대군의 배짱이 너무나 부족하이.”

권람이 끄덕이며 수긍하자 명회가 말을 잇는다.

“산이 좋아서 산을 찾고, 물이 좋아서 물을 찾는 사람이 어찌 살생을 할까.”

안평대군의 풍류객의 기질을 두고 한 말이다. 수양대군에게 직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양대군은 고명 사은사의 정사 노릇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파안대소할 정도로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펼쳤으며, 조정 대신들의 신망을 얻었다. 수양대군에게 명 황제가 어사주를 따르니 조선과 명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이것은 모두 신숙주(申叔舟)의 조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사철(李思哲)과 김종서의 장남 승규(承珪)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북경에 있었다.